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야만전사-8화 (8/132)

#008화. 흑마법사들 (2)

만신전 교회의 성기사는 특별하다.

기사라는 존재가 평범한 병사 백 명은 거뜬히 갈아버리는 괴물이기에 당연한 소리겠지만, 성기사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특별했다.

기술과 육체를 극한까지 연마한 전사들이 신의 이름 아래 ‘충성의 서약’을 맺고서 기사가 되는 반면.

성기사는 신의 축복을 제 육체에 깃들게 하여, 별다른 수련 없이도 기사에 버금가는 무력을 손에 넣는다.

평생 검을 잡아본 적 없는 사람조차 성기사가 되면, 기사처럼 인간 믹서기가 되어 날뛰는 게 가능하다는 소리.

다만 신의 힘을 육체에 담는 건 극히 희귀한 자질을 타고나야 했기에, 어지간해서는 마주칠 일이 없는 귀한 몸이기도 했다.

‘그런 귀한 양반이 하필이면…….’

흑마법사를 족치고 나서 아이템을 파밍하던 와중에 나타날 건 또 뭔가.

“오해의 소지가 많다는 건 알고 있소. 그런데 그쪽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

“……간악한 혀로 당신의 주구를 현혹하지 말지어다. 당신의 충실한 종은 마귀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야 할 것이며, 오로지 당신의 의지를 이 땅에 투사할 것을 맹세하여라.”

듣기만 해도 어지러운 기도문을 읊조린 직후 성기사의 전신을 감싼 순백의 아우라. ‘신성갑주’가 더욱 찬란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아, 글쎄!”

이쪽의 답답함을 헤아릴 생각이 없는지, 아예 입을 다물어버린 성기사가 발로 땅을 가볍게 밀어 찼다.

투쾅!

고작 개소리 몇 마디 지껄였다고 아까보다 훨씬 빨라진 성기사의 검이 바닥을 긁으며 쇄도한다.

반격하는 대신, 뒤로 펄쩍 뛰어 물러난 칸은 낭패감을 느꼈다.

눈앞의 성기사에게 질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죽일 수 있냐고 묻는다면 얘기가 또 다르다.

상대는 만신전 교회 내부에서도 특별 취급을 받는 존재다. 가부를 떠나서 이후의 감당이 가능한가를 따져야 했다.

‘야만족 이단에게 성기사가 죽었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게거품을 물고 달려들 테니.’

무엇보다 교회의 성기사가 수상한 거적때기를 걸쳐 신분을 감춘 채, 흑마법사가 있던 장소에 나타난 이유라면….

‘그거야 더 깊이 생각할 가치도 없지.’

“다르킨 페레야스.”

거의 눈앞까지 접근한 검신이 우뚝- 허공에서 정지했다.

짐작이 들어맞았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칸이 입을 열었다.

“그쪽이 녀석을 쫓고 있다면, 우린 서로에게 꽤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요. 성기사 양반.”

“무슨 뜻?”

“나도 그 녀석을 찾고 있다는 말이지. 여기가 이 난장판이 된 건, 내가 녀석의 제자를 족친 흔적이오. 그쪽은 그걸 오해한 거고.”

“증거는.”

“내가 왔던 방향에 흑마법사의 시체가 있소. 다르킨이 애용하는 육체 강탈의 흔적이 시체에 고스란히 남아 있을 테니, 보면 대충 알 거요.”

그녀는 말의 진위에 대해 고민하는 듯 침묵했다.

그런 와중에도 밤하늘을 품은 눈동자가 칸의 심중을 꿰뚫으려는 것처럼 똑바로 눈을 마주쳐왔고, 칸은 제 떳떳함을 드러내듯 시선을 받아냈다.

‘거. 눈빛 한번 더럽게 부담스럽네….’

그와 별개로 조카뻘의 꼬맹이와 장시간 눈을 마주하는 건, 삼십 대 아저씨에겐 다른 의미로 고역이었다.

지구였으면 벌써 신고당하고도 남았겠지.

철컥-.

목에 겨눠졌던 검이 납검되는 소리에 칸이 슬쩍 몸의 긴장을 풀었다.

그래도 성기사치고는 말이 좀 통하는 양반인 듯했다.

“자세히. 설명해.”

다만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한국식 유교 예절을 머릿속에 때려 박아야 할 필요성이 있어 보였다.

*

*

*

칸의 안내를 따라 에릭센의 시체가 있는 곳에 당도한 성기사가 감정이 희미한 목소리로 제가 본 것을 입에 담았다.

“흑마법사.”

“그렇소. 정확히는 뒈진 흑마법사지만.”

“에릭센. 다르킨의 제자.”

역시 만신전 교회인가? 그녀가 처음부터 에릭센의 신상을 특정하고 이 자리에 나타난 것임을 알아차린 칸이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교회의 총본산이 있는 제국과 멀리 떨어진 아르곤 왕국에서도 은밀히 움직이는 흑마법사의 신분을 특정하고, 그 행적을 쫓을 수 있는 수준이라니.

대륙 전역에 신자를 보유한 만신전 교회의 힘을 새삼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놈을 발견한 건 검정 어쩌고 하는 파티가 다 뒈져버린 직후였소. 그래서 도끼로 냅다 골통을 쪼개버렸지. 그쪽은 내가 현장을 수습하던 걸 오해했단 얘기고.”

사실 현장 수습이 아니라 아이템 파밍을 하고 있던 도중이었다마는. 크게 다를 것도 없으니, 딱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보를 캐야 했어.”

“그건 걱정 마시오. 제약 때문에 다르킨 페레야스에 대한 정보는 듣지 못했지만, 녀석도 어지간히 살고 싶었는지 제 사형제들의 정보를 모조리 뱉었으니까.”

“…어째서?”

“뭐가 어쨌냐는 거요.”

칸의 되물음에 성기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무표정한 얼굴이건만, 이걸 왜 못 알아듣냐고 책망하는 듯하여 칸의 눈빛이 뚱해졌다.

“흑마법사. 왜 노리는 거야.”

“아. 그걸 말하는 거였나. 별 이유는 아니오. 저쪽에서 날 먼저 사냥감으로 찍었거든. 언데드로 만들 생각이라나.”

“그래.”

“대답 한번 간결해서 좋군.”

성기사만 아니면 쥐어팼을 텐데…. 칸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진짜 본론으로 주제를 넘겼다.

귀족이고, 기사고, 아름다운 주문쟁이고, 가리지 않고 무력을 행사하던 그가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용을 썼던 데엔 이유가 다 있었다.

“다르킨 페레야스를 쫓는 건 만신전 교회의 뜻이오? 아니면 당신의 독단이오?”

“후자. 지원도 받고 있어.”

“당신의 독단을 만신전 교회가 지원하고 있다는 얘기인가?”

그녀가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꼬맹이 성기사 주제 권한이 생각보다 더 대단한가 본데.’

조직의 소속된 개인이 멋대로 움직여도 군말 없이 지원해주는 모습이 시사하는 바는 작지 않았다.

하물며 그 조직이 대륙에서도 손에 꼽는 영향력을 지닌 만신전 교회라면 말이다.

그녀의 가치가 그 정도 수준은 된다는 것이거나, 다르킨 페레야스가 일찍이 저지른 사고를 교회에서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는 뜻이리라.

“현재 놈의 제자들 중 일부의 소재를 확인했소. 교회의 정보력이라면 사실 여부도 금세 파악할 수 있겠지. 내 말이 맞소?”

“…맞아.”

“그럼 정보를 넘겨드리겠소. 왕국에도 교회의 심문관이 한 명쯤은 있을 테니. 내가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 대신 조건이 있소.”

“조건?”

칸은 곧장 답하는 대신에 잠시 뜸을 들였다.

악마의 힘을 빌려 사악한 힘을 다루는 흑마법사는 교회의 최우선 척살 대상이다.

칸이 먹이를 던져 준다면 눈앞의 성기사는 최선을 다해 다르킨의 제자들을 사냥할 것이고, 종국엔 다르킨 본인과도 대적하게 될 것이었다.

교회의 신자들이 귀에 딱지가 앉도록 읊어대는 기도문의 구절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게 옳은 선택일까. 그녀가 정말 다르킨을 이길 수 있나? 칸은 확신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교회에 죄다 떠넘기고 술이나 퍼마시고 싶지만, 혹시라도 성기사의 시체를 다르킨이 손에 넣는 날엔….

‘젠장-.’

똘망똘망하게 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성기사를 한 번 마주 본 뒤, 칸은 속으로 탄식하며 입을 열었다.

“다르킨 페레야스. 놈을 상대할 때 나를 꼭 데려가시오. 녀석의 죽음을 내 눈으로 봐야겠으니까.”

“위험해.”

“위험이라니?”

칸이 코웃음을 쳤다.

서릿골의 야만인들은 투쟁을 위해 살아가는 미개한 족속들이다.

그 본질이 그린스킨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싸우다가 전장에서 죽는 것을 크나큰 축복으로 여긴다….

세상 모두가 그렇게 말하는데, 이 얼빠진 여자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서.

“나는 서릿골의 전사요.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소.”

물론 죽음은 두렵다.

자신은 북방의 용맹한 전사 따위가 아니라, 평범한 삼십 대 회사원이니까.

또한 아무런 연고도 없는 판타지 세계를 위해 쇠빠지게 구르다가 허망하게 뒈져버리다니.

‘그건 너무 허망하잖아.’

하지만-.

“내 입장에서 이건 피할 수 없는 싸움이오. 녀석의 제자가 날 노린 순간부터 그랬지.”

게임에서 아무리 멀리 도망쳐도 어그로가 좀처럼 풀리지 않던 녀석의 집요함은, 현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을 터.

성기사가 놈을 확실하게 끝장낼 수 있단 보장이 없는 이상. 차라리 성기사라는 전력과 함께 토벌에 나서는 것이 맞다.

무엇보다.

‘공짜로 버스 받을 기회를 버리기는 좀 그렇지.’

*

*

*

그녀는 결국 칸의 제안을 수락했다.

두려움을 모르는 북방의 전사를 연기한 것이 깨나 유효한 듯했다. 그렇게 나란히 작은 수도원이 있는 장원에 향하던 도중이었다.

“근데 이쪽에 흑마법사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알고 온 거요? 신분까지 특정한 걸 보면, 우연히 걸려든 건 아닐 텐데.”

칸 본인이야 근방의 정보상들을 탈탈 털고서 흑마법사의 표적으로 유력한 후보의 주변을 맴도는, 다소 몸으로 때우는 방법을 썼다지만.

교회의 정보력이 현지의 정보상보다 나은 수준이라면 이젠 그럴 필요도 없어지지 않나.

그녀의 대답에 따라선 생각보다 빨리 다르킨 페레야스에게 닿을 수도 있-.

“기다렸어.”

“응?”

“이 수도원에서. 흑마법사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어.”

“어…….”

순간 제 귀를 의심한 칸이 눈을 끔뻑거렸다.

기다렸다니. 설마 흑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수도원에서 죽치고 잠복이나 하고 있었단 소리인가?

“…그럼 놈의 이름이 에릭센이라는 건 어떻게 알고 있던 거요?”

“예전에 똑같은 흔적. 본 적 있어.”

주문쟁이가 아닌 칸으로서는 잘 이해할 수 없었으나, 같은 주문을 써도 술자마다 고유한 패턴이 습관처럼 묻어나온단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었다.

아마 그녀가 봤다는 ‘흔적’이 그러한 패턴을 뜻하는 것이리라.

“예전이라니. 놈들을 쫓기 시작한 게 최근의 일이 아닌 건가?”

“…….”

질문에 답은 듣지 못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한 대답이 됐다.

‘나이도 얼마 차지 않은 성기사가 예전부터 흑마법사의 뒤를 쫓고 있었다? 게다가 교회의 인력을 빌리지 않고, 몸소 잠복수사 같은 멍청한 짓거리를 하면서…?’

그 이유가 뭘까. 깊이 고민하지 않아도 대충은 알 것 같았다.

개인적인 원한.

사적인 이유를 들먹이며 멋대로 다르킨 페레야스를 추적하고 있으니, 저 쬐끄만 성기사는 양심에 찔려서 교회의 지원은 최소한으로 받고 있는 게 아닐는지.

‘그럼 괴상한 로브를 뒤집어쓰고, 목소리까지 변조한 이유가 대충 설명이 된다.’

제아무리 교회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라 한들, 성기사쯤 되는 존재가 막무가내로 제 영토를 들쑤시기를 원하는 국가가 어디 있겠는가.

그녀가 신분을 감추고 교회의 도움을 받지 않는 것은, 추후에 본인의 행동이 문제가 됐을 시.

교회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 일탈로 받아들이라는 정치적 제스처인 셈이다.

‘사실 만신전 교회가 겨우 왕국의 눈치를 볼까 싶기는 한데….’

“이거. 흑마법사 족치는 데 교회의 도움이나 좀 받을까 했더니. 오히려 이쪽에서 도움을 주게 생겼군.”

“…….”

그 말에 고개를 획- 돌려버린 그녀의 옆모습에서 어째선지 민망함을 읽어낸 칸은 피식- 웃어버렸다.

표정이나 말투는 어째 딱딱한데, 몸은 퍽 솔직하지 않은가.

“걱정 마시오. 이제와서 딴소리할 생각은 없으니까. 쬐끄만 양반.”

애초에 그녀가 눈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혼자서 끝장을 볼 셈 아니었던가.

무엇보다 어린 꼬마애를 상대로 화내는 것도, 어른으로서 바람직하지 못했다.

“어차피 정보야 다른 흑마법사를 더 족쳐서 캐내면 될 테니. 좀스럽게 탓할 생각은 없소.”

“…정말?”

“정말이고 말고. 성기사는 칼질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겠소? 머리 쓰는 건 내가 하면 되겠지.”

“당신. 야만인.”

“야만인이 멍청하다는 건 종족 혐오 발언이오. 만신전의 자비 아래 평등해야 할 신실한 성기사가 차별성 발언을 뱉다니. 통탄한 일이군.”

“……이상한 야만인.”

또다시 시작된 야만인 혐오에 칸이 무어라 답하기 전에, 백금발의 머리를 질끈- 묶은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툭- 내뱉었다.

“주의 가장 영광된 옆자리를 약속받은 기름부음 받은 자. 아리에스.”

마치 성경의 한 구절처럼 들리는 말. 그것이 자기소개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칸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고 보니.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았군.’

“평범한 야만인이라 딱히 내세울 수식은 없군. 코르디 칸. 코르디의 아들 칸이라는 의미니까 칸이라 부르면 되오.”

평소라면 생판 모르는 여자에게 악수를 권하는 일 따위는 없었을 테지만, 칸은 슬쩍 오른손을 내밀었다. 뭔가 그래야만 하는 훈훈한 분위기 아닌가?

“크흠. 한동안 잘 부탁하겠소. 쬐끄만 양반.”

하지만 그렇게 내밀어진 손이 민망하게도. 아리에스는 몇 초 동안 가만히 칸을 노려보다가, 획- 등을 돌려버렸다.

‘저 예의 없는 것이 또 왜 저럴까.’

어딘가 삐진듯한 뒷모습에 칸은 멋쩍은 듯 내밀었던 손을 바지에 슥슥 닦았고, 신경질적으로 총총 앞서 나가는 성기사의 뒤를 따라 걸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