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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야만전사-10화 (10/132)

#010화. 흑마법사들 (4)

철벅- 철벅-

잘 닦인 가도가 오물로 더럽혀진다. 검붉은 피와 썩은 시체의 살점이 융단처럼 그 위를 뒤덮으며, 죽은 자들의 군세가 진군을 시작한다.

“이만하면 충분하겠군.”

육안으로 모두 담아내기도 힘든 숫자의 폭력. 그 중심에 선 흑마법사들의 숫자는 여섯이었다.

“에릭센. 그 멍청한 새끼가 여기서 뒈졌단 거지. 하여튼… 주제도 모르고 나댈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그래도 멍청해서 써먹기는 좋잖아? 이번처럼.”

“흥. 애초에 그놈이 우리와 같은 항렬의 제자라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들었다.”

고압적인 사내의 말에 다른 흑마법사들이 동의한다는 듯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그래. 사령 계통 주문도 제대로 못 다루는 얼간이였으니까.”

“그 점에서 따지면, 엘리야 그 년이 재능은 썩 괜찮았지. 저 혼자 고고한 척하는 것만 빼면 말이야.”

“흠. 그러고 보니 그년의 표적은 듣질 못했는데. 너희는 알고 있나?”

침묵.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고압적인 태도의 사내는 그럴 거라 예상한 듯 고개를 주억였다.

엘리야는 다른 사형제와는 일절 교류하지 않고, 스승이 내어주는 주문에만 골몰했었으니까.

“아쉽게 됐어. 에릭센처럼 추적용 주문을 걸어둘 걸 그랬나. 이참에 묻어버리는 것도 괜찮았을 텐데.”

“흐흐. 하루 종일 시체들이랑 지내다가 그쪽 취향이라도 생긴 거냐?”

“개소리! 스승께서 그 년을 알게 모르게 총애하던 것 정도는 너희도 알고 있었을 텐데?”

“그만.”

높아지던 언성이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일행의 최선두, 유일하게 금테로 치장된 검은 로브를 두른 중년인이 감정의 터럭조차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곧 있으면 추적 주문이 끊긴 곳이다. 가용 가능한 추적술로 흉수의 흔적을 찾도록.”

중년인의 말이 절대적인 명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만하게 굴던 흑마법사들이 각자 주문을 발동했다.

“흑마법 외의 다른 주문의 흔적은 없습니다.”

“생명의 흔적도 희미합니다. 자리를 떠난 지가 꽤 지난 듯하군요.”

“…고강한 전사가 남긴 흔적이 있습니다. 에릭센의 표적이라 했던 파티의 실력 같지는 않고, 제삼자가 끼어든 눈치입니다.”

“흠.”

쏟아지는 정보를 머릿속에서 정리하면서도 중년인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직접 새긴 추적 주문의 잔향이 몹시 희미했다.

‘주문의 휘발이 지나치게 빠르다. 중간에 끼어든 제삼자가 벌인 충돌의 여파인가. 그렇다면 상당한 강자겠군. 그렇다면 역시…….’

“제1 표적이 그물망에 걸렸다. 아무래도 에릭센이 제대로 대어를 낚은 모양이야.”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다면 놈도 마지막엔 제 쓸모를 다한 셈이군요.”

고압적이었던 사내가 중년인의 앞에서 조심스레 의견을 피력했다. 명백히 상전을 모시는 듯한 태도.

그럴 법도 했다.

평범한 학자처럼 생긴 중년인은, 가장 오랫동안 다르킨을 스승으로 모셔온 것은 물론. 스스로의 성취 또한 제자들 사이에선 손에 꼽는 강자였으니까.

“생명의 흔적이 남긴 방향에 뭐가 있지?”

“작은 장원이 있습니다. 수도원의 늙은 사제가 행정관 노릇을 대신하고 있는데, 여행객들이 자주 하룻밤을 묵고 가는 곳으로 기억합니다.”

수도원, 사제.

상기된 단어들에 흑마법사들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흑마법사에게 만신전 교회란 그만큼 끔찍한 존재였기에.

허나 중년인에겐 아니었다.

“교회의 주구를 노린 순간부터 상정했던 바다. 그리고 크게 의외랄 것도 없지. 사람이 머무는 곳이라면 위신(僞神)의 숭배자가 반드시 섞이기 마련이니까.”

다르킨 페레야스의 제자가 된 이후부터.

아니, 훨씬 이전부터 흑마법사로 활동했던 중년인은 안다.

교회의 힘은 분명 막강하지만, 절대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무엇보다 스승의 비전인 ‘육체 강탈’이 있는 이상, 놈들에게 붙잡힐 일 따위는 없다는 것을.

“고작해야 위신의 개새끼를 붙잡으면 되는 간단한 임무다. 이만한 전력이라면 실패하는 게 더 어렵지.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 말에 흑마법사들이 동조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생명력을 추적하는 주문을 펼쳐 방금까지 이 자리에 있었던 인간을 뒤쫓았고, 그 흔적이 장원의 안쪽에서 끊겼음을 확인했다.

크어어──.

우우우…….

흑마법사에 의해 부활한 망자들이 울부짖는다. 장원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생명력을 갈취할 생각에 기뻐서 내지르는 비명이다.

인간의 모습을 한 시체와 온갖 이형의 마물들이 전신에서 흑마력을 피워올리며 전진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싸움과 연이 없는 일반인이라면 당장 졸도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망자다─! 더러운 악마의 하수인들이 나타났다!”

“횃불을 올려! 만신전의 주께서 굽어볼 수 있도록 불을 피워올려라!”

“베델 사제께서 축성한 나뭇가지를 모두 가져와! 멀리서 요격한다!”

그러나 장원 내부의 반응은 흑마법사들의 예상을 한참 웃돌았다.

당황하기는커녕,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전투를 준비한다. 그 모습은 마치 숙련된 성전사들을 보는 듯했다.

“쯧…. 수도원 하나 있는 정도가 아니었군. 광신도들로 꽉 차 있다니.”

중년인이 혀를 찼다.

장원의 전력은 분명 대단치 않다. 그래 봤자 촌민. 마나로 육체를 갈고 닦는 전사들이나, 주문을 다루는 마법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마음가짐이 다르다.

노련한 용병조차 먼저 도망칠 궁리부터 할 법한 상황이건만, 두려움에 주저앉거나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우는 광신도의 자세는 그 자체로 훌륭한 무기였다.

‘흐. 신앙심이라 이거냐.’

중년인은 저 어리석은 광신도들을 보면서 냉소를 흘렸다.

“흑마력으로 언데드들을 미리 강화해라. 축성이 가능한 사제가 함께 있는 듯하니.”

그의 지시에 흑마법사들이 흑마력을 피워올렸다.

아리에스가 가까이 있었다면 악취에 코를 틀어막았을 정도로 농밀한 흑마력.

그를 지시한 중년인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가 사역하는 단 하나의 하수인이 주인의 부름에 응하였다.

“오오…. 저것이 바로!”

“성기사를 타락시켜 만든 암흑기사. 역시, 평범한 암흑기사와는 궤를 달리하는군!”

중년인의 그림자가 아지랑이처럼 물결치고, 곧이어 형체를 갖춘다.

평범한 인간의 신장을 아득히 뛰어넘는 장신. 그 위를 뒤덮은 암흑갑주와 흑마력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대검. 그리고 그림자가 만들어낸 망토.

고위계에 닿지 못한 사령 계통의 흑마법사가 사역할 수 있는 하수인들 중에서도 수위에 꼽는 괴물, 암흑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너는 적을 유린하라.”

하수인에게 명령을 내린 중년인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맺힌다.

성기사가 그들을 추적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역으로 사냥에 나설 수 있었던 건 모두 이 암흑기사의 존재 덕분이었으니까.

“너희도 슬슬 시작해라.”

“예.”

흑마력으로 되살아난 시체들의 진군은 지극히 조용했다. 그러나 텅 빈 눈구멍에선 생명에 대한 증오가 불타올랐다.

그렇게, 죽음을 모르는 군세가 장원을 넓게 둘러싸는 사이.

“화살을 쏴라──!”

사제의 축복을 머금은 화살이 포물선을 그리며 언데드의 군세를 향해 내리꽂혔다.

죽은 시체를 되살린 것에 불과한 언데드에게 고통을 느낄 감각이 존재할 리가 없건만, 화살이 몸에 박힐 때마다 언데드들이 마구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숫자가 많군요. 수도원의 사제가 할 일이 없었나 봅니다.”

“그래 봤자 급조한 물건이지!”

그때 고압적인 태도의 사내가 자신만만하게 앞으로 나섰다.

“오랜 시간 축성한 기물이 아닌 이상에야. 상처를 입히는 건 가능해도, 완전히 무력화하는 건 불가능─!”

사내를 중심으로 흑마력이 들불처럼 일어나 번진다.

언데드 군세의 가장 앞쪽에 자리한 시체들이 내지르던 비명이 뚝- 끊겼고, 오히려 이전보다 몸집을 불렸다.

‘흠. 역시 나쁘지 않군.’

흑마법사 무리를 이끌던 중년인이 속으로 감탄했다.

행실이야 다소 경박하고 오만할지언정, 다수의 언데드를 동시에 다루는 솜씨만큼은 그 오만함에 걸맞은 수준이었다.

“크하하하하! 쓸어버려!”

오만한 사내의 개입으로, 사제가 축성한 화살의 비는 순식간에 저지력을 잃었다.

그렇게 저지선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광신도들의 창칼은 의지로 가득 찼을지언정, 위력은 평범한 촌민의 그것에 불과했기에.

‘이대로라면 시간 문제군.’

광신도들이 성전을 부르짖으며, 망자들의 품에 목숨을 초개처럼 내버린다.

그러나 의미 없는 죽음일 뿐이다.

아무리 창을 내지르고, 둔기를 휘둘러도 후방에 위치한 흑마법사를 죽이지 않으면 이미 한 번 죽었던 망자의 군세는 스러지지 않는다.

“사, 살아난다…!”

그때부터 몇 광신도들의 눈에 광기가 아닌 감정이 내비치기 시작했다.

공포. 고압적인 태도의 사내는 광소하며 흑마법을 더욱 끌어올렸다. 마치 악단을 지휘하는 지휘자처럼.

그때였다.

촤아────────!

가장 앞쪽에서 교회의 신자들을 몰아치던 언데드들을 가로지르는 순백의 광채가 전장을 관통했다.

시체의 파도가 일순간 밀려나고, 소멸한다. 그 압도적인 광경에 흑마법사들이 멈칫- 몸을 떤다. 저 빛이 무엇인지. 그들 흑마법사가 모를 수가 없기 때문에.

“당신의 검에 찬란한 빛을.”

청아한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를 파고든다.

여리여리한 몸. 그 육체를 감싼 신성갑주. 성검이라 불려도 모자람이 없을 광채를 내뿜는 순백의 검까지.

“부정한 것들을 불사르는 신성한 불꽃을.”

어둠의 아래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은 백금발이 성기사, 아리에스의 걸음을 따라 춤을 춘다.

만신전을 숭배하는 신도들은 환희에 몸을 떨었고, 흑마법사들은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이런-. 보통 사냥개가 아니었나…….”

유일하게. 성기사를 사냥한 경험이 있는 중년인만이 평정을 잃지 않았다.

‘저만큼 강력한 축복이 깃든 육체를 타락시킨다면….’

“애덤. 전선을 넓게 퍼뜨려라. 상대는 고작 하나다. 그에 더해져 봐야 사제 하나겠지. 이 수를 전부 감당할 수는 없어.”

“예, 예!”

오히려 차분하게 상대의 약점을 파고든다.

“전황을 뒤집기 위해 저 성기사는 일점돌파를 노릴 터. 내 암흑기사가 성기사의 발을 묶어놓는 동안, 너희는 최대한 많은 숫자를 죽이는 데에 집중해라. 저년이 온전히 전투에 집중할 수 없도록 말이다.”

성기사는 분명 강하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명확한 약점을 지닌 존재이기도 하다.

저 고결한 존재가 과연 눈앞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신자들을 내버려둘 수 있을까?

아니, 절대 그렇지 않다.

고작 복수 따위를 위해 변방 왕국을 방황하는 반푼이 성기사가, 그렇게 냉정한 판단을 내리는 건 불가능했다.

신성한 빛을 전신에 갑옷처럼 두른 성기사와 흑마력으로 빚어진 암흑기사가 충돌한다.

쾅──! 까드드득!

과연 흑마력의 천적이라 할 수 있는 성기사답게 시작부터 암흑기사가 위기에 처한 듯했다. 하지만 중년인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웃었다.

‘과연 대단하군. 하지만….’

제 주인으로부터 흑마력을 공급받는 암흑기사도 쉽게 당해주진 않았다. 오히려 이따금 반격에 나서면서 아리에스를 밀어내기까지 했다.

“끄아아악! 살려줘!”

“주, 죽지 않잖아! 이런 걸 어떻게 상대하라고!”

신앙은 눈앞의 날붙이보다 멀다. 유일한 희망이라 믿었던 성기사가 암흑기사에게 발이 묶이자, 광신의 껍데기 속 숨겨두었던 공포가 빠르게 퍼져나간다.

그럴수록 어린 성기사의 검 끝은 점차 본연의 날카로움을 잃기 시작한다.

그녀의 뒤쪽에서 들려오는 비명이, 검 끝을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보기 좋은 광경이야….”

쾌락에 젖은 중년인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수도원에 상주하고 있어야 할 사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성기사는 뒤쪽의 안위를 신경 쓰느라 무뎌졌으니.

‘더 이상의 변수는 없다.’

그렇게 확신하는 순간.

쿠우웅──.

‘뭐지……?’

원인을 알 수 없는 둔중한 진동이 땅을 뒤흔들었다. 그 시작점이 불타오르는 장원의 안쪽이었음에, 중년인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리고.

전장의 하늘을 무언가가 관통했다.

살아있는 생명을 유린하는 언데드의 군세와 성기사와 암흑기사가 충돌하는 지점을 지나, 흑마법사들이 있는 후방까지.

“투석이다─!”

커다란 회색의 덩어리를 스치듯 본 누군가가 외쳤다.

그러나 미처 방비할 새가 없었다.

빠른 속도로 날아든 물체가 흑마법사들의 한가운데로 거침없이 떨어졌다.

쿵──!

피가 튄다.

누군가는 다급하게 몸을 굴렀고, 누군가는 제 몸을 보호할 주문을 다급하게 펼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이나 되는 흑마법사가 목숨을 잃었다.

그 난리통에서도 완벽하게 충격에서 몸을 보호한 중년인은, 그들을 타격한 것이 바위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방금까지 욕탕에라도 들어가 있었던 건지. 물기조차 제대로 닦지 못하고, 속옷만 겨우 걸친 잿빛 피부의 거인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괴, 괴물……!”

누군가 공포에 질려 중얼거린 소리가 헛소리처럼 들리지 않았다.

같은 인간이라 생각하기 힘든, 오히려 흑마법사의 신체 개조로 만들어진 생명체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육체가 뜨거운 열기를 후욱- 후욱- 사방으로 내뿜는다.

다소 거리가 벌어졌음에도 흑마법사들은 열기 탓에 눈을 뜨기가 버거울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나타난 거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꿀꺽…. 긴장한 누군가가 침을 삼켰다. 그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려 퍼져서 화들짝 입을 틀어막았다.

“오랜만에 제대로 씻나 했더니. 이 엿 같은 새끼들이-.”

음성에서 여실히 전해지는 살기에 눈앞이 아찔했다. 마치 거대한 늑대가 가까이서 울부짖는 것만 같았다.

그 앞에서 흑마법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같은 의문을 떠올렸다.

‘저 괴물은 누구길래. 저런 살기를 우리에게 내비치는 거지?’

그 이유는 무척 간단했다.

게임도 아니고, 현실에서 고인물 룩으로 사냥에 나서게 된 야만전사의 눈두덩이가 분노로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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