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화. 바그너 (1)
[제2막, 용의 흔적이 묻힌 곳]
─실패할 시, 아르곤 왕국의 멸망. 대마경의 침식 가속화. 이후의 시나리오 난이도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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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여기 있었군. 한참 찾고 있었소. 성기사 아리에스.”
“……?”
수도원 부원장에 의해 기력이 크게 쇠한 수도원장을 대신해, 일을 처리하고 있던 아리에스가 서류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마구스 제롬. 어쩐 일로.”
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신사, 제롬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의자 하나를 끌어다 아리에스가 업무를 보는 책상 앞에 놓곤 앉았다.
“뭐기는. 떠나기 전에 잠깐 들렀소.”
“연구는 잘 끝났나요.”
“일단 필요한 만큼은. 제대로 된 연구는 제국의 마탑으로 복귀한 후가 될 거요. 뭐…. 더 자세히 말하자면 내가 연구할 건 아니오. 당신도 알다시피. 이게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마탑이거든.”
“…….”
아리에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제롬은 여전히 아리에스가 마탑의 비밀을 알고 있다 착각하는 듯하지만, 아리에스는 칸에게 이름을 빌려준 것뿐.
기실 마탑의 사정 따위, 그녀는 조금도 알지 못했다.
‘주문쟁이들은 알아서 떠들게 내버려두면, 저가 알아서 착각의 나래를 펼치니까. 대답하기 애매하면 걍 조용히 듣기만 하시오. 쬐끄만 양반.’
칸의 조언을 머릿속에 다시 상기한 아리에스는 얌전히 고개만 끄덕였다.
“대신 대가를 좀 받겠지. 마탑이 이런 쪽으로는 계산이 확실해서 말이오. 당분간은 연구비 걱정은 없을 것같소. 당신과 당신의 동료……. 칸 덕분에.”
아리에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야만인 전사에겐 충분하다 못해 과할 정도로 이것저것 내주기로 했지만 말이오.”
제롬의 말투와 표정에서 떨떠름한 기색이 느껴졌다.
아리에스는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열등 인종이란 말까지 듣는 야만인에게 입씨름으로 밀렸다는 것에 대한 충격이 상당하겠지.
“칸은 원래 이상해.”
“…보통 이상한 친구가 아니더군. 사실 그의 언행보다는 실력이 더 그렇지. 나는 살면서 그보다 강한 전사를 본 적이 없소. 순수하게 육체의 성능으로만 따졌을 때 말이오.”
제롬은 여전히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아니,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떠오른다 표현하는 것이 옳겠지.
‘단 일격.’
그래. 단 일격이었다.
제롬 본인의 주문과 성기사가 신성술까지 써가며 펼친 일격을 큰 상처 없이 맨몸으로 받아냈던 다르킨 페레야스가, 야만인의 주먹 한 방에 시체조차 남기질 못하고 말 그대로 터져버렸다.
사람의 육체로 마나의 이적을 뛰어넘었다는 소리다.
처음엔. ‘네베다의 지옥뱀’으로 인한 흑마력의 오염으로 자신이 환상을 보았노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설마. 고작 주먹질로 용의 비늘을 가루내고, 그 여파만으로 공동까지 무너뜨릴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소?”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제롬이 쓴웃음을 흘렸다. 꼼짝없이 돌무더기에 깔려 죽을 뻔한 그때의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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꽝──!!!
바로 옆에서 드워프의 화포가 터졌다 착각할 만큼 굉음. 거기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론이었다.
특유의 감이 외치고 있었다. 당장 여기서 벗어나지 않으면 죽을 거라고!
“쓰읍. 퉤! 잠깐 실례하겠네! 마법사 나으리들!”
“네에에엑?!”
“크헉.”
근처에 나란히 누워있던 얀과 제롬을 양팔에 끼운 론이 호다닥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지나왔던 통로가 아닌, 뼈왕좌가 있는 방향으로.
“성기사 아가씨랑 칸 형씨도 퍼뜩 따라오시오! 다 이겨놓고 허무하게 뒈지기 싫으면은!”
쩌저적! 쩌저저저적!
사방에서 들려오는 심상찮은 소리에 때마침 한 줌 핏물로 변한 다르킨의 시체를 살피던 칸이 몸을 일으켰다. 시발, 뒈지겠네.
노르딕에서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도약 스킬을 거듭 사용한 탓에 발목이 끊어질 것처럼 아파왔다.
거기에 투척 스킬의 과다한 사용으로 오른쪽 어깨는 움직이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가장 심각한 건 왼팔의 상태였다.
‘씁. 이거 아예 못 써먹게 되는 건 아니겠지.’
덜렁거리는 왼팔에선 아예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체력 소모가 상당한 상황에서 A등급 스킬을 펼친 대가였다.
무엇보다 게임에서처럼 HP 게이지가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닌 만큼. 정확한 여파를 측정하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체력 스탯이 하나 올라가서 다행이지….’
다르킨이 죽은 순간 레벨이 25로 올랐다. 그러고도 경험치가 남아서 벌써 경험치바의 반이 넘게 찼다.
그것만으로도 배가 부른데, 마지막에 뒈질 각오로 A등급 스킬을 쓴 덕분일까.
공격을 날리는 순간, 태생 B등급 스킬을 획득했다. 그 결과 단번에 A등급 스킬이 2개로 늘어났다.
100%가 얼마 남지 않은 투척까지 고려하면, A등급 스킬이 무려 3개로 늘어나는 거다.
‘그럼. 거의 제3막 시점의 캐릭터랑 비슷한 보유량이 되는군.’
솔직히 말해서. 아픈 건 쥐뿔도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좋았다. 이만하면 다르킨 하나 족치자고 했던 고생들을 전부 갚고도 남았다. 팔만 고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일단 나가고 나서 생각해야겠군.”
잠깐 생각에 빠진 틈에 벌써 공동이 붕괴할 조짐이 보였기에, 칸은 바닥에 떨어진 붉은색 구슬과 손바닥 크기의 황금색 비늘을 바지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고 론의 뒤를 따랐다.
그러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우두커니 고개를 떨구고 선 아리에스가 눈에 들어왔다.
안 그래도 급한데 왜 저러나, 인상을 쓴 칸이 그녀의 곁으로 냉큼 방향을 틀었다.
“실례하겠소.”
“윽.”
그나마 조금은 움직이는 오른손으로 아리에스의 뒷덜미를 고양이 낚아채듯 붙들었다. 그에 아리에스가 부둥거렸으나, 미약한 저항에 불과했다.
“에렌달…….”
흠칫.
어딘가 아련하게 울려 퍼지는 그녀의 음성에 칸이 움찔했다. 다만 뜀박질을 멈추진 않았다.
“숨 참으시게! 물 먹기 싫으면!”
“자, 잠깐만요…!”
어느새 뼈왕좌를 지나쳐 거대한 피웅덩이에 도달한 론이 경고하듯 외치더니, 그 안에 냅다 뛰어들었다. 칸 또한 망설임 없이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퍼엉.
피웅덩이는 그 표현과 달리 생각보다 수심이 있는 편이었다.
그렇게 깊은 편은 아니지만, 망신창이 상태의 몸뚱어리론 그나마도 헤엄치기 버거운 거리.
‘더럽게 쑤시네.’
얼마간 아래로 내려갔을까. 온통 붉게 물든 시야 속. 가장 밑바닥에 있는 통로가 보였다. 다르킨의 개인 연구실이자, 게임에선 보상방으로 불리던 공간과 이어진 통로다.
‘다행히 게임이랑 똑같군.’
그에 안도하는 한편, 론의 말도 안 되는 직감에는 진심으로 경악했다.
칸이 무어라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저가 알아서 살길을 찾아 피웅덩이로 냅다 달려들다니?
‘이쯤 되면 거의 확실하네. 등급이 불확실하긴 한데….’
아무리 낮게 잡아도 A. 낮지 않은 확률로 S등급 스킬을 보유한 것이리라.
‘미들랜드 퀘스트’엔 길잡이 빌드 같은 건 없지만, 비슷한 효과를 내는 스킬이 몇 개 있는 편이었다.
‘A등급 스킬 사망 회피인가? 아니면 S등급 패스파인더……?’
“푸헉! 우웩! 웩!”
“쿨럭…. 핏물에서 수영해보긴 처음이군.”
“수영은 내가 다 했는데 그건 또 뭔 소리인가? 마법사 양반! 내 목숨만큼 소중한 쇠망치까지 포기했건만!”
‘아닌가……?’
해저 통로 너머에 있는 보상방에 도착하자마자 입으로 똥을 싸기 시작한 론의 모습을 보고 나니, 저 머저리 같은 놈이? 라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나는 쇠망치 론이라 부를 수도 없게 됐네…!”
“하, 하나 사드릴 테니까 조금 진정하세요!”
“이래서 마법사란! 전사의 무기는 제 분신이나 다름없거늘! 감수성이 부족하군! 한참 부족해!”
“예에?”
지랄을 하네, 진짜. 그야말로 똥씹은 표정이 된 칸이 아리에스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기분은 좀 괜찮아졌소? 상태가 영 이상해 보이던데.”
“……아무것도.”
딱 봐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나 고민 있어요.’라는 티를 내면서도 막상 물어보면 신경질 내는 사춘기 조카를 보는 듯했다.
‘음. 여기서 괜히 더 물어봤자, 짜증이나 내겠지.’
과거의 교훈에서 터득한 처세술이었다.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뭐.
“혼자 상처를 돌볼 수 있겠소? 난 여기를 좀 살펴봐야겠는데.”
아리에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혼자 두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에, 칸도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선 그녀에게 ‘치유의 빛’을 좀 써달라 하고 싶지만, ‘강신’을 사용한 직후의 성기사는 모든 스킬에 쿨타임이 걸린다.
한동안 축복은커녕, 제대로 싸우는 것도 힘들 터였다.
“끄응.”
어차피 고통을 참는 건 익숙했다.
어느 정도 성장이 궤도에 오르기 전까지는,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온종일 쌈박질만 해댔으니까.
‘어디 한번 볼까.’
다르킨의 개인 연구실은 제5막 시점과는 달리 영 휑했다.
눈에 보이는 거라곤 책장과 책상, 의자, 그리고 용도를 정확히 다 파악할 수 없는 마법 용품…. 오로지 연구를 위한 공간 같았다. 게임에선 더럽게 호화로웠는데.
‘이래선 보상방이라 부르기도 애매하네.’
칸은 가장 먼저 책장을 살폈다.
놈은 제 흑마법에 자부심이 큰 놈이었고, 스스로를 ‘키루츠의 학파의 종사’라 칭했던 만큼. 거의 모든 연구를 기록으로 남겼었다.
심문하기 위해 놈을 살린단 선택지를 배제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했다.
‘제목이나 좀 적어두지. 쓸모없는 자식.’
가장 윗줄의 일지를 아무거나 집어 들었다. 깜지를 연상케 하는 난잡한 글씨 탓에 알아보는데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트롤의 재생력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인가. 그에 대한 연구는 많으나, 명확한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지난날의 실험으로 말미암아 후보군을 좁힐 수는 있었다…….’
‘심장과 피다. 트롤의 심장은 인간의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혈액을 신체 곳곳에 흘려보낼 수 있고…….’
‘트롤의 혈액은 대부분의 유사 인류와 다른 성질을 띤다. 정제하지 않은 트롤의 혈액은 오히려 독처럼 작용하는데, 대부분의 인간은 순수한 트롤의 혈액을 받아들였을 때. 심장과 혈관이 버티질 못하는…….’
‘97번의 실험을 거쳤다. 다양한 유사 인류와 백오십 개체의 실험체를 통해 증명해낸바. 트롤의 혈액은 독이 아닌, 지나치게 강한 효능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 틀림없다. 결과. 살아있는 인간에게 살아있는 트롤의 심장을 이식하고, 혈액을 천천히 주입하면…….’
“윽. 시발.”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오는 내용에 일지를 그대로 덮어버렸다. 이 미친 싸이코패스 새끼.
‘놈이 황금색 비늘을 어떤 경로로 얻었는지, 분명 일지에 적혀있을 텐데…. 이래서는 몇 달 동안 깜지로 엮은 책이랑 씨름하게 생겼네.’
칸이 왕국 서부로 향한 근본적인 목적, 서부 대산맥에 떨어졌다는 진룡의 비늘 조각. 다르킨은 그걸 써서 용의 모습을 빌린 게 틀림없었다.
문제는 이번 회차의 다르킨이 그걸 손에 넣게 만든 변수가 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내 행동에서 비롯된 변수라는 건 분명한데……. 시발, 도무지 모르겠네.’
이게 나비효과라는 건가.
게임 텍스트조차 제대로 읽기 싫어하는 성격에, 하루종일 책을 붙들어야 할 처지에 처하자 칸의 안색이 나빠졌다.
그러다 창백한 안색의 제롬이 은근슬쩍 일지의 내용을 훔쳐보다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흥미로운 내용이군. 흑마법사라 가능한 실험인가…….”
“흥미롭긴. 만신전 교회가 당신 말을 들었으면, 악마에 씌였다고 지랄할 거요.”
“흠. 그건 곤란하지. 못 들은 거로 해주게. 그래도 이건 분명하군.”
멀끔한 신사처럼 생겨선 순 또라이군. 누가 주문쟁이 아니랄까 봐….
“마법사로서는 어떤가 싶지만, 확실히 다르킨 페레야스는 인체와 관련한 연구에선 상당한 권위자임에 틀림없네. 그 일지만 해도, 금색 마탑에 가져가면 굉장히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을 터.”
“하고 싶은 말이 뭐요.”
“나는 마구스일세. 몹시 공사다망한 몸이지. 굳이 위험을 자초하면서 성기사 아리에스의 요청을 받아들인 건, 다르킨의 연구를 바란 것이고. 애초에 그런 약속을 하고 나의 힘을 빌린 것 아닌가?”
거기까지만 들어도 제롬의 말뜻을 이해하긴 충분했다.
‘자기가 이걸 전부 챙기고 싶은데, 선뜻 그러기엔 쫄린다 이거지?’
일지를 원래 자리에 꽂아두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속으로 삼켰다. 안 그래도 이걸 어떻게 다 읽고, 분석하나 고민이었는데…….
알아서 호구가 굴러들어왔군.
“서릿골의 전사는 목숨을 걸고 싸운 전우를 홀대하지 않소. 그쪽은 마지막 순간에 위험을 감수하고, 옳은 판단을 내렸었지. 그러니 이것들을 가질 자격이 있지.”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사실, 마법사가 아닌 자네나 성기사 아리에스가 가지는 것보단…….”
새꺄, 아직 말 안 끝났어.
“당신 말대로. 다르킨의 연구 일지는 내게 필요가 없소. 교회야 도로 회수하고 싶겠지만, 그거야 마탑이 알아서 해결할 수 있겠지. 쬐끄만 양반의 경우엔 이미 동의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소.”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새끼, 누가 주문쟁이 아니랄까 봐.’
수상쩍음을 감지한 제롬의 입매가 살짝 굳는 걸 보며, 칸이 능청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연구 일지에 적당한 가치를 매겨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나와 아리에스에게 지불한다면 서로 불만 없이 깔끔하게 정산을 마칠 수 있겠지.”
물론, 정해진 값이 없으니 가격은 협상을 좀 해야겠지만…….
‘주문쟁이한테 뭘 뜯어낼 기회가 드문 것도 아니고. 최대한 뜯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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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때는 워낙 경황이 없어서 어물쩍 넘어갔지만, 그 야만인 친구가 억지가 좀 심하긴 했소.”
“칸은 원래 그래.”
아리에스는 제 몫의 서류를 옆으로 치워버리고, 불만을 토로하는 듯한 제롬의 표정을 살폈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소?”
음흉한 계략을 꾸미는 마법사의 얼굴이었다. 실제로는 옅게 미소짓고 있을 뿐이지만, 아리에스에겐 정말 그렇게 보였다.
“칸이 요구한 대가가 정말 부당하다 여겼으면, 당신은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야. 왜냐하면.”
“마법사니까. 당연한 얘기요. 마법사란 족속들이 대부분 그렇지.”
“하지만 당신은 받아들였어.”
“흠. 사실 나로서는 당연한 대가였소. 금색 마탑과 마탑의 마스터들에게 받아낼 것들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셈법이기도 했고.”
정말 그럴까. 아리에스는 그렇지 않다고 봤다. 칸이 요구한 것들은 하나같이 부담스러운 것들이었으니까.
“마탑의 주문을 이것저것 각인한 손도끼에, 다르킨의 일지를 통해 알아낸 것들을 숨김없이 공유하고, 신화시대와 관련한 정보를 달라…….”
제롬은 주문을 읊듯 조용한 어조로 칸의 요구사항을 나열했다.
“첫 번째야 그리 어려운 건 아니오. 그런 무기를 구하려면 돈이 꽤 나가겠지만, 돈이야 충분히 남아도니까. 두 번째는…. 마탑의 연구를 외부에 공유하려면 일이 좀 귀찮아지겠지만, 내 공을 생각하면 충분히 밀어붙일 수 있지.”
“마지막은.”
“왕국 북부에서 퍼지고 있는 이상현상이, 신화시대의 유물과 관련됐을 거란 마탑의 추측을 내 멋대로 공유한 것 말이오?”
그렇게 말하는 제롬의 얼굴에서,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만약 칸이 이 자리에서 보았더라면, 주문쟁이가 사악한 음모를 꾀한다고 손도끼를 휘둘렀을 게 분명하리라.
하지만 칸은 모든 뒷수습을 떠맡기듯, 노르딕을 떠나 왕국 북부로 향한 지 오래였다.
유능한 길잡이, 그리고 제롬이 연락통이라며 억지로 동행시킨 얀과 함께.
“나는 그저 기대하고 있을 뿐이오.”
“기대?”
아리에스가 눈살을 찌푸렸고, 어느새 푸근한 신사의 얼굴로 되돌아온 제롬은 웃음기 섞인 투로 이해하기 힘든 말을 남겼다.
“뭇 사람들이 현자라 믿는 마탑조차 허상에 가깝다 여기고, 사실 존재하지 않던 시대로 치부하는 신화시대. 그걸 혈혈단신으로 좇는. 인간의 몸으로 마나의 이적을 초월한 위대한 전사…. 어쩐지 신비로운 일 아니오?”
그리고… 마법사란 본래, 신비를 좇는 이들이다.
“지금이야 그런 말을 주워섬기는 족속을 신비주의자라며 마탑에서도 괴짜로 분류하지만, 나도 모르는 괴짜 기질이 내게도 있었나 보오.”
제롬의 눈에서 빛이 번뜩였다. 그건 순수한 호기심과 열망으로 뒤섞인, 광기에 가까운 탐구심이었다.
“무엇보다 궁금하더군. 로렌의 마녀라 불리는 그녀가, 가장 신비로운 존재라 칭한 이가 어떤 인물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