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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야만전사-15화 (15/132)

#015화. 길잡이 (3)

빛을 가리려 든 팔을 당겨 급소를 보호하는 동시에 칸이 뒷걸음질 치며 거리를 벌렸다.

스억! 날붙이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세 방향에서 칸의 팔뚝과 쇄골, 허리를 긁고 지나간다.

다행히 회백색 모피로 두 개의 공격은 아무런 피해 없이 막을 수 있었으나, 시큰한 열감이 팔뚝을 가로지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단검이군. 베는 데 특화된… 그럼 독인가?’

머릿속으로 그런 계산이 오갔다.

그사이에 측면의 두 놈이 바싹 거리를 좁혀왔다. 태세를 정비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가 훤했다. 칸이 걸친 모피가 범상치 않게 질기다는 걸 알아차린 놈들이 훤히 드러난 팔과 목 위를 집요하게 노려 단검을 휘둘렀다.

슈왁! 슈왁!

허리를 뒤로 젖혀 대각으로 올려 쳐진 검격을 회피하기 무섭게 심상찮은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드드드득! 팽팽한 줄을 힘껏 당기는 듯한…!

‘석궁!’

이에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허리를 젖힌 상태로 아예 드러누워 몸을 바싹 낮추자, 투왕-! 하는 소리와 거뭇한 빛살이 동시에 감각에 잡혔다.

‘뭐 하는 놈들이지?’

독을 바른 것으로 추정되는 단검으로 기습 후에, 약속한 연계로 빈틈을 만들고 석궁을 쏜다.

어중이 떠중이가 아닌 제대로 배운 놈들이었다. 정확히는 사람을 상대하는 데 도가 튼 녀석들.

‘아마도 용병이겠지. 대인전을 전문으로 하는.’

칸이 석궁마저 피해버리자 놈들에게서 작은 동요가 이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단검을 든 두 녀석이 파운딩을 꽂는 것처럼 단검을 내리찍자 칸도 얌전히 드러눕고 있을 순 없게 됐다.

“읏. 차!”

쾅──!

단검에 긁히지 않은 손으로 땅을 짚은 칸이 허리를 퉁기며 솟구쳤다. 그 과정에서 왼쪽에 있던 못난이가 복부를 얻어맞고 주점 벽을 부수고 나가떨어진다.

‘한 놈 보냈고.’

“……이런 미친!”

“놀랄 시간에 몰아붙여!”

운 좋게 살아남은 단검 못난이가 경악하고, 석궁 든 못난이가 공격을 이어나가라 다그쳤다. 셋 중에 네가 대장 못난이구나. 대충 상황을 파악한 칸이 땅을 밀어 찬다.

[도약]

거구에 걸맞게 칸의 무게는 갑옷을 입은 기사와 비교해야 할 수준이었고, 거기에 스킬로 인한 가속이 따라붙자 가히 마상돌격에 준하는 충격이 단검 못난이를 덮쳤다. 꿍──!

굳이 볼 것도 없었다. 두 단검 못난이가 나란히 벽을 부수고 탈락하자, 석궁을 든 녀석은 조금의 망설임 없이 자기가 등진 문 쪽으로 도망을 쳤다.

‘어딜 도망가? 이 씹새가.’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주워 그대로 투척했다. 스킬의 보정으로 상승한 명중률이 초인의 근력에 힘입어 곧은 직선을 그렸고, 석궁 못난이의 발목을 아예 끊어버렸다.

“끄아아악……!”

카악, 퉤! 독 때문인지 답답한 속을 침 한 번 뱉어 해소한 칸이 석궁 못난이의 머리채를 낚아챘다. 실수로 힘을 너무 줘버렸는지 가냘픈 모발이 투두둑 떨어지는 게 보였다.

‘이건 좀 심했나?’

“어차피 못생겼는데 뭐…. 못난 대머리로 전직한 정도지. 어이. 일어나라.”

“놔…!”

“놓기는. 머리카락 다 뜯기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있어.”

못난 놈 주제에 나름 머리카락은 소중한 걸까. 반항을 뚝 멈춘 놈을 주점에 대충 집어넣은 칸이 단검 못난이들도 그 옆에 던져놨다.

안타깝게도 단검 놈들은 이미 대머리여서 잡을 머리채가 없었다.

“누가 보낸 놈들이냐. 셋. 둘. 하나…….”

“아, 아무도 안 시켰다.”

“그건 무슨 개소리야. 난데없이 사람 칼로 쑤셔놓고. 묻지마 살인 이런 거냐?”

“돈……. 네놈이 어마어마한 양의 금화를 들고 다닌단 소문이 파다하단 말이다……!”

“흠.”

그게 벌써 소문이 퍼졌다고? 칸이 턱에 난 상처를 살살 긁으며 되물었다.

“누구한테 들었는데.”

“몰라! 그냥 용병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다 퍼져서, 먼저 잡는 놈이 임자란 식으로 난리가 났다고! 그런. 그런데. 이런 괴물일 줄은…….”

석궁 못난이가 망연자실하게 고개를 떨궜다. 말이야 대충 앞뒤가 맞기는 한데……. 칸은 도무지 찝찝함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소문이 빠르게 난 것까진 그렇다 쳐도, 습격을 결단하기까지 소요된 시간이 고작 몇 시간이란 건 너무하지 않나.

‘내 손에 처맞은 놈들이 몇 명인데 말이야. 무작정 덮쳤다간 뻔히 뒈질 거란 걸 모를 리가……?’

아, 혹시 그건가.

“노르딕에 돌아온 건 어젯밤인가?”

“그, 그걸 어떻게?”

“역시.”

칸이 대충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였다.

아리에스가 만나기로 한 수도원의 부원장이 근처 도시로 출장을 나갔다가 돌아온 게 바로 어젯밤.

도시의 유력자 중 하나이자, 교회의 사제가 혼자 여정에 나섰을 리는 없을 터. 당연히 용병을 줄줄이 달고 떠났겠지.

이 셋은 부원장과 함께 노르딕을 떠났다가 이제 막 복귀한 놈들인 거다.

그래서 칸을 둘러싼 흉흉한 소문을 모를 테고, 거금을 들고 다니는 야만인이 있단 말에 눈이 돌아가서 일단 덤벼든 것이리라.

“미끼였군.”

“뭐, 뭐?”

병신처럼 이용당한 놈들에게 더 이상 볼 일은 없다. 칸은 무심하게 손등을 휘둘러 석궁 못난이를 기절시키곤, 탐색 스킬로 주변의 기척을 한 번씩 훑었다.

‘아홉, 열, 열다섯, 이 정도면 거의 스물은 되겠군….’

“도시에서 노르딕의 용병을 살해하다니─!”

“새끼가. 죽이긴 뭘 죽였다고 그래?”

그때 기다렸다는 듯 주점 바깥에서 들려온 고함 소리에 칸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저것들은 칸이 못난이 삼형제를 무조건 죽였을 거라 단정 지은 듯했다.

아예 틀린 소리는 아니지. 다른 서릿골 놈이면 목부터 쳤을 테니까.

“너! 잔악무도한 야만인아─! 어서 모습을 드러내라. 내 검으로 너를 즉참할 것인즉!”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활과 석궁, 단창과 방패로 무장한 무리가 주점을 포위하고 있다는 걸.

도시 소속의 병사들도 저렇게 짱짱한 무장은 무리였다. 아무래도 용병이겠지. 즉참이니, 뭐니, 떠드는 거랑은 다르게.

칸은 마치 포위당하지 않은 것처럼 여유롭게 행동했다.

못난이 삼형제를 주점 탁자 아래에 구겨 넣고, 부순 벽과 앞으로 부숴질 벽에 대한 값을 미리 치렀다.

그리고 나서야 주점 바깥으로 나서서 이쪽을 노려보는 무리들을 맞이했다.

‘기억에 있는 문장이군. 검은색 완갑에 붉은색 단창 두 자루가 교차하는 형태. 네로 녀석들인가.’

네로 용병대는 칸이 노르딕에 도착하자마자 부딪쳤던 놈들이었다. 야만인이 어딜 도시에 들어오냐며 꺼드럭대길래, 친히 팔다리를 하나씩 꺾어 줬던 것.

그것들이 노르딕 최대의 용병대라는 건 나중에 안 사실이었다마는.

정체를 알고 나니 일의 전후가 훤히 읽혔다. 복수든 체면치레든. 둘 중 하나 아니겠는가. 뒤에 다른 이유가 더 있을 수도 있겠지만, 당장 떠오르는 건 그 둘이었다.

“야만인들이 포악하고, 도리를 모른단 소문이 사실이었군! 도시의 용병을 살해해놓고 저렇게 뻔뻔한 얼굴로 기어 나오다니!”

“이거 웃긴 새끼네. 니가 나오라며.”

“……당장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라! 그렇다면 재판만은 받을 수 있게 해주마. 만약 반항한다면!”

“반항하면 뭐 어쩔 거냐.”

기름칠을 얼마나 쳐 한 건지, 번들번들 빛나는 올백 머리의 중년 남자가 칸의 대꾸에 벙쪄선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바로 네로 용병대의 대장인 네로였다.

소속 용병만 스물이 넘고, 그 절반이 베테랑으로 이루어진 네로 용병대의 주인. 법보다 칼이 우선인 세상에선 아주 강력한 권력자였다.

다만 칸이야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사내여서 영 시큰둥했다. 그게 뭐 어쨌다고.

“건방진! 도시의 규율을 어지럽힌 것도 모자라서, 내 명에 반항을 해?!”

“네가 뭐라고 반항을 하지 말라는 거냐. 귀족도 아닌 평민 나부랭이가. 아니면, 네가 이 도시의 귀족과 동등한 위치라는 건가?”

예상 밖의 일격을 맞은 네로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달아오른다.

괜히 입으로 위협 좀 해보려다 된통 얻어맞았단 것에 한 번. 미개한 야만인 따위가 자신을 무시했단 사실에 또 한 번 분노했다.

“오밤에 이게 무슨 난리여?”

“용병들이 또 싸움이라도 붙은 모양인데……. 이크. 네로랑 그 야만인 아닌가!”

“저번에 망신을 당했다고 하더만. 저 얼굴 시뻘건 거 보게. 작심하고 복수에 나선 듯허이.”

게다가 고작 야만인 상대로 소란을 듣고 구경나온 시민들이 망신이니, 복수니, 떠들어대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정당한 명분을 쥐고 무도한 야만인을 벌하러 온 몸이다. 어째서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지?

네로는 이에 결심했다.

당장이라도 놈을 죽이자고. ‘그자’는 최대한 생포를 요구했지만, 일단 죽이고 나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면 뭐 어쩔 텐가.

“말로는 안 되겠군! 살인과 항명. 크나큰 죄를 두 개나 저질렀으니, 억울하진 않겠지!”

네로가 손을 척! 들어 올리자 활과 석궁을 겨눈 용병들이 금방이라도 쏠 준비를 마치고서 대기했다.

이제 이 손을 내리기만 하면 저놈은 끝장이다.

야만인이 강해봤자, 이만한 거리에서 쏘아진 화살과 석궁의 틈바구니 속에서 무사할 수는 없을 테니.

그러건 말건. 칸은 흠흠 목을 가다듬고서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섰다.

저 야만인이 무슨 흉악한 짓을 벌이려고? 대충 그런 시선이 몸 이곳저곳 꽂혔다. 수많은 이목이 집중되자 입꼬리가 슬슬 올라갔다.

감히 어쭙잖게 정치를 걸어?

“푸흐흐.”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완전무장한 용병들이 자신을 포위하고 있었으나, 칸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칸의 웃음에 용병들이 지레 놀라서 움찔대는 게 보였다. 우르르 몰려와서 겁쟁이처럼 움츠리는 꼴이라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신 있으면 덤벼라.”

“야만인이라 그런가. 만용을 부리는군.”

“쫄보라 그런가. 말을 못알아 처먹는군.”

칸은 네로의 눈빛에서 익숙함을 느꼈다. 긴장과 두려움을 애써 의연함으로 감추려는, 겁쟁이의 눈빛.

무장이 튼튼해서, 숫자가 많아서, 자신이 기사, 마법사, 귀족이라서. 처음엔 자신있게 덤볐던 놈들도 막상 싸우기 전엔 저런 눈빛을 보이곤 했다.

서릿골의 야만인이 숫자나 무장의 차이, 신분 따위에 굴복하지 않는단 사실을 대륙인의 피로 증명해왔기에.

‘물론……. 나는 야만인이 아니지만.’

동시에, 필요에 따라선 얼마든지 야만인처럼 행동할 수 있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어설픈 모함이나 해댈 시간에. 닥─치─고! 덤비란 말이다──!”

*

*

*

전쟁을 앞둔 대군의 함성도, 그린스킨 전사들이 외치는 전투 함성도, 군주의 지엄한 연설도.

그 무엇도 능가할 수 없는 어마무시한 기백. 단 한 사람의 목소리에서 뿜어져나오는 성량이 군중을 압도했다.

야만인의 포효를 정면에서 마주한 모두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속박당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 느낌이 아니라 정말 몸이 옴싹달싹하질 않았다.

[워크라이 (C) - 51%]

─의지를 담은 포효를 내질러 적을 압도한다. 일정 확률로 ‘상태 이상 : 경직’ , ‘상태 이상 : 공포’를 부여한다.

덜덜덜.

그뿐만이 아니었다. 칸의 ‘워크라이’를 직접적으로 얻어맞은 용병들의 경우엔 보는 쪽이 다 안타까울 정도로 파르르- 몸을 떨고 있었다.

수준 차이가 상당한 탓에 상태 이상을 피하지 못한 것이리라. 그나마 네로 쪽은 꼴에 대장이라고, 잠깐 경직되는 수준에서 그쳤다.

‘새끼. 좀 치나 보네.’

칸은 활짝 웃으며 도끼가 묶인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석궁의 숫자는 다섯. 활이 열. 다섯은 방패와 단창. 서로의 거리는 대강 스무 걸음인가.’

상태 이상에 걸린 걸 감안하더라도, 이미 쏠 준비를 마친 석궁과 활보다 먼저 닿기란 쉽지 않을 터였다.

‘첫 발은 도끼로 받아내는 것보단 최대한 피하는 쪽으로 하는 게 좋겠어. 그다음은…….’

그 과정에서 피부에 기스가 나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어차피 급소만 피하면 된다. 나중에 아리에스에게 대충 치료해달라 부탁하면 되겠지.

좋아. 간다.

칸이 가볍게 첫 발을 내딛는 순간. 경직에서 벗어난 네로가 고함을 내질렀다.

“쏴──! 새끼들아!”

터더더더덩!

달빛이 유독 밝은 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을 칠한 석궁을 모조리 포착하는 건 무리였다. 평범한 사람들은 궤적조차 포착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칸은 다르다.

34의 민첩 스탯은 거리에 따라선 석궁조차 보고 반응할 수 있는 수준의 반사신경을 칸에게 주었다.

칸은 희끄무레한 검은 선이 제각기 다른 부위를 향해 쏘아지는 걸 포착했다.

그를 따라 몸을 비틀고, 도끼를 휘둘렀다. 두 발은 스쳤다. 한 발은 도끼의 넓찍한 면으로 쳐냈다.

가히 놀라운 기예였으나, 연달아 쏘아진 두 발의 석궁과 직사로 날린 화살들의 경우엔 몸을 비틀고 도끼를 휘둘러 쳐낼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이에 칸은 자신의 모피를 넓게 펼치며 앞으로 뛰었다.

[설산백랑의 털가죽]

─서릿골의 혹한을 견디고 살아가는 백랑들의 우두머리. 그 가죽을 뛰어난 실력의 장인이 가공해 만들어진 귀물이다. 뛰어난 물리 내성을 지녔다.

─투사체막이의 가호 : 투사체에 대해 보통 내성을 지닌다.

─겨울의 가호 : 착용자에게 추위에 대한 강한 내성을 부여한다.

─민첩 +2

투두두둑!

석궁과 화살을 막아낸 ‘설산백랑의 털가죽’에서 느껴지는 저항감을 힘으로 무시한 채, 무작정 달려나가는 칸의 앞을 방패를 든 용병들이 막아선다.

그러나 거리를 허용한 이상,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꿍─! 칸의 발끝이 방패를 두들기자 와르르 대열이 무너졌다.

59의 근력을 고작 방패 하나로 막아서려면, 용병이 아니라 기사를 데려왔어야만 했다.

너무나 쉽게 전열이 무너지자 당황한 놈들이 네로의 지시를 기다리는 게 보였다.

칸은 도발하듯 네로를 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언제까지 가만히 있을 참이냐.

“건방지─다──!”

느끼한 중년인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노호성이 터졌다. 네로가 검을 뽑아들고 칸을 향해 마주달렸다. 무시무시한 칸의 힘을 보고도 정면에서 맞붙을 생각인 듯했다.

칸은 코웃음을 쳤고, 손도끼를 벼락처럼 휘둘러 네로의 검을 두들겼다.

쩌어어엉──!

칸이 한 손으로 휘두른 도끼와 검을 맞댄 네로의 몸이 붕- 떠서는 열 걸음이나 물러났다. 경악으로 물든 얼굴이 일그러졌다.

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걸 버텨?

설마 퇴역 기사라도 되는 건가. 그런 소리는 못 들었는데…. 놈이 힘에서 밀려나 열 걸음 뒤로 날아가긴 했지만, 어쨌거나 멀쩡하다는 것부터 범상한 일은 아니었다.

“잘 됐군. 생각보다 튼튼한 놈이라서.”

그러나 승패의 저울이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적당히 할 필요가 없어졌다.

오랜만에 힘 좀 쓸 생각에 흥분한 칸의 입꼬리가 슬며시 상승했고, 딱딱하게 일그러진 네로가 뒷걸음질 치려다 놀라 멈칫거렸다.

다시 간다.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칸이 또다시 앞으로 뛰었다.

그에 제 대장을 도우려던 용병들이 허망한 표정으로 팔을 떨궜다. 사람 키보다 높게 뛰어서 화살처럼 날아다니는 놈을 어떻게 막으라고?

“이─놈──!”

굴욕감을 느낀 걸까. 분개한 네로가 두 손으로 검을 굳게 쥐었다. 그 기세가 영 심상치 않았다.

너무 강하게 검을 파지한 탓인지, 놈에게서 희미하게 우드득- 대는 뼈소리마저 들리는 듯했다.

칸은 개의치 않고 도끼를 한 손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었다. 아니, 내리찍으려 했다.

“그만! 그만하시오!”

노인의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드는 동시에 누군가 칸과 네로의 사이로 난입하지만 않았다면.

뜻밖의 상황에 칸이 도끼를 휘두르던 팔을 비틀어 궤적을 바꿨고, 네로의 검은 올곧게 나아가 난입자의 머리와 칸의 목을 동시에 관통하려 들었다.

그 사이에서.

촤아아악!

달빛을 머금은 백금발이 핏방울과 함께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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