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화. 드라우프니르 (4)
흔들나무 숲은 바람 한 점 없는 날에도 숲 전체가 흔들리는 풍경을 보고 붙여진 이름이었다.
미신이나 소문을 광신하는 시대였기에, 원래는 마경이나 마녀의 거주지쯤으로 여겨져 한동안 사람의 발길이 뜸했던 곳을 헤펠트 백작가가 나서서 소문의 진상을 밝혔다.
이전에 칸과 론이 네카르 산에서 마주친 적 있는 마물.
쥐대가리들의 서식지인 것이 그 과정에서 밝혀졌으며, 대대적인 토벌 끝에 흔들나무 숲은 도시 바그너의 벌목지가 되었다.
서부 대산맥의 마나를 품은 철이 나오는 광산이 있다는 것도 그때 같이 알려졌다.
물론, 긴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벌목과 채광으로 광산은 폐쇄되고 흔들나무 숲은 민둥숲이 된 지 오래였다마는.
“그런 곳에 기사가 둘이나 향했으니, 형씨가 수상쩍게 여기는 것도 당연한가.”
“그냥 대놓고 수상하죠.”
“나는 여기에 왜 낀 거냐고. 대체…….”
그런 흔들나무 숲에 론과 마이아, 디에고가 당도한 건 얀의 호위로 위장한 칸이 헤펠트 백작저로 잠입할 준비를 마친 시점이었다.
그쪽에 백작저의 문제를 해결할 무언가가 있을 수 있으니, 조사해 보라는 칸의 제안에 따른 결과였다.
실제로는 마검에 홀린 백작을 칸이 진작 구한 뒤였으나, 이미 흔들나무 숲에 도착한 일행으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디에고. 의뢰금도 잘 받아놓고 무슨 딴소리인가?”
“시벌. 그럼 오크보다 흉악한 인간이 돈을 품에 쑤시는 걸 막아? 그건 의뢰가 아니라 협박이라고.”
“흐흐. 형씨 얼굴이 좀 흉악하긴 하지. 그래도 같이 다니기엔 나쁘지 않아. 나름 잔정이 깊은 양반이라고.”
“야만인이 정은 무슨…….”
바그너에서 출발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티격태격하는 둘의 모습에 마이아가 한숨을 삼켰다.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고 저렇게 태평하단 말인가. 간담이 쇠심줄로 된 게 아니고서야.
그러나 평소 성격처럼 쏘아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답답함이 더 컸다.
한쪽은 강제로 딸려온 칼잡이고, 나머지 한쪽은 왕국에서도 경력으론 알아주는 베테랑이니까.
‘어떻게 저런 성격으로 이십 년 넘게 용병으로 살아남았는지……. 참수자. 그 무식한 작자가 데리고 다니는 것도 신기하고.’
그동안 지켜본 바. 론의 실력은 칸의 일행 중 가장 처지는 듯했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참수자라 불리는 칸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 심약한 마법사는 무려 마구스의 제자라지 않나.
그에 비해 론은 시끄럽게 떠들 뿐인 아저씨처럼만 보이니…….
“잠깐. 이 앞은 느낌이 좀 이상하네.”
론이 갑작스레 일행의 전진을 멈춰 세웠다. 그 근거조차 빈약한 ‘느낌이 이상하다.’라는 말로.
나름 경력이 긴 축에 속했던 디에고는 론의 말을 허투루 넘겨듣지 않았다.
오래 생존한 용병의 직감은 그 자체로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음을 잘 알았다.
“느낌이라니…. 별다른 소리도 안 들리고, 시야에도 이상한 점은 없습니다만.”
마이아는 그렇지 않았다.
오로지 출중한 재능과 실력으로 젊은 나이에 총지부장의 눈에 들어 조합의 요직을 꿰찬 탓이었다.
용병 조합의 지부장이지만, 실제 용병들의 생태에는 어두운 것이다.
“쉿. 앞장서겠네.”
론은 굳이 마이아의 의견을 찍어누르거나, 시간을 들여 설득하지 않았다.
본인이 일행의 선두를 자처하여 위험한 역할을 떠맡는 것으로 일행을 이끌었다.
그 이후부터 한층 조심스러워진 속도로 일행이 나아갔다.
그리고 후미에서 론의 느릿한 전진을 지켜보던 마이아는 답답함을 느꼈다.
벌목으로 사실상 평야나 다름없게 된 숲은 시야가 훤히 트여있었고, 이렇게까지 조심스럽게 나아갈 이유가 없어 보였기 때문.
“……이 앞에 시체가 있군.”
얼마나 나아갔을까. 론이 낭패스럽단 투로 일행에게나 겨우 들릴 만큼 작게 중얼거렸다.
시체? 놀란 디에고가 흠칫 멈춰섰고, 마이아가 비스듬히 몸을 내밀어 앞을 살폈다.
그리고 얼굴이 굳었다.
“이런 제기랄.”
자기도 모르게 평소 말투대로 욕이 튀어나온 마이아였으나, 말투 따위를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기, 기사가 죽어 있는데. 내가 잘못 본 건 아니겠지? 그치?”
“닥치고 칼 뽑아.”
“뭐, 뭐? 칼은 왜?”
“뽑으라면 뽑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디에고를 윽박지른 마이아가 등허리에 고정한 창으로 손을 가져가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거대한 나무 둥치에 가려져 있었던 시체가 그곳에 있었다.
피와 흙으로 더럽혀진 판금 갑옷은 시체라는 걸 증명하듯 미동조차 않았다.
갑옷도 이곳저곳이 찌그러져 있었고, 검을 쥔 손은 아예 뭉개져서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뛰어야 하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는 늦은 것 같으니, 앞으로 최대한 빨리 달려야 해.”
다소 경직된 목소리로 론이 제안했다. 마이아도 이번엔 가타부타 따지지 않았다. 끔찍하게 살해당한 기사의 시체가 론의 직감이 옳다는 걸 증명하니까.
쒜에엑─!
“석궁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추격이 따라붙었다.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일행의 곁을 화살이 스쳤다.
“자작의 사병이다! 저것들이 왜 여기에…!”
달리는 와중에 슬쩍 뒤를 살핀 디에고가 숫제 비명을 내질렀다.
급소를 보호하기 위해 철판을 덧댄 검갈색 가죽 갑옷에 단창, 석궁으로 무장한 집단을 발견한 직후였다.
“…….”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으며 일행의 뒤를 쫓는 그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몹시 섬뜩했다.
심지어 똑같이 달리고 있는 와중에도 석궁을 쏴대는데, 그다지 크게 빗나가지도 않았다.
왕국에서 강병으로 소문날 만큼의 실력이 충분하다는 증거였다.
“시벌. 저것들은 대체 뭐 원수졌다고 저러는 거야!”
“우리가 헤펠트 백작 쪽 사람이라 생각한 거겠죠! 떠들 시간에 뛰어!”
“마이아 아가씨! 아무리 그래도 이 쇠망치 론이 이십 년 경력 용병인데, 말이 좀 짧은…….”
“닥치고 뛰어! 이 대머리 새끼야! 염병할 숲에서 묏자리 깔 거 아니면!”
난폭해진 마이아의 말투가 상황의 다급함을 설명했다.
당장 보이는 숫자만 십수 명이다. 무엇보다 헤펠트 백작의 기사를 살해한 자가 보이질 않았다.
“조금만 더 힘내게! 저들도 계속 쫓아올 수는 없어!”
그때 론이 목소리를 높여 일행을 독려했다.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아무리 훈련이 잘된 강병이라도 평범한 인간인 이상 체력의 한계가 분명 존재하고, 일행의 무장이 더 가벼웠기 때문.
“됐다! 저놈들, 슬슬 지쳤어!”
체감상 몇십 분, 실제로는 고작 몇 분도 되지 않는 추격전 끝에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론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큰 목소리로 방향을 제시하며 내달렸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폐광이 나올 걸세. 버려진 시설이긴 해도, 확 트인 이곳보다는 사정이 나을 거야. 나름 쓸만한 것도 있을 테지.”
동시에 일행에게는 제대로 된 목적지를 알려주었다. 흔들나무 숲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폐광.
과거 광산에 나타난 마물을 처리하는 의뢰를 받았던 론이기에 가능한 선택이기도 했다.
“허억! 허억!”
“……!”
가장 체력이 달리는 디에고의 호흡이 거칠었다. 마이아도 아닌 척은 하지만 점차 숨소리가 커졌고, 의외로 쇠망치까지 짊어진 론이 가장 멀쩡했다.
“이제부턴 천천히 속도를 늦추게. 서서히…. 곧 있으면 폐광이 나올 테니.”
슬슬 한계였던 디에고와 마이아는 반개하며 론의 말을 따랐다. 그리고 머지않아 반쯤 망가진 울타리가 일행의 눈에 들어왔다.
론이 말한 폐광에 도착한 것이 분명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일단 여기서 체력을 좀 회복…….”
“고개 숙여!”
쩌엉─!
돌연 울타리 너머에서 짓쳐 든 검을 마이아가 쏜쌀 같이 창을 휘둘러 튕겨냈다.
“크윽…!”
‘무슨 위력이!’
마이아의 몸이 크게 휘청였고, 잇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불안정한 호흡과 자세로 갑작스러운 기습에 반응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검격에 실린 힘이 대단했다.
“아가씨! 으랏─차─!”
그때 론이 쇠망치를 크게 내리찍었고, 정체불명의 습격자는 곧장 검을 회수했다.
우지직!
안 그래도 상태가 영 좋지 않았던 울타리가 순식간에 박살 났다. 당연히 그 너머에 몸을 숨기고 있던 습격자의 정체도 같이 드러났다.
“조그만……. 아이?”
상대의 외양을 본 디에고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뜻밖에도 습격자는 여성인 마이아보다 작은 체구에 둥그런 몸태를 가진 사람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드, 드워프…?”
“흥! 이 빌어먹을 놈들! 뭘 처음 보는 척하는 거냐! 어서 덤비기나 해!”
미들랜드의 육지에선 더 이상 보기 힘들어진 이종족, 드워프였다.
“이런 시벌.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야. 드워프가 왜 이딴 깡촌에…….”
“육시럴 것들아! 잔말 말고 덤벼! 대가리에 전부 구멍을 내줄 테니까!”
“드워프들 입이 그렇게 험하다더니 정말이었군. 형씨랑 마주치면 큰일 나겠어.”
“뭐라 수군대는 거냐! 덤비라니까!”
부웅! 부웅!
드워프가 마구잡이로 휘두른 검에서 살벌한 소리가 났다. 인간과는 비교하기 힘든 괴력을 지닌 드워프라 가능한 일.
“뭔가 오해하고 있나 본데. 나랑 여기 친구들은 자네를 어떻게 할 생각이 없네! 게다가 우리도 쫓겨서 여기까지 온 걸세. 아마 자네가 경계하는 놈들과 같은 녀석들한테 말이야!”
“차라리 귀쟁이가 겸손하단 말을 믿지! 너희 인간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일삼는 걸 나는 안다! 그러니까 꺼지든가 덤비든가 골라!”
“염병. 그냥 대화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디에고가 당혹스럽단 투로 마이아에게 말을 건넸다. 론의 설득이 통하질 않으니, 뭐라도 수를 내보라는 뜻이리라.
정작 마이아도 지나치게 예상을 벗어난 존재의 등장에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드워프라니…….’
다행히 마이아가 뭔가 묘수를 생각해 낼 필요는 없었다.
일행의 대표로 나선 론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드워프가 갑자기 기세를 누그러뜨렸기 때문.
“응? 그런데 그 얼굴…. 저번에 저택에서 본 거 같은데? 사제 놈 호위랍시고 문 앞에서 멀뚱히 서 있던 멍청한 얼굴이랑 똑같이 생겼어. 맞아. 정말 똑같이 멍청하게 생겼어!”
“나는 멍청하지 않네! 사제의 호위로 따라간 건 맞지만!”
“흐음. 그럼 정말 적이 아닌 건가? 근데 다른 도시에서 사제 호위나 하던 놈이 여기는 왜 왔어?”
“그건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상황에 맞지 않게 얼빠진 두 인간과 드워프의 만담에 침착함을 되찾은 마이아였다.
그녀는 미리 준비했던 설명을 풀어내는 것처럼 일행이 폐광까지 당도하게 된 사정을 깔끔하게 전달했고,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용병 조합의 직인이 찍힌 금패를 설명의 말미에 내밀었다.
“음……. 거짓말 같지는 않은데. 이해할 수가 없네. 백작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으면, 저택에 쳐들어가야지. 여기는 왜 온 거야? 죽고 싶어서?”
“오히려 이쪽이 묻고 싶네만. 대충 보아하니 자네는 헤펠트 백작의 아래에서 일하고 있는 것 같군. 그런 자네가 저택이 봉쇄된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가 뭔가? 장원 기사들은 왜 뒤늦게 이쪽으로 향한 거고…….”
“드워프가 뭘 하겠어? 장비를 만들려고 왔겠지! 여기 광산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희귀 금속이 필요했어. 그 깡통 놈들은 저택의 대장 깡통한테 날 다시 저택까지 데려오란 말을 듣고 온 거겠고. 뭐. 하나는 뒈졌고, 하나는 저 안쪽에 널브러져 있지만.”
그렇게 말하는 드워프의 목소리에선 희미하게 적의가 묻어나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헤펠트 백작 측과 사이가 마냥 좋은 것 같진 않았다.
“어쨌든. 내가 해줄 말은 딱히 없어. 여기까지 죽으러 온 놈들한테 바라는 것도 없고. 차라리 날 붙잡아다 그 썩을 인간 귀족한테 넘기는 게 나을 거야.”
“인간 귀족?”
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드워프가 말한 인간 귀족이 누구인지 대충 알 것 같았기에, 스스로 되뇌이는 것에 가깝긴 했다.
“귀족이 귀족이지! 헤펠트 백작 그놈이랑 허구한 날 치고받는 녀석 말고 또 누가 있어?”
“끄응……. 설마 했는데.”
‘기사를 그 끔찍한 꼴로 살해한 자가 누군가 했더니…….’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린 론이 침음을 흘렸다.
왕국에서 손에 꼽는 강병을 직접 육성한 귀족이자, 현 아르곤 왕국 국왕이 아직 왕이라 불리기 이전에 ‘충성의 서약’을 맺고 기사가 되어 혁혁한 공을 세우고 귀족의 위를 스스로 쟁취한 강자.
전 왕가의 근위기사. 에밀 자작.
“표정 보니까 대충 자기가 엿 됐다는 걸 알아차렸나 본데. 차라리 지금이라도 도망치는 게 어때…….”
“큰일이다─! 정말 큰일이라고 이건!”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냐!”
갑자기 절규하는 자신을 미친놈 보듯 바라보는 드워프의 시선은 안중에도 없었다.
“시, 시벌. 귀족 살해라니. 그것도 국왕의 기사였던 자를…? 이건 진짜 아니야. 아니란 말일세!”
지금 이 순간 론의 머릿속에선, 뼛조각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터져버린 다르킨과 에밀 자작의 모습이 겹쳐 보이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