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화. 흑마법사들 (6)
흑마법사가 싸놓고 간 똥. 리치를 마저 처리한 칸이 목욕하기 전보다 더러워진 몸을 보곤 인상을 썼다.
그를 따라 일그러진 흉터 탓에 우는 아이를 기절시킬 만큼 흉악한 얼굴이 되었으나, 아리에스는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 칸의 정강이를 후려 까버렸다.
“왜 그러시오. 쬐끄만 양반.”
툭. 툭. 어딘가 정강이를 차는 발끝에 힘이 더해진 기분이었지만, 워낙 강골이었기에 아프다 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린 조카가 건드는 느낌이라고 할까.
“…설명.”
“아. 그 잡놈을 왜 놔줬냐, 이 말이군.”
아리에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냄새가 멀어지고 있어. 놓칠 거야.”
“흑마력이 무한한 것도 아니고, 어차피 곧 있으면 제풀에 지쳐서 나가떨어질 거요. 도주 속도도 느려질 테지. 급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오.”
그 설명에도 아리에스는 여전히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일부러 놓아줬다는 것까지는 이해했지만, 지금이라도 당장 냄새를 쫓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한 의문을 알아차린 듯. 칸이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혼자 남은 녀석이 하기는 뭘 하겠소. 보아하니 암흑기사 하나 믿고 설치는 놈 같던데, 그거야 당신이 지져서 없애버렸고…. 어떻게든 도망쳐서 제 스승한테 일러바치기나 하겠지. 우린 천천히 놈을 따라가면 될 뿐이오.”
하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좀 있지.칸은 들릴락 말락 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아리에스 또한 갸웃갸웃하면서도 총총- 그 뒤를 따랐고, 그렇게 둘이 도착한 곳은 수도원의 뒤뜰이었다.
“여기는 왜.”
“왜긴. 설마 나보고 온종일 벌거벗고 다니란 거요?”
“아.”
칸은 뒤뜰의 빨랫줄에서 장비를 주섬주섬 챙겨서 입었다.
‘리자드맨 정예 전사의 갈퀴손’, ‘바닥을 기는 시궁쥐의 가죽 장화’, ‘오우거의 낭심가리개’, ‘설산백랑의 털갑옷’, ‘전령의 팔목 보호대’….
하나 같이 스탯을 올려주는 장비들. 칸은 스탯이 상승해 달라진 몸 상태를 간단히 점검하곤 만족스레 웃었다. 이제야 맘이 좀 편하네.
“다시 따라오지. 우리 신실한 쥐새끼도 만나봐야겠으니까.”
“쥐?”
“당신도 잘 아는 쥐새끼요. 늙고, 비겁한 쥐새끼지.”
거기까지 설명한 칸은 뒤뜰을 지나, 수도원의 뒷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어둠이 내려앉은 낡은 수도원 내부는 어딘가 을씨년스러워 귀신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모양새였지만, 역으로 때려잡으면 잡았지. 둘 다 귀신 따위를 두려워하진 않았다.
“수도원장의 방이 어디오.”
“가장 안쪽.”
“그렇군.”
예배실에서 안쪽으로 들어가자 제법 널찍한 복도가 나왔다.
수도원에서 성서를 공부하는 아이들이 지내는 방과 다른 업무를 보는 집무실, 비품을 모아두는 창고를 연이어 지나친 칸의 발걸음이 가장 안쪽에 위치한 문 앞에서 멈췄다.
쾅!
“히이익.”
문이 열림과 동시에 안쪽에서 억눌린 비명이 샜다.
아리에스는 그것이 늙은 사제 베델의 것임을 알아차렸다. 거기에 칸이 말한 ‘신실한 쥐새끼’의 정체가 베델이라는 것도….
“그럴 줄 알았지. 초개처럼 목숨을 바치긴 새끼가-.”
“흐, 흐윽. 너… 야만인?”
“그래. 야만인이다. 쥐새끼.”
“끄어어억!”
칸이 한 손으로 늙은 사제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억센 손아귀 힘에 공포를 느낀 베델이 벗어나려 발버둥 쳤으나, 땅에 발이 닿지 않아 무용한 몸부림이었다.
“쬐끄만 양반. 대충 보아하니 예전부터 다르킨 페레야스를 쫓아온 것 같던데. 그 과정에서 놈들에게 신분을 노출한 적이 있나?”
“…아니.”
“이상하군. 도망친 그 새끼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성기사가 이 장원에 있다는 걸 알고 온 눈치였소. 그만한 전력이었고.”
그 말이 의미하는 건 분명했다. 배신. 아리에스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
“아, 아니야…!”
“아닐 수도 있겠지.”
다급하게 제 결백을 주장하는 베델.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칸의 눈빛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장원에 성기사가 있다는 정보에 확신을 얻기 위해 에릭센을 이용했을 터. 그리고 놈이 죽으면서 확신을 얻은 그것들이 습격에 나선 것이고…. 즉. 중간에 쬐끄만 양반의 신분이 드러났다는 얘긴데. 그쪽이 실수했거나 장원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거나. 둘 중 하나 아니겠소?”
켁켁- 숨을 토하는 쥐새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리에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아마도 내 실수.”
“아. 그러쇼.”
범인의 자백이 나왔군. 칸이 우스갯소리처럼 내뱉으며 베델의 목을 놓아주었다.
“그러니까. 난 아니라고 했을 텐데…!”
억울하게 목이 졸린 베델이 분노를 쏟아냈으나, 칸은 시큰둥한 태도로 쏘아붙였다.
“뭐, 아니든 말든. 남들 다 뒈져라 싸우는 동안 숨어있었으면 처맞아도 할 말 없지 않나?”
“……그건.”
“그쪽이 여기 쬐끄만 양반에게 무엇을 바라는지는 내 알 바가 아니지만, 그딴 식이어서야 평생 무리겠군. 미운털이 콱 박혔을 테니.”
늙은 사제의 얼굴이 확연하게 일그러졌다. 분노와 두려움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신앙심 깊은 사제라고는 도저히 하기 힘든 얼굴.
“아, 아니. 아닙니다! 주의 곁을 약속받은 분이시여…!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날을 거르지 않고 축성을 해 방비를 단단히 했고, 신자들의 신앙심을 무장시켰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네 공적이 돋보일 거라 생각했으니까.”
“뭣…!”
도저히 야만인의 그것이라 볼 수 없는 통찰력에 베델은 크게 당황한 눈치였다. 칸은 코웃음을 치며 베델을 연이어 쏘아붙였다.
“정말 쬐끄만 양반의 도움이 되고 싶은 게 맞나? 그게 조금 의문이군.”
“그것은 진실이다…! 내 신앙을 모욕하지 마라! 야만인!”
“위험할 땐 사라지고, 평화로울 때만 충만해지는 신앙심이라. 뷔페도 아니고… 제멋대로 골라잡는군.”
베델이 모욕감에 얼굴을 붉혔다. 뷔페가 무슨 의미인지는 알아듣지 못했어도, 저것이 그를 향한 모욕이라는 건 확실했기 때문에.
‘이 정도면 충분하려나.’
그에 칸은 적당히 당근을 내밀 타이밍이라 생각하고, 슬쩍 웃었다.
“그쪽이 바라는 걸 이루고 싶으면, 쬐끄만 양반이 인정할 만큼 도움이 되어야지. 그렇지 않나?”
“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늙은 사제의 확언에 칸의 웃음이 짙어진다. 성기사의 앞에서 맹세한 말이니, 절대 거절은 못 할 터.
칸은 베델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렸고, 어쩔 수 없이 예스맨이 되어야 했던 베델은 모조리 수락했다.
“잘 지켜질 거라 믿겠소. 사제 베델.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면 어찌 될지는… 상상에 맡기지.”
얼굴이 핼쑥해진 베델을 한 번 쏘아붙인 칸이 수도원 바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주문쟁이의 허약한 몸뚱어리라면, 슬슬 지쳤을 거라 생각하며.
*
*
*
“허억. 허억. 허억!”
데빈은 그저 달렸다. 어둠 속에 몸을 감춰 이동하는 주문을 유지할 흑마력조차 바닥난 지금으로선, 유일한 이동 수단이 두 발뿐이었기에.
어서 빨리 알려야 해. 데빈은 잿빛의 야만인에 대해서 떠올렸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몸 위로 가득한 흉터, 남들의 두 배는 될 법한 덩치와 흉악한 얼굴, 무식하기 그지없는 전투법까지.
‘정보가 틀렸어. 놈은 괴물이다.’
어린 오우거를 운 좋게 사냥한 야만전사.
다르킨이 파악한 놈의 정보는 딱 그 정도였고, 실제와 괴리감이 좀 있긴 해도 큰 차이가 없을 거라는 것엔 데빈도 동의했었다.
그게 아니라면 엘리야가 혼자 사냥에 나섰을 일도 없었을 터.
그러나 놈은 어지간한 기사쯤은 간단히 고꾸라뜨릴 수 있는 괴물이었다.
“젠장. 젠장…!”
스승, 다르킨 페레야스는 무능한 제자를 용서치 않는 냉혹한 이다.
오랫동안 그를 모셨던 데빈이기에, 이대로 돌아가 봐야 스승의 손에 죽을 뿐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았다.
한참을 멈추지 않고 달리던 데빈의 발이 멈췄다.
그 즉시 아주 조금 남은 흑마력을 바닥까지 긁어내 생명 추적 주문으로 주변을 수색했다.
반응이 없다. 그제야 데빈은 숨을 몰아쉬었고, 품에서 조그마한 벌레를 꺼냈다.
검은색 몸체에 붉은색 무늬. 열 쌍이 넘는 촉수 같은 다리.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조형된 생명체라 해도 무방한 생김새다.
“흐윽. 흐읍.”
데빈은 눈을 질끈 감고서 그 벌레 시체를 오른쪽 귀에 쑤셔 넣었다.
그러자 시체라 생각한 검붉은 애벌레가 잠에서 깨어나 살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제 살을 파먹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와중에 데빈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고, 머지않아 살 파먹는 소리가 멎었다.
“스, 스승님. 접니다. 데빈입니다! 들리십니까?!”
-무슨 일이냐.
“실패했습니다…! 성기사의 곁에 괴물이 있습니다! 놈, 놈이 혼자서 사제들을 전부 죽였단 말입니다!”
-괴물? 자세히 말해보아라.
데빈은 최대한 빠르고, 다급하게 저간의 사정을 스승에게 토해냈다.
그래야만 ‘너무나 의외의 변수 탓에 어쩔 수 없이 실패했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흑마법사도 결국엔 마법사였다.
두려움과 공포를 입으로 쏟아내면서도, 데빈의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마법사들의 이성은 그토록 냉정했다.
“…제 실력으로는 놈을 막는 게 불가능했습니다. 도끼질로 아티팩트를 망가뜨리는 괴물입니다. 적어도 스승께서 도와주시거나, 키루츠에 남은 전력을!”
-그만.
“스승님!”
-그만하라고 했거늘.
머릿속에서 울리는 음성이 싸늘하다. 귓속의 살점을 파먹어 발성 기관을 만든 생명체의 목소리는 본래 스승의 것과 많이 다르지만, 데빈은 스승이 화를 내고 있음을 알았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스승의 의견을 물어야 하는 순간인 것이다.
“그, 그러면 저는 어찌해야….”
-너도 알다시피 그것의 완성이 멀지 않았다. 그러니 너는 몸을 숨기고 있어라. 예의 성기사와 야만인에 대해서는 추후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하마.
“……예. 알겠습니다.”
살았다. 살아남았다.
데빈은 겉으로 티 나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남은 일은 새로운 육체를 강탈해서, 신분을 바꾸기만 하면 된다.
‘아르곤을 벗어날까? 그래. 벗어나자. 이대로 베이츠까지 가서 스승의 부름을 기다리는 거야.’
역할을 마친 전음귀충의 시체를 귀에서 빼낸 데빈이 몸을 일으켰다. 스승의 손에 죽는단 결말은 피했으나, 생존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새로 강탈할 육체. 최대한 뒤탈이 없을 부랑자의 육체를 구해야 했다.
흑마력과 전력의 보충. 마물의 생명력을 갈취해 언데드로 일으키면 된다. 임시방편에 불과하지만, 그 부분은 베이츠에 가면 해결할 수 있었다.
무법자들의 도시라 불리는 만큼 흑마법의 희생양이 넘쳐나도록 있는 곳이니까.
“좋아…….”
“좋기는. 씹새가.”
‘무슨…!’
난데없는 속삭임에 데빈이 퍼뜩 몸을 굴렸다. 그러나 소리조차 내지 않고 배후에 접근한 누군가의 우악스런 손길이 더욱 빨랐다.
[은신 (C) - 3%]
스킬로 억누른 기척을 풀어내는 동시에 베델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후방에선 순백의 광채가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성기사의 ‘성역 선포’였다.
“어, 어떻게…!”
목이 졸리며 의식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의문이 데빈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분명 생명 추적으로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지 않았나?
설령 그 이후에 접근했다고 한들, 저만한 거체로 소리 없이 접근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이 빌어먹을 야만인이 대화를 엿들었을까… 아니, 그건 중요치 않은 부분이다.
스승의 신상은 입에 담지도 않았거니와 ‘키루츠’라는 단어는 그들끼리 사용하는 은어에 가까우니까.
그렇다면 살길은 여전히 있다.
“내 목숨만은 살려다오! 스승이 있는 곳까지 내가 너희를 인도하마! 그러니까. 제발!”
‘어차피 나 혼자서 놈과 성기사를 막는 건 불가능하다. 차라리 스승이 계신 곳으로 끌고 가 처리하면……!’
“잔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군.”
“……!”
“키루츠. 대마법사가 된 다르킨 페레야스가 아르곤을 지워버리고, 그 땅 위에 세운 망자들의 나라의 이름이 키루츠였지. 그 이름을 지금도 쓰고 있었나?”
“그게 무슨…!”
‘이 녀석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팽팽하게 돌아가던 데빈의 머리가 헝클어졌다. 마치 미래의 일을 보고 오기라도 한 듯한 말투다. 게다가 단순 헛소리로 치부하기엔 실제 스승의 계획과 일치하는 내용이었다.
“대충 알겠군. 키루츠의 왕도가 어째서 아르곤의 왕도가 아니라, 서부의 대산맥에 위치했었는지.”
“……!”
스승이 총애하는 제자들을 모아두고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떠들어댄 비전이 미개한 야만인의 입에서 속속히 까발려지고 있었다.
‘정말 미래라도 보고 왔단 말인가?’
그러나 의문은 길지 않았다.
우드드득─.
모든 해답을 얻은 야만인의 우악스런 손아귀가 목을 비틀어 뽑아버렸기 때문에.
“그만 가라.”
너무나 가볍게. 수십 년이 넘는 세월 왕국을 농락해온 흑마법사를 끝장낸 칸의 시선이 서쪽… 키루츠의 왕도가 있던 곳을 향했다.
떠오르지 않아야 할 기억이 범람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대한 국가.
제국의 땅을 침범한 망자들의 군세. 그 앞을 막아서는 ‘나’와 끊임없이 바뀌는 ‘나’의 모습.
어떨 때는 제국의 선제후들이 고용한 용병, 또 어떤 때는 검 한 자루로 초월의 경지에 도달한 검의 주인, 또 대륙 역사상 가장 많은 귀족을 살해한 암살자이거나, 신비 고수의 기술을 전승한 궁사….
모두 한때 칸이 플레이했던 캐릭터들이었고, 모니터 너머로 보았던 모습이 마치 실제 겪었던 기억처럼 흘러넘쳤다.
그 캐릭터들의 기억에 빙의한 것처럼… 칸은 스스로의 의지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제국의 땅에 그림자를 드리운, 거대한 몸체를 한눈에 담을 수조차 없는 거대한 해골용.
그리고 해골용의 머리에 올라탄 존재가 시야에 비친다.
멸망을 부르는 첫 번째 재앙, 수많은 플레이어를 접게 만든 최악의 네임드. 제5막의 최종보스.
“다르킨 페레야스.”
아직 재앙이 되진 못했어도, 지금도 충분히 놈은 강대한 흑마법사다.
특히 제 공방에 틀어박힌 주문쟁이를 상대하는 건 통상의 몇 배나 까다롭다는 걸 칸은 너무나 잘 알았다.
‘뭐.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인 만큼, 확실하게 하는 쪽이 좋겠지. 어쨌거나 보상 하나만큼은 빠방한 놈이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다르킨 페레야스가 드랍하는 보상 중엔, 현재 칸이 가진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줄 아이템이 놈에게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우선 놈이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부터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