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야만전사-11화 (11/132)

#011. 흑마법사들 (5)

아, 이게 인생이지. 커다란 오크통에 끓인 물을 옮겨 담아 만든 간이 욕조에 몸을 담근 칸의 얼굴이 풀어졌다.

“흐으으으-.”

편안하게 등을 기대자 오크통이 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삐그덕- 비명을 지른다.

조금만 더 버텨라. 이 녀석아. 늙다리의 무게나 버틸 줄 알았던 낡은 오크통의 호소에도, 칸은 무자비하게 몸을 기댔다.

아무리 돈이 있어도 이 엿 같은 중세에서 목욕할 기회는 흔치 않았다. 뜨겁게 덥힌 물을 담은 욕조와 향비누는 귀족이 아니라면 누리기 힘든 것들이거니와-.

‘애초에 왜 씻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면, 마법이 발전한 미들랜드 쪽이 위생 면에서는 지구의 중세보다 사정이 괜찮았다.

“흐으. 좋다-.”

평범한 사람은 진작 화상을 입고도 남았을 뜨거운 물도, 야만인에게는 알맞게 덥혀진 온수에 불과했다.

그렇게 한참을 썩은 시체들과 드잡이질 하면서 덕지덕지 묻은 오물을 깨끗하게 씻어내고, 여유를 만끽하던 칸의 얼굴이 일그러진 것은 갑자기 들려온 비명 탓이었다.

“……!”

“……!”

거리가 멀어 말뜻까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다급함이 묻어나는 높다란 고성이 오가고 있다는 것만은 이해했다.

일그러진 얼굴의 칸이 몸을 벌떡- 일으키곤 한옆에 벗어둔 속옷을 대충 걸쳤다.

‘시발, 하필이면….’

언제나 휴대하고 다니는 도끼를 손에 쥐고서 수도원의 후원을 벗어난다. 그러자 흡사 전쟁이 난 듯한 장원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숫자가 너무 많은데…. 흑마법사가 대체 몇이나 몰려온 거지? 아니, 애초에 여기까지 어떻게 알고 온 거야?’

꼬리가 붙었다면 진즉에 알아차렸을 터. 그렇다면 어떠한 주문의 작용이라 보는 것이 옳다. 그리고 그 목표물은 칸이 아니라….

촤아────!

그때 밤하늘을 밝히는 한줄기의 광채가 머릿속의 고민을 단칼에 베어냈다.

‘그래. 고민은 나중으로 미뤄둬도 충분하지.’

전황은 척 보기에도 몹시 불리하다. 장원의 주민들이 생각보다 열성으로 항전에 나서고 있긴 해도, 상대가 상대인지라 유의미한 저항이라 볼 수는 없다.

고작 성기사 하나로 넓게 펼쳐진 전선을 틀어막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아리에스는 발이 묶였고, 희생자는 계속 늘어날 테지.’

결국 전황을 뒤집으려면 최후방에서 하수인을 조종하는 흑마법사를 족쳐야 한다.

다행스러운 점은, 흑마법사들이 후방에서의 기습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처럼 앞쪽에만 전력을 배치했다는 것이었다.

하기야, 저 정도 숫자라면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방심했군.’

꽈드드득.

몸의 중심을 낮춘 칸이 다리를 굽혔다. 동시에 웬만한 사람 머리통보다 굵직한 다리가 더욱 굵어지고-.

[도약 (C) - 97.1%]

─C등급 효과, 도움닫기 :: 크게 진각을 밟으며 점프할 경우, 근력에 따라 효과가 상승한다.

─D등급 효과, 안전한 착지 :: 낙사 데미지가 대폭 감소한다.

쿵!

둔중한 진각, 그리고 그다음.

칸의 육중한 몸이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포탄처럼 쏘아진 몸뚱어리가 전장의 하늘을 격하여 흑마법사들이 위치한 후방까지 도달하기까지는, 눈 깜빡할 사이면 충분했다.

그렇게 땅에 발이 닿기 직전.

허공에서 허리를 튕긴 칸의 몸이 한 바퀴를 빙그르- 회전한다.

콰드드득!

도약으로 더해진 속도와 낙하하며 더해진 힘을 회전에 모조리 쏟아부어 도끼를 휘두르자,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흑마법사 둘의 몸이 말 그대로 갈려버렸다.

“오랜만에 제대로 씻나 했더니. 이 엿 같은 새끼들이-.”

“괴, 괴물……!”

적당히 할 생각은 없다. 물이 식기 전에 전투를 끝내야 한 번 더 몸을 씻지 않겠는가.

“막아──!”

교탁에 있어야 할 법한 인상의 중년인이 칸에게 삿대질을 하며 발작을 일으켰다.

아, PTSD오게 생기는 면상이네. 학창 시절 그를 끈질기게 갈궜던 선생의 얼굴을 떠올린 칸이 얼굴을 구기며 발을 굴렀다.

“어째서……!”

하필이면 가장 먼저 노려진 것이 억울했는지, 분기를 터뜨리는 중년인을 보며 칸이 씨익 웃었다. 어째서는 뭐가 어째서야.

“얼굴이 마음에 안 들어.”

제법 빠른 속도로 방벽을 전개한 중년인이 재차 다른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쩡─!

그러나 미처 주문을 완성하기도 전에 칸의 도끼가 단숨에 흑마력 방벽을 깨부수었다. 다급해진 중년인은 주문의 발동을 중단하고선 손바닥을 활짝 펴 보였다.

“Scutum, refléxĭo-!”

‘시동어!’

칸과 중년인의 사이를 격리하듯 불투명한 방패가 허공에 떠올랐다.

칸이 다급하게 도끼를 회수하려 했으나, 그러기엔 이미 늦었음을 깨달은 칸이 충격에 대비했다.

쿵───!

끔찍한 충격이 칸의 전신을 두들겼다. 내장이 진탕되고, 손아귀의 힘이 일순간 풀릴 정도의 충격이었다. 염병- 이건 좀 아픈데!

“뭣들 하냐! 몰아쳐!”

사령 계통을 전문으로 하는 흑마법사라고 해서 다른 계통에 완전히 문외한인 것은 아니었다.

쇠약, 탈진, 마비, 감각의 박탈……. 당장 육안으로 확인해도 두 손을 넘는 숫자의 저주 계통 주문이 형편없이 나가떨어진 칸을 향해 쇄도했다.

끊임없이 중첩되는 저주는 고작 단 한 사람을 향한 것이라기엔 과했다.

그러나 정작 주문을 마구잡이로 쏘아대는 흑마법사들에겐 그러한 자각이 없었다.

너무나 강렬했던 첫 등장. 그 순간 새겨진 공포가 마법사의 냉철한 이성을 단번에 앗아갔다.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

“시체가 남지 않아도 좋아! 어떻게든 죽여버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공격을 명령한 중년인의 얼굴은 좀처럼 펴지질 않았다. 오히려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티팩트가…!’

그가 펼친 불투명한 방패는 마법사의 주문이 각인된 물건이 아니라, 고대의 기술이 담긴 진짜 아티팩트였다.

괴물을 마주했을 때 확실하게 목숨을 구하면서 반격의 기회를 만들어주는 귀물이자, 평범한 방법으로는 훼손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고대 유물.

‘고작 일격으로?!’

그런 아티팩트가 고작 손도끼질 한 번을 버티지 못하고 과부하 상태에 접어들었으니…. 만약 어쭙잖게 막으려 들었다면 몸이 통째로 터져버렸을 게 분명했다.

충격을 반사하는 아티팩트의 효과 때문에 상대도 멀쩡하진 않겠으나-.

“뼈 아픈 손실이군…….”

아티팩트의 수명이 극단적으로 줄어들었을 걸 생각하면 좀처럼 웃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성기사와 저 야만인. 둘 다 언데드로 삼아야 수지가 맞겠지….

“절대 거리를 내주지 마라. 스치기만 해도 몸뚱어리가 터져버릴 테니까. 성기사가 이쪽에 닿기 전에 확실하게 사냥한다.”

흑마력으로 빚어진 거대한 지옥뱀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몸을 일으키고 있는 칸을 향해 달려든다.

저주의 효과를 배가하는 흑마법. ‘지옥뱀의 송곳니’를 발동한 것이었다.

“주여 광명을──!”

그러나 이 전장에서 조심해야 할 건 야만인만이 아니었음을, 흑마법사들은 뒤늦게 상기해야만 했다.

백금발의 성기사를 중심으로 넓게 퍼뜨려진 성스러운 파동이 흑마법의 흐름을 일순간 억눌렀다. 사마(邪魔)의 기운을 억제하는 ‘광휘의 외침’이다.

아주 잠깐이지만 언데드들의 진격이 멈춘다. 그러나 아리에스가 노린 것은 언데드 따위가 아니었으니.

“씹새들아-!”

칸을 속박하는 저주를 잠시간 무력화하는 것.

그게 그녀의 진짜 목적이었고, 아티팩트로 반사된 충격과 저주의 압박을 모조리 풀어낸 칸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마구 날뛰었다.

도약 스킬이 아니라 순수한 각력으로 뛰어오른 칸이, 끈질기게 저주를 쏘아내던 흑마법사에게 달려들었다.

이어 한 손의 도끼로 가슴을 쩍 갈라버리고 다른 한 손의 주먹으로는 골통을 깨부쉈다.

콰득. 뻥!

경지에 오른 전사에겐 언데드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령 계통의 흑마법사 따위, 패기 좋은 샌드백에 불과했다.

처음엔 일곱이었던 흑마법사의 숫자가 순식간에 반절 아래로 줄어들었다. 그것도 단 한 명의 야만인의 손에.

그 결과.

“언데드들이 쓰러진다!”

“조금만 더 버텨! 죽지만 않으면 된다!”

가장 까다로운 암흑기사는 아리에스에게 발이 묶였고, 흑마법사가 있는 후방은 한 명의 전사에게 속수무책으로 쓸려나갔으니.

그저 다가오는 죽음을 늦추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버티면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사람들에게 깃들기 시작했다.

“제기랄…!”

흑마법사들을 이끌던 중년인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분명 여유롭게 이길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상대의 전력으로는 유의미한 저항조차 불가능할 테니, 일방적인 학살극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이건 도대체 뭔가.

“살려주십시오! 데빈 님-!”

또 한 명의 흑마법사가 잿빛 야만인의 손에 머리가 터져 목숨을 잃었다. 이로써 살아남은 건 고압적인 태도의 사내와 중년인 단둘.

절망적이다.

마법사의 냉철한 사고가 도출해낸 결과 모두, 그의 죽음을 알렸다.

‘도망칠 수 있나?’

누군가는 스승에게 성기사를 돕는 야만인의 존재를 알려야 하고,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 외에 적임자가 없을 게 분명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선 누군가는 희생해야 할 터….

“데빈 님! 후퇴해야 합니다……! 컥!”

“어딜.”

다급하게 후퇴를 외치던 사내의 정수리에 자라난 도끼 손잡이를 거칠게 뽑아낸 잿빛의 야만인이 이가 다 보이도록 환하게 웃었다.

“이제 너만 남았다. 싸가지.”

“강하군. 믿기 힘들 정도로 강해. 왕국에서 활동하는 야만전사는 많지 않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건 셋밖에 없지.”

“뭔 개소리냐.”

중년의 흑마법사는 시큰둥한 반응에도 개의치 않았다.

어느새 암흑기사를 무력화한 성기사가 야만인의 곁에 나란히 섰음에도, 그는 넉살 좋게 웃으며 야만인의 무위를 칭찬했다.

“하나는 흑익공(公)이 아낀다는 북방의 전사. 또 하나는 오우거와 정면에서 맞붙었다는 동부의 오우거 슬레이어. 북부의 참수자…. 하지만 흑익공이 저가 아끼는 대전사를 위신의 주구에게 내어줬을 리가 없고, 소문의 참수자라면 대화가 안 통했을 테니, 그쪽이 오우거 슬레이어겠지?”

“뭐 어쩌라고?”

“엘리야는 죽었나?”

“진작에.”

“그래. 그렇군. 안타까운 일이야. 재능이 넘치는 아이였건만.”

말과는 달리 중년인의 얼굴은 지독히 차가웠다. 그저 시간을 끌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우릴 추격하던 위신의 주구와 오우거 슬레이어가 힘을 합쳤으니. 어쩔 도리가 없군. 이번에는 내가 졌다.”

“이번에는?”

도끼를 어깨에 척- 올려놓은 칸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다음이 있을 것 같나?”

“물론…….”

쒜에에엑──!

칸의 손을 벗어난 손도끼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당연히 있지.]

마치 땅으로 꺼진 것처럼 자취를 감춰버린 중년인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웅웅- 울렸다. 그 기이한 현상이 어떠한 주문에 의한 현상임을, 모지리라도 알 수밖에 없었다.

‘어둠 잠영인가. 또 귀찮은 주문을…….’

헛소리를 내뱉는 동안에 부린 수작질이 바로 이것이겠지. 칸은 아무리 감각을 집중해도 방향을 추정할 수 없음에 고개를 설레 저었다.

‘어둠 잠영’은 흑마법사의 생존기 중에서 까다롭기론 손에 꼽는 녀석인지라, 같은 주문쟁이가 아니고선 파훼가 힘들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흑마법사의 음성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꽤 손실이 크긴 했으나. 야만인, 너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면 오히려 더 큰 손해를 보게 되었겠지.]

죽은 흑마법사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킨다.

온전한 시체조차 남기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나, 그나마 형체라도 남은 부분들이 한 곳에 뭉치며 하나의 형태를 이루었다.

텅 빈 눈두덩이에 암녹색 귀화를 불태우는, 본디 영생을 추구한 마법사가 영락하여 만들어지는 존재.

[급조한 녀석이라 영 시원찮은 수준이긴 해도. 발을 묶는 정도야 가능하겠지. 아무렴, 흑마법사의 시체로 빚은 리치인데.]

중년인은 제 사제들의 시체를 이용해 리치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렇게 되살아난 리치가 또다시 언데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럼. 다음에는 스승님과 함께 널 찾아가마. 야만인.]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전장을 벗어나 버린 중년인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쫓아야 해.”

다른 녀석들 보다 많은 정보를 쥐고 있을 흑마법사가 도주해버렸다.

그를 용납할 수 없었던 걸까. 아리에스는 금방이라도 뛰쳐나가 흑마법사를 추적할 기세였다.

“가지 마시오. 우선 리치부터 족쳐야 하지 않겠소?”

척- 하고 내밀어진 두툼한 손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추적. 칸은 리치.”

내가 쫓을 테니, 너는 리치를 사냥하란 말. 합당한 판단이다. 아리에스는 흑마법의 잔향을 느끼는 게 가능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은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감정적이군. 아까 암흑기사와 싸울 때부터 그래 보이긴 했는데…….’

그 중년인과 얽힌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를 쉬이 보내줄 순 없었다.

“내 말 들으시오. 다르킨을 잡고 싶다면, 놈을 잡는 건 나중으로 미루는 편이 좋을 테니.”

“…?”

단호한 태도에 아리에스가 고개를 갸웃거렸고, 칸은 대답 대신에 그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 두고 보면 알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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