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3화. 다르킨 토벌전 (3)
제5막의 마지막, 다르킨 토벌전이 더욱 까다로운 이유는 지하에 존재하는 다르킨의 공방이 그 자체로 난공불락의 요새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네카르 산의 마물과 흑마법사, 악마숭배자들. 그 모든 방해를 뚫고 어찌저찌 다르킨의 지하 공방에 입장한 플레이어를 기다리는 건, 살아있는 생물처럼 움직이는 거대한 지하 동굴과 사방에서 달려드는 언데드의 군세. 그리고 강력한 네임드.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이 난관을 뚫지 못하고 좌절했었다.
‘나도 지긋지긋할 정도로 리트라이 했었고.’
이상할 정도로 정확한 론의 직감을 따라 걷다 마주친 늙은 흑마법사를 처리한 장소에서, 기시감을 느낀 것은 그 영향인 걸까.
수십, 수백 번 모니터로 본 풍경이라 그런 거겠지. 당연히 먼 미래의 네카르 산은 지금과 많은 부분이 다르지만,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확신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어쩌면…….
‘내가 플레이했던 캐릭터들의 기억이 떠올랐던 일이. 이 기시감과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르지…….’
그러한 고민은 일단 뒤로 미루었다. 칸은 론에게 빌린 쇠망치로 바닥을 툭툭 건드리며, 요 근래 쓸모가 많은 탐색 스킬을 열심히 돌렸다.
[탐색 (D) - 19%]
예상대로. 발아래 쪽의 생명 반응이 탐색 스킬에 잡혔다. 칸은 그 즉시 쇠망치로 바닥을 부쉈다.
“우워어어억!”
악성 스토리 스킵충인 탓에 자세한 것까지는 모른다만, 칸의 몇 안 되는 기억 중 그나마 확실한 게 있다면….
‘다르킨의 지하 공방은 기존에 있던 유적을 놈이 제멋대로 차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유적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지하 시설이라는 것이었다. 맵 설명에 나왔을 정도니 틀림없겠지.
중요한 건, 이 지하 시설이 생각보다 불안정한 상태라는 점이다. 제5막의 다르킨은 그걸 악마의 힘으로 해결했었다마는.
지금 다르킨의 실력으론 흉내조차 낼 수 없을 터였다.
마탑의 ‘마스터’들과 동등한 대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게 아니고서야, 악마가 자기의 신체 일부를 내어줄 리가 없지 않나.
“처, 천장이 무너진다……!”
“피해! 깔려 죽는다!”
처음엔 자그마한 균열이었고, 그 균열은 순식간에 범위를 넓혀가더니 이내 칸이 딛고 선 땅 전체로 퍼져나갔다.
결국, 초인의 근력을 버티지 못한 바닥. 아니, 석실의 천장이 무너져내렸다.
쿠콰콰콰캉!
그 아래에 있던 사람들에겐 재해요. 곁에서 지켜보던 론에겐 꿈만 같은 광경이었으니.
사람의 손으로 이 모든 걸 일으킨 야만전사가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가자. 론.”
“그, 그러지.”
무너진 바닥 아래는 칸도 익히 알고 있는 구역이었다.
시체처리장. 정석적인 루트로 진입했다면 수백, 수천의 언데드에게 포위당하는 구역이다.
그러나 이 공간에 멀쩡한 시체는 더 이상 없다. 무너진 천장에 모두 휩쓸려 짓뭉개졌기 때문에.
“형씨. 사실은 야만인이 아니라 거인의 후손이라던가. 그런 건 아니지?”
“무슨 소리냐. 그건.”
“아니 그렇잖나. 사람이 바닥을 무너뜨리다니……. 대체 힘이 얼마나 강한 건가?”
물론, 론도 칸이 강하다는 것쯤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마녀의 실험체처럼 변한 네로를 가뿐히 상대하고, 건물보다 높이 뛰어서 수도원의 천장을 부수는 짓거리를 곁에서 보고 직접 겪지 않았던가.
그런데 쇠망치로 바닥을 두들겨 무너뜨리다니?
‘사람 힘이 아무리 세도 그건 좀…….’
론이 속으로 경악하는 반면에. 칸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섣불리 떠올릴 수 없었다. 얼마나 강하냐니.
‘나도 잘 모르겠는데.’
현재 칸의 근력은 59.
그 수치는 칸이 역대로 육성한 캐릭터들 중에서도 비교할 대상이 많지 않은 수준이었다.
물론, 칸이 민첩 위주의 전사를 선호한 탓도 있긴 하다마는.
‘미들랜드 퀘스트’에서 인간 종족의 전사 빌드 기준으로 근력이 59가 되려면 최소한 40레벨은 찍어야 했다.
그것도 근력 스탯이 붙은 장비나 스킬이 잘 떠줘야 가능할 터.
물론, 그렇다고 칸이 40레벨 캐릭터만큼 강하단 소린 아니었다.
‘미들랜드 퀘스트’는 기본적으로 보유한 스킬과 셋팅한 장비에 따라 강함이 크게 나뉘니까.
실제 칸이 육성했던 40레벨 캐릭터와 지금의 칸이 맞붙으면, 조금도 버티지 못하고 끔살당할 게 분명했다.
‘그래도 굳이 비교하자면…….’
“힘으로만 따지면, 약골 오우거랑 비슷할 거 같은데.”
“오우거한테 약골이란 말이 가당키나 한가? 주먹질, 발길질로 성벽을 무너뜨리는 괴물인데.”
“있으니까 하는 말이지.”
“본 적 있나?”
얼마 전에 직접 족치고 왔다. 새끼야. 칸은 그 말을 속으로 삼킨 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지하 공방의 대략적인 구조는 이미 숙지하고 있었지만, 미래의 것과 지금은 큰 차이가 있었다.
‘시체보관소를 기준으로 쭉 왼쪽으로 가면 수호자 방이 나왔었지. 거기서 악마의 위장을 소환한 매개를 부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오른쪽 루트에서 갈림길을 3-1-2-1-1 순으로 고르면 보스 방이…….’
이처럼. 다르킨이 추가적으로 확장하고, 악마의 위장으로 구조를 복잡하게 만든 미래의 지하 공방을 동일시하기엔 무리가 있으리라.
그럼, 여기서 어느 쪽으로 가는 게 정답일까…….
제자리에서 한참 고민하던 칸이 결정을 내렸다.
“우린 왼쪽 길로 간다.”
*
*
*
지난밤 벌어진 일들의 수습을 노르딕 수도원의 사제들에게 맡긴 아리에스는 제롬과 얀을 동행한 채 네카르 산을 올랐다.
머리가 희끗하게 물들기 시작한 중년의 신사. 회색 마탑의 마구스 제롬.
그의 곁에서 불안한 눈빛을 이리저리 굴리는 심약한 인상의 청년 마법사. 마구스의 제자 얀.
백금발을 총총 흔들며 작은 몸집으로 일행의 전열을 지키고 선 아리에스.
그렇게 세 명으로 이루어진 파티의 전진은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산의 초입에선 퍽 귀찮게 들러붙던 마물들도, 성기사와 마법사가 벌이는 학살에 겁을 먹고 도망다닐 만큼.
게다가 미로처럼 꼬인 심부의 환경조차 큰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이쪽에서 냄새가 나.”
“흠. 이건 흑마법으로 새긴 표식 같군. 아무래도 이곳의 환경을 극복하려고 다르킨, 그 떨거지가 수를 쓴 것 같소. 수준도 썩… 나쁘진 않고. 물론, 나만큼은 아니지만 말이오. 금방 해석해드리지.”
정의의 신의 권능으로 흑마력의 악취를 추적할 수 있는 성기사. 마탑에서 한 사람 몫의 마법사로 인정한 마구스. 둘이 힘을 합치자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쉽게.
다르킨의 공방을 찾을 수 있었다.
“이게 무슨 광경인지 모르겠군. 땅이 왜 무너져 있는 거지?”
“그, 글쎄요. 스승님도 모르는 걸 제가 어찌 알겠어요.”
“제자야. 마법사란 끊임없이 고민하고 사색해야 하는 존재란다.”
“스승님도 생각 안 하고 제게 여쭤보신……. 아, 아닙니다!”
두 사제의 만담을 대충 흘려들으며 아리에스는 눈앞의 참사 현장에 가까이 다가갔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코르디 칸. 무식한 그의 동료뿐이었다.
“우리도 이쪽으로 가.”
“노골적인 함정일 수도 있지 않겠소? 차라리 신중하게 입구를 열고 들어가는 것이.”
“함정 아냐. 내 동료가 한 짓.”
“동료…? 사람이 아니라 그린스킨을 동료로 데리고 다니셨소?”
“사람 같지 않은 야만인.”
아리에스는 적당히 대답하곤 칸이 만들어둔 길을 따라 내려갔다. 무너진 천장의 잔해가 불안정하게 쌓여서 자칫 위험해 보였으나, 성기사에겐 큰 불안 요소랄 것도 없었다.
“너는 이리로 붙어라. 제자야.”
“예엡……. 으허어억!”
제롬 또한 회색 마탑의 상징과 같은 조작 계열 주문을 자신과 제자에게 걸어 사뿐히 내려앉았다.
“갈림길이군. 왼쪽과 오른쪽. 여긴 당신의 후각에 맡기는 쪽이 낫겠지?”
아리에스는 고개를 끄덕이곤 눈을 감았다. 이 지하 공방의 사방에 가득한 시취와 흑마력의 악취 탓에 잠깐 현기증이 일었으나, 끈기 있게 집중력을 유지했다.
정의의 신의 권능은 결코 친절하지 않았다.
처음엔 흑마력의 악취를 맡고서 그 지독함에 기절했었고, 다수의 악마숭배자와 마주쳤을 땐 고문이라도 받는 기분이었다.
신의 힘을 인간이 다루는 것이다. 조절에 난항을 겪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당연하지만, 지금의 아리에스는 권능을 능숙하진 않더라도 자기 의지대로 다룰 수 있었다.
다 똑같이 느껴지는 흑마력의 악취를 구분하고, 그 흐름을 역으로 쫓을 수 있을 만큼.
“오른쪽으로.”
이내 다르킨으로 추정되는 끔찍한 악취를 발견한 아리에스가 눈을 찡그리며 방향을 알렸다.
“괘, 괜찮으세요? 표정이 영…. 성, 성기사님!”
얀의 물음에 아리에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말없이 오른쪽 길로 향했다.
제롬은 제자의 얼빠진 모습에 할 말을 잃은 듯 눈을 흘기며 아리에스의 뒤를 따랐다.
“가, 같이 가요!”
오른쪽 길로 빠져나간 일행을 맞이한 건 어둡고, 기다란 복도였다.
일정한 간격으로 타오르는 등불이 길을 밝히고 있었는데, 시야가 생각보다 짧다는 걸 알아차린 얀이 엇- 소리를 냈다.
“이거. 흑마법 같습니다. 스승님.”
“암시의 저주를 안개의 형태로 빚어 넓게 퍼뜨린 건가. 하찮은 잔재주를….”
제롬이 성가시다는 듯 손을 휘젓자 시야가 확 트였다. 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아리에스는 별다른 반응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애초에 수준 낮은 저주 따위는 성기사의 육체를 침범할 수 없으니까.
그러나 적의 영역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는 것은 저주가 통하건 통하지 않건 부담되는 일이다.
당연히 심리적 압박감이 거셀 수밖에. 그나마 제롬은 본인의 오만한 성정 탓인지 긴장감이 없어 보였다.
“전투의 흔적이 없네요…. 먼저 길을 뚫었다는 성기사님의 동료 분과는 갈라진 걸까요? 그분은 괜찮을까요?”
“무슨 한심한 소릴 하는 거냐. 제자야. 바닥을 무너뜨려서 길을 뚫는 자를 걱정할 시간에 주문이나 준비해라.”
“예? 주문을요?”
얀이 스승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의아한 시선을 던질 때였다.
“키에에엑…!”
기괴한 울음소리와 함께 나타난 건 사람이었다. 아니, 사람의 모습을 한 언데드가 복도를 빼곡히 채우며 밀려들고 있었다.
언데드들은 제각기 다른 장비로 무장한 상태였는데, 그들이 생전에 용병이었음을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도시의 용병들… 이겠죠?”
콰드드득─!
“으악! 스승님!”
가장 앞 열에 있는 언데드들의 머리가 보이지 않는 손아귀에 짓뭉개졌다. 끔찍한 광경에 얀이 몸서리를 쳤고, 제롬의 손이 재차 움직이자 뭉개진 머리가 늘어났다.
가만히 서서 십수 개체를 학살한 제롬의 얼굴은 지극히 무덤덤했다. 그저 반복적으로 손을 휘저어 시체의 머리를 박살 냈다.
“주여 광명을 내려주소서.”
나지막한 기도였다. 그다음은 순백의 검이었다. 성기사의 손에서 비롯된 새하얀 검광이 몇 갈래로 쪼개져 시체들을 조각냈다.
강인한 육체와 경지에 오른 검술을 겸비해야 가능한 움직임이다.
조각내고, 찌부러뜨리고, 박살 낸다.
부정한 사술로 되살아난 시체 따위는 성기사의 돌진을 막을 수 없었다.
“흐얍!”
쩌저저적! 쾅─!
어딘가 힘 빠지는 기합과 함께 쏘아진 무형의 화살은 제롬의 제자인 얀의 마법이었다.
단단히 압축한 공기를 회전시키며 투사하는 회색 마탑의 주문이 시체들의 후방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이 없어요……!”
사람 네다섯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복도를 꽉 채운 시체의 군세는 조금도 줄어든 것 같지 않았다.
“소모전을 강요할 속셈인가. 쓸데없는 짓을.”
“이러다 마나가 먼저 바닥나겠어요. 스승님!”
얀이 앓는 소리를 냈다.
기사나 마법사의 시체도 아니고, 용병의 시체를 아무리 되살려도 성기사와 마법사로 이루어진 일행에게는 별다른 위협이 되질 못한다.
그러나 마나는 물론이고, 체력 또한 무한하지 않았다.
“쯧…. 성가시군.”
“차라리 한 번에 쓸어버리는 건 어떨까요, 스승님!”
“여기서 생매장당하고 싶은 거라면 마음껏 그리 해라. 멍청한 제자야.”
그야말로 지독한 소모전이었다.
작물을 수확하는 농부처럼 단순 노동을 반복하는 기분. 얀의 얼굴에서 긴장이란 감정이 조금씩 옅어졌다.
그건 아리에스와 제롬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긴장을 풀지는 않았으되, 나중에 있을 다르킨과의 싸움을 위해 힘을 의식적으로 아끼려는 움직임을 종종 보였다.
그것 또한 일종의 방심이라 볼 수 있을 것이고, 동시에 다르킨이 어쭙잖은 시체 병사를 보낸 의도였다.
쒜에에엑! 쾅─!
“큭!”
“성기사님! 힉!”
암석에 부딪친 파도처럼 와르르- 무너지던 시체들의 틈바구니에서 시커먼 쐐기가 뛰쳐나와 아리에스를 밀어냈다.
이에 놀란 얀이 주문을 준비하려다, 제롬의 주문이 머리 위에서 폭발한 탓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키이에엑! 키익!”
제롬이 쏘아 떨어뜨린 건 이형의 괴물이었다. 기본적으로는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많은 부분이 달랐다.
어떤 것은 거대한 짐승의 모습을 닮았고, 또 어떤 것은 등에 달린 촉수를 날개처럼 활짝 펼친 기괴한 모습이었다.
제롬의 주문에 당한 괴물은 칸이 마주쳤던 쥐대가리와 닮아 있었다.
“산의 마물들을 이용해서 만든 키메라 같군. 확실히. 인체 개조 하나는 마탑의 기술에도 없는 독창성을 지녔어. 보통은 거부 반응을 일으킬 텐데.”
“스, 스승님. 태평하게 감탄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얀이 말한 대로.
쥐대가리를 닮은 키메라가 가슴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상태에서 비척비척 일어나 이빨을 드러냈다.
쾅! 쾅! 쾅!
앞쪽에선 아리에스가 키메라의 촉수를 신성갑주로 비껴 받아내면서, 손을 바쁘게 움직여 짐승 형태의 키메라가 뻗은 발톱을 쳐내고 있었다.
그리고 시체 용병들이 계속해서 그 수를 더하고 있었으니.
“이, 이거 괜찮은 거 맞죠…?!”
얀이 우는 소리를 내는 동시에.
“그워어어──!!”
“키익!”
사악한 수법으로 만들어진 괴물들이 다르킨 토벌전의 시작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