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화. 바그너 (4)
마이아는 서부로 오기 전엔 북부에서 조합의 심부름을 도맡았던 용병이었고, 주로 용병들이 일으킨 문제의 뒷수습을 도맡았었다.
유명 용병대, 귀족의 사병과 기사, 종국에는 귀족까지.
상대를 가리지 않고 적대하는 모두의 머리통을 도끼로 쪼개버리는 무자비한 야만인과 충돌한 것도 그러한 일의 연장선에 있었다.
“네놈은 분명 총지부장의 의뢰를 받고 동부에……!”
그 결과가 어땠는지는, 지금 마이야의 모습이 설명했다.
애처로울 정도로 부들부들 떠는 그녀의 눈동자와 자연스레 뒷걸음질치는 다리. 누가 봐도 겁을 집어먹은 모양새였다.
“뭐냐, 너.”
참수자. 아니, 칸의 회색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조금의 의아함과 귀찮음이 묻어나는 눈빛은, 마이야에게 포식자의 권태처럼 느껴졌다. 자연스레 어깨가 공손히 쪼그라들었다.
“마, 마이아…….”
“잉? 마이아면, 최근 부임한 지부장 아닌가? 칸 형씨랑 아는 사이였소?”
“아니. 처음 보는데.”
무심한 말에 마이아는 안도감과 수치심을 동시에 느꼈다.
물론, 전자의 비중이 컸다.
“딱 봐도 처음 본 눈치는 아니구만, 뭘. 형씨보고 참수자라 하던데. 그건 북부에서 유명한 이름 아니오? 그게 칸 형씨였나?”
“몰라. 씹새야.”
“모르긴. 저 아가씨 겁먹은 거 안 보이쇼? 전형적인 형씨를 아는 사람의 반응인데.”
“모른다니까. 야, 너 나 알아?”
칸이 눈을 부라리며 을러대자, 마이야는 숫제 찌그러진 깡통처럼 쪼그라들었다.
일말의 수치심에 몸을 맡기기엔 참수자란 존재가 그녀에게 각인한 두려움이 더 컸다.
“칸 형씨,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안에 들어가서 얘기나 들어보자고. 이쪽 아가씨라면 도시 사정에 꽤 밝을 테니까.”
“흠…….”
칸은 주변을 슬쩍 둘러보며 고민했다. 안 그래도 주변의 이목이 슬슬 이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용병을 시켜 짐마차를 끌게 한 야만인 일행은 그냥 눈에 띄고, 눈앞의 지부장이란 녀석은 그 야만인을 보자마자 쥐새끼 마냥 떨고 있으니.
‘여기서 참수자니, 뭐니, 더 떠들게 두는 것보단 낫겠지.’
“야.”
“네……?”
“사람들 눈에 안 띄는 곳. 알고 있지?”
“다, 당연하죠. 제 집무실로 모시겠습니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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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의 통과는 이렇다 할 문제 없이 이루어졌다. 사실 도시 상황이 어지러운 만큼, 흉악한 야만인은 들여보내 주지 않을 것 같았는데….
“내 손님이니. 검문은 따로 필요 없습니다….”
“네, 넵…! 마이아 님. 손님이시라면!”
성문을 지키던 자가 마이아의 말에 그야말로 껌뻑 죽었다. 이 계집애가 누구길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지부장님! 수고하십니다!”
“네. 다들 수고가 많습니다.”
“엇. 마이아 씨! 저번엔 고마웠어요!”
“별말씀을. 또 문제 일으키면 날 찾으십시오. 그땐 내가 직접 손을 써줄 테니.”
‘누가 보면 저 여자가 여기 시장인 줄 알겠네.’
정말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용병이 아닌 시민들이 그녀에게 보내는 호의가 특히.
그 꼴을 선거철 유세를 구경하는 것처럼 지켜보던 칸의 눈가가 씰룩였다.
잔뜩 찌그러졌던 마이아가 칸이 있는 쪽을 돌아보더니, 묘한 눈빛을 보내왔기 때문에.
마치 ‘보여? 내가 이 정도야!’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을.
“뭘 꼬라보냐.”
“읏……!”
하지만 저 여자가 누구인지도 제대로 떠올리지 못한 칸에겐, 싸우자는 거로밖에 안 보였다.
자길 보고 참수자란 멸칭을 꺼낸 거나, 잔뜩 쫄아 있는 모습을 보면 대충 구면 같기는 한데……
“아. 기억났다. 그 녀석이었군. 예전에 자기 창술이 북부 제일이라면서 깝죽거렸던 찔찔이…….”
움찔.
오도도도도! 요란한 발소리를 내며 칸에게 달려간 마이아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 얘기는 절대 하지 말라는 몸부림이다.
‘새끼. 쪽팔린 줄은 아나 보지.’
칸은 피식 웃으며, 마이아의 요청대로 하던 말을 멈췄다.
원래 이런 건 다 떠벌리는 것보다, 혼자 알고 있는 게 더 써먹기 좋기도 하고.
“조, 조금 서두르는 게 좋겠습니다! 바그너까지 오느라 고생 많으셨을 텐데!”
“그러자고.”
어쩐지 굳은 얼굴로 걸음을 빨리 하는 마이아와 짓궂은 미소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뒤따라가는 칸.
“어. 뭔가 있어 보이죠…? 아무래도.”
“그렇군. 뭔가 있어 보이네.”
또 그걸 지켜보던 얀과 론이 의아하단 반응을 내비치고, 자기가 여기에 왜 껴있는지 모르겠단 표정의 디에고가 땀을 닦아내며 터덜터덜- 걸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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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아는 조합 지부에서 가장 은밀한 곳이라 할 수 있는 그녀의 집무실로 일행을 들였다.
뭐라도 내오겠다며 눈치를 보는 직원까지 내보낸 후.
칸 일행과 자기가 이 자리에 왜 낀 건지 의아해하는 디에고, 의기소침한 마이아가 자리에 둘러앉은 뒤에야 대화가 진행됐다.
“참수자 당신이 어째서 디에고와 같이……?”
“오는 길에 만났다.”
그것참 성의 있는 대답이군요…. 마이아가 작은 목소리로 구시렁거렸다.
‘안 그래도 도시가 어지러운데…….’
그 혼란에 걸어 다니는 트러블메이커 내지는 살인기계나 다름없는 야만인이 더해졌다.
헤펠트 백작을 대신해 도시의 치안을 유지하고 있는 그녀로선, 도저히 기뻐할 수가 없는 일.
“그럼. 바그너에 온 목적은요?”
“무기를 사려고. 최대한 튼튼한 놈으로.”
“으으음…….”
그나마 희소식이었다.
만약 저 무식한 괴물이 바그너와 피카르의 분쟁에 한 몫 거들러 온 거라면, 마이아는 심신미약으로 쓰러졌을 수도 있었다. 정말로.
“구하려는 물건이 어느 수준입니까? 대충 견적만 알려주면, 이쪽에서 수배해줄 수 있습니다. 이래 봬도 여기 지부장이니까요.”
잘난 척 떠들어대는 것처럼 들리지만, 그녀로서는 분명한 사실을 얘기한 것뿐이었다.
게다가 칸이 도시에 머무르지 않기를 바라는 그녀이기에 정말 최선을 다해 무기를 구해다 줄 터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칸의 요구에 마이아가 얼굴을 굳혔다.
“이름이 ‘부서진 모루’였나? 그랬던 것 같은데. 그쪽 공방에서 제작한 물건을 사러 왔다.”
“……부서진 모루요.”
그리고 마이아가 얼굴을 굳힌 시점에서, 칸도 일이 귀찮게 꼬였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왜. 어렵나? 지부장이라면서.”
“아니, 그게……. 하아.”
마이아는 두어 번 마른 세수를 하더니, 이내 고개를 떨구며 답했다. 정말 마뜩잖다는 투였다.
“지금 바그너가 어떤 상황인지는 들었습니까?”
“대충. 헤펠트 백작이 자기 저택에 틀어박혔다는 것까지만.”
“안타깝지만, 백작만 틀어박힌 게 아닙니다. 그의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이나 행정관들, 거기에 사병들까지 전부 구금된 상태라고요…….”
“구금?”
칸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구금이라니.
“아무런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대뜸 저택 문을 걸어 잠궜습니다. 백작 입장에서야 스스로를 가둔 꼴이지만, 덩달아 갇힌 사람들한텐 구금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마이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현재 바그너는 인근 도시인 피카르와의 분쟁이 한창이고, 그 전장에 뛰어들기 위해 모여든 용병들의 숫자가 일반 시민 못지않게 많은 상황이니까.
지금 상태가 장기화 될 경우 헤펠트 백작은 도시의 통제력을 상실할 것이고, 만약 피카르의 병력이 들이닥칠 경우엔 꼼짝없이 도시를 내어주게 될 터였다.
“흠. 아예 봉쇄한 건 아니지 않나? 저번에 노르딕 수도원의 부원장이 저택에 출입했으니까.”
“당신은?”
“론일세. 쇠망치 론. 이름은 들어보셨을 테지? 지부장 양반.”
마이아가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아르곤의 용병 중, 손에 꼽는 베테랑인 론의 이름은 그녀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네, 맞아요. 그러고 보니 당신이 그 사제를 호위했었지요.”
“맞네. 그리고 의뢰를 중개한 건 그쪽 아닌가? 대충 무슨 문제인지는 파악하고 있을 텐데….”
“그랬으면 좋겠군요. 우리 쪽에서 파악한 거라곤, 사제가 필요한 문제가 그쪽에서 생겼다는 것밖에 없어요. 아, 하나 더 있긴 합니다.”
마이아가 뒤늦게 뭔갈 떠올린 듯 눈을 번뜩였다.
“그 사제가 가고 난 뒤에 있었던 일이에요. 백작의 장원 기사들이 동시에 자리를 비웠다고 하더군요. 듣기로는 피카르와의 분쟁 지역을 돌파하고, 어디론가 향했다는데…. 정확한 행적은 거기서 끊겼어요.”
마이아가 제 서랍에서 지도를 하나 꺼내 펼쳤다.
인근의 지형이 삐뚤하게 그려진, 용병 조합에서 백작 몰래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지도였다.
“여기. 피카르의 영역과 맞닿은 지역인 에르몽. 그쪽에서 피카르의 사병 스물을 격파한 기사들이 그대로 북상했고…….”
그녀의 손가락이 에르몽이라 찍은 위치에서 북쪽으로 향했다. 이에 칸 일행의 눈빛이 동시에 이채를 발했다.
“서부 대산맥이 있는 방향이군. 거기에 뭐가 있나?”
“흔들나무 숲. 바그너 최대의 벌목지죠. 더불어 예전에 버려진 폐광이 하나 있는 곳이기도 해요. 그런 곳에 장원 기사가 둘이나 향했단 얘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뭔가가. 그쪽에 있다는 얘기겠군.”
칸이 길었던 대화의 종지부를 찍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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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간의 사정을 모두 공유한 장내의 모두는 잠시 휴식을 가졌다.
칸은 잠시 사색에 빠진 듯 침묵했고, 론과 얀은 그런 칸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눈치를 봤다.
‘뭔가 있다는 건 알겠는데, 이걸 끼어들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사실 칸에게 있어서 바그너의 문제는 그닥 중요치 않은 것이었다.
무슨 추리 만화 주인공도 아니고…. 사고가 터지면 그걸 해결하기 위해 칸이 나설 필요는 없으니까.
‘부서진 모루’ 공방의 무구가 필요하긴 하지만, 당장 무기가 없다고 칸의 전투력이 급감하는 건 또 아니었다.
그의 가장 큰 무기는 강인한 몸뚱어리 그 자체 아닌가.
하지만.
‘뭔가. 신경이 좀 쓰인단 말이지.’
제롬이 알려준 북부의 이상 현상. 그런 상황에서 바그너 백작저에 생긴 이변.
물리적 거리가 거리인 만큼. 두 사건 간의 상관관계는 희박하다 보는 게 맞겠지.
허나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의뭉스럽다.
실제 존재조차 확실하지 않던 서부 대산맥의 비늘 조각. 그걸 칸보다 먼저 입수한 뒤. 다르킨 페레야스에게 조각의 일부 떼어준 존재가 아르곤에서 암약하고 있단 걸 아는 지금으로서는 특히.
“아무래도 백작저에 들어가 봐야겠다.”
“으잉?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애초에 방법도 없지 않나? 형씨.”
“방법이 없기는 왜 없어. 노만, 그 타락한 사제도 들어갔는데. 우리라고 안 될 건 없지.”
마이아가 ‘타락한 사제?’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칸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당장 중요한 부분은 그게 아니니까.
“마이아. 저쪽에 기별을 넣는 정도는 가능하겠지?”
“저쪽에서 무시할 가능성이 크지만, 소식을 전하는 것뿐이라면….”
“그럼. 그 기사에게는 이렇게 전해라. 마구스의 제자가 도움을 줄 의향을 밝혔노라고.”
“네? 저요?”
잠자코 있던 얀이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란 마이아의 깜짝 놀란 목소리에 얀의 의문은 묻히고 말았다.
“마, 마구스의 제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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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 똑.
“백작 각하. 페네스입니다.”
“들어오라….”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 사이 사이로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게 뒤섞여 새어 나온다.
그 기괴한 목소리의 주인은 한바탕 헛기침을 터뜨린 후. 바깥에서 들려온 물음에 허락을 내렸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전신을 감싸는 판금 갑옷을 두른 기사였다.
기사의 신 앞에서 ‘충성의 서약’을 맺고, 헤펠트 백작가의 기사가 된 이.
그는 헤펠트 백작이 제 혈육보다도 더 신뢰하는 심복 중의 심복이기도 했다.
“용태는 좀 어떠신지.”
“힘이 넘친다. 도저히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크으.”
“각하….”
바이저 너머로 비치는 페네스의 눈이 미약하게 떨렸다.
당장 저택에서 백작을 알현할 수 있는 유이한 인물인 페네스조차, 변해버린 주군의 모습 앞에서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다.
“더 이상 각하의 정신이 버티지 못합니다. 이쯤에서 저쪽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하찮은 것들과 타협할 수는 없다. 아니, 애초에 왜 타협을 한단 말이냐.”
“각하…!”
우드드득! 백작이 몸을 뉘인 의자의 팔걸이가 으스러졌다. 도저히 평범한 인간이 낼 수 있는 괴력이 아니었다.
백작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제 손을 멍하니 바라보다, 입가에 매끄러운 웃음을 띄웠다.
“이렇게나 훌륭한 힘이 주어졌거늘. 어째서 이걸 없애려 생각하는 거냐. 페네스. 오히려 이 힘만 있다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으냐……! 쿨럭!”
“각하!”
한바탕 피를 쏟아내던 백작이 정신을 잃은 뒤에야 페네스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는 흥건해진 바닥을 손수 닦아내고서, 흘긋 백작을 살폈다.
겉모습은 여전히 그가 알던 주군의 그것이다. 아니, 오히려 이전보다 더 건강해진 것처럼도 보였다.
방금 웅덩이가 고일 만큼의 피를 쏟아낸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아니. 쓸데없는 생각이다.’
그는 충성의 서약으로 묶인 몸. 지금은 주군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보중하십시오.”
페네스는 기절한 백작에게 꾸벅 읍을 하고서 방을 나섰다.
“경. 가주의 용태는 어떠신가. 안쪽이 소란스럽던데…….”
“소가주.”
밖으로 나서기 무섭게 마주친 청년에게 고개만 꾸벅- 숙여 인사한 페네스가 아무렇지 않다는 투로 답했다.
“각하께선 괜찮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