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화. 타락자들 (3)
‘이건, 아에카리스의 구덩이인가.’
아에카리스는 고블린과 비슷한 몸집에 수십 쌍의 조그만 눈, 얼굴의 절반을 차지한 아가리가 특징인 악마였다.
정확히는 대악마에게서 태어난 악마 부스러기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지만….
어쨌건. ‘아에카리스의 구덩이’는 바로 그 악마 부스러기의 권능을 일부 재현하는 고위 흑마법이었다.
무엇이든 집어삼키는 아가리, 별개의 차원으로 만들어져 끊임없이 먹이를 저장하는 아에카리스의 위장을 비틀어 공간 이동과 유사한 효과를 내는 것이다.
‘고위 흑마법을 각인하는 수준인가. 현시점 다르킨의 수준이 내 생각보다 훨씬 높은데……. 설마 아에카리스와 계약했을 리는 없고.’
만약 놈의 경지가 칸이 상정한 수준을 아득히 넘는다면… 이 자리가 자신의 묏자리가 될 수도 있으리라.
아무래도 상관없지. 칸은 쓸데없는 생각을 갈무리하며, 공간 이동의 여파로 기절한 론을 발로 툭- 툭- 차서 깨웠다.
“오, 오메! 여기는 네카르 산이잖아!”
그사이에 침까지 질질 흘린 론이 멍한 얼굴로 일어나 외친 첫마디에 칸이 고개를 주억였다.
‘어쩐지 주변 풍경에서 기시감이 느껴진다 했는데. 모니터로 본 기억이 있어서 그랬던 거군.’
제국과의 전쟁 끝에 결국 격퇴 당한 다르킨이 최후의 격전지로 삼은 장소이자, 제5막의 마지막 퀘스트가 진행되는 무대 아닌가.
기시감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으, 으으윽……!”
“아.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있었군.”
“잉? 수도원의 재수 없는 사제 아녀? 이 양반은 왜 이러고 있어?”
“이놈도 흑마법사의 하수인이니까.”
에엑!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칸의 손에 들려서 여기까지 끌려온 론이 괴상한 비명을 지르건 말건.
칸은 발아래에 깔린 부원장 노만을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육체 자체가 인간을 벗어난 성기사도 아니고, 늙은 사제가 지금도 살아있는 건 분명 의아한 일이었다.
론을 둘러멘 채로 천장을 부순 칸이 노만의 허리를 쿠션 삼아 착지했으니까.
그런데 뒈지지도 않고 멀쩡히 살아 숨 쉬는 건 무슨 의미일까.
‘종교쟁이 주제에 너무 신실하더라니. 역시 타락자였군.’
칸은 확신에 찬 눈으로 노만을 째려보았다.
굳이 볼 것도 없다. 이놈도 네로처럼 다르킨의 신체 개조를 받아들였으리라.
천장을 부수기 전에 파악한 정황상. 아리에스와 쌈박질을 벌인 게 분명한데, 그러고도 겉모습이 멀쩡한 걸 보면 네로보다 더 좋은 시술을 받았을 테고.
“어이. 일어나라.”
“끄어어억!”
태평하게 기절한 노만을 거칠게 깨운 칸이 곧장 취조에 나섰다.
“이, 미개한 야만인 놈이……!”
“매를 버는군.”
감히 순진한 야만인을 속여놓고, 뻔뻔히 눈을 치켜뜨는 노만의 행태에 칸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무래도 대화를 나누기 전에 진솔한 설득의 시간을 거쳐야 할 듯했다.
*
*
*
“끼에에엑! 끼에엑!”
과연 진심은 통하는 법인가.
한결 온순해진 노만의 모습에 칸이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꺼으으윽. 끄윽.”
“음…. 저거 살아있는 거 맞나?”
“무슨 소리냐. 멀쩡히 숨 쉬고 있는데.”
“말 그대로 숨만 쉬고 있잖나.”
미개한 판타지 원주민이 뭘 안다고. 칸은 론의 헛소리를 콧방귀로 일축했다.
“그래. 부원장 노만. 여기가 정확히 어디냐.”
“네, 네카르 산 심부의 경계다….”
“으헉. 심부라고?! 수도원에서 거기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데, 마법이 아무리 대단해도…….”
쉽사리 믿지 못하겠단 어투와 달리, 론은 예상한 답이 나왔다는 것처럼 탄식을 흘렸다. 대충 주변 풍경을 보고 어림짐작한 게 아닐는지.
다만 어지간한 고위계 마법으로도 실현하기 힘든 ‘공간이동’의 이적에 놀란 눈치였다.
“마법보다는 악마의 권능을 이용한 일종의 사기니까. 그리 놀랄 것도 없다. 애초에 뒈진 시체를 움직이게 하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잖나.”
“드, 듣고 보니 그렇군.”
론은 정확히 알아듣진 못하고, 그저 흑마법이라 가능한 사술쯤으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주문을 발동하고, 그다음은 어쩔 작정이었나.”
“…….”
“묵비권 행사라. 아직 설득이 덜 됐군.”
아무래도 대화가 더 필요하겠어. 노만이 입을 꾹 닫아버리자, 칸은 다시 한번 진득하게 설득을 이어나갔다.
퍽- 퍽- 퍽-
어둠이 내려앉은 숲에 단조로운 타격음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기고만장한 것도 여기서 끝이다! 그분의 손에 미개한 네놈과 건방진 성기사 둘 다 죽을 테니까…!”
“덜 처맞았군.”
아니면 너무 처맞았던가. 다 죽어가던 놈이 뻗대기 시작하자 칸의 입매가 삐뚜름해졌다.
사람 냄새를 맡고 마물이 모여들 가능성도 영 배제할 수 없었기에, 본격적으로 매타작을 시작하려던 칸의 주먹이 덜컥 멈췄다.
“마중이 있었나?”
“흐흐흐. 늦었다 야만인!”
탐색 스킬에 읽히는 기척이 늘어나고 있었다. 속도는 그리 빠른 편은 아니지만, 똑바로 이쪽을 향하는 게 심상치 않았다.
‘흑마법사?’
칸은 기고만장하게 웃는 노만의 목에 발을 올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사태가 급격히 움직이기 시작한 건 전부 노만이 도시에 복귀한 이후다.’
가장 먼저 움직인 건 네로였다.
놈은 칸의 소문을 듣지 못한 용병들을 속여 기습하게 만들었고, 그 자리에 나타나 도시의 용병을 칸이 해쳤단 명분을 내세우며 칸을 공격했다.
하지만 도중에 난입한 아리에스에 의해 싸움은 중단되었고, 노만이 화를 내자 네로는 물러났다.
여기까지의 정황만 보면, 네로와 노만은 반목하는 사이처럼 보인다.
‘그런데 알고 보니, 둘 다 다르킨의 시술을 받았다라?’
같은 따까리지만, 공적을 두고 경쟁하는 사이라는 뜻일까? 아니면 진심으로 다르킨을 추종하는 쪽과 거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르는 쪽의 다툼이었던 걸까?
‘모르겠군.’
다만 분명한 건, 놈이 애초부터 칸 일행이 노르딕에 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일행을 납치한단 계획을 짰다는 것.
그게 아니면 고위 흑마법이 새겨진 장비를 시의적절하게 조달한 부분이 말이 되질 않는다.
‘게임 때랑 다를 게 없군. 더럽게 조심스러워.’
거기에 치밀하다.
놈은 칸 일행이란 추격자에게서 몸을 숨기는 게 아니라, 아예 역으로 잡아들여 자신의 전력을 보강하는 걸 선택했다.
어찌 보면 사령술의 대가라 할 수 있는 선택.
다만 노르딕에서 아리에스가 실종되면, 만신전 교회가 노르딕에 전력을 투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을 텐데…….
‘만신전 교회가 들이닥쳐도 뒷수습할 자신이 있다는 소린가?’
대체 그 뒷수습을 어떻게 한다는 건지, 칸의 머리로도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뭐가 됐건… 일단 벗어나는 게 낫다는 판단이 들었다.
“쓸모가 없어졌어.”
“잠……!”
노만의 목에 올려놓은 발을 그대로 지그시- 내리누르자, 뿌드드득-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경험치가 상승했다.
다르킨의 신체 개조와 신성력을 보유한 걸 후하게 쳐줬는지, 실제 전투력에 비해 경험치가 많이 오른 느낌.
‘이놈 하나로 드디어 70%를 뚫었군.’
그에 기뻐하기도 잠시.
“어이 길잡이. 이 자리를 벗어나게 앞장서라. 흑마법사들한테 포위당하고 싶지 않으면 서두르는 게 좋아.”
“길잡이가 아니라 쇠망치 론일세! 이쪽!”
칸의 언행에서 적이 나타났음을 눈치껏 알아차린 론이 뒤도 안 돌아보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방향이 퍽 의외였다.
적과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게 아니라, 심부의 경계를 따라 내달리듯 이동을 시작한 것.
“어쭙잖게 내려가다간 마물한테 포위당할 걸세! 주변의 나무들이 가지가 꺾인 걸 보면, 쥐대가리의 서식지가 근방에 있을 거고!”
평범한 야만인이라면 납득하는 데에 장황한 설명이 필요했겠으나, 칸은 달랐다. 다회차의 게임 플레이로 쌓인 그의 마물 지식은, 어지간한 베테랑 용병보다 방대했다.
‘쥐대가리라.’
“억!”
발에 땀이 나도록 달리던 론이 갑작스러운 부유감에 허우적댔다. 어딘가 익숙한 상황과 감각. 이건 분명…!
“혀 안 깨물게 조심해라.”
“형씨……!”
반론은 듣지 않았다. 론을 짐짝처럼 어깨에 짊어진 칸이 땅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쿵!
깊은 잠에 들었던 동물들도 잠에서 확 깨어날 만큼 둔중한 진동이 넓게 퍼지고, 칸의 목적을 알아차린 론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쥐대가리. 마물치고는 드물게 지능이 뛰어나 무리 지어 생활하기에, 얕봤다간 베테랑조차 꼼짝없이 물어 죽이는 놈들.
평소엔 땅 아래에서 수면을 취하고, 사냥할 땐 나뭇가지를 자유자재로 타고 다니며 먹잇감을 쫓는 습성 탓에 다른 마물들이 쥐대가리의 영역엔 얼씬도 안 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리고 지금. 칸이 한 짓은 간단했다. 땅 아래에서 숙면을 취하던 쥐대가리를 모조리 깨워버린 것.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잡아!”
“저기 있다! 잿빛 피부, 오크 같은 생김새! 성기사와 함께 다닌다던 야만인이다!”
추격자들이 육안에 보일 만큼 거리를 좁혔다. 아무래도 흑마법으로 속도를 높인 듯했다.
드드드드!
그 상황에 분노한 쥐대가리들이 굴을 파는 소리마저 들려오자, 기겁한 론이 칸의 등짝을 퍽퍽 두들겼다.
“어서 출발하게!”
“뛴다. 꽉 잡아라.”
“어, 엇! 우와아악!”
[도약 (C) - 98.1%]
─C등급 효과, 도움닫기 :: 크게 진각을 밟으며 점프한다. 근력에 따라 효과가 상승한다.
─D등급 효과, 안전한 착지 :: 낙사 데미지가 대폭 감소한다.
꽝───!!
무려 59의 근력이 더해진 도약 스킬이 칸의 몸을 땅으로부터 멀리 밀어낸다. 그건 어떤 면에서 도약이 아니라, 비상에 가까웠다.
어느덧 B등급을 앞둔 스킬 숙련도와 압도적인 근력 스탯이 합쳐져 만들어낸 이적.
“우워어어어억!”
“나, 날았다!”
“아티팩트를 쓴 건가?! 저게 무슨!”
마나로 육체를 강화할 수도 없고, 마법도 쓸 수 없는 야만인이 날아올랐단 사실에 당황한 흑마법사들이 허망하게 하늘을 바라봤고.
“키르르르르!”
“쥐대가리다! 하수인들 꺼내!”
“저 미개한 야만인이 무슨 짓을……!”
마침내 땅굴 위로 올라와 제 잠을 깨운 인간들을 향해 수십, 수백의 쥐대가리들이 이빨을 드러낸다.
흑마법사와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마물이 뒤섞여 발생한 혼란. 그 모든 걸 유도한 칸의 어깨에 짐짝처럼 탑승한 론이 뺴액- 비명을 내질렀다.
“떠, 떨어진다아!”
아니, 안 떨어진다. 나지막히 중얼거린 칸의 손도끼가 저 멀리 보이는 거목을 향해 쏘아졌다.
빠르게 멀어지는 손도끼. 그를 따라 회색의 실타래가 허공을 수놓았다. 엘리야에게서 빼앗은 ‘아라크네의 은반지’로 만든 실을 손도끼에 칸이 미리 묶어둔 것.
터어엉──.
머지않아. 눈으로 봐도 까마득한 거리에 있는 거목에 손도끼가 정확히 꽂힌다. 한쪽 어깨에 사람을 짊어지고, 나머지 한 팔로 공중에서 투척한 거라고는 믿기 힘든 명중률.
[투척 (B) - 90.1%]
─D등급 효과, 백발백중 :: 명중률이 상승한다.
팽팽하게 당겨진 ‘아라크네의 침묵실’이 버거운 듯 부르르- 떤다. 자칫 주문이 새겨진 반지 자체가 망가질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칸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촤르르르륵!
반지의 회수 기능을 이용하는 동시에. 공중에서 허리를 튕기며 과감히 침묵실을 힘껏 잡아당겼다.
일순간 빳빳하게 당겨졌던 실이 퉁겨지듯 출렁이고, 칸의 몸이 도끼가 박힌 나무를 향해 쏘아졌다.
창의적이다 못해 무모하게 느껴지는 수법으로 전장을 이탈한 야만인을 허망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흑마법사들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떤 무례한 인간 탓에 잠에서 깨어난 쥐대가리들이 흉악한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키르르!”
“키이이익!”
“이, 이런 제기랄─!”
*
*
*
퍽! 쿠당탕!
“어이쿠……. 나 죽네!”
“엄살은. 일어나기나 해라.”
“날아서 나무에 처박히긴 또 처음이구먼. 그럴 수도 있지.”
반쯤 도박에 가까운 곡예였으나, 어쨌든 무사히 추격자를 떼어낸 칸이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태세를 정비했다.
“시간은 좀 벌었지만, 아직도 안전한 건 아니야. 곧장 움직여야 한다.”
“설마…. 그 많은 쥐대가리들을 뚫고 추적이 또 붙을까?”
칸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사령 계통의 흑마법사한테 어중간한 물량은 안 통해. 오히려 시체가 늘어나서 힘만 더해질 뿐이다. 게다가…….”
“게다가?”
“아니. 확실해지면 말해주지.”
칸은 품에 챙긴 장신구…. ‘아에카리스의 구덩이’를 발동하고 쓸모를 다한 흑수정 목걸이를 의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굳이 부정확한 정보로 겁을 줄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취할 행동은 달라지지도 않을 테고.’
의도치 않게 적의 앞마당에 떨궈진 상황이지만, 칸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아니, 진심으로 상황이 나쁘지 않다 판단했다.
그도 그럴 게.
정상적인 방법으로 여기까지 도달하려면 끝도 없이 나타나는 마물을 뚫고, 중간중간 난입해 방해하는 흑마법사도 족친 뒤에야 가능했을 터.
‘사실 이거… 적의 앞마당에 드랍이 떨궈진 거 아닌가?’
본의는 아니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그랬다.
즉, 이건 기회였다.
‘도시에 남은 꼬맹이가 걱정이긴 한데…….’
칸은 그냥 걱정 않기로 했다.
‘걔가 바보천치도 아니고, 어련히 잘하겠지.’
무엇보다.
칸이 쥐새끼 사제, 베델을 경유해 섭외해둔 협력자가 슬슬 노르딕에 도착했을 시간이었다.
칸이 빙의자가 아니라면 꼬시는 게 불가능했을, 아주 강력하고 까탈스러운 협력자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