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화. 다르킨 토벌전 (6)
“뭐, 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왜 그러기는. 눈치 없이 나타났으니까 그렇지.”
“무슨……!”
한창 중요한 순간에 깨방정을 떨며 나타난 론이 억울함을 토로했으나, 칸은 아예 신경을 꺼버렸다. 그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지 않은가.
‘저 자식. 저런 패턴도 있었나?’
칸은 당혹감에 찬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다르킨을 마주보았다.
중성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소년의 얼굴은 제5막의 다르킨과 동일했다.
그런데 황금색 비늘에 뼈로 만든 날개와 꼬리를 달고 있는 건 아예 처음이다.
‘너무 일찍 찾아온 탓에 생긴 변수인가?’
아니, 그건 아니다.
그런 거라면 게임 시절에 비슷한 패턴이 한 번쯤은 등장했겠지. 즉, 이번 회차에 국한된 특별한 변수라는 소리다.
그리고 이번 회차의 세상에서. 이러한 변수를 일으킬 수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는,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다.
‘문제는 대체 어디서 시작된 변수냐는 건데…….’
“일단 족치고 알아내면 되겠지.”
[네놈.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 심부의 마물을 해치우고서, 그 많은 언데드와 키메라를 뚫었다고?]
칸은 대답하는 대신에 목을 좌우로 꺾어 몸을 풀었다.
스킬은 최대한 아끼는 쪽으로 싸웠기에 체력은 그럭저럭 남았고, 일행의 상태도 썩 괜찮아 보였다.
모르는 얼굴이 있기는 한데, 칸이 베델을 시켜 부른 마탑의 주문쟁이리라. 둘이나 올 줄은 몰랐다마는.
“아무래도 자네가 먼저 길을 뚫었던 일행인가 보군. 회색 마탑의 마구스인 제롬이라 하네. 저 녀석은 내 제자인 얀.”
“코르디 칸이다.”
“칸? 칸이라고…. 어디서 들어본 기억이…….”
“한가하게 통성명할 때는 아니지 않나.”
“음…. 그것도 그렇군.”
희끗한 중년의 마법사. 제롬이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기 전에 대화를 끊어낸 칸이 몸 상태의 점검을 마쳤다.
“론. 너는 뒤에서 마법사를 지켜라.”
“누구든 가까이 오면 내 쇠망치 맛을 보여주겠네!”
칸이 맨손으로 대가리 둘 달린 강아지의 목을 뽑아버린 뒤. 묘하게 텐션이 높아진 론을 내버려 두고서, 뼈왕좌 근처에서 아리에스와 대치하고 있는 다르킨에게 성큼 다가갔다.
[나와라─!]
뒤늦게 제정신이 돌아온 다르킨의 호령에 뼈왕좌의 뒤쪽에서 웬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칠흑의 갑주로 전신을 꽁꽁 싸맨 죽음의 기사였다. 기억에 있는 네임드다. ‘타락기사 에렌달.’ 다르킨의 곁을 지키는 최후의 방패.
그 말고도 썩은 고깃덩이를 반죽해 사람 모양으로 빚어놓은 듯한 ‘구더기 구울’과 어지간한 오크보다 거대한 크기의 스켈레톤인 ‘군단장 요우힘’도 있었다.
모두 제5막에 등장하는 네임드들이었다.
뼈왕좌의 뒷쪽, 거대한 피웅덩이 안쪽에 끝까지 전력을 숨겨둔 것이다. 최후의 최후…. 정말 위험한 순간을 대비한 비장의 한 수로 말이다.
[건방지게 구는 것도 끝이다! 네놈 하나가 더해졌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다! 감히 마법사의 공방을 침입한 대가가 무엇인지 똑똑히 알게……!]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이 쇠망치 론을 잊으면 섭하지!”
[닥쳐라!]
난생처음 겪는 론의 정신 나간 입담에 격분한 다르킨이 흑마력을 일으키자, 네임드들이 차례차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은 ‘암흑기사 에렌달’이었다.
언데드 특유의 재생력과 괴력, 생전에 지녔던 뛰어난 검술로 무장한 에렌달은 지금 칸의 실력으로도 쉬이 돌파할 수 없는 존재였다.
“───!!”
에렌달이 내지른 소리없는 포효가 일대에 흑마력을 퍼뜨렸다. 듣는 것만으로 위압 효과를 주는 동시에, 체력을 갉아먹는 위협적인 패턴.
그러나 이쪽엔 성기사가 있다.
“주여…!”
어째선지. 감정적으로 느껴지는 아리에스의 목소리. 그러나 효과는 확실했다. 성기사의 ‘광휘의 외침’이 에렌달의 포효를 상쇄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아리에스는 곧장 달려들었다. 다르킨이 아닌 에렌달을 향하여.
쩌억- 쾅!
칠흑의 검과 순백의 검이 교차한다. 마치 거울을 두고 검술을 펼치는 것처럼, 두 기사의 검이 비슷한 궤적을 그리며 맞붙는다.
자연스레 선택지가 나뉜다.
다르킨, 구더기 구울, 군단장 요우힘. 칸의 선택은 정해져 있었다. 사령술사부터 족치는 것.
[도약 (C) - 98.5%]
여느 때처럼 도약을 수평에 가까운 각도로 펼쳐 단숨에 거리를 좁힌다. 구더기 구울과 군단장 요우힘이 앞을 막아서려 시도하는 게 보인다.
“덩치 큰 괴물들은 맡기게.”
그때 제롬이 지원에 나섰다. ‘아르세이스의 손아귀’에 의해 다르킨에게 향하는 길이 뻥- 뚫렸다.
[허튼 수작을!]
다르킨이라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용인(龍人)의 모습을 한 놈에게서 검은 기운, 흑마력이 넘실 흘러넘쳤다.
칸은 놈이 부린 수작을 단번에 꿰뚫었다. 흑마력으로 하수인의 스탯을 증폭하는 패턴, ‘죽음의 오라’다. 스킬의 대상은 놈의 네임드 중 질량이 가장 큰 구더기 구울이었다.
“끄어어어어!”
주문의 속박을 억지로 끊어버린 구울이 칸의 앞을 막아섰다. 자글자글한 구더기들이 피부를 대체한 역겨운 구울이 주먹을 내리찍으려 했다.
‘저건 때리기 싫은데.’
몸 여기저기에 역겨운 게 다 튈 거 아니야. 인상을 찡그린 칸이 본능적으로 반격하려던 걸 멈추고, 걸음을 돌렸다.
쉽사리 속박을 떨쳐내지 못하는 스켈레톤, 요우힘을 향해.
투쾅──! 쩌억!
[도약 (C) - 98.6%]
칸이 가장 애용하는 수법 중 하나. 도약을 이용한 횡이동은 조절이 힘들단 단점이 있지만, 위력과 속도 하나만큼은 확실한 이동기였다.
발을 구르는 소리와 동굴 벽을 뒤흔드는 타격음이 동시에 터졌다.
흑마법으로 어쩌고 할 틈이 없었다. 요우힘의 거대한 몸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무슨……!]
그런 요우힘의 위에 우뚝 선 칸이 다시 발을 들어 올렸다.
방금처럼 무식한 속도로 돌진해오는 걸 의식한 다르킨이 알아듣기 힘든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정체불명의 검은 안개가 다르킨의 몸을 감쌌고, 이내 그 자리에서 다르킨이 사라졌다.
일전에 수도원을 습격한 흑마법사가 썼던 ‘어둠 잠영’이다.
칸의 눈이 번뜩였다.
첫 조우에서 민첩 위주의 캐릭터로 빠르게 접근하면, 다르킨은 반드시 어둠 잠영으로 대처한다는 걸-.
“그럴 줄 알았다!”
칸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비비적 몸을 일으키려는 요우힘의 몸 위에서 거칠게 진각을 내디딘 칸이 손도끼를 들었다.
[투척 (B) - 90.1%]
연달아 사용한 스킬의 여파로 심장이 터질 듯이 뛴다. 그럴수록 칸은 더욱 힘을 쥐어 짜낸다.
쩌저저적!
진각의 여파로 요우힘의 단단한 뼈에 쫘악 금이 가고, 시큰한 통증이 오른쪽 어깨를 관통함과 동시에, 손도끼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
용권풍을 몰고서 날아간 손도끼의 목표는 어둠 잠영으로 모습을 감춘 다르킨이 아니라, 멀찍이 있는 구더기 구울이었다.
거대한 몸집과 그에 걸맞은 근력, 놈의 육체를 이루는 구더기에 담긴 시독(尸毒)까지. 날뛰게 두었다간 피해가 곱절로 불어나는 놈이다.
그러니.
‘우선 너부터 잡는다.’
콰가가가가가각!!
근력 계수가 붙은 B등급 효과, 용권풍의 위력은 벌레 따위가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울의 살점을 대신하는 구더기들이 말 그대로 찢겨 나간다. 놈의 커다란 몸집도 지금 순간엔 방해물에 지나지 않는다.
소용돌이의 범위에서 몸을 빼내기도 전에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완전히 사멸한다.
“우선 하나.”
[이놈──!!]
대노한 다르킨이 칸의 머리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생존기인 어둠 잠영을 역으로 돌진기로 쓴 것이다.
마법 무기로 추정되는 손도끼는 이미 멀리 날아갔고, 공격 직후의 빈틈마저 생긴 상황. 다르킨은 과감히 판단을 내렸다. 가장 위험한 변수부터 제거한다!
[죽어라!]
다르킨의 뼈꼬리가 채찍처럼 휘더니, 부우욱- 파공음을 흘리며 쇄도했다.
신성갑주로 보호받는 아리에스조차 간단히 상처입혔던 일격이다. 판금 갑옷은커녕, 가죽 갑옷조차 걸치지 않은 야만인은 단번에 몸이 두 쪽 날 게 분명했다.
그때 얄미운 목소리가 다르킨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성기사, 마탑의 마구스, 서릿골의 야만인이라는 쟁쟁한 이들 사이에서 잠시 잊혀졌던 용병.
“망치 받아라!”
론이었다.
쿵-!
갑자기 날아든 묵직한 쇠망치가 공중에 뜬 다르킨에게 적중했다.
물론, 아리에스의 ‘단죄의 일격’조차 맨몸으로 버틴 다르킨에겐 별다른 효과가 없는 기습이었다.
겨우 공중에서 몸이 밀려나는 정도에 그쳤을 뿐이다.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콰드득!
칸을 끝장낼 기세로 쇄도하던 다르킨의 꼬리가 아무것도 없는 바닥을 긁어놓는 데에 그쳤다.
제기랄…! 그 즉시 어둠 잠영으로 몸을 빼내려던 다르킨이 얼굴을 구겼다.
“떨, 떨어지세요…!”
그럴 수 없었다.
회색 마탑 특유의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해 다르킨의 육체를 잠시간 붙들었다. 흑마력을 방출해 금새 속박을 흩어놓았으나, 그 잠깐의 틈조차 눈앞의 적을 상대론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일어나라!]
칸의 발판 신세로 전락한 스켈레톤 요우힘이 ‘죽음의 오라’를 받고서 몸을 일으켰다. 마침 위로 뛰려던 칸이 마지못해 뒤로 펄쩍 뛰었다.
[일어나라!]
그리고 다시.
‘죽음의 오라’가 뼈왕좌의 뒤쪽, 다르킨을 재탄생시켰던 알이 있는 피웅덩이로 뻗어 나간다.
“으어어어…….”
“키이에엑!”
의식의 제물로 활용되었던 다르킨의 제자들. 악마숭배자들이 되살아났다. 다만 피와 살을 모두 뽑아낸 탓에 전력으로 활용하긴 어려워 보였다.
어중이떠중이 흑마법사라면 그랬겠지.
[일어나라─!]
저들 모두가 다르킨과 직간접적인 계약을 맺은 이들이다. 피와 살, 어느 것 하나 다르킨의 소유가 아닌 것이 없었다. 심지어 영혼까지도.
계약에 묶인 채 흩어지지 못한 영혼이 하나로 뭉친다. 죽은 것들은 모든 게 나의 힘이 된다. 너희는 그걸 알았어야 한다.
다르킨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더니, 이내 다수의 영혼을 하나로 뒤섞어버렸다.
[우우우우우우……!]
산 채로 피와 살이 흡수당하며 죽어간 고통, 배신, 원한…. 갖가지 감정이 뒤섞인 원령의 울음은 그 자체로 강력한 저주로 화했다.
“커헉!”
“이, 이게 뭔……!”
저주로 인해 마나가 역류한 얀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론은 눈과 귀, 코에서 피를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주문으로 주변의 소리를 완전히 차단한 제롬은 또 다른 주문을 준비했고, 아리에스는 본인의 신성력으로 견디다 빈틈이 생겨 암흑기사 에렌달에게 일격을 허용했다.
그리고 칸은…….
“닥─쳐─라──!”
[워크라이 (C) - 51.4%]
저주가 통하지 않은 것처럼. 더 큰 고함을 내질러 원령의 울음을 완전히 묻어버렸다.
‘저 괴물은 뭐란 말이냐!’
그 모습을 본 다르킨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수로 원령의 저주를 무시한 거지? 설마 저주 방어에 특화된 아티팩트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갖은 생각이 짧은 순간 머릿속을 스쳤다.
당연하지만 전부 오답이었다. 어지간한 기사조차 고꾸라뜨릴 수 있는 저주를 설마 몸으로 때웠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에.
[네놈은 대체…!]
오늘만 몇 번을 놀란 건지, 다르킨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요우힘과 원령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 야만인을 막아!
원령에게 물리적 타격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 한 줌의 마나조차 없는 야만인에겐 딱 알맞은 상대. 거기에 죽음의 오라로 강화된 요우힘이 더해지면 능히 버틸 수 있으리라.
‘용병 놈과 마구스의 제자는 더 이상 싸울 기력조차 없다. 성기사 계집은…….’
생전에 지녔던 성기사의 육체와 타락으로 생겨난 막대한 흑마력, 뛰어난 검술을 지닌 에렌달에게 발을 붙들려 싸움에 개입할 수 없을 터.
그렇다면.
‘마구스부터 처리한다!’
마법사는 어떤 전장에서건 크나큰 변수다. 주문 하나로 전황을 바꿀 수 있기에 그렇다. 더군다나 마구스라면 더더욱.
판단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칸이 그랬던 것처럼 강하게 땅을 박찼다.
강대한 육신의 힘으로 단번에 거리를 좁힌 다르킨의 손에서 흑마력이 뭉클- 쏟아져 내린다.
수만 마리의 뱀으로 이루어진 육체를 가진 악마의 힘을 본떠서 만들어진 흑마법. ‘네베다의 지옥뱀’이 한창 주문을 준비하던 제롬을 덮친다.
그와 동시에.
제롬의 주문이 완성됐다.
회색 마탑 비전의 고위계 마법.
‘붕괴.’
쩌저저저저적!
허공에 형성된 잿빛의 구체가 범위 내의 모든 것들을 찍어누른다. 위에서 가해진 힘을 버티진 못한 바닥이 갈라지고, 무너진다.
그리고 구체가 회전한다.
방사한 힘을 회수하듯, 구체에게서 비롯된 힘이 기세를 잃지 않고 와류를 일으키며 모든 걸 우그러뜨렸다.
“커흡…!”
제롬이 피를 토했다. 무리한 주문의 발현으로 인한 게 아니었다.
방어 마법을 돌파한 ‘네베다의 지옥뱀’으로 인해 체내에 침투한 흑마력이 날뛴 탓이었다.
그 상태에서도 제롬은 수인을 맺었다. 다급히 일으킨 무형의 파동으로 자기 몸을 후려쳤다. 투쾅─. 그 자리로 다르킨의 주먹이 내리꽂혔다.
거기서 의문이 생긴다.
설마 마구스가 주문의 조정에 실패했단 말인가? 어째서 저 마구스의 주문이 자신을 비껴간 거지? 그리고 다르킨의 고개가 무심코 뒤쪽을 향한다.
[……!]
그리고 알아차렸다. 처음부터 저 주문은 자신을 노린 게 아니라는 걸!
“커헉……. 마법사는 냉철한 이성을 가져야 한다네…. 떨거지 흑마법사.”
제롬이 다르킨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주문으로 다르킨을 끝장낼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아리에스가 보여준 가공한 일격조차 통하지 않았는데, 충분한 시간 없이 발휘한 주문으로는 어림도 없단 걸 진작에 파악했다.
성기사도, 마구스도 다르킨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없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한 사람.
“후욱! 후욱!”
단단한 육체를 가진 요우힘과 물리적 타격은 아예 무시하는 원령은 제롬의 주문에 휘말려 소멸한 지 오래였다.
그리고 두 언데드와 격렬한 공방을 펼치던 야만전사. 칸이 ‘아라크네의 침묵실’로 회수한 손도끼를 쥐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끊임없이 치러진 전투로 달궈진 거대한 육체에서 뜨거운 숨을 토하며,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쥐어 짜내며.
뛰었다.
콰─!
앙───!
[도약 (C) - 99.1%]
강적과의 전투로 상승한 숙련도. 이제는 B등급을 목전에 둔 도약이다. 발목에서 둔중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를 악문다.
‘저놈은 어째서 저렇게까지!’
까마득한 세월을 살아간 다르킨이다. 그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 두려움을 지워낼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그럴 순 없었다.
저건 괴물이다. 오로지 싸움을 위해 태어난, 인외의 존재다.
‘어둠 잠영!’
감히 맞부딪칠 생각은 하지 않는다. 공포가 그의 선택을 강제했기에. 어둠이 다르킨의 몸을 휘감기 시작한다.
“쇠망치…!”
흠칫.
잊을만하면 들려오는 얄미운 목소리에 다르킨의 고개가 돌아갔다. 설마 또 쇠망치가 날아올까 본능적으로 몸이 반응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론의 쇠망치는 진작에 저 멀리 투척된 지 오래였기에.
[이놈이─!!]
속았단 사실에 분노하는 것도 잠깐. 침착함을 되찾은 다르킨이 몸을 빼내는 데에 다시 집중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정의의 신이시여─!”
그건 신성력의 폭발이었다. 아리에스를 중심으로 빛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전력을 한참 상회하는 신성력이 그릇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흘러넘친 것이다.
‘강신.’
오로지 신의 총애를 받는 성기사에게만이 허락된 힘.
넘치는 신성력은 형태를 갖추지 않았다. 그저 공동을 가득 메우려는 듯 뻗어 나갔다.
상극의 기운과 충돌한 흑마력이 힘을 잃고 소멸한다. 다르킨의 몸을 감추던 어둠이 흩어진다. 야만전사의 눈이 다시 나타난 적을 포착했다.
빛은 그것으로 효용을 다한 듯 사그라들었다. 거대한 신성력을 코앞에서 얻어맞고도 끝끝내 쓰러지지 않은 에렌달의 검이 무방비한 아리에스의 복부를 훑고 지나갔다.
칸은 멈추지 않았다.
예정에 없던 모습으로 등장한 다르킨. 서부 대산맥의 신화. 황금색 비늘. 메인 스토리. 모든 상념을 지운다.
[투척 (B) - 90.9%]
재차 어둠 잠영으로 도주를 시도하던 다르킨의 시도가 칸이 투척한 손도끼에 의해 막혔다.
거듭되는 방해에 다르킨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공포를 다른 감정이 대신했다.
그것은 분노였다.
[이곳은 내 영역이다─!]
어차피 남은 건 야만인 하나다. 저자만 죽이면 모든 건 해결된다! 놈은 무기를 잃었고, 체력 또한 한계에 달했다! 하지만 내 육체는 여전히 건재하다!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용인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느새 코앞까지 닥친 야만인을 향해, 비늘로 감싸여진 주먹을 움켜 쥐고서 마주 달렸다.
쾅!
마치 쐐기를 꽂듯. 발끝으로 땅을 내리찍은 다르킨의 몸이 포탄처럼 쏘아졌다. 지극히 비효율적인, 오로지 힘에만 의지한 움직임.
용의 비늘을 믿기 때문이다. 얻어맞더라도 버티면 된다. 일방적인 피해를 강요해 힘을 소모시키면 결국 승자는 자신이 될 것이다.
당연히. 칸 또한 자신에게 기회가 많지 않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원령의 저주를 억지로 버텨낸 대가로 얼굴의 구멍이란 구멍에선 피가 계속 쏟아지고, 앞으로 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통증 때문에 쉽지는 않았다.
놈이 역으로 거리를 좁혀준 것에 감사해야 하리라.
‘한 방으로.’
머리를 비운다. 놈은 스스로의 방어력을 믿고 무식하게 달려드는 중이다. 그게 착각이라는 걸. 알려주면 될 일이다.
힘이 용솟음친다.
마치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위기의 순간에 없던 힘이 솟아나는 게 아니라, 남은 여력을 모조리 끌어올린 것이다. 지금 발동한 스킬의 효과다.
그 반동으로 눈앞이 잠깐 흐려진다. 귀가 먹먹해지고, 통증조차 무뎌진다.
그러다 번뜩- 정신이 되돌아왔다. 반투명한 시스템창이 눈앞을 가렸다. 그러나 내용이 눈에 들어오진 않았다. 빠른 속도로 쇄도해오는 다르킨만이 시야에 가득했다.
쾅────.
둔중한 진각이 바닥을 무너뜨린다. 과도한 힘의 제어에 실패해 무너질 거라 생각한 하체가, 어째선지 곧게 버티고 선다.
투척을 남용한 대가로 삐걱대는 오른팔 대신, 왼팔을 뒤로 당긴다. 이내 팔을 뻗으면 닿을 만큼 거리가 좁혀진 순간.
주먹을 뻗었다.
부우우우욱──!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다르킨이 팔을 교차하듯 들어 급소를 보호한다. 그 모습이 기이하리만치 느릿하게 보인다.
으드득─.
팔을 교차한 지점에 주먹이 꽂히고.
비늘이 조각조각 찢어지며, 놈의 팔이 뻥- 터져 핏물로 변한다. 그렇게 창처럼 찔러들어간 주먹이 다르킨의 가슴을 두들겼다.
터엉…….
그리고 그것이.
쩌저저저저적!
미래의 재앙이 될, 다르킨 페레야스의 이른 최후였다.
쾅─────!!!
[끓어오르는 힘 (A) - 11%]
─전심전력을 다한 일격을 날린다.
*
*
*
[제1막, 여정의 시작] - 클리어!
─클리어 보상 :: ???의 비늘 조각, 피의 그릇, 다르킨 페레야스의 연구 일지, 기사 회생(B).
─태고의 혈통 효과로 기사 회생(B) 등급 상승. 불굴의 의지(A) 획득.
[불굴의 의지 (A) - 1%]
─전투 불가능 상태에 빠졌을 때, 불굴의 의지로 극복해낸다. 일정 시간 동안 체력 소모를 무시하고 전투를 지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