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야만전사-32화 (32/132)

#032화. 드라우프니르 (1)

“아버지……!”

소가주가 비명을 내지른 다음 순간 우악스런 손길이 얀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그의 야만인 호위, 칸이었다.

“위험해!”

그사이 당황한 소가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까지 얀이 있던 자리로 붉은 검날이 쇄도하는 걸 본 직후였다.

“저, 저건.”

“크르르륵!”

얀의 당혹스런 목소리와 예의 짐승 울음소리가 겹친다.

풀플레이트 아머로 무장한 기사를 날려 보내고, 소가주에게 아버지라 불린 존재.

헤펠트 백작이 흰자위만 남은 눈동자에 살기를 가득 드리운 채. 얀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붉은 기운이 일렁이는 고풍스러운 외형의 검을 손에 든 상태로.

“크윽. 각하…!”

벽에 부딪쳤던 페네스가 뒤늦게 몸을 일으켜 나섰다.

당장이라도 얀을 향해 달려들 기세의 백작을 진정시키려는 듯, 검집째로 검을 휘둘렀다.

카각!

백작은 제자리에서 페네스의 일격을 막았다.

오히려 검끼리 맞물린 상황에서 힘으로 밀어내는 모습까지 내보였다.

“어떻게…!”

페네스조차 당황한 듯 놀란 목소리를 내고, 백작이 끔찍한 포효와 함께 페네스를 몸으로 밀어붙여 버렸다.

백작이 다칠까 전력을 발휘할 수 없는 페네스로선 속수무책으로 당해줄 수밖에 없는 일격.

쿵-!

페네스를 밀어낸 백작의 눈은 그대로 얀을 향했다.

“용은 죽─인─다─!”

“미, 미친 사람이에요! 전사님!”

그러다 이지를 완전히 상실한 것처럼 보이는 백작이 의미 모를 포효와 함께 달려들었다.

당황한 얀은 연기조차 잊고 칸의 뒤로 내뺐고….

“죽어─라─! 사악한 용─!”

“이런 시발.”

백작이 미쳐 날뛰는 이유가 제 품에 있는 용의 비늘 조각 때문임을 알아차린 칸의 얼굴이 썩어들어갔다.

붉은 기운이 감도는 낡은 검, 용과 연관된 것을 마주치면 발작하는 모습과 착용자에게 과도한 힘을 부여하는 마검스러운 기능까지…. 이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다르킨이 등장하는 제5막. 그보다 훨씬 뒤에 나타나야 할 최악의 마검.

‘용살검이잖아, 저거.’

용살검 드라우프니르.

제6막에서 입수할 수 있는 히든 퀘스트를 진행하면 획득 가능한 종결급 무기.

검 형태의 장비 중에서는 빼어난 성능을 가졌기에, 나름 준종결급 장비로 취급하는 사기템이기도 했다.

칸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의문은 이거였다.

‘저게 왜 지금 시기에 나타난 거지?’

용살검 드라우프니르는 여덟 개의 분신과 하나의 본체로 이루어진 무기다.

제국 전역에 퍼진 드라우프니르의 모든 분신을 회수해, 제국 북방 너머에 있는 유적에 잠든 본체와 합치는 게 히든 퀘스트의 내용이고.

그런데 제1막이 채 끝나지도 않은 시점에 드라우프니르가 웬 아르곤 왕국의 귀족 나부랭이의 손에 들려있다…?

‘일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거야. 대체.’

칸이 다르킨을 족친 시점에서 스토리가 비틀리는 건 확정된 미래지만, 드라우프니르의 건은 완전히 별개였다.

퀘스트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드워프들이니까.

설마 이것도 서부 대산맥에서 용의 비늘 조각을 칸보다 먼저 회수하고, 다르킨에게 조각의 일부를 건넨 누군가의 소행인가?

‘정보가 부족해.’

“용은 죽인─다─!”

“엿 같네. 진짜….”

‘우선……. 드라우프니르의 원념에게 홀린 백작부터 어찌해야겠지.’

칸은 습관적으로 주먹을 뻗어 백작을 날려버리려다 흠칫- 멈춰섰다. 자칫 귀족을 죽여버릴까 걱정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쒜엑─! 섬뜩한 파공성과 함께 짓쳐 든 붉은 검날이 칸의 귓볼을 살짝 스쳤다.

칸은 거기서 또 반사적으로 주먹을 후려치려다 뒤로 물러났다.

‘존나 까다롭네.’

드라우프니르의 효과 때문이다.

저 염병할 검은 제 숙주의 피를 빨아먹고, 몸뚱어리를 날붙이처럼 단단하게 만든다. 동시에 ‘상처 악화’라는 저주를 적중한 상대에게 부여한다.

마땅한 무기가 없는 지금으로선 그야말로 최악의 상성.

심원의 방패를 써서 밀쳐내야 하나? 겨우 이런 일로 아티팩트를 내보이는 건 싫은데. 아니면 아예 도약으로 들이박아……?

백작을 두들겨 팰 이런저런 방법이 짧은 순간 몇 가지나 떠올랐다. 다만 그걸 실제로 시연할 기회를 페네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각하!”

짓씹듯 외친 페네스가 판금 갑옷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민첩함으로 달려들더니, 순식간에 백작의 후방을 점했다.

“용은 죽인다……!”

그러나 백작은 제 뒤에 뭐가 있든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정확히는 백작의 정신을 조종하는 드라우프니르의 원념이 그렇단 말이지만.

“검!”

칸은 어눌한 말투를 연기하며, 최대한의 조언을 건넸다.

페네스도 영 멍청이는 아니었는지 눈치 좋게 칸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빛이 있었다.

말 그대로 빛이었다. 푸른색의 덩어리가 광원을 흩뿌리며 페네스의 검을 코팅하듯 감쌌다. 칸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오러.’

만신전의 신들 앞에서 ‘충성의 서약’을 맺은 이들. 기사에게 주어지는 힘.

마나와 신성력, 흑마력이 주문 따위를 필요로 하는 것과 달리, 오러는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

실력에 따라선 오러를 건물보다 커다랗게 빚어서 휘두르는 것도 가능한데, 페네스의 실력으론 검을 코팅하는 게 겨우였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대단히 위협적이긴 했다.

쩌어엉──! 쨍그랑!

자기가 그린스킨 전사라도 된 것처럼 돌진하던 백작의 몸이 휘청거렸다.

페네스의 검이 드라우프니르를 부숴버릴 작정으로 두들긴 반동이었다.

저택 복도에 걸린 장식품들이 충돌의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작은 드라우프니르를 놓지 않았다.

되레 방금의 일격이 검의 원념을 자극한 듯, 붉은 기운이 더욱 드세졌다.

“용은……!”

정말 팔이라도 잘라야 하나? 전투를 지켜보던 소가주가 손을 벌벌 떨며 그런 생각을 떠올렸을 때.

숨죽이고 있던 얀이 주문을 완성했다.

“가만히 계세요!”

미덥지 못한 목소리와 달리, 주문의 위력만은 걸출했다.

과연 마구스의 제자라는 반응이 절로 나올 만큼.

촤르르륵!

저위계 주문, 아라크네의 침묵실.

회색의 반투명한 실타래가 범람하는 강물처럼 쏟아져 내렸다. 용병 마법사들의 주문 정도에나 익숙했던 소가주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얀의 지휘에 따라 주문의 실타래가 백작의 전신을 꽁꽁 옭아대기 시작했다.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를 날려 보낸 괴력으로도 사지와 관절이 모두 포박당한 상태에선 제힘을 발휘하기가 힘들었다.

칸이 그 틈을 노리고 드라우프니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칸이 거리를 좁혀오자 백작이 더욱 발광하며 실을 끊어내려 했으나, 페네스가 달려들어 백작의 팔을 붙들었다.

‘잡았다.’

칸의 우악스런 손아귀가 드라우프니르를 쥔 백작의 손 위로 덮어졌다.

자그마치 61의 근력으로 손가락을 하나하나 들어내자, 원념의 저항이 무색할 정도였다.

“그오오……!”

이대로 당해줄 수는 없다는 듯. 원념이 백작의 입을 빌려 끔찍한 포효를 토했다.

드라우프니르가 더 많은 피를 빨아들이는 것으로 저항하려 들었다. 그러나 칸의 힘을 상회하려면 인간이 아니라 최소한 트롤이 드라우프니르를 쥐고 있어야만 했으리라.

마침내.

백작의 손에서 드라우프니르가 떨어져 나갔다. 우득- 손가락이 꺾이는 소리가 들렸으나 칸은 불의의 사고라며 스스로 납득했다.

털썩!

“각하!”

원념의 지배에서 풀려난 백작이 쓰러지는 걸 받아낸 페네스가 급히 제 주군의 안색을 살폈다. 다행히 의식을 잃은 것뿐.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는 없었다.

우우우웅─! 우우웅!

제 주군을 홀린 마검이 토해내는 진동 소리에 페네스가 얼굴을 굳혔다.

교양으로 검술을 익힌 백작조차 뛰어난 전사로 만든 마검이다. 그게 야만전사의 손에 들린 순간, 어떤 위력을 발휘할지 가늠조차 불가능했다.

“전, 전사님…! 괜찮으세요?”

얀이 연기를 잊고 평소 말투처럼 칸의 안부를 물었으나, 페네스는 드라우프니르를 쥔 채 침묵하는 야만전사에게 모든 신경을 집중시키느라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물러서시오. 만약 저 야만인이 날뛰면 당장 제압해야 할 테니.”

“어……. 그러지 않는 게 좋을 텐데요……! 다칠 거라고요!”

“어쩔 수 없소. 호위의 목숨은 최대한 살려보지. 팔 하나 자르는 정도로 말이오.”

“그 뜻이 아니라….”

‘기사님 목이 잘릴 거란 뜻인데요!’

얀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

*

*

“이건 또 뭔 상황이래.”

칸이 황당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풍경…. 아니, 이제는 낯설어진 풍경이 보였다.

눈에 띄는 거라곤 침대와 책상, LED조명으로 번쩍이는 고사양의 컴퓨터밖에 없는 살풍경한 14평 남짓의 원룸.

‘내 집이잖아. 이거.’

머리를 긁적이던 칸이 문득 든 생각에 컴퓨터로 걸음을 옮겼다.

이게 무슨 개꿈인지는 몰라도, 혹시 모른단 생각에 마우스로 손을 가져가자 모니터에 불이 들어왔다.

[부먹펩시민트초코김피탕님.]

화면을 살펴보니, 게임 정보를 공유하던 커뮤니티가 켜져 있는 상태였다. 곧장 스토리 요약 공략글을 찾기 위해 게시판을 클릭했다.

“쯧. 역시. 화면이 안 넘어가…….”

예상한 결과였다. 혀를 차며 물러난 칸이 이번엔 냉장고로 향했다. 이어 내용물을 확인한 야만인의 험상궂은 얼굴이 활짝 펴졌다.

물처럼 달고 살던 그 제로 탄산음료를 집어 든 칸이 음료를 단번에 들이켰다.

그러는 즉시 엿 같은 중세에선 맛볼 수 없는 시원한 탄산이 목구멍을 타고…….

우그극.

“시발. 아무 맛도 안 나잖아.”

흉신악살 마냥 일그러진 얼굴의 칸이 음료병을 종이처럼 접어버렸다.

짜증이 확 올라서 그런지, 까먹고 있던 직전의 상황이 떠올랐다.

‘드라우프니르가 보여주는 환각이군.’

게임에서도 마검 상태의 드라우프니르를 강제로 착용하면, 검에 깃든 원념이 환각 상태 이상을 부여했었다.

게임이 현실이 된 지금. 그게 이런 방식으로 구현된 게 아닐는지.

“생각보다 별거 없는데……?”

내 방을 보여주는 게 무슨 공격이 된다고. 칸이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쯤, 사방이 아지랑이 치며 뭉개지기 시작했다.

지금의 환각이 별 타격이 없다는 걸 알아차린 원념이 다른 걸 보여주려는 듯했다.

평범한 오피스텔의 모습은 순식간에 묽은 찰흙처럼 변했고, 이내 새로운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실내였다. 지구의 것은 아니고, 평범한 중세 양식의 방…….

“이런 씹.”

새로운 배경에 엿 같은 익숙함을 느낀 칸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졌다. 아무 맛도 안 나는 탄산음료를 마셨을 때보다 더.

또각. 또각.

뒤쪽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칸은 저절로 이끌리듯 몸을 돌렸다. 타죽을 걸 알면서도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황금빛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칸을 바라본다. 그것과 눈이 마주친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다. 하지만 칸은 이해했다. 그녀가 나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틸리.”

칸도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또각…. 또각….

그녀가 다가온다. 칸은 어쩐지 멍한 머리로 다시 그녀의 이름을 입에서 굴린다.

틸리. 아름다운 눈매가 반달 모양으로 곱게 접힌다. 예전과 같은 웃음이다. 칸이 그녀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아무 느낌도 나지 않던 탄산음료와 다르게 그녀의 볼에선 온기가 느껴졌다. 마치 진짜 그녀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 ■.]

그녀가 말했다.

이번에도 칸은 알아들었다. 그래서 그 말에 따랐다. 부드러운 볼을 쓰다듬던 손을 아래로 가져갔다.

믿기지 않을 만큼 가녀린 목이 야만인의 손아귀에 잡혔다.

그리고.

칸은 과거의 후회를 바로 잡았다.

우드득…….

*

*

*

[크아아악! 네가 어떻게 그 괴물을 알고 있는 거냐……!]

머릿속에 직접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칸이 정신을 완전히 되찾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드라우프니르의 환각이 깨졌다.

[이런 제기랄! 놔라! 당장 날 놓으란 말이다! 그 괴물이랑 엮인 놈을 숙주로 삼을 까보냐……!]

드라우프니르의 원념이 게임에서도 말을 했었나? 마검 상태의 드라우프니르를 장착한 적이 없어서 그건 모를 일이다.

자기가 환각을 보여줘 놓고는 혼자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하나는 확실하게 알았다.

‘우리 서로 나눌 대화가 많을 것 같은데.’

[끄아악! 놓으라고! 이 미친 인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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