소설리스트

망겜 속 야만전사-4화 (4/132)

#004화. 착한 주문쟁이 (1)

“오해는 말아요. 나쁜 의도로 찾아온 거 아니니까.”

칸의 눈빛이 대번에 매서워진 걸 보곤, 그제서야 겁이라도 먹었는지 여인이 손사래를 쳤다.

“보통 그렇게 말하더군.”

“누가요?”

“날 등쳐먹으려는 놈들. 지금은 전부 땅속에 묻혔지.”

너도 그렇게 될 거다, 라는 말을 듣고도 여인은 태연자약했다.

“속고만 살았어요? 정말 그런 거 아니라니까.”

‘진짜 속고만 살았으니까 이러지.’

이 간악한 중세 놈들은 뒤통수 치는 습성이 유전자에 각인되기라도 한 것처럼 굴었다. 특히 무식하기로 소문난 야만인을 상대로는 아예 대놓고 등쳐먹으려 드는 수준.

이 세계에서 인간 불신은 결함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스킬이었다.

“하아…. 사람 말 진짜 안 믿으시네. 저 그런 수상한 사람 아니거든요? 자, 봐요.”

[회색 마탑 소속 마법사, 엘리야]

금으로 만든 신분패에 적힌 회색 글자를 본 칸의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그것이 오색 마탑에서 발행하는 신분패라는 걸 알아본 까닭.

‘마탑의 주문쟁이가 이런 후미진 곳에 왜 있는 거지?’

이유야 어쨌건. 이 세계에서도 손에 꼽는 영향력을 지닌 오색 마탑 소속의 마법사라면 확실한 신분 증명이긴 했다.

미치광이거나, 삶에 미련이 없는 놈들이 아니고서야 오색 마탑의 이름을 참칭하진 않으니까.

“이제 믿겠어요? 딱히 수상한 사람도 아니고, 나쁜 의도로 온 것도 아니에요. 당신을 발견한 것도 거의 우연이었다고요.”

“우연?”

“정확히 말하자면 완전히 우연은 아니고요…. 동부에 오우거 슬레이어가 있다고 해서 찾으러 갔어요. 그런데 당신이 변경백한테 쫓기느라 모습을 감춰버렸다고, 아는 사람한테 들었죠.”

결국 뜻하지도 않게 완전히 허탕을 쳐버린 셈. 그녀, 엘리야는 완전히 포기하고 서부로 돌아가는 마차에 올라탔다.

“운이 좋았죠. 그토록 찾던 사람이 같은 마차에 있고, 저랑 목적지가 같을 줄은.”

“……우연치고는 공교롭군.”

“그렇게 보지 말아요. 저도 놀랐다고요?”

운이 좋다는 말로 설명하기엔 찝찝한 부분이 있긴 하나, 앞뒤가 영 안 맞는 건 아니었다.

다만 신경 쓰이는 게 하나.

“나와 관련한 정보를 구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귀족이나, 동부의 유력자라면 또 모를까. 마탑의 첩보 능력이 내 생각보다 대단한 건가?”

“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 제 스승님이랑 친한 귀족분이 동부에 계셔서, 도움을 조금 받았죠. 애초에 스승님 명령으로 당신을 찾아다닌 거라…….”

“마탑의 마법사가 제자를 시켜 날 찾으라 했다고?”

칸은 도끼 손잡이를 슬쩍 어루만졌다.

‘누구지? 예전에 북부에서 회색 마법사 둘을 묻었던 게 내 짓이란 걸 들킨 건가? 아니면 날 실험 소재로 쓰겠다 덤빈 늙은이 목을 딴 거 때문에? 그것도 아니면…….’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마법사가 찾는단 말에 원한 관계부터 떠올린 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당장 그의 손으로 죽인 숫자만 수십이 넘었으니까.

“표정 보니까 험악한 생각 하는 거 같은데, 그냥 당신이 필요해서 그런 거니까 오해는 마요. 정확히는 오우거 토벌에 전위로 나섰던 당신의 힘이 필요한 거지만.”

“내 힘이? 무거운 물건이라도 옮길 건가?”

“그런 건 아니고…. 근방에서 발견된 변종 트롤을 잡아야 해요. 연구용 소재로 쓸 생각이라, 최대한 온전한 형태여야 하는 건 덤.”

“귀찮고, 곤란한 주문이군.”

트롤 사냥의 정석은 칼로 마구 난도질해서 토막 내거나, 화력이 뛰어난 주문으로 완전 박살 내는 것이다. 그 정도가 아니면 금새 재생해버리는 탓.

“받는가, 마는가는 둘째치고. 보수가 만만치 않을 거요. 쉽지 않은 의뢰잖소.”

“그건 저도 알아요. 제가 준비한 건 금화나, 장비에 주문 각인을 해드리는 건데 어떠세요?”

주문각인이라. 나쁘지 않은데. 흥미가 동한 칸이 테이블에 몸을 바싹 들이밀었다.

“멀리 투척한 무기를 제자리에 돌아오게 하는 식의 주문 각인. 가능한가?”

“바라는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가능해요. 야만인은 마나가 없으니까 효율이 나쁘겠지만요.”

“흐음…….”

주문 각인은 장비에 주문을 새겨 마도구로 만드는 걸 뜻한다. 일종의 아이템 사용 효과라 보면 이해하기 쉬웠다.

다만 야만인은 다른 종족들과 달리 마나가 없는 까닭에, 마석을 배터리처럼 갈아줄 필요가 있었다.

칸이 생각하는 대로 주문 각인을 받을 수만 있다면, 투척한 도끼를 일일이 회수할 필요도 없을 터.

이거야말로 판타지판 이기어검…. 아니, 이기어부(以氣馭斧) 아니겠는가.

“거기에 얹어서. 제가 아는 옛 신과 관련한 정보도 드릴게요.”

거기까지 듣고 나서는 더 이상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

“일어나지.”

“네?”

갑작스런 말에 어리둥절해하는 엘리야는 안중에 없다는 듯, 칸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트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시오. 지금 당장.”

*

*

*

아주 당연하지만, 칸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렇게 과음하고 뭔 사냥이에요? 저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고…. 오늘은 그냥 쉬고 내일 움직이는 거로 해요!”

엘리야가 극구 만류한 탓이었다.

의뢰주가 싫다는데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칸은 어쩔 수 없이 그녀와 술을 몇 잔 더 마시고 나서 잠에 들었다.

“찌뿌둥하군.”

밤새 맥주 한 통을 혼자 비워놓고 한다는 말이 고작 찌뿌둥하단 소리였다.

기실 이 염병할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는 취한 경우가 손에 꼽았다.

서릿골의 야만인은 모두 그런 건지, 칸의 몸뚱어리가 유독 특별한 건지는 모르겠다만.

“아, 몸은 좀 괜찮아요?”

“괜찮소. 조금 찌뿌둥하긴 한데, 이정도야.”

“다행이네요.”

약속한 시간에 맞춰 1층에서 재회한 엘리야가 퀭한 눈으로 칸을 맞이했다.

주문쟁이들은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으니까. 아마 밤새 사냥에 쓸 주문이라도 저장해놓은 게 아닐는지.

“그래도 의뢰주보다 늦게 나오는 건 조금 그렇지 않을까요?”

“내가 늦었나? 그쪽이 좀 빨랐던 것 같은데.”

짓궂은 표정으로 농담을 건네는 엘리야에게 장난스레 맞받아친 칸이 물었다.

“나보다는 그쪽이 걱정이군. 어제 들었던 대로라면, 꽤 깊숙한 곳까지 가야 할 테니.”

“그건 괜찮아요. 마법사라고 죄다 허약한 샌님이 아니거든요. 봐요.”

대뜸 되지도 않는 근육 자랑에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전신을 가린 로브를 입어놓고서 뭘 보라는 건지.

“믿음직스럽군. 그럼 출발합시다.”

엘리야의 말에 따르자면, 변종 트롤이 발견된 곳은 체르노 자작령의 한 산맥이라고 한다.

다양한 마물이 서식하는 곳인데, 그곳 깊숙한 곳에서 머리 두 개 달린 트롤이 주인처럼 군림하고 있다나….

‘트윈 헤드라. 정석적인 변종이군.’

평범한 트롤보다 덩치도 크고, 힘도 쌔며, 재생 능력도 대단한, 몹시 까다로운 몬스터 중 하나였다. 칸이 할 일은 트윈 헤드 트롤을 최대한 온전한 상태로 죽이는 것.

그리고 고용주의 뒷담에 어울려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말이죠? 저번에는 그 영감쟁이가 뭐라 했는지 알아요?”

“뭐라 했소.”

“쥐뿔도 없는 재능을 거둬주었으면, 시키는 일이나 제대로 처리해라.”

제 스승을 흉내 내려는 듯, 엘리야가 인상을 쫙- 구기며 괴팍한 노인네처럼 말했다. 이에 칸은 대충 맞장구나 쳐주었다.

원래 회사원으로 살아왔던 칸에게, 남의 뒷담에 어울려주는 건 그닥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싸움보다 자신이 있다고 해야 하리라.

‘염병할 꼰대들 비위 맞추는 거에 비하면, 이쁘장한 아가씨 위로해주는 정도야 오히려 환영이지.’

“고약한 양반이군.”

“정말 그렇다니까요. 다 죽어가는 늙은이가 맞지도 않게 젊은이 행세나 하고. 진짜 별꼴이야.”

그녀의 기나긴 한풀이에 적당히 대꾸해주는 동안, 둘은 어느새 변종 트롤이 출몰했다는 산맥에 접어들었다.

“변종 트롤이 나타난 곳은 최근 인적이 없다시피 하다고 해요. 실종자가 워낙 많아서….”

“그럼 마물 토벌도 제대로 안 되고 있겠군.”

“아무래도 그렇겠죠. 가는 길이 꽤 험할 테니까, 그때는 잘 부탁해요?”

가는 길이 험할 거라는 엘리야의 말은 머지않아 현실이 됐다.

산맥의 초입부터 짐승이 변이한 마물들이 사람 냄새를 맡고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콰득──.

당연히. 다가오는 족족 야만인의 가차 없는 주먹이 마물의 골통을 일일이 깨부수었다.

“든든하네요. 사실 그쪽이 잡은 오우거는 성체가 아니었잖아요?”

“그랬지.”

칸은 오우거를 잡았던 당시의 기억을 회상했다.

자신만 해도 2m가 넘는 장신인데, 오우거의 앞에선 어린아이와 같았다. 하물며 상대가 다 자란 놈도 아니었는데도 그러했다.

만약 자신이 사냥한 오우거가 성체였다면, 전위에서 시간을 끄는 것도 불가능했겠지.

‘지금이라면……. 잘 모르겠군.’

“그래서 사실 거품이 좀 끼었다고 생각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네요.”

어딘가 질린 듯한 기색으로 엘리야가 칸의 옆모습을 흘긴다.

콧잔등에 날카로운 뿔이 달린 검은색 멧돼지, 디-호그라 불리는 마물이 머리를 잃고 죽어 있었다.

노련한 용병들도 상대하기 까다로워하는 괴물이 바로 디-호그다. 그런데 이 특이한 야만인은 고작 주먹질 한 번으로 머리를 터뜨려버렸다.

“정말. 대단하네요…….”

엘리야가 묘한 탄성을 흘렸다. 어딘가 이상한 반응에 칸이 그녀의 안색을 살폈으나, 아까의 묘한 기색은 온데간데없었다.

‘착각인가?’

주문쟁이에 대한 선입견이 너무 강한 탓인 건가…? 아니, 그렇게까지 혐오하는 건 아닌데?

“바위로 된 구역에 종종 출몰한다고 했으니까. 요 주변을 수색하는 게 좋겠어요.”

“그러지.”

어쨌거나 일의 진행은 굉장히 순조로웠다.

달려드는 몬스터라 해봐야 경험치 거리도 안 되는 잡몹이었고, 별다른 방해 없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남은 건 대가리 두 개 달린 변종 트롤을 찾고, 족치는 것뿐.

‘흔적이라. 흔적.’

칸의 추적술은 빈말로도 좋다 말하기 힘든 수준이었으나, 변종 트롤 같은 덩치 큰 놈들은 싫어도 그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무리 수색을 진행해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놈이 싸놓은 배설물 정도는 진작 나와도 이상하지 않건만.

‘설마 이미 뒈져버린 건 아니겠지……?’

“아직도 못 찾았어요?!”

저 멀리서 엘리야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문쟁이 치고는 체력이 좋은 편인 그녀조차 장시간의 산행에 지쳐버린 지 오래였다.

그래서 호기롭게 ‘내게 맡겨라.’ 말하고 대략 한 시간 가까이 주변을 수색했는데…….

“아무것도 없군. 이상할 정도로.”

그래.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바위산 지대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마물의 습격이 아예 끊겼다.

주변에 몹시 강력한 개체가 있다는 징조다. 그런데 조금도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니?

[탐색 (D) - 10%]

비전투 스킬인 탐색의 등급이 낮은 것과는 별개로, 상황이 기이하단 건 너무나 명확했다.

‘상의를 좀 해야겠는데.’

이대로는 삽질 밖에 안 된다는 생각에 칸이 엘리야가 있는 쪽으로 발을 돌렸다. 이상한 구석이 발견된 이상, 너무 오랫동안 그녀를 혼자 두는 것도 좋지 않았다.

그렇게 왔던 길을 되돌아가던 칸이 제자리에서 덜컥- 걸음을 멈췄다.

“이런 젠장-.”

뭔가 있다! 욕지꺼리를 중얼거린 칸의 손이 흐릿하게 일렁인 순간이었다. 포탄처럼 쏘아진 도끼가 빙글- 허공을 선회하여 저 멀리에 내다 꽂혔다.

쾅!

도끼 한 자루로 짙은 먼지 구름을 만든 칸이 뒤쪽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뻐거걱─! 피칠갑을 한 짐승형 마물이 육편이 되어 비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의 표정은 무섭도록 굳은 채였다.

‘손맛이 시원찮다.’

마치 부패한 시체를 터뜨리는 듯한 감촉.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흩어진 살점을 흘겼다.

척 보기에도 죽은 지 한참 지난 시체처럼 변색된 살점이 사방에 즐비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흑마법사.”

그것도 죽은 시체를 일으키고, 병사처럼 부리는 사술을 부리는 사령 계통의 흑마법사다. 이런 씨발….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은 칸이 혀를 찼다.

‘어쩐지 흔적이 아무것도 안 보이더라니. 땅 밑에 시체를 숨겨뒀나!’

반사적으로 던져버린 도끼가 이토록 아쉬울 수 없었다. 맨손으로 부패한 시체를 터뜨려야 한다니. 상상만 해도 엿 같았다.

“엘리야──!”

혹시 몰라 엘리야의 이름을 부르짖었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잠깐 길을 되돌아가는 사이에 흑마법사에게 당했던가. 그것도 아니면…….

“크────.”

“키이──.”

상념은 길지 않았다. 대충 눈으로 세어봐도 백에 달하는 시체가 칸의 주변을 포위하듯 다가오며, 적의를 드러냈기에.

그 모습은 마치 밀려드는 파도와 닮아 있었다.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파도 너머.

머리가 두 개 달린 암녹색 거인이 익숙한 도끼를 손에 쥔 채, 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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