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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야만전사-31화 (31/132)

#031화. 바그너 (5)

페네스는 바이저 투구 안으로 감정을 숨긴 채. 무뚝뚝한 어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소가주가 어째서 지금 여기에?”

“용병 조합 쪽에서 소식을 전해왔네. 평소처럼 침묵할까 했는데, 아무래도 내용이 내용인지라. 경도 내용을 알아야겠다 싶더군.”

“바깥에 무슨 소란이라도 생겼답니까.”

“아니, 그게 아닐세.”

소가주라 불린 청년은 직접 말로 설명하는 대신, 곱게 접힌 서신을 건넸다.

“출입을 요청한다……? 이쪽에서 먼저 요청을 넣기 전에는 불가하다 경고했거늘. 새 지부장이란 어린 계집이 간이 부었군요.”

내용은 간단했다.

이쪽에서 도움을 줄 테니 정보를 공유해달라는, 지금까지 몇 번이고 거절한 내용의 서신.

페네스는 서신을 손아귀에서 구겨버렸다.

“불가합니다. 저택을 폐쇄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나라고 그걸 모를 리가 있나. 다만 예외라는 게 있으니.”

예의 사제를 초청한 것처럼 말일세. 청년은 자신을 훈계하는 기사에게 짐짓 불쾌하단 눈치를 쏘아 보내며, 서신과 함께 전해진 말을 공유했다.

“얼마 전 왕국 동부에 마탑의 마구스들이 파견된 건 알고 있겠지. 그 마구스의 제자 하나가 지금 도시에 와있고, 필요하다면 도움을 줄 의향도 있다 하네.”

“……사제도 해결하지 못한 일입니다. 한낱 마법사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마구스의 제자가 한낱 마법사는 아니지 않나. 제국의 오색 마탑에서도 재능을 인정받은 소수일진대.”

딱히 반박할 거리가 없는 말이다.

비밀 유지니, 제국의 마법사를 믿을 수 없다느니, 그런 말은 페네스가 노르딕의 사제를 초청한 순간부터 힘을 잃었으니까.

“그리고. 언제까지 도시를 방치할 수는 없네. 경도 그걸 모르진 않을 터. 우리는 조금 서두르더라도 방법을 찾아야 해.”

‘각하의 실각을 확실시하고 싶은 거겠지. 욕심 많은 애송아.’

페네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가진 능력에 비해 욕심만 많은 이 어리석은 소가주가, 각하에게 생긴 이변을 틈타 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영문도 모르고 저택에 구금당한 인부들과 행정관들이야 소가주의 자비로운 속삭임에 쉽사리 넘어가겠지.

다만 ‘충성의 서약’을 맺은 기사들은 다르다.

“…마법사의 자문을 구하는 건 알겠습니다. 다만 그 모든 과정은 제 감시하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응당 그래야지.”

금발의 귀족 청년은 화사하게 웃었다.

“아버지께선 신의 앞에서 충성을 맹세한 기사만을 신뢰하시니까.”

화사한 미소 속, 노골적인 비웃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처럼.

페네스는 주군의 못난 아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자신은 주군의 곁을 지키는 소임을 다해야 하니, 이만 꺼지라는 의미다.

“그럼. 마구스의 제자는 내가 책임지고 저택에 초청하겠네.”

“그러십시오.”

페네스의 무뚝뚝한 대답이 가소로웠던 걸까. 청년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곤 등을 돌려 떠나갔다.

‘주제도 안 되는 것이.’

백작의 뒤를 잇는 장자가 저딴 놈이라니.

왕국 서부에서도 수위에 꼽는 헤펠트 백작가의 앞날에 먹구름이 낀 기분이었다.

백작이 이지를 잃기 전에, 제 혈육이 아닌 페네스에게 본인의 신변을 부탁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줄곧 아비의 그림자를 가문에서 걷어내려 날뛰던 놈인 만큼. 지금 이 상황이 마냥 즐겁겠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도 못 하는 녀석이…….’

외부의 적보다 무능한 내부자를 더 경계해야 할 판이었다.

정말 만약의 경우지만, 저 욕심 많은 애새끼가 백작가의 이변에 가담했을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수는 없고.

‘차라리……. 마구스의 제자라는 자가 도움이 됐으면 좋겠군.’

문제가 정말 걷잡을 수 없도록 커지기 전에….

*

*

*

“와. 아르곤 왕국의 귀족은 제 생각보다 단촐하게 저택을 꾸미고 사네요. 검소한 게 왕국에선 미덕으로 통하는 걸까요?”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금발 청년의 입술이 씰룩였다.

저게 과연 비꼼인지, 순수하게 그리 생각해서 나온 감탄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

분명 문앞에 마구스의 제자가 도착했단 말을 듣고 나왔건만….

‘저 멍청한 목소리의 주인이 정말 마구스의 제자라고…? 이 화려한 저택의 어디가 검소하다는…….’

아니지, 아니야. 청년은 본인의 의혹을 일단 꾹 눌러담았다.

그리고선 얼굴 만면에 부드러운 웃음을 걸쳤다.

“어서 오시오. 기다리고 있었소. 당신이 서신을 적었던 마탑의 마법사가 맞소?”

백작의 장자이자, 후계자인 청년이 직접 누군가를 맞이하는 건 퍽 이례적인 일이었다. 평소의 그는 오만한 성정으로도 유명했으니까.

다만 상대가 상대였다.

“예. 스승이신 마구스 제롬의 제자인 얀이라고 합니다.”

오색 마탑의 마구스는 제국의 귀족들에게도 존중을 받아내는 귀한 신분이고, 얀은 그 마구스의 제자였다.

헤펠트 백작 본인이라면 모를까. 그 후계자의 불과한 신분으로 얀의 앞에서까지 뻗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나마 말을 편하게 하는 것이, 자존심을 지키는 마지막 마지노선이리라.

“좋군. 우선 안으로 들어오시오. 쓸데없는 대화를 나눌 시간에 먼저 봐줬으면 하는 게 있어서. 그런데…….”

말끝을 흐린 소가주의 시선이 얀의 뒤쪽으로 향했다.

“동행이 있단 말은 못 들었던 것 같소만.”

그것도 야만인이라니.

명백히 당혹스러워하는 반응이었다. 서릿골의 전사들은 보기도 힘들뿐더러, 몹시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족속들이란 소문이 자자한 까닭.

흑익공의 대전사가 퍼뜨린 흉명을 생각하면 소문이 진실일 가능성도 크고.

“스승께서 호위로 붙여준 전사입니다. 실력은 확실해요. 조금 난폭하긴 하지만….”

얀이 말하다 말고 야만인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뒤쪽을 흘겼다.

설마 마구스의 제자나 되는 인물이 제 호위의 눈치를 볼 리가 없건만, 소가주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착각이겠지……?’

“크흠. 보는 눈과 귀가 느는 걸 걱정하는 거라면, 그 부분도 괜찮습니다. 왕국어를 못하거든요. 그 소문 아시지요? 야만인들은 멍청해서 글은커녕 말도 제대로 못 한다는 소문.”

“아, 들어봤소. 흑익공의 대전사도 소통이 힘들어서 혼자 전장을 누빈다 했었지.”

“예에……. 하하. 맞습니다. 아주 멍청한 족속이죠. 크흡. 아, 죄송합니다. 사레가…….”

크흡. 크흡. 괴상한 소리를 내는 얀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던 소가주가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정신이 멀쩡한 마법사가 드물다는 말이 아무래도 사실인 듯했다.

“음. 일단 알겠소. 그쪽도 같이 들이는 거로 하지.”

사실 그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괜히 호위를 내쫓았다가 눈앞의 마법사가 돌아가 버리기라도 하면, 그쪽이 더 손해였다.

겨우 야만인 하나가 날뛰어봤자, 당장 이 저택의 상주하는 병력만 수십에 기사가 둘이니. 혹시라도 문제가 될 일은 없으리라.

다만.

“현재 저택의 상황을 지휘하는 페네스 경이 어쩔지는 모르겠군…. 일단 같이 가십시다.”

그렇게 말하며 앞장서는 소가주의 뒤를 얀과 그 호위인 야만인이 뒤따랐다.

그 도중에 얀은 본인이 ‘마구스의 제자다운 모습’을 연기해야 한다는 걸 잊은 것처럼 소가주에게 이것저것을 질문 했는데, 다행히 소가주는 수상하게 여기지 않고 모두 답해주었다.

수상쩍게 여기기는 커녕, 오히려 부쩍 호감을 느꼈다.

‘그래. 이게 맞는 거지. 건방진 놈들이 가르치긴 누굴 가르치려고……. 귀족도 아닌 것들이 말이야.’

다른 왕국의 마법사들은 대귀족의 장자인 자신의 앞에서도 거들먹거리며 가르치려드는데 반해, 이 심약한 얼굴의 마법사의 태도는 아주 훌륭했다.

과연 마구스의 제자라고 해야겠지. 원래 뛰어난 사람일 수록 스스로를 낮춘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사병들이 소가주를 본체만체하네요. 왜 그런 거죠?”

어찌 보면 무례에 가까운 질문에도 소가주는 불쾌한 티조차 내지 않았다.

내심 뛰어난 마법사다운 지적호기심이라 여겼을 정도였다.

“저택의 경비를 아버지께 위임받은 페네스 경의 지침이오. 몇몇 인물을 제외하고, 이 저택에서 사사로운 대화는 현재 금지된 상태거든.”

“어. 조금…. 아니, 많이 특이한 조치네요.”

“뭐. 그럴 필요가 있다는 소리겠지. 어쨌거나 ‘충성의 서약’을 맺은 기사 아닌가. 배신행위 따위는 절대 못 하는 충실한…….”

소가주는 말끝을 흐렸지만 뒷말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대충 들어도 ‘집 지키는 개’라는 뉘앙스가 가득했으니까.

얀은 그 불퉁한 태도에서 ‘페네스 경’이라는 인물과 눈앞의 귀족 청년이 사이가 썩 좋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눈치가 빠른 야만인 호위’도 충분히 알아차렸겠지.

“흠. 질의응답은 이쯤으로 하는 게 좋겠군. 슬슬 페네스 경이 있는 가주실 앞이오. 그는 언제나 그곳에 있지.”

소가주의 입에서 목적지까지 도착했단 말을 듣기까지, 무장한 사병들을 제외하곤 아무도 마주치지 못했다.

평범한 하인이나 행정관들은 저택 어딘가에 따로 격리되어 있다는 뜻.

역시나 비정상적인 결정이다. 무언가 비밀이 있고, 그걸 알리지 않고 싶다는 의지가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수준.

“페네스 경. 어제 말했던 마구스의 제자가 오셨소.”

“…….”

주변 상황에 정신이 팔렸던 얀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전신을 갑옷으로 감싼 기사가 침묵하며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짐짓 위협적인 태도에 얀이 평소처럼 움츠러들다가, 뒤에 있는 야만인의 존재를 떠올리곤 침착함을 되찾았다.

“마구스 제롬의 제자 얀입니다. 귀가의 저택에 발생한 이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이렇게 무례를…….”

“억지로 예를 차리지 않아도 괜찮소. 젊은 마법사. 제국 귀족들을 상대로도 목이 빳빳한 오색 마탑의 인재 아닌가?”

“어. 딱히 그렇진 않은데요……?”

“문제가 발생해서 봉쇄한 저택에 야만인 같은 폭력적인 족속을 데려온 게, 무례가 아니면 뭐겠소. 아무래도 호위로 고용한 모양인데….”

저 미개한 인종은 믿을 수 없군. 씹어뱉듯 말하는 페네스에겐 어떠한 감정의 편린이 엿보였다.

“안으로 들어가는 건 나와 마법사. 단둘이오.”

그 말에 얀이 야만인 호위를 슬쩍 흘겼다가, 이번엔 소가주 쪽으로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다만 금발의 청년은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수긍의 뜻을 내비칠 뿐. 굳이 얀을 돕진 않았다.

“페네스 경이 좀 고집불통이라. 적당히 협조해주시오. 어차피 야만인까지 볼 필요는 없지 않나?”

“……네. 그렇지요.”

오히려 페네스를 지지하는 듯한 발언을 내뱉곤, 대화에서 한 발짝 물러나는 태도를 내보였다.

‘뭐지? 사이가 안 좋은 게 아니었나?’

페네스를 싫어하는 것 같던 이전의 모습과 다른 태도에 얀은 적잖이 혼란스러웠다.

아니, 애초에 이 저택의 모든 것들이 수상쩍게만 느껴졌다.

백작의 기사가 명령을 내렸다고, 백작의 아들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사병들.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소가주 본인. 그리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 이 사태의 중심에 있을 헤펠트 백작…….

얀은 뭐가 어쨌건 저 페네스란 기사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야 한단 걸 확신했다.

그의 뒤에 있는 무시무시한 전사가 그걸 바라고 있으니까.

“그럼. 문을 열 테니 바로 따라 들어오시오.”

“네. 알겠습니다.”

페네스는 속내를 알 수 없는 목소리로 등을 돌려, 자기가 지키고 있던 가주실의 문을 반쯤 열어젖혔다.

얀에게는 그 광경이 악마의 소굴로 들어오라는 것처럼 퍽 불길하게 느껴졌다.

안쪽에서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게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크르르르륵──!”

“어….”

그리고 다음 순간.

“우워어─어─어─!”

저택 전체를 내려 앉힐 기세의 포효가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깜짝 놀란 얀이 앞에 있어야 할 페네스를 향해 어찌 된 일인지 물어보려 했으나, 그때 이변이 발생했다.

“이게 무슨…. 각하!”

붉은 섬광이 번쩍-! 터졌다 생각한 순간.

쾅!

둔중한 굉음과 함께 페네스의 몸이 붕- 떠서 벽에 처박혔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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