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화. 흑마법사들 (1)
“일어나라. 주문쟁이.”
“끄….”
“일어나라니까. 내 말 안 들리나?”
현대인의 덕목, 우선은 대화로 해결한다.
그것을 철저히 준수하며 기절한 흑마법사를 깨우려던 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곤-.
쫘악──!
“끄헉!”
“거. 말로는 못 알아듣네.”
솥뚜껑만 한 손바닥이 짜릿한 손맛을 내며 볼기짝을 휘감았다.
그 충격에 의자에서 굴러떨어진 흑마법사가 둥지에서 떨어진 아기새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하아….’
안 그래도 짜증이 나던 참이었는데 팔자에도 없는 심문을 하려니, 욕이 절로 나왔다.
그야 그렇지 않나.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그가 고문에 소질이 있을 리도 만무하고, 남에게 고통을 주는 걸 즐기는 취향도 없으니.
‘그래도 최대한 해 봐야지.’
그간의 개고생을 생각하면, 억울해서라도 해야만 했다.
다르킨을 잡기로 결심한 날.
곧바로 체르노 자작령을 떠나 정보 길드와 접촉. 윗대가리가 따로 지령이라도 내린 건지, 묘하게 비협조적인 정보상들을 탈탈 털었다.
거기서 얻은 정보대로 엘리야가 칸에게 접근한 것과 비슷한 형태의 의뢰를 받은 ‘명성 있는 전사’의 목록을 수배했고.
그렇게 나온 후보들 중. 위치가 가까운 이들을 찾아가 상태를 확인해봤으나, 세 번이나 허탕을 쳤다….
그 고생 끝에. 겨우 붙잡은 흑마법사가 눈앞의 이놈이었다.
‘의뢰를 받은 검은 어쩌고 용병대는 이미 죽어 있었지만…. 뭐, 대신 조져주면 그쪽도 좋아하겠지.’
“내 질문에 똑바로 대답 안 하면 재미없을 줄 알아라. 그때는 손바닥 대신에 도끼와 입맞춤을 하게 해주지. 이름.”
“아르센! 아르센입니다!”
“그래. 흑마법사 아르센. 어째서 그 용병들을 습격했지? 누구의 사주를 받은 거냐?”
“아니, 아닙니다…! 저, 저는 그냥 그들의 시체로 하수인을 만들려고!”
“거짓말을 하는군.”
삐걱.
칸이 도끼를 쥐며 몸을 일으키자 의자가 비명을 질렀다. 피가 진득하게 묻은 도끼날을 바라본 흑마법사의 안색이 거무죽죽해졌다.
“다르킨 페레야스. 그 염병할 시체박이의 명령으로 바깥을 나도는걸. 내가 모를 줄 알았나?”
“……!”
“거짓말을 했으니. 억울하진 않겠지.”
칸이 느릿한 속도로 도끼를 치켜들었다. 흑마법사의 빈약한 반사신경으로도 충분히 볼 수 있도록.
실시간으로 놈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공포에 물들기 시작한다.
스승의 정체를 발설해선 안 된다는 이성과 당장 눈앞의 도끼가 처박힐 거라는 공포가 격렬히 내면에서 충돌하고 있는 듯했다.
“그냥 죽어라.”
칸의 도끼가 일말의 망설임 없이 흑마법사의 정수리 위로 내리꽂혔다.
놈은 그때까지도 고민을 이어나가다, 발작하는 것처럼 외쳤다.
“자, 잠깐……! 전부 말하겠습니다! 전부 말할 테니!”
쾅─!
“히, 히끅!”
“운이 좋군.”
정확히 가랑이 사이에 내리꽂힌 도끼를 회수한 칸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당연히, 의도적으로 빗맞힌 것이었으나 한순간 생사의 위기를 오간 흑마법사에겐 그걸 알아볼 정신머리가 남아있질 않았다.
그저 가랑이를 축축히 적시며, 칸의 질문을 기다릴 뿐이었다.
‘이만하면 충분하겠군.’
“다시 묻지. 이름.”
“에, 에릭센입니다……. 스승의 밑에서는 칠 년 정도 수학했습니다.”
방금 전 씨부렸던 아르센이란 이름과 영 딴판인 이름이 튀어나왔다. 아주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레 거짓말을 하는구만.
‘간악한 주문쟁이 같으니.’
이래서 주문쟁이들의 말을 믿지 말라는 거다.
칸은 스스로의 신념에 무게를 더해가며 질문을 이어나갔다.
“너를 포함해서 지금 바깥을 쏘다니는 다르킨의 제자가 몇이냐.”
“정확히는 모르지만…. 거의 대부분이 나왔을 겁니다. 숫자는 열, 열일곱 정도.”
“위치는? 어디로 향했는지 알고 있나?”
“전부는……. 사이가 나쁘지 않은 사형제들과는 협력을 위해 표적을 공유하긴 했습니다.”
“전부 말해라.”
제 목숨이 칸의 손에 달렸음을 완전히 인지한 듯. 에릭센은 순순히 정보를 넘겼다.
칼같이 배신하는 꼴이 참으로 주문쟁이 다웠다.
“제자라는 놈들의 수준은? 너와 비슷한가?”
“그, 그건…….”
“말 안 해도 알겠군. 너랑 비슷하거나 조금 나은 정도겠지.”
“큭!”
에릭센의 얼굴이 치욕으로 일그러졌다. 제 부족한 실력을 인정하기 싫은 걸까.
애초에 바지에 오줌이나 지린 시점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고 말고 할 것도 없어 보이긴 했지만.
눈앞의 얼간이와 비교하니, 엘리야의 실력은 제자들 중에서도 꽤 높은 축인 듯했다. 하기야 녀석 수준의 제자가 너덧 정도만 더 있었다면, 토벌은 꿈도 꾸지 못했을 터였다.
“그럼 마지막이다. 다르킨 페레야스. 그 새끼의 은신처를 말해라.”
“…….”
갑자기 침묵하는 에릭센의 태도에 칸이 미간을 좁혔다.
제 사형제도 전부 팔아먹은 놈이, 스승을 팔아먹지 못할 이유가 없다. 설마 눈앞의 도끼보다 그 늙은이가 무섭다는 이유는 아닐 테고….
“제약인가? 스승에 대한 정보를 발설할 수 없다는 그런 계약이라도 했나 본데.”
아무래도 그 추측이 정답이었는지, 에릭센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들을 만한 건 다 들었군.”
“그. 그럼! 사, 살려주시는 겁니까?”
에릭센의 목소리가 조금 밝아졌다.
“나를 뭘로 보고.”
‘감히 나를 의심하는 거냐.’라고 말하는 듯한 당찬 어조에 에릭센이 함박웃음을 지었고, 칸도 마주 웃었다.
‘깜빡하고 말을 안 했군.’
그는 테러리스트와 협상 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 상대가 주문쟁이. 특히 흑마법사라면 더더욱-.
*
*
*
“냄새가 왜 이렇게 안 빠져?”
주인을 잃은 장비들을 열심히 수거하던 칸이 가죽 장갑에 코를 가져가 킁킁- 냄새를 맡고선 기겁하며 얼굴을 뗐다.
에릭센을 아주 친절히 보내준 시점에서 삼십 분이 지난 후였다.
워낙 현장이 개판이어서 정리할 엄두는 안 났고, 대신 강철- 어쩌고 하는 용병들의 장비를 한곳에 모았다.
“이만하면 금화 열 장은 나오겠는데.”
나름 한 가닥 하던 용병 파티란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생각보다 수확이 괜찮았다.
에릭센 녀석이 아티팩트나 쓸만한 아이템을 안 떨군 게 아쉽기는 하다만. 항상 그렇게 운이 좋을 수는 없는 것이리라.
“끄응. 차.”
마지막 시체에서 갑옷을 벗겨낸 칸이 허리를 쭈욱- 폈다.
슬슬 어둑어둑한 것이, 어서 가까운 마을에 돌아가지 않으면 술집 바닥에서 자야 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건 안 되지.’
평소 제대로 씻지도 않는 미개한 중세 놈들과 바닥에서 뒹굴며 자라니. 그런 끔찍한 경험은 절대 사양이었다.
차라리 길바닥에 드러눕고 말지….
“여기서 제일 가까운 마을이 아마……. 수도원이 있는 장원이었던가.’
‘만신전 교회 놈들은 껄끄러운데.’
신의 힘이 실재하는 이 세계에서 교회의 권력은 절대 약하지 않았다.
‘만신전의 가호’랍시고 풍요의 축복을 내리거나, 병자를 치유하는 사제들이 나타날 때면 귀족조차 버선발로 맞이할 정도라니 말 다했지.
그런데 교회의 입장에서 자기들에게 힘을 내려주는 만신전의 신이 아닌, 제 민족의 신만을 숭배하는 북방 야만인은 심문관이 잡아다 족쳐야 할 이단이나 다름없었다.
‘제국이랑 다르게 이쪽 동네는 좀 나은 편이긴 하지만….’
괜히 마주쳤다가는 서로에게 껄끄러운 만남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최대한 얌전히 쉬고 곧장 떠나기로 결심한 칸이 한쪽으로 모아둔 장비들을 배낭에 욱여넣으려 하던 그즈음.
“……음.”
칸이 짧게 침음성을 흘렸다.
언제나 의연하던 모습과는 반대로, 얼굴의 일그러짐이 그의 동요를 여실히 드러낸다.
“손님이 또 있을 줄은 몰랐는데.”
허리춤에 고정한 손도끼를 천천히 말아쥔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검은 로브로 전신을 가린 괴인이 멀리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행색은 아니었고… 그리고 일순간이라지만 그의 감각을 속였다.
마법 혹은 고도의 은신술. 그 방법이 어느 쪽이건 범상한 녀석은 아니리라.
“제길-. 오늘은 이만하고 쉬려 했는데.”
“……가 한 짓?”
“뭐라는 거야?”
듣기만 했는데 절로 불쾌감이 올라온다. 마치 짐승이 억지로 사람의 말을 내는 느낌….
“그쪽이 뭐 하는 양반인지는 모르겠는데…….”
칸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괴인의 신형이 자취를 감추었다.
놈이 손도끼에 의해 토막난 용병들의 시체를 본 직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이, 씹!”
캉! 까드득!
‘빠르다…!’
반사적으로 도끼를 앞세운 칸이 괴인의 검을 힘으로 밀어낸다.
그러나 한참 뒤로 물러날 거란 예상과 달리, 괴인은 몇 걸음 밀려나고선 자세를 다시 갖췄다.
도끼를 통해 느껴진 힘이 상당하다. 검을 다루는 솜씨도 제대로 익힌 느낌이 물씬 났고-.
쉬익!
특히 순간적인 속도에서는 칸조차 우위를 점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쾅. 쾅. 쾅!
불과 한 호흡 만에 이어진 세 번의 격돌. 손도끼와 괴인의 검이 어지럽게 맞부딪쳤고, 근력에서 우세를 점한 칸이 다음 수를 준비했다.
검의 가드 부분에 도끼 손잡이를 걸고서 바깥으로 강하게 튕겨낸다.
그렇게 훤히 열린 상체로 칸의 발끝이 창처럼 찔러 들어갔다.
뻥! 그 충격에 내달리는 마차에 부딪치기라도 한 것처럼 괴인의 몸뚱어리가 일직선으로 날아 처박혔다.
제대로 들어갔다.
갑옷을 입었어도 압력을 버티지 못한 내장이 제 기능을 상실하거나, 터져버렸을 게 분명한 일격.
그러나 칸은 섣불리 쫓지 않았다.
손아귀 안에서 도끼 손잡이를 굴려가며 다시금 긴장을 끌어올렸다.
‘타격감이 좀 밋밋했다.’
뼈가 으스러지고, 내장이 짓눌려 터지는 특유의 감각이 느껴지질 않았다. 분명 갑옷이 아니라 맨살을 밀어 찼음에도.
“후우.”
빠르게 호흡을 가다듬는다.
그의 예상대로 괴인은 잠깐 비틀거렸을 뿐, 큰 타격을 입지 않은 것처럼 멀쩡히 일어나선 기수식을 취했다.
단순히 맷집이 좋다거나, 몸이 튼튼하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다.
‘역시. 사람이 아니라 언데드인가. 암흑기사인가? 아니면 키메라?’
저 로브 아래에 무슨 괴물이 감춰져 있을지는 직접 확인해보지 않는 이상 확신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일전에 칸의 손에 죽은 엘리야 이상의 기량을 지닌 흑마법사가 실력을 발휘했다는 것.
다르킨 페레야스가 못 미더운 제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보낸 하수인일 수도 있겠고, 놈의 제자들 중에서도 실력이 뛰어난 네임드일 수도 있다.
‘생각보다 이른 시점에서 대어가 물었군.’
그 말은 엘리야, 에릭센보다는 아는 게 훨씬 많을 거란 얘기. 상대를 반드시 족쳐야 할 이유를 되새긴 칸이 선공에 나섰다.
쾅!
발밑에 구덩이가 생길 정도로 강하게 도약한 칸이 방어적인 자세를 취한 괴인의 어깨를 쪼개기 위해 도끼를 휘둘렀다.
카드득─.
용케도 막아낸 괴인이 이번에는 손목을 아래로 꺾고, 검끝의 방향을 바닥으로 처박히도록 각도를 조정했다.
힘의 방향을 비틀어 공격을 흘려내려는 것이다. 칸에게는 몹시 익숙한 노림수이기도 했다.
여태껏 그와 적대한 전사들이 제 기량을 믿고 칸의 괴력을 흘려내려 시도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연하지만, 그러한 시도들은 모두 실패했다.
레벨업을 거듭한 칸의 힘은 인외의 영역에 맞닿아 있었기에, 검과 도끼가 맞부딪치는 충격에 검이 버티질 못하거나 팔이 으스러지는 까닭.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칸의 얼굴이 일순 굳는다.
괴인의 검은 부러지지도 않았고, 팔은 멀쩡하게 검을 지탱했다.
그 결과 제힘을 이기지 못한 칸의 도끼가 애꿎은 땅을 후려쳤고, 직후 상반신 위가 훤히 비어버린 칸의 턱을 무언가가 스쳤다.
“큭!”
괴인이 휘두른 검의 폼멜이 턱을 강타하는 충격에 일순간 시야가 흔들린다.
그러나 그뿐.
“흐읍!”
잠깐 흐려지는가 싶던 의식은 금세 제자리를 찾았고, 오히려 전의를 불태우듯 회색 안광이 번뜩였다.
오로지 싸움을 위해 태어난 야만인의 강건한 육체, 그간 레벨업을 통해 꾸준히 상승한 체력 스탯, 그와 더불어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뺀 덕분이었다.
터억─.
오히려 손이 닿을 만큼 좁혀진 거리를 이용해 괴인의 로브를 낚아챘다.
괴인이 당황하지 않고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이미 땅과 발이 이별한 지 오래였으니. 공중에 붕- 뜬 괴인의 몸이 이윽고 순식간에 바닥까지 처박혔다.
쾅──!
주변의 산천초목이 강하게 불어닥친 바람에 부산스레 몸을 흔들고, 짙은 먼지구름이 둘의 신형을 완전히 가린다.
이윽고.
먼지가 걷히자 그 안에 있던 칸의 모습이 보였다.
그를 중심으로 생겨난 구덩이 속에서 바람을 따라 펄럭이는 로브를 손에 쥔 칸의 얼굴은 누가 봐도 좋지 않았다.
“쯧. 더럽게 날래군.”
등이 땅에 닿기 직전에 괴인이 칸의 손목을 붙잡고는 반동을 이용해 로브를 벗어던지면서 빠져나가 버렸다.
그런 묘기 같은 몸놀림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차치하고….
의미 모를 헛웃음을 흘린 칸의 고개가 괴인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어째 몸집이 작다 했더니.”
달빛을 머금고선 은은하게 빛을 흩뿌리는 백금발 아래, 밤하늘의 색깔을 머금은 듯한 신비로운 눈동자가 칸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설마, 어린 꼬마였나?”
그것도 남자가 아니라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수려한 외모의 여자애였다.
물론…. 칸의 도끼는 미인과 귀족, 주문쟁이를 가리지 않고 쪼개버리는 평등 실현의 병기다.
하지만.
칸은 도끼를 허리춤에 고정하고선 양손을 들어 보였다.
“무슨 의미?”
그에 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옥구슬이 굴러간다는 게 이런 말일까. 어조야 딱딱해도 몹시 듣기 좋은 목소리임이 틀림없었다.
아까는 꼭 지옥에서 기어올라온 마귀 같았는데…. 로브에 음성 변조 기술이라도 달린 건가.
“우리 사이에 오해가 좀 있는 것 같아서.”
“……오해?”
칸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자신의 무고함을 눈앞의 그녀에게 증명할 수 있을지 딱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애초에 먼저 덤벼든 건 저쪽이지 않나.
평화를 사랑하는 현대인의 마음을 가진 칸의 입장에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검을 휘두르는 저 여자야말로 미개한 야만인이었다.
그러나 소녀의 정체를 알아버린 이상, 뒤늦게라도 그녀의 오해를 풀어야 했다.
척 보기에도 성스러운 순백의 아우라를 갑옷처럼 전신에 두르고, 평범한 인간을 능가하는 신체 능력을 지녔으며, 검까지 수준급으로 다루는 인간을 이 세계의 명칭으로 무어라 부르는지 떠올린 칸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성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