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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야만전사-16화 (16/132)

#016화. 길잡이 (4)

뚜욱- 뚜욱-

붉은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지고, 그 위로 아름다운 백금발이 겹쳐졌다. 칸에게는 퍽 익숙한 색깔의 머리카락이었다. 아리에스.

칸의 부름에 사이에 끼어든 난입자. 아리에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쳐왔다.

어딘가 성이 난 듯한 눈빛은, 가만히 있으랬는데 이게 무슨 난리냐고 묻는 것 같았다.

“저쪽이 먼저 덤빈 거요. 난 무죄란 소리지.”

“……누구야.”

“여기서 힘깨나 쓴다는 용병대 있잖소. 네로인지, 고양이인지 하는 놈.”

아리에스의 불퉁한 시선이 네로에게 향한다.

놈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건지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검 거둬.”

“……건방진.”

네로는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도 순순히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아리에스의 말을 들었다기보단, 그녀와 함께 나타난 노인을 의식한 행동인 듯했다.

“내 멈추라 했거늘. 어째서 검을 회수하지 않았나!”

“이미 휘두른 검을 어찌 멈추란 말이오. 검호…. 그 칼 귀신들이라면 모를까. 내겐 무리요.”

“이런……! 괜찮으십니까!”

노인은 뻔뻔하게 구는 네로와 말다툼하는 걸 시간낭비라 여긴 듯, 서둘러 아리에스의 안위를 확인했다. 칸도 핏방울이 뚝- 떨어지고 있는 아리에스의 손바닥을 살폈다.

상처가 얕지 않았으나, 실시간으로 빠르게 아물고 있었기에 큰 상처랄 것도 없었다.

날카로운 검을 맨손으로 막은 것치고는 경상이라 봐야겠지.

오히려 신성갑주로 보호받는 아리에스에게 상처를 입힌 네로의 실력이 더 놀라웠다.

‘도시에서 제일 강한 용병이라 생각하면 묘하게 납득이 가는 실력이긴 한데, 그런 것치고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기도 하고…….’

뭔가 실력의 균형이 안 맞는다고 해야 할까. 육체는 기사의 그것과 비등하다 해도 충분한 수준이지만, 검을 다루는 솜씨는 한참 어설펐다.

여타 용병들이랑 비슷하게 실전으로 다듬어진 사짜 검술. 딱 그 정도.

사실 저런 위력이면 굳이 검술이 없어도 충분하긴 했다.

칸의 경우만 보아도 그렇다. 무술이라곤 하나도 모르지만, 무식한 육체 능력으로 전부 해결해오지 않았던가.

네로도 비슷한 경우겠지.

“도시 내에서 전투를 벌이다니. 당신 미쳤소? 제아무리 행정관이 치안을 일부 맡겼다고 해도, 정도라는 게 있지 않나!”

칸이 네로에 대해 생각하던 사이. 아리에스의 무사를 확인한 노인은 네로를 향해 버럭 화를 내고 있었다.

늙은이가 겁도 없이 용병에게 화를 낸다며 감탄하던 칸이 노인의 의복을 보곤 납득하여 고개를 주억였다. 사제였군.

“부원장이야.”

“아. 성기사 지망생이라던.”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온 아리에스가 노인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성기사 지망생이라….

‘그래서 저렇게 기가 드센 건가.’

“정도는 무슨. 나는 내 할 일을 했을 뿐이오, 부원장. 저자에게 얻어맞고 드러누운 용병이 열을 넘고, 갈색 조랑말 상단의 가게가 두 개나 박살이 났소. 그쪽 상단주 애덤이 탄원서를 요 며칠 스무 장이나 보내서 행정관이 업무를 진행할 수가 없다며 얼마나 화를 냈는지 아시오?”

“그렇다면 정당하게 붙잡아 재판을 진행하면 될 일이지. 오밤중에 자네 수하들을 이끌고 핍박하는 건 말이 되는가!”

“모르는 소리를 하는군. 야만인은 대개 폭력적이고, 법도를 모르는 자들인데, 평화적으로 일을 해결하라고? 그 과정에서 내 부하들이 죽어 나가면? 부원장이 책임질 건가?”

“책임을 논하려면 자네 또한 법도대로 일을 진행했어야지. 내 이 건은 행정관에게 가서 따질 터이니. 오늘은 물러가게!”

“…….”

네로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가만히 부원장을 노려보다가, 부릅뜬 눈으로 칸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칸은 그냥 피식 웃으며 받아넘겼다.

‘꼬우면 덤비던가.’

결국, 본전도 못 찾은 녀석이 제 수하들과 함께 멀어진다.

칸은 그 뒷모습에 대고 농담이라도 던지려 했으나, 아리에스의 눈총을 받고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자네가 칸이군. 저분을 모시고 있다는 야만인. 오면서 얘기는 들었네. 네로와 부딪치고 상처조차 없다니, 상당히 강한 전사인가 보군. 난 노르딕 수도원의 부원장인 노만일세.”

“뭐……. 별거 아니었소. 코르디 칸이오.”

노만은 고개를 주억이곤 주변의 시선을 물리쳤다. 그의 한마디에 군말 없이 다들 물러나는 걸 보면, 위신이 상당한 듯했다.

그런데 이도저도 못하고 눈치만 보는 것들이 있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주점 밖으로 기어 나온 못난이 삼형제였다.

‘아, 깜빡했네….’

“너희도 그냥 가라.”

그냥 죽일까도 싶었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아서 그냥 보내주기로 했다.

‘애초에 죽일 거였으면 처음부터 죽였지.’

어차피 한 놈은 절름발이 신세에다가 나머지도 뼈가 으스러진 상태다. 당분간은 살림이 꽤 퍽퍽하지 않을까.

단검 못난이 둘이 머리에 땜빵이 난 절름발이 못난이를 부축하고서 떠난다. 살려줘서 고맙단 의미인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서.

“잠깐 안에서 얘기하지.”

“그럽시다.”

대충 상황을 정리한 후. 칸과 아리에스, 노만은 벽에 구멍이 뚫린 주점으로 들어갔다.

이것저것 박살이 나 멀쩡한 게 몇 없어서 그나마 상태가 온전한 의자를 끌어다 앉을 수밖에 없었다.

“우선 이것부터 확인해야 대화가 되겠군. 아리에스에게 얼마나 전해 들었소?”

“네카르 산에 다르킨 페레야스의 은신처가 있고, 그걸 토벌하기 위해 찾아왔다는 것까지 들었네. 성기사께서 자세한 계획을 설명하려던 때에 무식하게 큰 고함 소리가 들려서 대화가 끊겼고.”

“뭐. 대충은 다 들으셨군. 계획이야 굳이 들을 필요는 없소. 그냥 나랑 여기 쬐끄만 양반 둘이서 놈을 족칠 뿐이니까.”

“……무모하군. 차라리 지원을 기다렸다가 한 번에 공격하는 게 낫지 않겠나? 길잡이도 필요할 텐데.”

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너무 늦소. 이미 놈의 귀에 우리가 나타났단 얘기가 들어갔을 가능성이 큰데, 요란하게 지원군까지 부르면 아예 도망칠 거요.”

“이미 도망쳤을 수도 있지 않나.”

“아니. 고작 드러난 전력이 쪼그만 성기사 하나에 야만인 하나면, 제 공방에서 요격하러 들 것이오. 흑마법사란 것들은 시체 욕심이 많으니까.”

“그 흑마법사의 위기감이 욕심을 넘지 않을 만한 전력으로 습격하는 게 최선이란 소리군.”

“그렇지.”

노만은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는지, 의미 모를 표정으로 바닥을 쳐다봤다.

아리에스는 자기 얘기가 아니라는 것처럼 멍하니 있었고, 칸은 어색한 침묵에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다 노만이 입을 연 건 대강 2, 3분이 지난 후였다.

“좋아. 수도원에는 전력이랄 게 없으니 별 도움은 안 되겠지만……. 언데드에게 쓸만한 물건은 꽤 많지. 내가 직접 축성한 성수를 몇 개 주겠네. 다만 시간은 좀 걸려. 지금부터 준비하면 오늘 밤쯤 끝날 테니. 대충 일 좀 보다가 나중에 찾아오게. 이런저런 일도 내 선에서 처리해 주지. 갑자기 용병에게 습격받는 일이라거나.”

“그건 고맙군.”

“성기사 님. 따로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딱히.”

“하긴. 제가 괜한 걸 물었군요.”

순식간에 논의를 마친 노만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아리에스가 있는 쪽을 보고 조용히 기도문을 읊고서 주점을 나가버렸다.

그걸 본 칸이 으음- 소리를 냈다.

‘너무 멀쩡한데.’

전 성기사 지망생, 지금은 한 도시의 수도원을 실질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실권자, 그리고 늙은 종교쟁이.

대충 열거해놓고 보면 더럽게 까탈스럽고 오만할 것 같은데, 노만은 칸의 생각보다 훨씬 건설적인 노인이었다.

칸을 야만인이라 깔보지도 않고, 대뜸 ‘동네 뒷산에 흑마법사가 있으니까 너가 좀 도와라.’라는 식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조금은 놀라거나, 당황할 법도 하건만. 지나치게 무덤덤했다. 종교쟁이라면 그럴 수가 없을 텐데….

“저 양반한테서 흑마력 냄새는 안 나던가?”

“그런 건 왜 물어봐.”

“종교쟁이 주제에 너무 신실하지 않소. 수상쩍게.”

성큼성큼. 퍽.

조용히 다가와선 자기 정강이를 걷어찬 아리에스를 칸은 말없이 쳐다봤다.

아리에스도 지지 않고 마주 노려보았고, 이내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편협한 야만인.”

갑자기 뭐 어쩌라는 거야. 칸은 이 쬐그만 녀석이 왜 이러나 싶었다. 내가 뭔 실수를 했나? 쌈박질한 건 먼저 시비 걸린 거라 무죄를 증명했을 텐데….

‘그리고. 성기사가 이렇게 마구 폭력을 휘둘러도 돼나?’

그렇다고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딱히 찔린 구석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그래야 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그 판단이 옳았다.

아리에스는 답지 않게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의자에 털썩 앉았다. 어쩐지 평소랑 다른 모습이었다.

“이제 어쩔 거야.”

“어쩌긴. 적당히 시간 좀 때우다가, 우리의 길잡이를 다시 만나러 갈 생각이오.”

“어떻게 설득하려고.”

“글쎄. 일단 만나보고 얘기나 나눠볼 생각이오. 올 사람도 아직 남았고, 그동안 밥만 축내기도 뭐하지 않소.”

아리에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피곤하단 말을 남기고서 그나마 멀쩡한 바닥에 모포를 덮고 잠을 청했다. 별일이군.

정말 그랬다. 아리에스는 좀처럼 제 기분을 표현하는 법이 없었고, 그동안은 겨우 얼굴 표정을 보고 칸이 알아서 해석할 뿐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오늘은 유독 말이 많았다. 그럴 만한 일이 있었다는 뜻일까.

‘알아서 하겠지.’

칸은 굳이 파고들지 않았다.

쌔액- 쌔액- 대는 숨소리가 들려온 것도 이유 중의 하나였고, 섣부르게 그녀의 속내를 물을 만큼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냥 목표가 같아서 동행하고 있을 뿐인 사이 아닌가.

아직은 어린 그녀가 왜 혼자 아르곤 왕국까지 와서 흑마법사의 뒤꽁무니나 쫓고 있는 건지, 암흑기사를 보고 왜 그렇게 분노를 표출했던 건지, 신실한 사제들이 가득한 수도원을 갔다 온 뒤로 갑자기 피로를 호소하는 이유가 뭔지….

굳이 알고 싶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칸 본인이 누군가의 짐을 덜어줄 깜냥이 안 되는 반푼이라는 것이었다.

현대의 30대 회사원도 아니고, 잔악무도한 야만전사도 아닌. 어정쩡한 반푼이.

“바닥에서 그냥 자면 입 돌아가는 것도 모르나. 이래서 애들은.”

며칠 잠을 못 잔 것처럼 금새 잠에 빠져든 아리에스를 보며, 칸은 그냥 피식 웃어버렸다.

그리곤 제 몫의 모포를 그녀의 위에 대충 얹고, 벽에 붙여둔 테이블을 들어서 뚫린 벽을 막았다.

‘이만하면 되겠지.’

그러다 문득 인기척을 느낀 그의 고개가 돌아갔다. 주점의 문이 있는 방향이었는데, 어째 기시감이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아이가 자고 있다는 팻말이라도 붙여둘 걸 그랬군.

“노크하지 말고 기다려라.”

“……!”

놀라서 수근대는 목소리가 어쩐지 익숙했다. 칸이 조용히 문을 열자 반짝이는 대머리 두 개가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못난이들?”

그에게 된통 처맞고 돌아갔던 단검 못난이들이었다.

“뭐냐. 또 처맞으려고 왔나?”

“그, 그런 게 아니다!”

“목소리 낮춰라. 처맞기 싫으면.”

뭐 어쩌라고! 두 못난이가 눈빛으로 억울함을 호소하건 말건, 칸은 둘을 너무 멀지 않은 골목으로 데려갔다.

“그래서. 왜 찾아왔다고?”

“우선, 그냥 보내줘서 고맙단 말을 하려고 왔다.”

“뭔 개소리냐.”

한바탕 시원하게 싸워놓고, 갑자기 고맙다니. 게다가 한 놈은 아예 다리 병신으로 만들었지 않았나.

머리는 안 때린 거로 기억하는데? 혹시 그런 성향인 건가…?

“이렇게 다시 찾아온 게 염치가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겠더군. 사실 나 같아도 일단 죽이고 봤을 거거든. 기습한 놈을 어떤 용병이 살려두나?”

“안 그래도 후회하고 있었다. 그냥 죽이는 게 낫겠군.”

“큼. 크흠! 지금 살려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있지 않나!”

“목소리 낮추란 말은 안 들어 처먹으니 죽이는 게 나아 보이긴 하는군.”

“뭐 이런 놈이 다….”

내가 뭐? 칸은 헛웃음을 터뜨리는 못난이의 턱수염을 뽑아버릴까 고민하다가, 그냥 관뒀다.

턱수염도 없애버리면 여기서 더 못난 얼굴이 될 것 같았다.

“형님. 이럴 게 아니라 그 얘기부터 들려주는 게 낫지 않겠수.”

“아. 그렇지.”

“그 얘기?”

다행히 그 선택이 옳았다.

똑같이 못나게 생겨서 설마 했었는데 둘은 진짜 형제였는데, 동생 쪽 못난이가 칸의 흥미를 끄는 얘기를 꺼냈다.

“큰 형님. 그러니까. 당신한테 다리가 잘린 사람을 말하는 거요. 그 큰 형님을 집으로 모시던 도중이었는데, 누구를 좀 마주쳤소. 우리랑 같이 의뢰를 나갔다가 어제 돌아온 친구를.”

“그게 뭐 어쨌다고.”

“들어보쇼. 그 친구가 술을 좀 거하게 잡쉈는지 길바닥에서 자고 있길래 내가 가서 좀 깨웠지.”

“태평하기도 하군.”

칸의 이죽거림을 그냥 무시하기로 한 듯, 동생 못난이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우리 꼴을 보더니 누가 그랬냐고 화를 내길래 대충 설명을 해줬수. 네로 녀석들한테 속아서 야만인 조지러 갔다가 된통 당했다고. 너도 괜히 덤비지 말라고 충고를 좀 했지.”

“그래서?”

“갑자기 길길이 날뛰면서 네로한테 따지러 가겠다지 뭐요. 자기 친구를 넷이나 엿먹이다니! 용서할 수 없다! 소리치면서.”

“그놈이 미친 새끼인 건 진작 알고 있었는데, 술까지 마셔서 그런지 머리가 돌아버렸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새끼야. 칸은 요지를 알 수 없는 이야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술 마신 미친놈이 네로한테 가서 난동을 부리건, 오줌을 갈기건 그게 자기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칸은 두 못난이의 턱수염을 뽑아버리기로 결정했다. 재미도 없고, 흥미롭지도 않은 잡소리로 그의 시간을 잡아먹은 죄로…….

‘아니, 잠깐만.’

친구를 넷이나 엿먹였다고? 못난이는 삼형제였을 텐데. 나머지 하나는 누구야?

칸은 어쩐지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어젯밤에 도시로 복귀했고, 미친놈인 데다가, 술까지 마셨다라…?

어째 익숙한 인물상이었다. 아니, 익숙하다 못해 최근에 비슷한 녀석을 마주친 듯한…….

“이런 제기랄.”

기시감의 정체를 알아차린 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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