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야만전사-9화 (9/132)

#009화. 흑마법사들 (3)

“저 행색은 야만인 아닌가? 어째서 야만인이 저분과 함께……?”

“예끼. 설마 성기사께서 이단과 함께 오시려고. 그리고 야만인들은 그린스킨처럼 문신이 많단 말이야.”

“아니. 잿빛 피부면 서릿골의 야만인이 맞지 않나.”

로브를 뒤집어쓴 괴인과 2m가 넘는 근육질의 야만인이 작은 장원에 들어선 순간. 수많은 이목이 단번에 집중되는 건 당연했다.

특히 야만인을 이단으로 취급하는 만신전의 신도들인 만큼. 그를 보는 눈총이 따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다행히 그의 곁에 아리에스가 있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대놓고 반발하고 나섰을 게 훤했다. 하여간, 미개한 종교쟁이 놈들.

“…….”

아리에스도 웅성거리는 말소리들이 신경 쓰였는지, 눈치를 보듯 칸을 슬쩍 흘겼다.

“뭐라 떠들건 난 괜찮소.”

일방적인 경멸과 혐오 어린 시선이야 익숙해진 지 오래인지라.

“만신전의 가호가 있기를…….”

“주의 기름부음 받은 분께 광명이 따르기를.”

그러나 수십 개의 입에서 쏟아지는 경건한 기도에는 도저히 의연할 수가 없었다. 거의 세뇌라도 당한 듯한 모양새 아닌가.

아리에스가 익숙한 듯 간단하게 목례하는 걸 보며, 이 장원 자체가 제멋대로 구는 성기사를 위한 교회의 비밀스런 지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스케일부터가 다르구만.’

지나가던 여행자가 강도로 돌변하고, 상단이 마적 떼로 업종을 변경하고, 용병이 무장 군벌로 종종 탈바꿈하는 세상이다.

그런 점에서 장원의 대다수 구성원이 신실한 교도들로 채워진 장원은 성기사 한정으로 대단히 훌륭한 거점이 될 터였다.

“의외의 쓸모군. 쬐끄만 양반.”

“이름 알려줬잖아.”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가, 에릭센이 근처에 나타났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소?”

“……냄새가 났어. 흑마법 특유의 악취가.”

“판타지판 마약탐지견이 여기 있었군.”

“…? 난 개가 아니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고귀한 성기사와 오우거를 토벌한 전사의 대화라기엔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한 만담은 수도원의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끝이 났다.

탕. 탕. 탕.

아리에스가 문고리를 잡고 두들기자 수도원의 문이 슬쩍 열린다.

그 틈에서 머리를 내민 것은 누가 봐도 ‘나 사제요.’라고 말하는 듯한 인자한 얼굴의 노인이었다.

노인은 아리에스를 보고는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고, 그 뒤에 선 덩치 큰 야만인을 보고서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늙은이가 눈을 제법 곱게 뜨는군.’

칸이 마주 눈을 찡그렸지만, 늙은 사제의 시선이 칸에게 머무른 건 아주 잠깐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목표하신 바는 이루셨습니까?”

아리에스가 고개를 주억이자 늙은 사제는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한데……. 아까까진 안 보이던 동행이 있으시군요.”

“협력자.”

“예. 협력이라. 홀로 움직이는 것보다는 믿음직한 동료가 있는 것이 낫지요. 예에. 그런데.”

믿을 수 있는 자입니까? 늙은 사제의 눈동자가 기이한 빛을 머금었다.

저 색채의 근원이 어떤 감정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뻔하다. 혐오, 경멸…. 이교도 야만인을 보는 광신도라면 응당 가질 법한 감정이다.

“북방의 야만인…. 만신전의 신격이 아닌, 저들만의 토속신을 숭배하는 이단자들 아닙니까. 북방의 서릿골을 넘어 이 땅에 와서는, 투쟁을 부르짖으며 곳곳에서 사고나 칠 줄 아는 속된 말로 무뢰배나 다름없는 자들입니다. 결코 당신의 눈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나.”

긴말을 쏟아내는 것조차 힘에 부쳤는지, 늙은 사제는 쩍쩍 갈라진 입술을 혀로 축인 후에 숨을 골랐다.

“…속세의 더러움이 당신을 물들일까, 그것이 저는 너무나 두렵습니다. 기름부음 받은 분이시여. 차라리 이곳의 젊은이들을 데려다 쓰십시오. 언제든 제 신앙을 증명할 준비가 되어있는 신실한 교도들이니, 당신께서 바라신다면 초개처럼 제 한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

아리에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침묵했다. 칸은 어째선지 쬐그만 그녀의 뒷모습에서 난처함을 느꼈다.

하지만 신앙에 미쳐버린 노인에겐 그녀의 곤란함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게 아니면. 조금만 저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저 야만인이 믿을 수 있는 자인가를 직접 확인하겠습…….”

“개소리도 그쯤 하지. 노망이라도 난 건가?”

이대로 두면 자신도 모르게 정의의 손도끼가 교활한 사제의 골통을 쪼개버릴까 저어된 칸이 결국 직접 교통정리에 나섰다.

“주의 옆자리를 약속받은 이께서 계신 순간부터 이곳이 바로 성역일지니! 너, 더러운 이단자야…! 삿된 혀를 마음대로 놀리지 말아라.”

‘이래서 종교쟁이 새끼들이란….’

개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쏟아내는 걸 보면 기가 차는 걸 넘어서 경이로웠다. 목숨을 바치긴 뭘 바쳐?

“지랄을 하는군. 성역은 무슨, 다 무너져가는 수도원이 어떻게 성역이냐. 노망난 사제.”

“이런 우매한─! 주의 시선이 바로 이곳에 향했음을 느끼지 못하는 걸 보아하니! 이단이 확실하구나!”

“신처럼 공사다망한 존재가 할 일이 없어서 쬐그만 여자애나 관음하고 있을 리가 없지. 아무래도 노망이 난 게 분명하다. 정신과에 가보는 걸 추천하겠다. 노망난 사제.”

“이, 이……!”

단지 몇 번의 말싸움만으로 뒷목 잡고 쓰러질 기세의 늙은 사제를 내려다보며 칸이 피식 웃었다.

지구가 평평하다느니, 세계를 막후에서 지배하는 기구가 존재하느니, 별 재미도 없고 관심도 없는 소재로 싸워대는 사이버 검투사들을 상대로 단련된 현대인과 혓바닥으로 싸워보려 하다니.

‘한참 멀었지. 암.’

게다가 칸이 조금 과한 언사를 막 내뱉어도 뭐라 할 사람이 딱히 없었다. 누가 뭐래도 지금의 칸은 ‘무식한 야만인’이니까!

“그만. 칸은 믿을 수 있어.”

“어찌……!”

늙은 사제가 화병으로 뒈져버리기 전에, 보다 못한 아리에스가 결국 상황을 정리했다. 그것도 칸의 손을 들어주는 방향으로.

“가자.”

“그러지.”

억장이 무너진 듯, 황망한 표정의 늙은 사제에게 한 번 이죽거린 칸이 아리에스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거닐었다.

“그를 너무 미워하지는 마. 자기 신앙에 충실한 것뿐.”

“딱히 이렇다 할 감정은 없다. 익숙하니까.”

원래 몇 시간을 싸워도 떡밥이 식으면 아무렇지 않게 훌훌 털어버리는 게 사이버 검투사란 족속 아니겠는가. 그저 상대를 이겨 먹었다는 즐거움만 가져가면 된 거다.

“……그래. 익숙하구나.”

아무렇지도 않게 답하는 칸이었지만, 반대로 아리에스의 목소리는 어딘가 가라앉은 채였다.

*

*

*

아리에스는 자신에게 준비된 독실에 들어선 이후에야 로브를 벗어던졌다.

등불의 빛을 머금어 주홍색으로 너울거리는 백금발을 정리한 그녀는 힘없이 침대에 몸을 뉘였다.

“에릭센.”

6년 전, 오크의 소동으로 일을 꾸며 산맥에 자리한 화전민을 몰살한 후. 그렇게 모은 언데드들로 신분을 감춘 채 용병 생활을 하다가, 청색 마탑 마법사의 육체를 강탈한 자.

타인의 육체를 강탈해 신분을 바꿀 수 있기에, 그 누구도 에릭센을 비롯한 다르킨의 제자들을 추적할 수 없었다.

흑마법의 흔적을 읽을 수 있는 그녀와, 오늘 처음 만난 잿빛 피부의 야만인을 제외한다면.

“코르디 칸.”

흑마법의 냄새를 맡고 달려간 장소에 있던 야만인. 곳곳에 즐비한 도끼에 갈려 나간 시체와 시체를 방치하고선 전리품을 수거하는 모습에서 느낀 첫인상은.

‘위험하다.’

그뿐이었다.

신의 축복이 깃든 육체는 그 자체로 초월성을 띤다. 단순 힘이 세고, 튼튼하다는 영역을 넘어 평범한 인간과는 격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도 칸을 마주친 순간에 육감이 비명을 질렀다. 저자는 위험하다고. 당장 도망치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고.

그러나 아리에스는 맞서 싸웠다.

상대의 정체가 무엇이건, 흑마법과 관련된 모든 것을 불사르기로 주의 앞에서 약속했기 때문에.

“졌어.”

육감이 알린 위험성에 비해, 칸의 강함은 그럭저럭 아리에스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이었다.

그러나 아리에스는 확신했다.

상대는 조금도 전력을 다하지 않았고, 만약 전력을 다했다면 졌을지도 모른다고….

“아니, 그건 몰라.”

그녀에게도 비장의 한 수는 있다.

상대가 누구라도 확실하게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한 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에스는 칸의 강함을 인정했다.

무력의 고하를 떠나, 칸이라는 사람 자체가 무척이나 강한 사람이었다.

‘평범한 인간인데도….’

다르킨 페레야스라는 강력한 흑마법사가 자신을 노리고 있음을 알지만, 오히려 되받아칠 생각을 한 것이나.

아리에스가 교회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말한 게 거짓임을 알고서도, 오히려 그녀를 다독인 면모나.

수도원의 사제가 그를 야만인이라 매도하고, 혐오하는 발언을 쏟아냈음에도 아무렇지 않게 털어내는 모습까지….

아리에스라면 그럴 수 있을까? 그저 그렇게 태어난 것뿐인데,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저 비난하기 위해 쏟아지는 온갖 혐오와 경멸을 감내할 수 있을까?

푸욱─.

아리에스는 푹신한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다.

표정의 변화가 희미하고, 말수도 적지만 그렇다고 감정이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속에 담아두는 생각이 많기에 머리가 복잡했다.

‘모르겠어.’

투쟁을 위해 태어났다는 말이 부족하게 느껴질 만큼 강하지만, 일자무식하다는 소문과 다르게 현명하고 사려 깊은 북방의 전사가 던진 파문은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신의 가르침을 오랫동안 떠받든 늙은 사제가 악에 받쳐 분노를 쏟아내는 모습이 선연했다.

이따금 과격한 신자들이 있다는 것 정도야 아리에스도 잘 알고 있었지만….

‘나도 다르지 않았어.’

육감의 경종, 널브러진 시체, 전리품을 수거하는 모습, 그러한 사정들이야 어쨌건 아리에스가 칸에게 선공을 가한 이유는 결국 칸이 야만인이기 때문이었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야만인은 이단이고, 얼마든지 흑마법사의 주구가 되어 날뛸 수 있다는 편견이 그녀의 등을 떠민 것이었다.

두서없이 떠오르는 상념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가운데.

똑. 똑.

“사제 베델입니다.”

“들어와요.”

어느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아리에스가 늙은 사제를 맞이했다.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혹여나 당신께 큰 해가 미칠까 염려하여 주제넘은 행동을 해버렸으니. 바라신다면 이 자리에서…….”

“괜찮아요.”

“자비에 감사를.”

아까 보여주었던 분노 가득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금세 감정을 추스리고 인자한 노인처럼 푸근하게 웃음 짓는 사제 베델의 모습은 신실한 성직자보단, 노회한 정치꾼에 가까운 인상이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베델은 처음부터 아리에스가 용서할 것을 알고서 극단적인 발언을 꺼낸 것이리라. 아리에스라고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베델의 속내가 그리 깨끗하지 않다는 건 진작 알아챈 뒤였다.

아마 ‘성기사의 호의’를 사서, 변방인 아르곤을 떠나 제국에서 한자리 차지할 속셈이리라.

“왜 오셨죠.”

하나, 같은 맥락으로.

아리에스 또한 순수한 의도로 흑마법사를 토벌하려는 게 아니었다.

이 늙은 사제가 속으로 딴 맘을 품고 그녀를 돕고 있는 걸 뭐라 할 처지가 아닌 것이다. 적어도 그녀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상관없겠지.’

어찌 됐건 이 장원은 교회가 아리에스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마지못해 내어준 선물이고, 베델은 그 선물의 주인되는 입장이니.

굳이 적대할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당신께서 데려온 협력자에게 제 행동에 대한 사죄를 하고 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뭘 하고 있죠.”

“전투로 더러워진 몸을 깨끗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한데……. 아까는 경황이 없어 말씀드리지 못했으나. 장원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묘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베델은 혹여나 누가 들을까 목소리를 낮췄다.

“최근 장원을 찾아오는 외부인들이 늘었사온데. 그 정체가 의심스럽고, 외부인이 증가한 시기가 당신께서 온 이후의 일인지라 묘하다는 말이 많습니다.”

간략한 정황만으로도 충분히 수상한 소문이었기 때문에, 아리에스가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려던 참이었다.

“냄새가 나.”

“예?”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한 베델이 제 몸 이곳저곳에 코를 들이박고 냄새를 확인했다.

그러나 아리에스가 말한 ‘냄새’란 단순히 후각을 통해 맡아지는 악취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에릭센이 흑마법을 사용한 것을 멀찍이서 알아차린 그때처럼.

그녀의 신이 내린 권능이, 사특한 흑마법의 기운을 읽어낸 것이었다.

“이건…….”

에릭센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농밀한 악취.

그것이 의미하는 건 분명했으니.

“습격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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