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야만전사-33화 (33/132)

#033화. 드라우프니르 (2)

마음 같아선 당장 드라우프니르와 진한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 칸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럴 수는 없었다.

헤펠트 백작이 생각보다 일찍 정신을 차린 탓이었다.

“고맙군. 그 검을 들고 나서부터 머리에 먹구름이 낀 것 같았는데……. 마구스의 제자라고 했나? 이 일은 잊지 않고 보답하지. 가문의 이름을 걸고서라도.”

“어. 저는 별로 한 게 없어서요….”

“얘기는 들었어. 자네의 호위가 큰 역할을 했다지. 야만인이라…. 흑익공이 괜히 기사보다 아끼는 게 아니더군. 마검에 홀려 날뛰는 날 간단하게 제압했다던데.”

여전히 창백한 안색의 백작이 사치스러운 의자에서 눈동자만 돌려 칸을 응시했다.

철딱서니 없는 아들내미와 달리, 백작은 드라우프니르에게 피가 빨리고도 귀족다운 위엄을 뽐냈다.

‘전쟁에 익숙한 군주라 이거지.’

확실히 칸이 보기에도 헤펠트 백작은 평범한 인간에게서 볼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한마디 말로 수십, 수백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진짜 귀족의 위엄이라 해야 할까.

‘그도 아니면, 연기에 능숙한 여우겠지.’

“마구스가 자네에게 붙여준 호위라 했나? 얼마에 고용했지? 가능하다면 웃돈을 주고서라도 내가 고용하고 싶다마는.”

“어. 그게요…….”

“어렵게 생각하지 말지. 얀이라고 했던가. 자네에게 그럴 용의가 있다면 용병 조합을 통해 믿을만한 용병 호위도 구해주겠네. 이만하면 괜찮은 조건이라 생각하는데.”

백작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얀이 이도 저도 못하고 버벅댔다. 사실 호위는커녕 그 반대. 자기가 칸에게 짐짝처럼 떠맡겨진 신세였으니까.

그걸 조용히 지켜보던 칸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군.

“그럴 필요는 없소. 나는 돈 때문에 움직이는 게 아니라, 저 녀석의 스승과 한 약속이 있어서 동행하는 것뿐이니까.”

“……!”

줄곧 왕국어에 무지한 척 연기하던 칸의 입에서 너무나 유창한 왕국어가 나와서 놀란 걸까.

목석처럼 시립한 페네스의 어깨가 움찔했다. 백작의 얼빠진 아들내미는 아예 대놓고 놀란 티를 냈고.

“전, 전사님. 말해도 괜찮은 거 맞아요…?”

“일도 다 끝난 마당에 무슨 상관이냐. 그렇지 않소?”

칸의 물음에 백작이 호기롭게 미소 지었다.

“그래……. 틀린 말은 아니야. 저택을 봉쇄한 건 애초에 내가 마검에 홀려 날뛴단 소문을 막기 위해서였으니까.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너무 당당하군. 후환이 두렵지 않나? 자네들에게 감쪽같이 속은 내 기사가 화가 난 것 같아서.”

“내가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오히려 걱정할 건 내가 아니라 그쪽이지. 잘못하면 귀한 기사를 잃게 될 테니까.”

“이─놈─!”

‘나한테 덤비면 네 기사가 뒈질 건데 괜찮냐?’라는 말에 격노한 페네스가 노호성을 터뜨렸다.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 정도의 살기.

칸은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꼬우면 덤비라지.’

좋은 장비로 무장한 사병 수십에 기사가 둘. 당장 헤펠트 백작이 보유한 전력은 분명 위협적이긴 했다. 기사의 존재가 특히.

하지만 칸은 확신하고 있었다.

만약 싸움이 붙게 된다면, 백작이 코앞에 있는 이상 이쪽이 유리하다고.

무엇보다 귀족과의 협상에서 기가 눌리면 될 것도 안 된다.

저것들은 신분의 차이를 이용해 최대한의 이득을 취하는 데에 매우 능숙한 족속들이니까.

“뭐. 어쨌거나 우리는 우리의 역할을 다했소. 용병 조합을 통한 공식적인 의뢰니, 설마 떼먹지는 않으시겠지?”

“……흐음.”

당당하다 못해, 파격적인 칸의 선언을 듣고서도 헤펠트 백작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미묘한 웃음을 입가에 띄운 채 칸을 응시할 뿐.

“각하─! 제가 저 무도한 야만인의 무릎을 꿇리겠습니다! 부디!”

분노한 페네스는 당장이라도 칸을 공격할 것처럼 살기가 충천했고, 무능력한 소가주는 그저 이 상황이 벅찬 듯 몸을 덜덜 떨었다.

그리고 백작은….

“하하하하……! 실로 용맹한 전사군! 내 곁에 두지 못하는 게 애석할 정도로!”

“가, 각하?”

“됐다, 됐어. 어쨌거나 본가의 문제를 해결해준 이들 아닌가. 사소한 거짓말 정도는 뭐…. 공으로 덮으면 될 일이지.”

그렇지 않나? 그리 물으며 백작이 눈빛을 보내오자, 칸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자식새끼랑은 다르게 제법 눈치가 괜찮은 양반이군.

“그래. 내게 바라는 게 뭔가? 마구스의 제자와 자네처럼 뛰어난 전사가 돈이 궁핍할 리는 없겠고.”

“부서진 모루 공방의 장비를 살 생각이오.”

“어렵지 않은 일이군. 아직 도시에 풀지 않은 물량이 꽤 있으니까. 원하는 걸 몇 자루 주도록 하지. 그리고?”

생각보다 통이 더 큰 양반이네. 칸은 속으로 감탄하며, 은근슬쩍 챙겨 허리에 묶어놓은 드라우프니르를 퉁- 때렸다.

우우웅! 우웅!

‘시끄러워. 새끼야.’

“덤으로…. 이 마검도 챙겨가고 싶은데.”

“흠. 그런 흉물은 어째서? 괜히 가지고 다녀서 좋을 게 없을 텐데. 그건 본인도 모르게 사람을 홀려. 아주 조금씩…. 본인은 위화감조차 느끼지 못한 채 당하고 말지.”

“무기가 잘 들기만 하면 됐지. 무엇보다 이놈이 내 정신까지 어쩌지는 못하는 모양이오.”

칸의 확신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백작은 실소를 터뜨리며 손을 내저었다.

“나도 괜히 재액을 불러올 물건을 본가에 두고 싶지는 않아. 나름 팔려면 팔아먹을 구석이 있긴 하겠지만, 제대로 쓸 수 있는 전사에게 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다만.”

수지가 좀 안 맞는군.

뭐든 들어줄 것처럼 굴던 백작이 입가에 나른한 미소를 걸치며 말했다.

“사람을 홀리는 마검이래도 명검은 명검. 그 위력을 생각하면, 부서진 모루 공방의 물건은 포기해야 할 걸세.”

“공방 쪽 물건은 돈을 주고 사면 되니까 상관없소.”

“흠……. 섣부르게 돈을 쓰기 전에, 내 제안을 먼저 들어보는 게 어떤가? 그 마검을 탐내는 자네라면 분명 흥미로워할 테니.”

짐짓 뜸을 들이는 백작에게 어서 말해보라는 듯 칸이 고개를 까딱이자, 헤펠트 백작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오며 웃었다.

“에밀 자작을 죽여주게. 그 마검은 본래 그의 것이거든.”

*

*

*

백작의 설명은 이러했다.

최근 벌어진 전투에서 헤펠트 백작은 제 기사들을 이끌고 몸소 전장에 나섰다. 그에 질 수 없다는 듯 에밀 자작 또한 강병으로 유명한 사병들을 이끌고 대응했고.

“물론, 그렇다고 당장 전면전을 벌인 건 아닐세. 정치적인 원인으로 발생한 전쟁이 으레 그렇듯 말야. 각자 대표자를 뽑아 결투를 벌였지. 당연히 더 많은 기사를 보유한 아군 측이 이겼네. 그리고……”

그 마검은 에밀 자작이 결투에 나선 기사에게 직접 건네준 물건이야. 헤펠트 백작은 지금도 부르르- 떠는 드라우프니르를 꺼림칙하단 눈빛으로 흘기며 말했다.

“포션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 오러와 부딪치고도 날이 멀쩡한 명검. 아주 귀한 전리품 아닌가? 그래서 결투의 승자인 페네스 경이 내게 직접 진상했지. 그때부터 정신에 이상이 생겼네. 나도 모르게 싫은 소리를 지껄이던 행정관을 찔러 죽였더라고. 마검에 홀린 게지. 오늘 갑자기 내가 날뛴 것처럼.”

“각하…….”

“그렇다고 검을 몸에서 떼어내려 하면, 또 발작을 일으켜서 어찌할 도리가 없더군. 오늘은 왜 그런 건지 잘 모르겠다만. 대충 전말은 이렇고…….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 아무래도 에밀 자작이 고의로 이 물건을 넘겨준 것 같다고 말이야.”

꽤 그럴듯한 추측이다. 합당한 의심이기도 하고. 칸이라도 헤펠트 백작과 같은 결론을 내렸을 터였다.

“그래서. 그 복수로 에밀 자작을 죽여달라?”

“아니지. 나에겐 복수겠지만, 자네라면 얘기가 다르지 않나? 내가 보기에 이 물건은 에밀 자작의 능력으로 구할 만한 물건이 아니야. 다른 출처가 있다는 뜻이지. 무슨 말인지 알겠나?”

“에밀 자작을 족치고 그 출처를 알아내면, 이 마검과 비슷한 물건이 더 있을 테니. 능력껏 챙기라 이 소리군.”

“맞네. 머리가 비상한 친구로군. 야만인은 다들 멍청하다던데…….”

숨 쉬듯 자연스레 나온 야만인 혐오야 넘어가고……. 제안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드라우프니르의 출처는 칸이 가장 궁금해하던 것 아닌가.

물론, 그렇다고 덥석 수락할 순 없었다.

‘제대로 챙길 건 챙겨야지.’

“그런 거라면 정식으로 의뢰하시오. 무려 한 도시의 주인을 살해해달란 의뢰니까. 고작 사람 홀리는 게 주특기인 마검을 대가랍시고 주진 않겠지?”

우우웅! 우웅!

드라우프니르가 항의하듯 몸체를 부르르- 떨었으나, 칸은 주먹으로 검신을 쥐어박는 것으로 놈의 항의를 묵살했다.

그리고선 사뭇 당당한 태도로 외쳤다.

“에밀 자작의 목을 대신 베어드리지. 원한다면 당신을 홀렸던 이 마검으로 말이오. 그럼 헤펠트 백작. 당신은 내게 얼마를 지불하시겠소?”

*

*

*

“각하. 처음부터 거짓을 일삼고 저택에 침입한 자들입니다.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그게 무슨 소리인가? 페네스. 내가 누굴 신뢰한다고?”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헤펠트 백작이 웃음을 터뜨렸다.

과할 정도의 보수와 흉물스러운 마검을 계약금 대신으로 챙겨간 야만인이 떠나간 뒤의 일이었다.

“진정한 귀족이란 자신 외에 그 누구도 믿지 않는 이를 말하는 걸세. 아, 물론 만신전 신의 앞에서 충성을 맹세한 자네는 다르지만.”

그 말에 완전히 잊혀진 것처럼 쭈그러져 있던 소가주가 움찔거렸다. 백작은 그 못난 모습에 혀를 차면서 말을 이었다.

“이 전쟁의 시작이 본가에 큰 득이 됐을지언정, 이제는 밑 빠진 둑에 물을 붓는 것과 다름없어졌어. 우리는 진작에 에밀 자작가를 밀어내고 피카르를 병합해 후작가가 되었어야 했지. 그런데 왕가의 눈치를 보느라 이도 저도 못하는 신세가 돼버렸고….”

“……!”

전쟁의 숨겨진 사정을 조금도 모르고 살던 소가주가 기함하는 게 보였다. 왕가의 이름은 그만큼 무겁고, 두려운 것이었다.

현 국왕이 앉은 왕좌가 고귀한 피로 적셔진 것이기에 더욱더.

“왕가뿐인가. 다른 귀족 세력까지 들러붙어 에밀 자작가를 지원하고 있네. 전쟁으로 큰 부를 이룩한 본가를 시기하고, 약탈하려 드는 것들이지. 그래서야. 우리의 여력이 다하기 전에 끝장을 봐야 해.”

“그 말씀은…. 아까의 야만인이 전쟁을 끝내는 데에 도움이 되리란 말씀이십니까? 정말. 그자가 에밀 자작을 처리할 수 있다고……?”

“뭐. 힘들겠지. 사람 하나 더해져서 가능한 일이었으면, 이 전쟁이 이토록 길어졌겠나. 다만.”

치명적인 비수 역할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나?

“단번에 날아가서 상처를 입히고, 그 쓸모를 다하는 비수 말이야.”

호탕한 귀족의 면모를 뽐내던 헤펠트 백작의 민낯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칸의 실패를 예견했다. 아니, 오히려 유도하기 위해 마검을 그에게 쉽사리 건네준 것이었다.

“에밀 자작의 사병은 이런저런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고 키워낸 특출난 강병이지. 그 야만인은 결국 한계에 부딪칠 것이고, 마검의 힘을 빌려 자멸하게 될 것이야. 그리고 강대한 전사가 마검에 홀려 날뛴 만큼. 에밀 자작에겐 빈틈이 생겨날 것이고…….”

“그 틈에 본가가 에밀 자작을 결딴내면 된다, 이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그 야만인이 정말 에밀 자작을 죽인다면 더할나위 없을 테지만.”

‘어쨌거나 보수를 받아야 할 야만인이 죽게 된다면, 전혀 손해 볼 게 없다. 혹시나 그 야만인이 살아남는다 치더라도…. 그땐 이쪽에서 숨통을 끊으면 될 일.’

그렇게 된다면 그가 손해 볼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 그가 손에 쥐게 될 것은 너무나 크다.

그동안 여러 귀족과 왕가를 등에 업고서 주제도 모르고 날뛰던 에밀 자작을 죽이고, 도시 하나를 다스리는 시장이 아니라 저 제국의 영주들처럼 진짜 지배자가 될 것이다. 헤펠트 후작이라는 새 호칭과 함께!

‘그 야만인이 어서 빨리. 만용을 부리다 마검과 같이 산화했으면 좋겠군…….’

헤펠트 백작의 입가에 간악한 미소가 떠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