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화. 바그너 (2)
다르킨과의 일전으로부터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다르킨의 지하 공방은 완전히 붕괴했다. 만약 칸이 노만에게서 ‘아에카리스의 구덩이’가 각인된 목걸이를 챙겨두지 않았더라면, 일행은 전부 거기서 아사했을 터였다.
흑마력이 담긴 마석을 다르킨의 개인 공방에서 발견하고, 제롬이 그걸 이용해 목걸이를 다시 작동시켜 탈출.
힘겹게 산을 내려오고 나니, 지난밤 벌어진 일로 혼란에 빠진 도시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시 최대의 용병대가 하룻밤 사이에 궤멸당하고, 용병대장은 마녀의 실험체처럼 변이한 채 말라 죽었질 않나.
도시의 수도원을 사실상 책임지던 부원장이 타락하여, 사제들을 습격했단 소식이 전해지질 않나.
‘거기서 다르킨의 얘기까지 들으면, 제아무리 도시 운영에 관심이 없는 귀족이라도 엉덩이에 불이 났겠지.’
조금만 생각해도 일이 더럽게 귀찮아질 거란 게 보였다. 누가 뭐래도 당사자니까.
그래서 도망치듯 노르딕을 벗어났다.
“거기서 내가 어쨌는지 아나? 아니! 나는 내 친구를 배신할 수 없다! 차라리 나를 죽여라! 네로! 그리 말하면서 놈의 제안을 거절했지.”
“오오……. 그래서. 그다음은요?”
“뭘 어쩌긴. 쇠사슬에 온몸이 결박당해서 꼼짝도 못 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칸 형씨가 나타났네. 날 구하기 위해 그 수많은 용병들을 뚫고……!”
오오─. 그래서요? 그래서요?
‘쌍으로 지랄을 하는군.’
한시도 입을 닥치지 않는 두 얼간이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본 칸이 고개를 절레 저었다. 질리지도 않나 저것들은.
입을 닥치지 못하는 떠버리 길잡이, 존재만으로도 뒤통수가 따끔거리는 주문쟁이. 도무지 안심이 안 되는 구성이었다.
‘오히려 혹을 달고 다니는 기분이라니까.’
고등급 스킬 보유자로 추정되는 론이야 급한 상황에선 쓸모가 있을 테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주문쟁이를 일행으로 받아들인 건 실수가 아닐까. 지금도 후회가 됐다.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자네가 요청한 것들은 당장 준비할 수가 없는 것들이네. 그렇다고 자네가 내 연구실까지 따라올 것 같지도 않고. 그러니 내 제자를 데려가게.”
“굳이?”
“굳이. 그래야 자네도 맘이 편할 거야. 마탑의 지부에 소식을 알리면, 필연적으로 여기저기 말이 새어나갈 테니까. 자네도 그걸 바라진 않겠지? 무엇보다 자네의 여정에 도움이 될 걸세. 심약한 녀석이지만, 실력은 변방이나 떠도는 떨거지들 보단 훨씬 나을 터이니.”
“내키지 않는데…….”
주문쟁이를 일행으로 들이라니. 평소 칸의 신념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칸은 제롬이란 마구스를 절대 믿지 않았다.
‘딱 봐도 무슨 수작이 있어 보이고.’
결국, 마구스의 제자를 일행으로 받아들이긴 했다마는. 그건 어디까지나 원활한 거래를 위한 결정이었을 뿐.
결코 주문쟁이 따위를 신뢰해서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뒤통수가 좀 가렵긴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거래의 대가를 받을 때까지 같이 다닐 뿐이라면. 오히려 이쪽에서 험하게 굴려서 최대한 뽑아먹어야지.’
음흉한 중년의 주문쟁이는 이 거래에서 자기가 큰 이득을 봤다고, 혼자 속으로 쪼개고 있을 터였다.
단기적으로 봤을 땐, 칸의 부탁을 들어주느라 이런저런 정치적 손해를 감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르킨의 연구가 마탑이 앓던 이 하나를 해결할 단초가 된다는 걸 고려하면….’
추후 얻을 이득이 무척 크다는 것을 제롬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터.
‘그런 계산이 진작 섰으니. 시원스레 제안을 받아들이고, 마탑 몰래 이런저런 정보를 건네주었겠지.’
하지만 그건 틀렸다. 다르킨 토벌전에서 가장 이득을 본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칸 본인이었으니까.
트롤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에 고이 모셔둔 것들을 떠올린 칸이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의 비늘 조각]
─오랜 세월이 흐르고, 누군가에 의해 다시 쪼개진 이 티끌만 한 조각은 본래의 기운을 대부분 상실했습니다.
칸이 그토록 찾던… 신화시대의 진룡이 남긴 비늘 조각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꽤 중요한 단서인 건 틀림없었다.
다만 다르킨이 아닌 누군가의 손을 한번 거친 듯했다.
‘그 누군가가 바로 다르킨에게 비늘을 건네준 장본인 아닐까.’
칸은 그렇게 추측했다.
아마 제롬의 연구가 끝이 나면 진실을 알 수 있겠지. 어쩌면… 이걸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진실에 닿을 수도 있었다.
다르킨은 아리에스와 제롬 사제를 상대로 순수히 육체의 힘을 이용해 전투를 벌였고, 거의 압도했다고 전해 들었다.
‘대부분의 기운을 상실한 티끌’에 불과한 이 조각만으로, 그만한 위력을 냈다는 소리.
‘만약, 다르킨을 통해 모종의 수작을 부리던 누군가가. 이 비늘을 빼앗겼단 소식을 듣게 된다면…….’
과연 가만히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이만한 힘을 간단히 포기할 리가 없지. 어떻게든 손을 써올 게 분명했다.
제롬이 밝혀내던가, 그 누군가의 참을성이 먼저 다하던가, 칸은 어떤 방법으로든 진실을 알 게 될 것이었다.
[피의 그릇]
─사령술과 인체 개조의 대가. 다르킨 페레야스가 일평생의 노력을 다 바쳐 만들어낸 역작.
─혈정 :: 피를 흡수해 저장하는 게 가능해진다.
─오랜 기간 흑마력에 노출됐습니다. 내성이 부족한 경우 상태 이상에 걸립니다.
─?? :: 미완성의 장비입니다. 특정 조건을 만족할 시, 개방됩니다.
─체력 +4
게임에서 본 설명과는 많은 부분이 다르지만, 제5막의 보상 중 가장 귀한 드랍템인 ‘피의 정수’임에 틀림없었다.
무려 추가 스탯이 4. 그것도 칸에게 가장 급한 체력 스탯이 붙은 아이템이었다.
게임에선 추가 체력 8에 이런저런 부가 효과도 여럿 달려있단 걸 떠올렸을 때. 모종의 방법으로 아이템을 성장시키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만신전 교회에 가서 정화를 좀 받아야겠지만……. 그것도 아리에스가 도움을 줬으니, 시간 문제지.’
“음.”
생각을 정리하던 칸이 돌연 입맛을 다셨다. 노르딕에서 부상과 강신의 부작용을 치료하고 있을, 백금발의 소녀가 헤어지기 전 남겼던 말이 떠올랐기에.
*
*
*
“간다고.”
“가야지. 그 음흉한 마구스에게 쓸만한 정보도 얻었으니, 빨리 가서 알아볼 생각이오. 무엇보다 언제까지 이곳에 죽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
짜게 식은 연보랏빛의 눈동자가 힐난하듯 칸을 째려보았으나, 칸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정치적인 문제는 딱 질색이오. 야만인이라 그런 건 잘 모르거든.”
“뻔뻔해.”
“맘대로 말하시오. 사실 말도 안 하고 갈 생각이었는데, 론 그 얼간이가 어찌나 성을 내던지.”
“무식한 야만인.”
“야만인이 무식할 수도 있는 거지.”
평소 같으면 자기는 무식하지 않다고 답했을 테지만, 어째선지 능글맞게 구는 칸의 모습에 아리에스가 눈가를 씰룩였다.
“어디로 가. 북부?”
“그렇소. 거기서 신화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는 물건이 말썽을 부리고 있다던가. 어디까지나 추측이어도, 출처가 마탑이니 영 엉터리는 아니겠지. 어차피 제롬이 다르킨의 일지를 모두 분석하기 전까진, 딱히 할 일도 없고.”
“신화시대는 가짜랬어.”
“그거야 만신전 교회의 신들이 고대의 존재들이란 말이 있으니까. 그네들로선 필사적으로 부정할 수밖에 없는 거지. 간단한 정치 논리요.”
“정치는 모른다며.”
“그런 소문을 주워들었소.”
아리에스는 드물게 혀를 차며 감정을 드러냈다.
“필요한 건.”
그러나 그 기세도 금새 누그러졌다.
짧게 함축된 물음에 담겨진 감정마저 모른 척할 수 없었던 칸도, 시선을 내리깔아 아리에스를 마주했다.
“…다르킨과의 싸움에서 난 아무것도 못 했어. 내 복수지만, 만약 칸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못 했을 거야. 그 자리에서 홀로 싸우다… 결국엔 다르킨에게 당했을 거야.”
아니다, 내가 없어도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거다, 그렇게 간단히 위로할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지 않았다.
칸은 고개를 주억여 그 사실을 긍정했다.
“에렌달도 고마워하고 있을 거야. 마침내 사령술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신의 곁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까. 정의의 신께서도 기뻐할 거고. 물론, 나도.”
네임드인 ‘암흑기사 에렌달’과 아리에스가 무슨 관계인지, 칸은 알지 못한다.
아리에스는 게임에 등장한 적이 없으니까. 설령 나왔다고 한들 텍스트는 모조리 스킵해버리는 성미 탓에 관심도 없었겠지.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했다.
본래 게임 스토리에서도 아리에스는 다르킨과 싸웠을 것이며,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죽어갔을 것이다.
제5막에 그녀가 등장하지 않았단 사실이 그걸 증명한다.
“그러니까 바라는 게 있으면 말해.”
“바라는 거라…….”
‘그러고 보니, 마침 적당한 게 있었지.’
“정화할 물건이 있소. 흑마력의 오염이 굉장히 심한 물건인데, 최대한 멀끔히 없애고 싶군.”
“…북부의 알-란자스 수녀원을 찾아가. 그곳의 수녀원장인 베르타에게 내 이름을 말하면 될 거야.”
아무래도 아리에스 본인이 현재 신성력을 쓸 수 없는 상황이라 아는 고위 사제를 소개해준 듯했다.
게다가 위치도 목적지인 북부와 겹치니, 마침 형편에 좋았다.
“그리고.”
“음?”
그리고라니, 뭐가 더 있나? 이 발칙한 계집애가 또 뭔 말을 하려고….
“다음에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땐 내가 도와줄게.”
*
*
*
그 맹랑한 말을 떠올린 칸이 쓴웃음을 지었다. 돕기는 뭘 도와, 쥐톨만 한 녀석이.
“칸 형씨. 그 징그러운 표정은 뭐요. 소름 돋게.”
“닥쳐. 한 대 얻어맞기 싫으면.”
“크흠. 사실 농담이었네. 표정이 너무 안 좋아 보인다고 저 친구가 걱정하길래.”
“론 씨! 갑자기 저한테 떠넘기지 마세요…!”
“자네가 형씨 표정이 사람 하나 죽일 것 같은 표정이라고 하지 않았나!”
“제, 제가 언제요!”
‘이런 빌어먹을 것들이….’
두 머저리의 대화를 듣고 있자면, 절로 머리가 지끈거려 왔기에 칸은 손을 휘휘 저어 꺼지란 뜻을 전했다.
“저어……. 그런데 전사님.”
“그냥 칸이라고 부르라니까. 그딴 낯간지러운 호칭으로 불릴 사람으로 보이나?”
“어. 이게 편해서요. 사실 전사님께 궁금한 게 있는데, 하나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나한테?”
칸은 이놈이 왜 이러나 싶었다.
그동안 눈만 마주쳐도 움찔대던 녀석이 대뜸 당돌하게 굴다니? 뭘 잘 못 처먹었나.
“물어봐.”
그래도 거절하진 않았는데, 어쨌거나 같이 동행하게 된 입장인 만큼. 말이라도 터놓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네. 저…. 전사님이 어디 정착하지 않고 신화시대의 흔적을 쫓는 이유가 궁금해서요. 사실 전사님 실력이면 제국에 가서도 어지간한 상급 기사 만큼의 대우는 받으실 텐데. 어디 정착하지 않고 떠돌고 계신 것 같아서.”
좋게 말하면 똑똑한 질문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눈치가 없는 질문이었다. 거의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사이에 상대의 진짜 목적을 캐묻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칸은 머릿속에서 단어를 고르듯 잠시 침묵하다가, 최대한 간결한 답을 내놓았다.
“신화시대의 존재들이, 미들랜드 바깥에서 온 존재들이니까.”
“네? 아…. 신화시대의 존재들이 외계의 존재라는… 마탑의 하이 마스터가 했던 말이죠, 그거? 그건 만신전에서도 폐기한 이론인데요….”
마탑의 누가 그런 소릴 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미들랜드 퀘스트’의 엔딩을 지켜본 칸은 안다.
진룡과 거인, 대악마들이 미들랜드의 바깥에서 찾아온 초월자들이라는 걸 말이다.
그게 자의건, 타의건 간에.
그들 또한 칸과 마찬가지로. 차원을 건너 미들랜드에 찾아온 존재들이란 소리다.
“근데. 제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닌 거 같은데요……. 바깥에서 온 거랑 전사님이 신화시대의 흔적을 찾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얀. 형씨가 어떤 사람인지 딱 보면 모르나?”
어째 집요해지는 질문에 칸이 인상을 찌푸리려는데, 갑자기 론이 잘난 체하며 끼어들었다. 이 떠버리가 또 뭔 개소리를 하려고….
“론 씨는 뭔지 아시나요?”
“아무렴. 나만큼 야만인을 잘 아는 왕국인은 없을 거라네.”
“오…! 알려주세요!”
얀이 흥미진진하다는 듯 똘망한 눈망울을 번뜩였고, 칸도 이놈이 뭔 소릴 하려나, 궁금한 건 마찬가지여서 은근슬쩍 귀를 활짝 열었다.
‘내가 빙의자라는 건 당연히 모를 텐데…….’
론은 오랜만에 집중된 관심에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신화시대의 용! 그 몸이 산보다 거대하다는 거인! 모든 악마들의 어버이라는 대악마들! 만신전의 신들 이상으로 오래되었다는 태초의 신들! 이 이름들을 듣고도 모르겠나? 정말?”
“네! 알려주세요!”
“허, 참. 이거 영 둔한 친구로구먼. 모두 엄청나게 강한 존재들 아닌가! 세상에서 그 어떤 존재도 대적할 수 없는 그런 존재들! 싸움에 환장하는 무식한 서릿골의 전사라면 당연히 이렇게 생각하겠지!”
즉! 형씨의 목적은 이거라네. 이목을 집중시키려는 듯 잠깐 뜸을 들인 론이 노르딕의 대장간에서 급하게 구한 쇠망치를 높이 들어 올리며 외쳤다.
“칸 형씨는 용맹의 증명을 위해, 신화시대에 존재했던 괴물들을 쫓고 있는 거야! 인간이 대적할 수 없는 괴물들을 두들겨 패려고!”
“오……!”
“미친놈.”
으어억! 론의 이마를 짝- 소리 나게 후려친 칸이 걸음을 재촉했다. 더 이상의 개소리는 듣지 않겠단 것처럼.
“론씨…. 아무래도 그게 아닌 것 같은데요?”
“커흠. 그럴 리가 없는데…….”
두 얼간이에게서 멀찍이 떨어지고 나서, 칸은 치렁하게 자란 뒷머리를 괜히 긁적였다.
‘두들겨 팬다라…….’
글쎄. 당장은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고, 그게 가능이냐 하겠냐만은.
어째선지… 론의 헛소리에 구미가 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