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화. 길잡이 (5)
평소 친하게 지냈던 삼형제가 엉망진창인 꼴로 눈앞에 나타났길래 론은 이유를 물었고, 평소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네로에게 속아 그렇게 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돈 많은 야만인을 낚기 위한 미끼로 자신들이 사용됐으며, 네로가 야만인을 부하들과 함께 겁박하려다 부원장의 만류에 막혀 허탕을 쳤다는 말도 들었다.
론은 분노했다.
그래서 네로의 용병대가 거점으로 삼은 저택에 다짜고짜 찾아가 따졌다.
“같은 도시의 용병까지 속여가면서 돈을 벌고 싶나? 그건 아주 비열하고 추잡한 짓이야! 내가 몇 번이고 말했을 텐데!”
“주제도 모르는 놈이……. 오늘은 너 따위를 상대할 기분이 아니다.”
“아니! 너는 나를 납득시켜야 한다. 감히 도시의 용병을 이용하고, 애꿎은 외부인을 핍박한 것에 대하여!”
그리 외치는 론의 모습은 언뜻 보면 기사라 생각할 만큼 위엄이 있었다. 그래 봐야 술주정뱅이에 불과했지만.
“이런 씨……. 저 새끼 길바닥에 버리고 오든가 해!”
저 미치광이가 시건방을 떠는 건 예전부터 종종 있던 일이고, 나름 노르딕에선 알아주는 놈을 함부로 쳐죽일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살려두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기분 같아선 저 얼간이의 면상에 당장이라도 칼을 쑤실 것만 같았다.
“사과해라! 사과해!”
“어이. 적당히 하라고 론. 그러다 대장 손에 진짜 뒈지는 수가…….”
결국 네로의 부하 중 부관 노릇을 하는 녀석이 날뛰는 론을 부둥켜안고 끌어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론의 힘이 보통이 아니어서 용병 둘이 더 달라붙고 나서야 론을 끌어낼 수 있었다.
“주정뱅이 새끼가 쓸데없이 기운만 넘쳐서…!”
네로는 기가 찼다.
용병 경력으로만 따지면 왕국에서도 위가 거의 없는 녀석이 론이었다. 그런 놈이 병신처럼 의리나 따지고 있다니….
듣기로는 그 건방진 야만인 놈이 금화를 열 장도 넘게 제시했는데 목숨이 아깝다며 의뢰를 거절했다던가.
‘모지리 새끼. 그냥 돈만 받고 적당히 하다가 튀면 될 일을.’
네로는 한심하단 눈빛으로 불콰하게 취한 론을 쳐다보다가, 문득 눈을 빛냈다.
‘잠깐, 이거 써먹을 수 있겠는데?’
“잠깐…. 어이! 그 새끼 다시 데려와!”
네로의 부하들에게 이끌려 무릎 꿇려진 론은 버둥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놔라! 놓으라고! 네로는 그 꼴을 비웃으며 손을 휘둘렀다.
쩌억─. 우당탕.
주먹에 얻어맞은 론이 바닥을 굴렀다.
이내 정신을 차렸는지 고개를 휙휙 털었으나, 네로의 부하들에게 붙잡혀 다시 무릎을 꿇는 수밖에 없었다.
“술이 좀 깼나? 머저리 론.”
“쇠망치 론이다. 비겁한 녀석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제대로 붙잡고 있어라.”
쩌억. 쩌억.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마치 지금까지의 울분을 푸는 것처럼 네로의 주먹은 무자비했다.
오히려 론을 꼼작 못하게 붙들은 용병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간다. 이거 이래도 괜찮은 건가? 설마 진짜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
노르딕 최대의 용병대를 이끄는 네로와 압도적인 경력과 특유의 친화력으로 노르딕 최고의 용병이라 불리는 론.
서로의 위치가 위치였다. 성격이 정반대라 말다툼은 종종 벌여도, 칼부림까지 일이 커진 적은 아예 없었다.
오늘도 여느 때와 같이, 그냥 적당히 다투다 말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지금 네로의 눈은 완전히 살인자의 그것이었다.
“대, 대장. 이러다 진짜 죽겠습니다.”
네로의 구타는 보다 못한 부관이 나선 뒤에야 멈췄다.
론의 얼굴은 심하게 부어서 제대로 알아보기도 힘든 수준이었고, 네로는 저가 만든 참혹한 꼴을 보고서 입꼬리를 올렸다.
“이봐. 같은 도시 출신끼리 이러지 말자고. 바깥에서 굴러먹다 온 야만인을 족치는 게 나 좋자고 하는 일인가? 이건 그냥……. 노르딕을 위한 일이야. 모두가 그 염병할 야만인이 뒈지기를 바란다고.”
“요른 형제들이 크게 다쳤다. 맡이 녀석은 다리를 잃었어. 네 녀석이 헛바람을 넣은 탓에……!”
“그게 왜 내 잘못이야? 주점에서 섣부르게 큰돈을 덥썩 내보인 야만인이랑, 좋다고 덥썩 문 녀석들의 잘못이지. 그걸 명분으로 써먹은 게 나쁜 짓이라 할 셈인가? 경력도 긴 새끼가 그딴 식으로 순진하게 굴 거야?”
그냥 속은 놈이 바보인 거야. 용병이라면 그 정도는 상식이잖냐. 네로의 비웃음이 짙어졌다.
“도시의 행정관, 상단의 주인, 그 밖에 힘깨나 쓰는 양반들이 한목소리로 외치고 있다니까? 제발 그 야만인 좀 어떻게 해달라고 말이야. 너가 정말 노르딕을 위한다면, 오히려 날 돕는 게 맞아. 그렇지 않나?”
“……거짓말 마라. 그치들이 뭐가 아쉬워서 야만인 하나에 관심을 가지지?”
“글쎄. 그거야 나도 모르지. 어쨌든 난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이야.”
네로의 비웃음을 본 순간 론은 확신했다.
‘거짓말이다.’
네로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그는 권력자들의 사냥개 따위가 아니라 권력을 쥐는 쪽에 가깝지 않나?
“안 믿는 눈치군. 뭐, 네가 날 안 믿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나는 사실을 말한 거야. 위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어찌 알아? 시키면 하는 거지.”
“위? 위라니. 그게 무슨 말…….”
“더 자세히는 나도 말 못 하지. 대신 하나 알려주자면, 괜히 알아서 좋을 거 없다는 것 정도다. 너 같은 머저리는 말해줘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네로의 표정이 묘했다. 입꼬리는 웃고 있는데, 비웃는단 느낌은 아니었다.
그 무자비한 네로가 어째서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론은 그 이유를 좀처럼 상상할 수 없었다.
다만 도시의 배후에서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은 확실히 알았다. 그 중심에 칸이 있다는 것도. 그 흐름에 자신이 덩달아 휘말리게 됐다는 것도.
“……뒤에서 대체 무슨 짓들을 벌이고 있는 거냐. 네로.”
네로는 그 의문에 굳이 답하지 않았다. 대신 부하들을 시켜 얼굴의 출혈이 멎을 만큼만 론을 치료하고, 쇠사슬로 팔다리를 묶어 옴싹달싹 못하게 조치했다.
그 상태로 넓은 로비에 내동댕이쳐진 론은 침울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의견 차이로 네로와 자주 다툰 건 사실이지만, 내심 네로를 사이가 나쁜 친구 정도라 생각해왔거늘. 아무래도 그건 혼자만의 착각인 듯했다.
철그럭. 철그럭.
‘그거는 그거고. 우선은 벗어날 궁리부터 해야지.’
다행히 론은 기분의 전환이 빠른 남자였다. 수많은 경험이 가져다준 것보다는, 타고난 성정 자체가 그러했다.
무엇보다, 어떤 위험한 상황에서도 살아남기 위한 최선을 본능적으로 모색할 줄 알았다.
신이 그에게서 눈치라는 걸 빼앗은 대신, 눈치가 없어도 살아남을 수 있는 재능을 줬다고 주변에서 떠들어댈 만큼.
론은 우선 힘으로 쇠사슬을 끊을 수 있나 실험하기 위해 양팔다리를 좌우로 크게 벌렸다.
음, 이건 무리야. 그리고 곧장 포기했다.
다음으로 주변의 상황을 눈에 담았는데, 전체적으로 부산스럽다는 느낌이었다.
‘뭣들 하는 거지?’
네로의 부하들은 넓찍한 홀에 론을 방치해뒀고, 네로의 지시에 따라 이런저런 물건들을 홀 구석구석에 배치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면면이 영 심상치 않았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설치된 석궁, 그 옆에 준비된 모래가 담긴 포대와 쇠그물, 그리고 곳곳에 쌓인 투척용 단창.
사실상 전쟁 물자나 다름없는 것들을, 홀의 이곳저곳에 배치하고 있었다.
“대장! 그 녀석이 오고 있답니다!”
“허. 설마 했는데, 진짜 오다니…. 이해할 수가 없는 놈이군.”
“무식한 인종이라 그렇겠지요.”
자는 척 대화를 엿듣고 있던 론이 의아함을 느꼈다.
누가 오고 있고, 그 누군가를 이 장소로 유인하기 위해 자신을 미끼로 썼다.
거기까지는 알겠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놈이 들어오면 석궁부터 쏴라. 괜히 돈 아끼려 들지 말고. 놈만 죽이면 그것보다 훨씬 많은 돈이 들어올 테니까.”
그 말을 들은 네로의 부하들이 천박한 농담을 지껄였다.
이번 건으로 돈을 벌어 누구와 자겠다느니, 베이츠의 노예 시장에 가면 좋겠다느니, 그런 얘기들을.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놈이 저택의 정문을 지나쳤습니다!”
바깥의 동태를 2층 난간에서 살피던 전령의 말에 넓찍한 홀 전체가 적막에 휩싸였다.
천박한 농담이나 지껄이던 한량들이 한순간에 용병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론은 그 꼴을 보고 어이가 없어서 허허 웃었다.
노르딕 최대의 용병대가 이만한 대비를 해놓고도 움츠린 꼴이라니. 도대체 상대가 누구길래?
그 해답은 바깥에서 들려왔다.
“나와─라─! 겁쟁이들──!”
째재쟁!
오우거 성대라도 갈아 마신 건지, 사람의 것이라 믿기 힘든 함성에 저택의 창문이 하나둘 깨지는 가운데.
론은 주변의 용병들이 딱딱하게 굳어 꼼짝 못 하는 걸 확인했다. 그나마 멀쩡한 건 네로와 자신뿐이었다.
그는 전투에 휘말리지 않으려 조심스레 기어서 저택의 구석으로 향했다.
벽에 비치된 등불이 흔들리며 간간이 그의 모습을 비추었으나, 그걸 신경 쓸 만한 자가 아무도 없었다. 그럴 상황이 아니었기에.
으저적──!
벽을 뚫고 날아든 단검이 석궁수 둘의 머리통을 꿰뚫는다.
이어서 단검 하나가 또 벽을 뚫고 석궁수를 노리자, 네로가 벼락처럼 검을 휘둘러 튕겨냈다.
그리곤 버럭 소리쳤다.
“정신 차려, 새끼들아!”
굳게 닫힌 저택의 문이 으지끈- 소리를 내며 부서진다. 동시에 미리 겨눠둔 석궁들이 발사된다. 터더더더덩…!
문을 부수고 난입하는 순간에 가해진 일제 사격. 제아무리 화살을 눈으로 보고 쳐내는 괴물같은 놈이라도, 이건 어쩔 수 없으리라.
투다다닥!
부서져가는 문을 석궁이 관통하며 큼지막한 구멍이 뚫렸다. 그 모습을 본 석궁수 하나가 화색이 되어선 외쳤다.
“해치웠나?”
“저, 저 병신이! 다시 장전이나 해!”
시체를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 안심할 수 없었다.
네로도 그 사실을 인정했다. 자세를 바로 하고 감각을 예민하게 벼렸다.
그리고.
“으아아악!”
비명이 들렸다.
모두의 이목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향했다. 2층 난간이었다. 웬 사람 몸통만 한 구렁이가 바깥을 살피던 녀석의 목을 휘감고 있었다.
‘저건 또 뭐야.’
“씨발. 쏴! 새끼들아! 놈이다!”
이 자리에서 가장 눈이 밝은 네로만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렸다.
“저건 구렁이가 아니라, 사람의 팔이라고! 머저리 같은 새끼들아!”
네로의 말에 허겁지겁 용병들이 석궁의 방향을 고쳤다.
터더더덕! 팔이 뻗어져 나온 창문을 향해 발사된 화살이 건물의 벽을 꿰뚫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해치웠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목이 붙잡혔던 동료의 시체가 2층 난간에서부터 추락하고 있었기에.
콰직…….
기괴한 각도로 꺾이고, 으깨진 동료를 본 용병들의 얼굴이 핼쓱해진다.
네로가 입술을 짓씹었다.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라더니! 비천한 고블린처럼 비겁하게 싸우는구나─!”
그리곤 옆에서나 겨우 들릴 법한 목소리로 론을 자기 앞으로 데려오라 지시했다.
“으아악, 놔라!”
하지만 론이 마구 발버둥을 치는 탓에 그것도 쉽진 않았다.
만약 지금 침입자가 난입해서 론을 확보한다면, 인질이란 이점조차 빼앗기게 될 터였다.
‘자, 와라.’
그것이 네로가 노리는 바였다.
놈이 론을 구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미리 준비해둔 걸 쏟아낼 작정이었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진 습격자의 행동은 네로가 예상한 대로였다.
콰지직. 천장을 부수고 나타난 커다란 인형이 론의 위로 낙하했다.
론을 붙잡고 있던 용병들이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렇게 보이도록 연기했다. 처음부터 론은 적을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였다.
“칸…! 자네가 왜!”
‘걸렸구나. 멍청한 야만인아.’
네로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야생 오크와 트롤, 대형 마물을 사냥하는 데 쓰는 쇠그물이 난입한 야만인과 론을 그대로 덮쳤다.
단순하게 힘이 세다고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았겠지. 그러니까 멍청하게 길잡이 하나 구해보겠다고 사지로 기어들어 온 것 아니겠는가.
네로가 조소했다.
덫에 붙잡힌 사냥감을 끝장내기 위해 비치된 석궁들이 화살을 토했다.
투투투… 투웅!
‘잡았다.’
쏟아지는 화살 세례를 보며 네로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마법사라면 기괴한 주문을 써서 위기에서 벗어날 수도 있겠으나, 무식하게 도끼나 휘두를 줄 아는 야만인에게는 불가능한 일.
‘그 늙은이가 뭣 때문에 야만인 하나에게 집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딱히 궁금하지도 않다.
용병한테 중요한 건 돈이고, 이번 건으로 충분하다 못해 과하다 싶을 만큼의 선금을 챙겼으니까.
네로는 그 돈으로 무얼 할까 행복한 고민을 하며, 이미 선인장처럼 된 야만인을 구경했다.
“뭐냐. 저건.”
그리고 이변을 알아차렸다.
쇠그물이 야만인과 론을 뒤덮었고, 석궁에서 발사된 철화살이 명중한 것도 맞다. 거기까지는 네로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갑작스레 허공에 나타난 반투명한 방패가 모든 공격을 무위로 만들었다는 것뿐.
“방어막…? 아니, 야만인은 마나가 없을 텐데? 마석으로 대체할 수 있는 저급한 주문으론 철화살을 막는 건 애초에 불가능……!”
“보고도 모르냐?”
충격을 흡수한 반투명한 방패가 불길한 떨림을 퍼뜨렸다.
수도원을 습격한 흑마법사에게서 노획한 이 아티팩트가 얼마나 엿 같은 물건인지, 몸으로 직접 겪었던 칸이 만면에 가득 웃음을 머금었다.
“무지개 반사다. 씹새야.”
쯔저저저적──!
갈가리 찢겨나간 쇠그물의 파편이 비수가 되어 피바람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