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야만전사-6화 (6/132)

#006화. 착한 주문쟁이 (3)

회색 마탑 소속의 마법사 엘리야.

처음부터 그녀를 의심한 건 아니었다.

가능성을 떠올린 건 전투 도중의 일이었고, 변종 트롤을 향해 달려드는 칸을 지원한답시고 갑자기 나타난 순간에 확신을 얻었다.

아니, 돌이켜보면….

“사령 계통의 흑마법사에게 뛰어난 전사의 시체만큼 훌륭한 소재는 드물지.”

“아, 으…!”

“그쪽이 말했었지. 변종 트롤을 온전히 사냥할 수 있는 전사가 필요했다고…. 그래서 오우거를 상대로 전열에 섰던 날 찾은 거라고 말이야.”

애초에 그녀가 떠들어댔던 말들에 전부 정답이 있었다.

“반대였군. 변종 트롤을 온전히 사냥할 만한 전사의 시체가 필요했던 거였어. 그 표적으로 날 고른 게 당신의 선택인지, 아니면 그 고약하다는 스승의 선택인지는…….”

썩 중요하진 않지. 칸은 차갑게 내뱉으며 도끼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뽀옵. 지마……!”

“내가 왜.”

끼야야야약─! 엘리야의 입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졌다. 정수리에 박힌 도끼를 빼낸 칸이 진득한 피를 훌훌 털어내며 눈을 마주쳤다.

“더럽게 질기군. 제 몸을 사령술의 소재로 삼는 유형인가. 흔한 부류는 아닌데.”

“끼야야약! 끼이이이!”

밟힌 지렁이처럼 바닥을 구르는 엘리야에게선 더 이상 예전의 아름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애초부터 그 얼굴조차도 가짜였겠지.

오로지 탑주들에게만 발행 권한이 있는 마탑의 신분패는 위조가 불가능하다.

‘회색 마탑 마법사였다가 흑마법사가 됐던지, 마법사의 몸뚱어리를 빼앗았던지, 둘 중 하나겠군.’

어쨌거나 그녀가 남의 얼굴을 빌려 썼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러한 수법에 정통한 아르곤 왕국 출신의 흑마법사를, 칸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시체박이. 다르킨 그 변태의 제자였나?”

뚝-.

비명이 끊겼다.

“어떻게. 그걸?”

“그거야 네 알 바가 아니지.”

피곤함 가득한 얼굴로 칸이 도끼를 치켜들었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천천히 재생할 테니, 완전히 다 해체해버려야겠어.’

“살려줘……!”

어느새 제 얼굴 가죽을 멀쩡하게 재생시킨 엘리야가 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일부라도 재생할 여력이 있는데도 굳이 얼굴을 고친 이유가 뭘까.

‘그거야 뻔하지.’

정상적인 사내 놈이라면 절로 음심이 동하고, 마음이 약해질 법한 고혹적인 자태다. 멍청한 야만인을 상대로 미인계라도 쓰겠다는 심산이리라.

“내, 내가 당신을 노린 게 아니야…! 그 늙은이가 너를 찾아오라고 명령했다고! 그러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날! 날 협박해서!”

아름다운 얼굴로 절절히 호소하는 그녀의 모습은, 겉으로만 봐선 퍽 그럴싸했다.

겉모습만은… 그랬다.

“너. 너뿐만이 아니야! 왕국에서 이름을 날린 전사들을 사냥하려고 내 사형제들이 움직이고 있어…! 나는 그냥 살고 싶어서 스승의 명령에 따른 거뿐이라고!”

“날 마주친 건 정말 우연이었나?”

“반쯤은…. 에빌 남작이 너가 벌써 마차를 타고 떠났을 거라 알려줘서……. 마차를 탔는데, 우연히!”

“하여간 도움 안 되는 새끼.”

에빌 남작, 기억에 있는 이름이다. 쓸데없이 그를 향해 질투심을 피어올리던 돼지.

동부에 있는 동안에도 더럽게 귀찮게 굴었던 놈이, 자신의 정보를 여기저기 팔아먹었단 사실에 칸이 얼굴을 구겼다.

“그 돼지 새끼는 나중에 족치는 거로 하고…. 어쨌든 날 노리고 덤벼든 게 맞네.”

“나. 나는 쓸모가 많아. 약속했던 주문 각인도 해줄 수 있고……. 너, 너도 남자잖아? 나라면 네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할 수 있어. 절대 안 질릴 거야!”

“뭔 개소리를 하나 했더니.”

이런 엿 같은 주문쟁이가 나를 뭘로 보고? 칸이 대놓고 콧방귀를 뀌었다.

자신이 그 어떤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단 사실을 그제야 자각한 걸까. 엘리야의 눈에 독기가 어렸다.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다고─! 나라고 흑마법사가 돼서! 이런…. 이런 더럽고 추잡한 일 따위 하고 싶지 않았……!”

콰직─!

엘리야의 머리가 허무하게 하늘을 날았고, 이내 칸의 발치에 떨어졌다.

“이런 썅년이. 착한 주문쟁이가 어딨어? 속일 사람을 속여야지.”

*

*

*

엘리야의 죽음이 확정된 직후.

아주 오랜만에 경험치바가 유의미한 변화를 보였다. 그녀의 수준이 결코 낮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실제로 변종 트롤과 하수인들의 합공은 퍽 위협적이긴 했다.

칸을 산 채로 포획하기 위해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지만 않았더라면, 여러모로 골치가 아팠을 정도는 되었다.

‘뭐, 앞으로 나온 시점에서 뒈지려고 작정한 거지만.’

거리를 좁히고, 마법적 방호를 뚫기까지의 과정이 까다로울 뿐. 마법사 본인의 육체는 평범한 인간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주문쟁이가 이런 점은 참 괜찮다니까.’

우득.

빠진 어깨를 대충 끼워 맞춘 칸이 어깨를 이리저리 휘돌리며 상태를 확인했다.

‘쯧. 영 뻐근하네.’

‘미들랜드 퀘스트’의 스킬 등급은 태생 등급과는 별개로, 숙련도를 100% 채울 때마다 등급이 계속해서 상승한다.

그렇게 태생 E등급에 불과했던 ‘투척’ 스킬이 A등급 직전까지 상승한 결과, 어지간한 공격 마법을 우습게 상회하는 괴랄한 스킬이 돼버린 것.

[투척 (B) - 89.6%]

─B등급 효과, 용권풍 :: 투척물을 중심으로 강력한 회오리 바람을 일으킨다. 근력에 따라 효과가 상승한다.

─C등급 효과, 차징 :: 준비 시간에 비례하여 위력과 코스트가 증가한다.

─D등급 효과, 백발백중 :: 명중률이 상승한다.

‘곧 있으면 A등급인가.’

A등급 효과는 그 아래의 것들과 격을 달리했다. 그만큼 찍기 어렵고, 숙련도 보정이 있는 칸조차 A등급 스킬은 하나밖에 보유하지 못한 형편이었다.

‘뭐, 그마저도 부작용 때문에 쓸 기회가 별로 없긴 하지만.’

캐릭터를 선택할 때만 해도 마나 대신에 체력을 소모한다고 해서 개꿀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막상 그 몸뚱어리로 살아가는 처지가 되니 그만큼 쓰레기가 또 없었다.

‘A등급 스킬 한 번 썼다고 체력이 다 빠져서 탈진해버리질 않나. 위력이 너무 세서 팔이 부러지질 않나. 어렵게 구한 무기가 개박살이 나질 않나….’

지금도 애써 괜찮은 척하고 있지만, 사실은 투척 스킬을 최대 위력으로 사용한 탓에 어깨가 상당히 뻐근한 상태였다.

‘예전엔 전투 한 번에 투척 풀차징 두세 번도 거뜬했었는데 말이야….’

그런데 근력이 40을 넘기고부터는 한 번 쓰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냥 유리 대포나 다름없다고 해야겠지. 근육질의 유리 대포라니,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이걸 해결하려면 체력 스탯이 근력을 얼추 따라잡아야 할 텐데, 야만전사의 종족 보너스 때문에 그건 영영 불가능했다.

“……파밍이나 해야겠군.”

괜히 울적해진 기분을 달래기 위해 엘리야의 품을 뒤적거리던 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돈이 많은 주문쟁이답게, 수확이 제법 쓸만하지 않나.

‘이게 아마……. 전령의 팔목 보호대였나.’

장착하는 것만으로 체력 스탯을 1 올려주고, 오래 달리거나 뛰어도 덜 지치게 되는 부가 효과가 있어서 쓸모가 많은 아이템이었다.

특히 체력 스탯이 절실한 칸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나 다름없었다.

‘어쩐지 주문쟁이치고 산을 잘 탄다 했더니.’

로브 안에 이런 귀한 걸 감춰두고 있었구만.

주황색 팔목 보호대를 왼팔에 대충 욱여넣은 칸의 시선이 이번엔 엘리야의 손가락에 껴진 은반지로 향했다.

‘처음 보는 물건인데.’

배터리 역할을 하는 마석이 박힌 걸 보면, 주문이 내장된 마도구인 듯했다.

“어떻게 쓰는 거지?”

반지를 여러 각도로 살펴보던 칸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반지를 중지에 끼우고서 손가락을 접었다.

그러자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회색실이 일직선으로 쭉- 뻗어 나갔다. 직전에 엘리야가 썼던 ‘아라크네의 침묵실’이었다.

“이거로 회색 마탑 마법사 행세를 해왔나 본데.”

칸은 반지로 쏘아 낸 실을 휘적휘적 움직여보다가, 도끼를 저 멀리 던져버렸다.

그리곤 회색실을 날려 도끼 손잡이에 고정한 다음, 손가락을 쫙 폈다.

그러자 회색실이 반지에 회수되면서 도끼가 같이 끌려 들어와 척! 하고 칸의 손에 붙잡혔다.

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이거 좋은데.’

마석만 제때제때 갈아주면 되니, 마나가 없는 그라도 사용하는 데엔 무리가 없었다.

‘마법 도끼는 못 얻었지만, 그 비슷한 건 얻은 건가.’

칸은 그 외에도 마탑의 신분증을 챙기고서 엘리야의 시체를 대충 땅에 파묻었다.

‘어서 빨리 씻고 싶군.’

그 길로 곧장 산을 내려간 칸은 곧장 마리의 둥지로 향했다.

2층의 여관방 대금을 미리 치러 뒀기에 몸을 닦고 나서 곧장 침대에 누워 곯아떨어질 생각이었다.

“꺄아악─!”

그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어린 여급을 놀라게 만들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하루를 꼬박 잠으로 보낸 칸은 일어나자마자 깊은 고민에 빠졌다.

뒤늦게 외면했던 사실이 일어난 순간에 불쑥- 그를 덮친 것.

시체박이, 다르킨 페레야스.

어젯밤 칸의 손에 목이 떨어져 나간 흑마법사의 스승.

게임 스토리를 대부분 까먹은 지금조차도 여전히 뇌리에 각인된 네임드 중 하나였다.

그럴 수밖에.

놈은 훗날 대마법사의 위계에 올라 나라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키고, 제 학파의 이름을 딴 시체들의 왕국을 세우는 사령술의 대종사니까.

‘그놈이 날 노리고 있다고….’

아무리 주문쟁이가 한 말은 믿을 게 못 된다지만, 칸이 기억하고 있는 시체박이의 성향이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였다.

시기상 놈은 아직 대마법사가 되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한창 강자들의 시체를 가져다 세력을 강화하고 있을 터.

‘오우거 슬레이어’라는 명성을 지닌 전사라면 놈이 군침을 흘려도 이상하지 않다.

“제길-. 귀찮게 됐는데.”

칸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엘리야의 실패를 녀석이 알게 되는 순간 새로운 추격자가 따라붙을 게 분명했다.

최악의 경우 놈이 직접 나설 수도 있고.

‘게임 스토리상 아직 초반부일 테니까…. 놈도 전성기에 한참 못미치는 실력이긴 할 거야.’

그렇다 한들 골치가 아픈 건 똑같다.

“하…….”

토해진 한숨이 무거웠다.

게임의 메인스트림과 어떻게든 엮이지 않으려 변방 중의 변방인 아르곤 왕국에서 활동해왔건만, 저쪽에서 먼저 칸에게 접촉해 올 줄은.

‘옛 신의 단서 때문이라도 아르곤을 뜰 수도 없는 형편인데.’

최근 수집한 문헌에 적혀 있기를.

「용의 압제에서 벗어나려 인간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 과정에서 용은 비늘 한 장이 뜯겨져 나갔다. 이에 크게 분노한 용이 꼬리로 땅을 내리쳤다…….」

「용이 이르길. 너희가 오늘 일을 잊지 않도록 내 비늘을 남기고 갈 터이니. 먼 후세까지 용의 두려움을 새기도록 하여라.」

문헌의 해석을 도와준 녀석의 추측은, 세월이 흘러 용의 꼬리가 대지에 새긴 상흔이 방대한 산간 지대를 형성했고, 용이 남긴 상처 위에 세워진 나라가 바로 아르곤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용의 비늘이 떨어진 장소가 서부의 대산맥일 가능성이 농후하다고도 말했다.

마침 저지른 일이 있어 동부를 떠야 할 참이었기에, 그 말을 따라 왕국 서부로 향했던 것.

다시 말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서부의 대산맥으로 가야만 하는 처지였다.

거기서 발생하는 문제가 하나….

‘다르킨 페레야스. 놈의 본거지도 아르곤 왕국 서부에 있다.’

*

*

*

사령 계통 주문의 대가.

다르킨 페레야스는 먼 훗날에 대마법사의 위계에 올라 악명을 떨치지만, 지금도 그 악명이 절대 부족한 편은 아니었다.

수시로 다른 사람의 거죽을 탈취해 신분을 바꿔대는 탓에 추적이 사실상 불가능한 데다가, 흑마법사로서의 경지 또한 상당히 높기에 어중간한 전력으로는 토벌이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

게다가 놈은 혼자가 아니었다. 칸의 손에 죽은 엘리야와 같은 제자가 적어도 십수 명은 더 있을 터.

‘흑마법사 몇십 명으로 나라까지 세울 정도였으면, 말 다 했지.’

무엇보다 그 집요한 녀석이라면, 엘리야의 연락이 끊긴 시점에서 그녀의 목표였던 칸을 찾아다닐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칸은 개인적인 목표를 위해 놈이 있을 왕국 서부로 기어들어 가야 하는 상황.

‘메인 스토리랑 최대한 안 엮이려고 피해 다녔는데, 이딴 식으로 얽히는 건 반칙 아닌가?’

물론 지금 시점에서 놈의 경지나 세력은 그리 대단치 않을 가능성이 컸다.

다르킨이 대마법사에 이르러 아르곤 왕국을 집어삼키는 건 제5막의 퀘스트고, 지금은 제1막이 한창 진행 중인 시점이니까.

‘즉, 잡을 거면 지금이 최적기란 얘기…….’

신화시대의 용이 비늘을 떨구었다던 서부 대산맥은 그 자체로도 위험한 마경. 뒤통수에 불안을 남기고 돌아다닐 만한 곳이 아니다.

결국 이것저것 고려했을 때….

다르킨 페레야스를 조져야 한다는 것이 칸의 결론이었다.

‘오랜만에 레벨업 좀 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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