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화. 드라우프니르 (3)
[부서진 모루 공방의 외날 도끼]
─뛰어난 장인이 적당하게 공을 들여 완성한 외날 도끼. 대산맥의 마력이 섞여 무거운 성질을 지닌 철을 섞었기 때문에, 겉보기에 비해 무척 무겁다.
“나쁘지 않네.”
백작이 따로 준비해준 숙소에서 검게 빛나는 손도끼를 쥔 칸이 흡족한 듯 웃었다.
아이템 정보가 뜬다는 건, 이 물건이 게임 시스템의 기준으로 ‘아이템’으로 분류될 수 있는 성능을 갖췄다는 얘기니까.
‘대충 만들었단 문구가 좀 그렇긴 한데…….’
어쨌거나 임시로 쓸 무기치곤 나쁘지 않은 게 사실이다. 무게도 상당하고, 투척용으로 써도 꽤 버텨줄 정도의 내구도는 갖춘 듯하니.
다르킨을 분쇄한 A등급 스킬 ‘끓어오르는 힘’에 써먹을 정도는 아니겠으나, 그건 지금도 우우웅- 진동하는 드라우프니르를 써먹으면 될 터였다. 자그마치 ‘파괴 불가’ 옵션이라니.
[용살검 드라우프니르]
─용의 원념이 서려 있는 마검. 현재 여러 개의 분신으로 나뉘어져 본 성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원념 잠식 :: 드라우프니르의 원념은 끊임없이 주인을 시험합니다. 원념이 보여주는 환각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육체를 강탈당합니다.
─상처 악화 :: 드라우프니르의 원념이 품은 사기(邪氣)는 상처의 치유를 방해합니다. 일정 등급 아래의 포션과 치유술을 무효합니다.
─혈주술 :: 피를 매개로 하는 온갖 ‘혈주술’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아이템이 성장함에 따라 더욱 많은 혈주술이 개방됩니다.
─파괴 불가
─???
고작 분신인 주제에 깨나 화려한 설명란.
‘원념 잠식’ 옵션은 어째선지 칸에게 별 효과를 못 미치니 넘어가고, 그 외에 상처 악화와 파괴 불가 속성은 그 자체로 최상급의 옵션이었다.
재생력이 장기인 트롤은 물론이고, 언데드나 악마를 상대로 굉장히 유효한 까닭.
칸이 선호하는 방식은 아니지만, 평범한 인간이 상대라면 출혈을 유도해 탈진시키는 전법도 가능하리라.
A등급 스킬의 반동에도 파괴 불가 속성이 있으니, 끄떡없을 테고.
‘앞으로 고생 좀 할 거다.’
[미친 인간! 당장 날 놓으란 말이다!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물론, 드라우프니르의 원념이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는 문제가 있긴 했다.
‘뭐. 그래 봤자 자기만 힘들지.’
[크아아악! 이 염병할 비늘 좀 떼라! 이 미친 인간 놈아!]
칸은 드라우프니르의 비명을 들으며, 드라우프니르의 검집에 같이 고정해두었던 용의 비늘 조각을 품에 넣었다.
“그래서. 이제는 협조할 기분이 좀 드나?”
[크흐윽. 내가 어째서 이런 꼴이……!]
“괜히 뻐팅기니까 그렇지. 말로 할 때 들었으면 오죽 좋아. 이제 순순히 불기나 해라.”
‘네가 보여준 환각 속에 나온 여자. 어디서 봤지?’
[미친 인간 놈! 오히려 내가 묻고 싶다! 그 괴물과 대체 무슨 관계냐! 그 괴물이 내 영혼을 찢어 이 답답한 파편에 집어넣었단 말이다!]
이건 또 뭔 소리야. 칸은 드라우프니르가 한 말을 순간 받아들이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영혼을 찢어 파편에 넣었다고?
‘꼭 네가 드라우프니르의 본체라는 것처럼 말하네.’
[것처럼이 아니라 사실이다! 미친 인간!]
원념이 정말 억울하다는 투로 소리쳤다. 몸체까지 부우웅! 떨어대는 게, 아무래도 진짜인 거 같아서 칸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본체의 영혼을 찢어서 분신에 담았다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마법에 조예가 없는 칸으로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었다.
본인부터가 다른 차원에서 온 빙의자인 데다가, 신과 악마가 실존하는 세상이니 영혼의 실존 여부를 따지는 것도 우습다만, 영혼을 물질처럼 찢고 다른 물건에 옮겨 담는단 얘기는 영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럼 뭐냐…. 그녀가 본체인 널 분신에 옮겨다 담았다 치자. 그럼 본체는 어디에 있는 거냐?’
[멍청한 인간 놈…! 본체와의 연결이 끊어졌는데 그걸 어떻게 아나!]
아주 지당한 지적에 칸의 말문이 막혔다. 그렇긴 하지….
‘그럼. 대륙 북쪽의 유적에 처박혀 있던 널 대륙 서부의 깡촌 왕국까지 보낸 것도 그녀냐?’
[모른다! 영혼이 찢어진 대가로 줄곧 잠들어 있다가, 네놈이 가지고 있는 비늘이 풍기는 용의 기운을 느끼고 처음 깨어난 거니까!]
이놈. 진짜 쓸모없네……. 칸이 떨떠름한 얼굴로 부르르- 진동하는 드라우프니르를 내려다보았다.
아는 거라곤 그녀…. 틸리의 손에 영혼이 찢긴 채 분신에 담겨졌다는 것뿐.
어떤 경로로 아르곤 왕국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건지는 아무것도 모른단 얘기 아닌가.
그냥 시끄럽게 떠드는 것과 진동하는 기능이 추가된 검이라는 소리.
[쓸모없다니! 이 미친 인간아. 이몸은 증오스러운 용들의 비늘을 찢고, 심장을 조각낸 위대한 존재다! 영혼이 찢긴 반동으로 대부분의 기억을 상실했다고 한들, 그것은 변치 않는다! 그러니 마땅한 예를 갖추어라!]
‘스마트폰은 검색이라도 되지. 이건 뭐 아는 것도 없는 게…….’
진지하게 용의 비늘을 섞어 검집을 만들까 고민하던 칸이 고개를 설레 저었다.
A등급 스킬에 맞고도 흠집조차 안 난 물건을 녹일 방법이 없거니와, 놈의 분신을 회수해 흡수시키면 기억이 되살아날지도 모르지 않나.
그리고 드라우프니르 덕분에 확실히 깨달은 것 또한 있었다.
‘모든 회차를 통틀어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용의 비늘 조각을 건네받은 다르킨. 이곳, 바그너에 나타난 드라우프니르. 그리고 어쩌면 북부 전역에 발생하기 시작한 이상 징후까지…….’
이 모든 일들에 그녀, 틸리 아샤누모스가 연관되어 있음을.
*
*
*
칸은 론이 쓸 쇠망치까지 하나 사는 것으로 쇼핑을 마쳤다.
헤펠트 백작이 나름 성의 표시랍시고 거의 헐값으로 물건을 넘긴 덕분에 그러고도 돈이 꽤 남았다.
‘원래는 대검도 하나 살 생각이었는데, 드라우프니르가 있으니…….’
드라우프니르는 일반적인 롱소드치곤 검신이 길고 넓죽한 편이었지만, 남들보다 덩치가 훨씬 큰 칸에게는 평범한 사이즈나 마찬가지였다.
‘무게가 좀 아쉽긴 하지만…. 나머지 분신을 전부 합치면 딱 적당하겠지.’
끓어오르는 힘의 반동을 나눌 매개 역할만 해주어도, 드라우프니르는 쓸모를 다 한 거나 다름없었다.
“남은 건 에밀 자작을 족치는 건가.”
즉, 귀족 살해다.
의뢰를 받았다곤 하나, 미들랜드의 통념상 귀족 살해는 엄연히 상식을 거스르는 행동이었다.
누가 법으로 금지한 건 아니지만, 인식 자체가 그랬다. 귀족을 죽일 수 있는 건 같은 귀족뿐. 이게 상식으로 통했다.
물론, 신분제 따윈 없는 21세기 지구에서 온 칸으로선 아무래도 좋은 상식이다만.
‘영 찝찝하단 말이야.’
바그너와 피카르. 헤펠트 백작과 에밀 자작.
두 도시와 귀족 사이의 분쟁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비정상적인 부를 이룩해 고위 귀족의 자리를 넘볼 수 있게 된 헤펠트 백작. 그를 견제하려는 귀족 세력과 왕가.
귀족 특유의 정치적인 문제가 얽히고 섥혀, 지금의 복잡한 형세가 만들어진 거다….
‘여기서 나한테 불똥이 안 튀는 방향으로, 최대한 이득을 볼 수 있게 움직여야겠지.’
그에 대한 고민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려던 그때.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란이 칸의 집중을 깨뜨렸다.
“저, 전사님…! 론 씨랑 마이아 씨 쪽에 문제가 생겼나 봐요! 조합에서 소식이 끊겼다고……! 으엑!”
벌컥!
칸이 말도 없이 문을 열어버린 탓에 부딪칠 뻔한 얀이 괴상한 소리를 냈다.
칸은 그 미덥지 못한 모습에 혀를 찼고, 외날 도끼와 론에게 줄 쇠망치를 각각 허리와 등에 고정했다.
“소식이 끊긴 건 어디냐.”
“흔들나무 숲 초입에 진입할 때가 마지막이고, 지금은 전령으로 활동하던 사람에게서 소식이 아예 끊겼대요….”
무슨 큰일이 생긴 건 아니겠죠? 얀이 불안한 눈빛으로 칸에게 확인을 구했다.
“괜찮을 거다. 아직은.”
“저, 정말요?!”
“그래. 그놈이 명줄 하나는 끝내주니까.”
길잡이 관련 A등급 이상 스킬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되는 론이다.
기이할 정도로 뛰어난 직감이 있는 만큼, 쉽사리 죽어버릴 일은 없을 터.
거기에 나름 실력 있는 창사인 마이아까지 동행하고 있으니, 설령 상대가 기사라도 도망 정도는 가능하리라.
“일단 가자고.”
“넵!”
그런 걸 일일이 설명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서두르는 게 낫다 판단한 칸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자 백작이 호위라는 명목으로 붙인 사병들이 칸의 갑작스러운 외출에 놀라 당황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다만 그들은 놀랐을지언정 그의 앞길을 막으려 들지는 않았다.
‘괜히 덤볐다간 죽을 거란 경고라도 들은 모양이지.’
칸은 능구렁이 같은 백작의 얼굴을 떠올리며 코웃음을 쳤고, 순식간에 숙소의 정문을 벗어났다.
스르릉.
“어디를 가는 거냐. 야만인.”
그러나 밖으로 나가기 무섭게, 서슬퍼런 검날이 칸의 목젖을 당장이라도 찌를 것처럼 들이밀어졌다.
“각하의 분부가 내려질 때까지. 너는 각하께서 친히 네놈에게 빌려준 이 별장에서 대기다.”
칸이 벙어리인 척 자기를 속이고, 도발한 이후로 대놓고 살기를 내비치던 페네스였다.
“그게 아니면. 이제 와서 의뢰를 포기할 마음이라도 든 거냐? 하긴. 너 같은 야만인에겐 불가능한 일이지. 에밀 자작의 사병은 왕국에서도 소문난 강병이고, 애초에 자작 본인부터가 대단히 뛰어난…….”
갑자기 검을 들이밀더니, 이제는 에밀 자작의 강함을 설파하는 페네스를 보며 칸이 중얼거렸다. 이 새끼는 대체 뭐가 하고 싶은 거야?
“야만인은 다들 두려움을 모르는 진정한 투사라 들었건만, 아무래도 그 소문이 틀렸나 보군. 당당하게 의뢰를 수락해놓고선 몰래 뒤꽁무니나…….”
“그 의뢰를 수행하러 가는 거니까 이만 닥쳐라.”
“뭣……!”
폭언에 익숙하지 않은 걸까. 하긴, 고귀한 기사님이 닥치란 소리를 얼마나 들어봤겠나.
깡통 너머로도 얼굴이 붉어진 게 느껴질 만큼 분노한 페네스의 검을 밀어낸 칸이 어깨를 스치듯 부딪치며, 비웃는 투로 쏘아붙였다.
“꼬우면 따라오던지, 덤비던지, 네 마음대로 해라. 나는 내 전용 내비게이션을 구하러 흔들나무 숲인가 하는 곳으로 가야 하니까.”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칸이 마구스의 제자를 데리고 훌쩍 떠난 뒤. 페네스는 그 자리에 굳은 듯 한참을 서 있었다.
“겨, 경…. 괜찮으십니까? 우선 각하께 보고를 드리는 것이…….”
“됐다.”
“예?”
“너는 저택으로 돌아가서 다른 사병을 모두 끌고 와라. 지금 당장.”
“예, 옙!”
괜히 말을 걸었다가 불똥이 튈 뻔한 백작의 사병은 영문도 모르고 부리나케 자리를 피했다.
괜히 곁에 얼쩡대다가 피를 보리란 것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바이저에 가려져 페네스의 눈을 제대로 볼 수 없었으나,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지금 페네스가 대단히 분노하고 있음을.
‘역시. 각하의 혜안은 대단하군.’
그러나 그건 사병의 지레짐작에 불과했다.
고압적인 말투와 무뚝뚝한 태도로 오해받곤 하지만, 페네스는 백작의 가신들 중에서도 가장 백작의 뜻을 잘 헤아리는 심복이었다.
결코 감정에 일을 그르쳐 움직일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다.
‘야만인은 대체로 과격한 성격에, 두려움이란 걸 몰라 전력의 차이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 탓에 제멋대로 뛰쳐나가 싸울 수 있으니 잘 지켜보라 하셨던 게 전부 맞았다…!’
그때를 대비해 곧바로 병력을 움직일 수 있게, 현장에서 곧장 판단을 내릴 수 있는 페네스가 백작의 곁 대신 야만인이 머무는 곳을 감시하고 있던 것이었다.
‘게다가 흔들나무 숲이라 했지.’
페네스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백작 휘하의 네 기사들 중, 각자 봉토를 얻고 장원 기사가 된 이들이 별개의 임무로 향한 장소. 그곳에 어떤 문제가 생긴 거다.
‘설마. 에밀 자작이 그자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최악의 상황이 페네스의 머릿속을 스쳤으나, 그는 이내 부정했다.
무려 기사가 둘이다.
문제가 생겨도 현장에서 해결할 수 있는 전력이거니와, 설령 그들의 실력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라도 상관은 없었다.
백작가의 기사들 중 최강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이 나설 테니까.
‘차라리 에밀 자작이 나서줬으면 좋겠군.’
그렇게 된다면 그 건방진 야만인에 줄곧 눈엣가시였던 에밀 자작까지. 동시에 제거할 기회가 되지 않겠는가…….
*
*
*
“시벌. 저것들은 대체 뭐 원수졌다고 저러는 거야!”
“우리가 헤펠트 백작 쪽 사람이라 생각한 거겠죠! 떠들 시간에 뛰어!”
“마이아 아가씨! 아무리 그래도 이 쇠망치 론이 이십 년 경력 용병인데, 말이 좀 짧은…….”
“닥치고 뛰어! 이 대머리 새끼야! 염병할 숲에서 묏자리 깔 거 아니면!”
“나는 대머리가 아니라 쇠망치 론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