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야만전사-22화 (22/132)

#022화. 다르킨 토벌전 (2)

[신기하군. 신기해.]

“뭐가 신기하다는 거냐.”

악령…. 아니 자기 스승에게 씌인 흑마법사의 눈깔이 데구르르- 돌아가며 칸의 몸을 샅샅이 훑었다.

노골적인 탐색 행위였다. 마치 먹잇감의 상태를 살피는 사냥꾼의 시선 같다고 할까.

[서릿골의 야만인들은 모두 역전의 용사라고들 하지. 흑익공의 대전사가 명성을 떨치면서 그런 소문이 더 퍼졌고. 사실 전부가 그 정도는 아닌데 말이야. 그런데 너는 조금 달라. 정말 흑익공의 대전사와 비교해도 되겠어.]

말 존나많네. 대체 뭔 소리를 하나 싶어 얌전히 듣고 있던 자신의 행동을 즉시 후회한 칸이 인상을 찌푸렸다.

“주문쟁이가 뭘 안다고…. 게다가.”

내 질문에 대답이 아직이잖냐. 씹새야.

“그래서. 아에카리스랑 계약했냐고. 안 했냐고.”

[흐흐. 흐흐흐! 정말 비상식적인 녀석이구나! 무식한 야만인이 악마의 이름을 어찌 알고 있는 거지? 만신전 교회에서도 소수만이 공유하고 있을 텐데. 설마 그 어설픈 성기사가 알려주더냐?]

“글쎄. 내 질문에 답하면 알려주지.”

푸흐흐. 다르킨은 늙어서 주책부리는 노인네처럼 음흉한 웃음으로 침묵을 대신했다. 대답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너 야만인아. 어째서 도망치지 않았느냐. 동부의 오우거 슬레이어란 허명을 듣고 나니까. 없던 만용이라도 생겨난 것이냐.]

“늙어 비틀어진 흑마법사 족치는 데 만용이랄 것까지야.”

[승산을 논할 거였다면, 네가 아니라 그 건방진 성기사 계집이 왔어야지. 네놈은 내 공방의 근처로도 올 수 없을 거다. 마나를 느낄 수 없는 열등한 인종이니까.]

“충고 고맙다. 늙은이.”

자꾸 말꼬리를 빙빙 돌려대는 다르킨의 꼴을 보아하니, 영양가 있는 대화를 나누긴 영 그른 듯했다.

노골적으로 시간을 끌어보려는 행태 아닌가. 칸은 악령에 씐 흑마법사를 번쩍 들어 올렸다.

물론, 그사이에도 다르킨은 헛소리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만.

[차라리 그대로 돌아 내려가는 게 조금이라도 살 가능성이 높을 거다. 네놈이 어린 오우거를 사냥한 전사건, 뭐건, 지금의 네 곁엔 그때 함께 한 마법사가 없으니…….]

“야.”

더 들어줬다간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었다. 주먹을 내리찍어 흑마법사의 입을 박살 낸 칸이 으르렁거렸다.

“그냥 닥치고 기다려. 곧 네놈 모가지도 비틀어줄 테니까.”

흑마법사. 아니, 다르킨이 빙그레 눈웃음을 지었다. 어디 해볼 수 있으면 해보라는 듯.

꽈득-!

골통을 짓밟아 으스러뜨린 칸이 얼떨떨하게 대화를 지켜보던 론을 무시하고 생각에 잠겼다.

‘다르킨은 나를 모른다.’

안다고 하더라도, ‘동부에서 어린 오우거를 잡고 명성을 떨친 야만인.’ 정도에 그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칸은 놈을 안다.

‘그것도 아주 잘. 더럽게 잘 알지.’

‘미들랜드 퀘스트’의 제5막 보스. 다르킨 페레야스는 밸런스 붕괴의 첫 시발점을 찍는 보스였고, 대부분의 유저가 놈의 벽을 넘지 못하고 ‘꼬접’을 해버린다.

물론, 칸은 접지 않고 연구했다. 놈의 패턴과 알고리즘, 특성……. 가리지 않고.

‘너 하나 잡으려고 내가 뭔 개고생을 했는지. 모를 거야.’

다르킨 페레야스는 결코 의미 없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놈의 행동 모든 게 전부 복선이고,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면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다 그대로 게임 오버다.

‘놈은 노르딕에서 나와 아리에스를 습격했다. 그래놓고는 정작 자기 영역이나 다름없는 네카르 산에 내가 끌려들어 오자, 이제는 가망이 없느니 떠들며 은근히 도주를 종용했고….’

오랜만에 ‘미들랜드 퀘스트’의 공략에 나선 기분이었다.

팽팽하게 돌아가는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단편적인 정보가 마구 뒤섞여 헤엄친다. 칸은 그중에서 쓸모가 있는 것들을 골랐다.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던 칸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그런 거였나? 그래서 시답잖은 짓거리를 한 거였어?’

어째 정답을 알고 나니 힘이 쭉 빠졌다.

“론. 아까 말했었지. 감으로는 쭉 직진하는 게 맞는 것 같다고.”

“그렇네만. 꼭 내 말을 전적으로 신뢰할 필요는 없지 않나 싶기도 하고…. 나는 길잡이가 아니라 쇠망치니까…….”

“아니. 아무래도 네 감이 정답인 것 같군.”

아까도 말했듯.

다르킨은 의미 없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자기 제자랑 악마숭배자를 대놓고 죽으란 듯이 밀어 넣고, 칸에게 쓸데없는 말을 떠벌린 건 놈이 심심해서 한 행동이 아니란 말이다.

그리 가정하면 남는 결론은 하나.

‘가까워지고 있는 거다. 놈의 공방에. 그리고 지금 녀석은….’

모종의 이유로 시간을 끌어야 하는 처지일 것이다.

*

*

*

파직.

“의식의 연결이 끊겼나.”

‘아쉽게 됐어. 기왕이면 그 야만인이 싸우는 모습을 봐뒀으면 좋았을 텐데…. 금제가 발동한 시점부터 의식 공유가 이루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나.’

젊은 소년의 목소리가 커다란 홀을 가득 채운다.

나지막한 목소리이나, 어떤 존재감이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그에 소년의 곁을 지키던 흑기사가 철그럭- 소릴 내며 반응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

흑색의 전신 갑옷에 투구까지 쓴 채 침묵하는 흑기사에게선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자아는 존재하는 듯했는데, 주인의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주억이는 모습이 그러했다.

“야만인 따위가 내 영역에서 날뛰는 데, 그걸 방치해야 한다니. 애석한 일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소년의 천진난만한 물음에 홀 여기저기에서 흑마법을 준비하던 이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개중에는 소년보다 훨씬 연로한 노인이나 건장한 체격의 청년들도 있었는데, 그들 모두가 어린 소년의 말 한마디에 동요하는 광경은 퍽 기이했다.

“기껏 내 지식과 주문, 힘을 나누어주어도 그릇이 모자라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한심한 것들.”

소년이 키득키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에 반응한 것처럼. 홀의 외벽이 조금씩 요동치는 게 보였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 같았다.

“엘리야의 죽음이 이제 와선 애석하게 느껴지는구나. 그 아이의 재능이라면, 내 지식을 이어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텐데. 아…. 그러고 보니 엘리야를 죽인 것 또한 저 건방진 야만인이었군.”

“스승님.”

소년의 혼잣말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흑마법사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머리가 완전히 하얗게 센 노인이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리암. 나의 첫 제자.”

“……스승께서 직접 나서기 힘든 상황이시니, 제 손으로 저 건방진 야만인의 시체를 가져오겠습니다.”

“네가?”

네 실력으로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냐? 라고 묻는 듯한 어조에 리암이라 불린 노인이 표정을 감추려 고개를 수그렸다.

물론, 소년은 그것조차 알고 있다는 듯이 매끄러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아서라. 리암, 나의 오랜 제자. 네가 엘리야의 재능을 질투해왔던 건 알고 있단다.”

“그런.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럼 내 착각이었겠지. 그래도 너에게 맡길 수는 없겠구나. 비록 로렌 지방의 탕녀가 그를 도왔다곤 하나, 어쨌거나 그는 오우거와 대적할 수 있는 전사란다. 나는 널 지금 잃고 싶지 않아.”

“……엘리야에겐 저 야만인을 사냥감으로 골라주시지 않았습니까.”

“정말 그 아이가 해낼 거라 여긴 게 아니란다. 오히려 제 부족함을 깨달으라고 보낸 거였지. 구차하고, 비참하게 살아 돌아와 영혼의 계약을 맺길 바랐어.”

소년의 자상한 설득이 통한 걸까. 리암은 한층 누그러진 태도로 저를 보내달라 간곡히 요청했다.

“…저 야만인을 처단하겠단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스승님의 비의가 목전인 만큼. 시간이라도 끌어보겠습니다.”

“운이 좋으면, 그 전사를 직접 처리하는 방식으로 말이냐?”

리암은 침묵했고, 소년은 오묘한 표정으로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허락을 내렸다.

“그렇게 해야 네 속이 시원하다면야. 하지만 절대 공방의 입구를 드러내선 안 될 것이다.”

“차라리 죽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등을 돌린 리암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소년의 눈빛은 지독하리만치 무감정했다.

직전까지 건넨 다정한 말들 모두. 허식에 불과한 듯.

‘아. 멍청하지만, 귀여운 내 제자 리암.’

소년은 직감했다.

리암은 비로소 오늘, 긴 생에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다. 부족한 재능에 절망하고, 영혼을 악마에게 넘긴 흑마법사의 흔한 말로였다. 그래서 더 애틋하고…… 우스웠다.

“너희는 준비를 서둘러라.”

“예.”

이젠 몇 남지 않은 제자들과 벌레처럼 증식하는 악마숭배자들에게 의식의 준비를 서두르라 종용한 소년은 뼈로 엮은 의자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런데 어둠이 찾아와야 할 시야에 다른 것들이 비치기 시작했다.

리암이다. 무어가 그리 분한 건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공방을 나서는 리암이 보였다.

‘확실히 죽겠어.’

차분하게 전력을 다해도 승산이 없는 전사를 상대로 감정적 동요를 가라앉히지 못한 채 싸우러 가다니.

소년은 늙은 제자의 어리석음에 혀를 찼다.

리암이 싸움터로 정한 장소는 공방에서 나오는 시체를 처리하는 시체처리장의 바로 위쪽이었다.

아마 그곳의 시체를 지상으로 끌어올려 언데드로 되살리는 것으로 야만인을 압박할 생각이겠지.

‘나쁘진 않은데…….’

사령술을 주류로 익힌 흑마법사의 문제가 저것이다. 수로 밀어붙이면 못할 게 없다는 믿음.

물론, 대부분의 상황에서 압도적인 물량은 곧 압도적인 폭력으로 작용하지만….

‘그것도 결국. 일정 수준 이상의 강자를 상대할 수는 없음이니.’

제국 기사나 마탑의 마구스, 제국의 검호처럼 개인의 무력이 군세를 갈음하는 강자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

그리고 그걸 깨닫지 못한 사령술사의 말로는 대개 비슷하다.

‘리암도 그리되겠지.’

터벅- 터벅-

소년은 갑자기 들려오는 발소리에 옅은 웃음을 지었다. 리암에게 교훈을 안겨줄 이가 찾아온 것이다.

[산이 넓은 거냐. 네가 길을 못 찾아서 넓게 느껴지는 거냐.]

[무슨 소린가. 그냥 앞으로만 쭉- 가고 있는데. 그냥 네카르 산이 넓은 거지! 그리고 난 길잡이가 아니라……!]

[쇠망치 뺏기 전에 닥쳐.]

긴장감 없는 대화를 나누는 야만인과 멍청한 얼굴의 용병이 소년의 시야에 비친다. 기어코 그들이 소년의 앞마당에 도달한 것이다.

‘놀랍군. 무슨 방법을 썼는지 짐작조차 안 가.’

서릿골의 야만인은 태생적으로 마나를 느끼지 못한다.

자연에 흐르는 용의 기운 탓에 공간이 일그러진 네카르 산에서 그가 길을 찾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설마 저 멍청하게 생긴 용병에게 뭔가 있는 건가.’

소년은 의문을 느꼈지만, 당장 벌어진 상황에 이목을 집중키로 했다.

[너는 또 뭐냐.]

[왔구나. 건방진 야만인아. 나는 리암 웰루스. 위대한 스승 다르킨 페레야스의 주문과 지식을 사사한 흑마법사다. 네게 목숨을 잃은 수많은 사형제들의…….]

리암의 패배는 정해진 결과다.

그렇다고 리암이 형편없이 깨질 일은 없을 터였다. 적어도 저 전사의 발목을 붙들고, 상처 입히는 정도는 가능하겠지.

소년은 자신의 늙은 제자를 소모해 야만인의 전투를 관찰하고, 혹시 모를 전투를 대비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 하찮은 왕국을 허물고, 새로운 왕이 되실 스승의 곁에 서게 될!]

[시발. 말 존나 많네.]

[뭐.]

피이이잉──!

“읏.”

갑작스러운 충격에 소년이 신음을 흘렸다.

그에 놀란 주변의 흑마법사들이 다가와 괜찮으냐 호들갑을 떨었으나, 소년은 대답하지 않고 시야에 비치는 광경에 집중했다.

터벅- 터벅- 터벅- 쩌억.

[이 새끼는 뭐야? 대체.]

[흑마법사 아닌가? 음침하게 생긴 몰골 보니까 딱 그래 보이네만.]

[내가 몰라서 그걸 물었겠냐? 폼이란 폼은 다 잡더니 한 방이 뭐야. 한 방이.]

대충 던진 것처럼 보이는 손도끼에 리암이 맞아 죽었다. 거기까지는 이해했다.

아니, 그럴 수가 있나? 방어 주문을 미리 발동하고 기다린 마법사를 저런 무식한 방법으로 죽인다고?

‘설마 힘으로……? 아니, 제아무리 서릿골 야만인들의 육체가 강인하다 해도 저 정도는 아니다.’

다르킨은 짐작했다.

저 야만인의 도끼에 무언가 비밀이 있을 거라고. 그게 아니면 말이 되질 않는다. 아마 충격을 극대화하는 유형의 주문을 새겼겠지.

[음. 그래서 이제 어쩔 건가? 나도 이제는 잘 모르겠는데.]

멍청한 용병의 말에 소년은 침착함을 되찾았다.

어차피 저 야만인과 부딪치는 건 당장의 일이 아니다. 설령 싸우게 되더라도 그가 패배할 일은 단연코 없다.

노르딕에 있을 성기사 합류한다 하더라도, 그 결과는 변치 않는다.

‘애초에. 공방의 입구를 발견하는 것부터 불가능하다.’

정교한 흑마법으로 숨겨둔 입구를 발견하는 건 둘째치고, 그걸 뚫고 들어오려면 마탑의 마구스 정도는 데려와야…….

[쇠망치 줘 봐.]

[차라리 날 죽이게! 내게서 쇠망치를 뺏으면, 나는 그냥 론이 돼버리질 않나!]

[그럼 그냥 죽던가. 마침 사령술사도 있겠다, 뒈져도 살아나면 되잖아.]

[……그냥 론이어도 괜찮겠군. 여기 있네.]

그때였다.

[요 언저리인 거 같은데……. 아닌가? 조금 더 옆인 거 같기도 하고……. 탐색은 등급을 좀 올리든가 해야지……. 아, 여기군.]

야만인이 묵직한 쇠망치를 지팡이처럼 써서 근처의 땅을 이리저리 건드려보더니, 세찬 기합과 함께 팔을 들어 올린 것은.

[후으읍─!]

쾅──!

쾅──!

쾅──! 쩌어억!

투석기로 쏜 돌덩이가 내려꽂히는 듯한 굉음이 소년이 있는 지하의 홀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거기에 시야를 공유하고 있던 인조 생명체가 여파를 버티지 못하고 까무룩 기절하자, 시야 공유가 서서히 끊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찾았다. 입구.]

리암이 전투에 이용하려 한 시체보관소의 천장을 부숴 길을 만든 야만인이 자랑스레 외치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거기는 입구가 아니다! 이 미개한 야만인아──!’

암전하는 시야 속, 소년이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