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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야만전사-5화 (5/132)

#005화. 착한 주문쟁이 (2)

요즘 판타지에서 오크나 트롤 같은 그린스킨들은 주인공의 경험치 셔틀 쯤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미들랜드 퀘스트’의 그린스킨은 다르다.

거대한 대검을 나뭇가지처럼 다루고, 급소만 피한다면 칼침 서너 방쯤은 거뜬히 버티는 용맹한 투사가 이 세상의 그린스킨이었다.

‘게다가 트롤은 어떤 면에선 기사보다 까다로운 놈이다.’

인간 기사야 칼침 좀 놓으면 뒈지기 마련이지만, 트롤은 목을 쳐내거나 완전히 토막 내지 않는 이상 죽지 않고 재생한다.

평범한 트롤도 그 정도인데, 대가리 두 개 달린 놈은? 당연히 대가리를 두 개 다 날려야 뒈진다. 힘도 일반적인 개체보다 훨씬 강하다.

‘그런 놈이 이젠 흑마력으로 강화됐으니…….’

더는 힘으로 우세를 점할 거란 확신이 없었다. 평범하게 목을 따서 죽이는 것도 당연히 힘들겠고…….

“최악이군.”

의뢰 표적은 시체 꼴로 나타났고, 의뢰주는 종적을 감춘 데다가, 언데드가 된 마물들까지 덤으로 처리해야 한다니.

주문쟁이랑 엮이기 무섭게 이런 꼴에 처한 걸 보면 역시. 주문쟁이는 만악의 근원이 맞았다.

“일단 도끼부터 회수하고 봐야겠군.”

뭐가 되었든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낫다. 그리 판단한 칸이 기민하게 움직였다.

반쯤 얼굴이 녹은 괴물 원숭이가 그를 노리고 달려들었고, 대충 휘두른 팔뚝에 몸이 뻥- 터졌다.

그게 전투의 신호였다.

“───!”

언데드의 군세가 발작적으로 칸을 향해 달려든다.

부패한 시체들이 내뿜는 악취가 점점 지독해지는 것으로 거리를 잰 칸이 거칠게 발을 내디뎠다.

쾅─!

초인적인 근력이 맞닿은 바닥을 뒤집어엎는다.

뻥! 휘둘러진 주먹이 칸의 전방에 밀려들던 시체를 터뜨려버리고, 일시적으로 공백 지대를 만든다.

그러나 그 공백을 시체들이 금방 채웠다. 아무리 부수고, 찢고, 산산조각내도 시체의 군세는 줄어드는 법을 몰랐다.

‘아무래도 효율이 좀 구린데.’

평범하게 주먹질하고, 발로 차버리는 거로는 끝이 안 나겠다 싶었는지, 칸이 덮쳐드는 마물 중 하나를 덥썩 붙들었다.

오면서 마주쳤던 멧돼지형 마물. 언데드가 된 디-호그의 짧은 다리를 우악스럽게 움켜쥔 칸이 디-호그의 시체를 둔기처럼 힘껏 휘둘렀다.

카드드득──!

디-호그는 죽어서도 단단했다. 물렁한 언데드 따위는 부딪치는 족족 터뜨려버릴 정도로.

‘좋군.’

제법 손맛이 괜찮았다. 무엇보다 적을 이용해 적을 잡는다니. 참으로 효율적인 전투법 아닌가.

“덤벼라! 새끼들아─!”

고작 몇 호흡이었다.

그 튼튼하다는 디-호그의 시체가 형체를 못 알아볼 만큼 짓뭉개지는 데 걸린 시간은.

빠각!

열 개체는 가까이 부숴버린 디-호그 시체가 마침내 제 쓸모를 다하고 스러졌다. 그러나 칸은 개의치 않았다. 그야 주변에 넘치는 게 시체니까.

“크하하하!”

거의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한 손에는 짐승형 마물을, 한 손에는 코볼트를 쥔 칸이 팔을 휘두를 때마다 서너 마리의 언데드가 박살이 났다.

시체로 쌍검술을 펼치는 와중에 썩은 살점과 검붉은 피가 잔뜩 튀었지만, 이미 눈이 돌아간 지 오래였다.

칸은 그저 압도적인 폭력으로 시체의 파도를 와해했다. 그야말로 야만전사라는 이름에 걸맞은 싸움법.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진 않았다.

“───.”

제대로 된 언어조차 되지 못한 망자의 포효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드디어 진짜들이 납셨군.’

잡몹의 처리를 마친 칸의 서늘한 시선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흑마력으로 빚어낸 갑옷으로 무장한 오크, 수많은 시체를 이용해 반죽한 시체골렘, 여러 가지 마물을 조합해 만든 키메라….

“크륵.”

거기에 가장 귀찮을 게 분명한, 변종 트롤 시체로 만든 언데드까지. 이 엿 같은 상황을 주도한 흑마법사가 드디어, 제대로 된 전력을 내보낸 것이었다.

‘그냥 때려잡기는 힘들겠어.’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대충 견적을 재봤으나, 상황이 썩 좋지는 않았다.

레벨업으로 상승한 스탯에 북방 야만전사의 신력(神力)이 더해진 칸의 육체는 그 자체로 뛰어난 흉기였고, 오크나 트롤 정도는 주먹질 발길질로 때려잡는 게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하지만 상대도 평범한 괴물은 아니었다.

“───!”

생각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흑색 갑옷으로 무장한 오크가 포효와 함께 검을 휘둘렀다.

아무리 칸의 몸뚱어리가 튼튼하다 해도, 맨손으로 받아낼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쾅!

대검을 피해 바닥을 구른 직후. 시체골렘이 기다렸다는 듯 주먹을 내리쳤고, 칸이 주먹을 마주 내질렀다.

크그극!

충격을 버티지 못한 칸의 발아래가 움푹 꺼졌다.

“키에에에!”

뒤쪽에서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린 순간 칸의 전신 근육이 크게 요동쳤다.

흉악하게 솟아오른 핏줄들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핏줄이 곤두섰고, 짓누르는 시체골렘의 주먹을 그대로 밀어내며 땅을 박찼다.

어찌저찌 몸을 빼낸 것처럼 보였으나 칸은 입술을 짓씹었다.

‘제기랄 쉴 틈을 안 주는군!’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속도로 칸의 후방을 점한 키메라의 손톱이 목덜미를 뜯어낼 작정으로 쇄도했다.

회피가 불가능한 틈을 정확히 비집고 들어온 일격. 자아가 없는 시체 따위에게 가능한 기습이 아니었다.

‘술자가 직접 지휘하고 있다!’

공중에서 몸을 크게 비튼 칸의 가슴에서 피가 튀었다. 키메라의 얼굴이 비웃음을 머금은 듯했다. 이미 뒈진 시체 주제에…!

가슴팍을 가로지르는 화끈한 열감과 함께 피가 끓었다. 제 가슴을 난자한 키메라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쥔 칸이 땅에 뿌리를 박듯이 진각을 내디뎠다.

그리고-.

꽈드드드득! 끼에에엑!

오른손이 통째로 뽑힌 키메라가 끔찍한 비명을 토했다. 직후 칸의 발끝이 창처럼 키메라의 가슴을 후려쳤다.

꽝!!

가슴이 뻥 뚫린 키메라가 저 멀리 처박히고, 칸의 눈이 형형한 안광을 내뿜었다.

평범한 생명체라면 진작에 뒈졌을 상처를 입혔음에도 전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가슴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칸과 다르게, 이미 뒈진 시체에 불과한 언데드는 다시 재생할 테니까.

결국 이 상황을 끝내려면 술자를 족쳐야했다.

다만 처음부터 함정을 판 채, 주문으로 기척을 감춘 흑마법사를 색출하는 건 같은 주문쟁이가 아니고서야 힘들다.

잠시간 이어진 대치.

그 사이에 칸의 머리가 팽팽하게 돌아갔다. 평범한 야만인이라면 멍청하게 돌격이나 해댔겠지만, 그는 현대의 지성인 아닌가.

‘이건 애초에 날 노리고 판 함정이다. 그럼, 사령술을 쓰는 흑마법사가 야만인을 노린 이유는?’

당연히 언데드로 만들기 위해서겠지. 칸의 사고는 단순한 추측으로 시작해서, 수많은 갈래로 뻗어 나갔다.

‘사령술은 시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보다, 살아 있는 존재를 언데드로 만드는 게 더욱 강력하다.’

‘오크 전사, 시체골렘, 키메라, 변종 트롤. 하나하나가 정예급이야. 저런 것들을 동시에 네 개체나 부리는 걸 보면, 고위계는 아니어도 대충 중위급은 되겠어.’

‘중위급 마법사의 탐색 주문이 닿는 거리는 통상 시야의 몇 배에 그친다. 가까운 곳에서 전투를 지켜보고, 직접 지휘하고 있을 터.’

게임을 통해 축적한 지식. 이세계에서 직접 몸으로 굴러 알아낸 경험….

그것들을 통해 도출해낸 최적의 방법은 결국 도박수에 가까웠다. 뭐, 당연하겠지.

마법사가 파놓은 함정에 제 발로 기어들어 간 상황이니까.

그나마 길이 남았단 사실에 감사해야 하리라.

“흐. 그럼 해볼까.”

*

*

*

‘저게 뭐야 대체……!’

한편, 전투를 지휘하고 있던 흑마법사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상대는 고작 하나였다.

어린 오우거를 사냥한 초인이라 하더라도,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자신의 군세라면 충분히 사냥할 수 있노라 확신했다.

도중까지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체력을 빼기 위한 용도로 일으킨 언데드들이 박살이 난 뒤, ‘역작’이라 할 수 있는 정예 언데드들이 야만 전사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야만전사가 무어라 중얼거린 이후로 구도가 바뀌었다. 키메라를 일격에 동작 불능으로 만든 놈이 갑자기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한 것.

자살 행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방향의 끝에 흑마법사가 몇 달에 걸쳐 강화한 변종 트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불사에 가깝던 재생 능력을 사령술을 더했고, 몇 번이고 강화한 근력은 오우거와도 대적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으며, 노망난 스승조차 저것을 본다면 탐욕의 군침을 흘릴 것이라 확신한 최고의 역작.

저 야만 전사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변종 트롤 앞에서는 무력하게 육편이 되어 흩날릴 게 분명했다.

‘안 돼-!’

은신처에 몸을 감추고 있던 흑마법사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래서는 함정까지 파놓고 일을 벌인 이유가 없지 않나.

성체 오우거가 아니라지만, 어쨌든 오우거를 사냥한 전사의 시체다.

그걸 기반으로 만든 하수인이 얼마나 강대할지는 사령술사인 그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어쩌면, 스승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몰라…!’

흑마법사는 개입할 필요성을 느끼고 마법적 은신을 해제했다.

그러자 술자의 모습을 감추던 어둠의 장막이 한순간에 걷힌다.

그 장소는 놀랍게도 야만인과 언데드가 싸우던 전장의 한가운데. 정확히는 야만인의 후방이었다.

“칸-! 도울게요!”

야만인의 후방에서 모습을 드러낸 흑마법사 엘리야의 손에서 발현된 주문, 회색 마탑의 ‘아라크네의 침묵실’이 야만인을 그대로 지나쳐 변종 트롤의 몸을 휘감았다.

누가 보더라도 야만인을 돕기 위한 마법이었고, 야만인 또한 그에 호응해 주먹을 내뻗었다.

“끄어───!”

그러나 변종 트롤을 묶어놓고 있던 마력사가 힘없이 끊어졌다. 마치 처음부터 묶어둘 생각이 없었다는 것처럼, 아무런 저항감도 없이.

뻥-.

그 결과 변종 트롤에게 타격을 허용한 야만인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하하하! 드디어…!”

바위와 충돌한 야만인이 비척- 몸을 일으키는 걸 느긋하게 구경하면서, 엘리야가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이라면! 당신이라면 스승도 저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무려 오우거를 사냥한 전사잖아요?! 저 변종 트롤보다도 우수한 하수인으로 만들어질 테죠.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된다면……!”

언뜻 광기마저 엿보이는 모습이었다. 감정의 고조가 지나치게 급격했다.

“저 멍청한 스승을 뛰어넘을 수도 있겠죠?! 정말. 정말 고마워요! 칸!”

푸스스.

쿨럭- 몸을 일으키는 야만인. 그가 한 움큼 피를 쏟아내는 걸 본 엘리야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이래서 주문쟁이와는 상종하지 말아야 하는 건데.”

야만인은 차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 꼴을 지켜봤다. 그 눈에선 어떠한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배신감, 당혹감, 의문, 그 무엇도.

그저 스스로 자책하듯 뇌까렸을 뿐. 그에 엘리야의 고개가 기괴한 각도로 꺾였다.

“으응? 상처받는 말을 하시네요. 저는 나름대로 당신이 마음에 들었는걸요……. 말이 제법 잘 통했거든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내가 처음에 알려주지 않았나. 주문쟁이.”

“뭘요?”

“날 등쳐먹으려는 놈들이 어떻게 됐는지.”

변종 트롤과 충돌하는 순간 빼앗아 든 도끼를 천천히 움켜쥔 야만인, 칸이 구불거리는 갈색 머리가 인상적인 여인……. 엘리야를 무감정한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전부 땅에 묻었다고.”

“하하. 그랬었죠? 분명.”

목을 원 상태로 되돌린 엘리야가 싱긋 웃었다.

“그 몸으로 정말 가능하겠어요? 당신을 더 이상 상처입히긴 싫은데……. 저항하면 저도 어쩔 수 없답니다.”

그녀의 조소에 칸은 묵묵히 도끼를 쥔 팔을 뒤로 당겼다. 대놓고 도끼를 던지겠다 시위라도 하는 듯한 모습에 엘리야의 비웃음이 짙어졌다.

“자포자기라도 한 건가요? 설마 제 아이들을 뚫고 그 조그만 도끼가 제 머리에 박히기라도 할까 봐요?”

칸은 대답하지 않고 투척 자세를 취했다.

그가 빙의한 이 엿 같은 세계는 분명한 현실이지만, 기이하게도 게임 시스템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경험치를 쌓아 레벨업을 할 수도 있고, 반복된 행동을 통해 스킬을 획득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리고 지난 몇 년간.

칸의 앞에서 깝죽대는 주문쟁이의 결말은 모두 같았다. 칸이 투척한 도끼가 이마에 박혀서, 손도끼 거치대가 되는 것.

그렇게 생겨난 투척 스킬의 숙련도는, 야만전사의 ‘전투 계열 스킬 태생 숙련도 증가’ 특성이 더해져….

[투척 (B) - 89%]

최상급 스킬로 분류되는 ‘A’등급에 도달하기 직전이었다.

“대가리가 쪼개지고도 웃을 수 있나 보지.”

그 말에 흑마법사가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

────────.

그건 마치 한 줄기의 섬광과 같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 속. 허공을 수놓은 빛의 궤적을 따라 돌풍이 몰아친다.

카드드드드득───!

단단한 바위가, 갑주를 입은 오크가, 살점으로 빚은 골렘이, 합성된 키메라가 나선형의 와류에 휩쓸려 갈려 나간다.

불사에 가까운 재생 능력을 지녔으리라 확신했던 변종 트롤조차 예외는 아니었고-.

“어제 말했을 텐데.”

어쩌면 마법보다 더 마법과 같은 이적을 도끼 한 자루로 만들어낸 칸이, 곤죽이 된 언데드들을 짓밟으며 엘리야를 향해 다가갔다.

“날 등쳐먹으려던 놈들은 전부. 땅속에 묻혔다고.”

움찔- 움찔-

정수리에 손잡이가 생긴, 머리가 반으로 갈라진 와중에도 죽지 않고 움찔대는 엘리야.

그녀와 눈을 마주친 칸이 도끼의 손잡이로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이번엔 네 차례다. 주문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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