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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야만전사-36화 (36/132)

#036화. 드라우프니르 (5)

“어떻게든 탈출해야 하네! 괜히 미적거리다 칸 형씨가 에밀 자작이랑 마주치는 것보단, 그게 훨씬 나아!”

“그건 뭔 개소리야? 당장 여기에 깔린 놈들이 서른은 넘는데 탈출은 무슨 탈출? 그 칸이라는 놈이 뭐 하는 놈인지는 몰라도…….”

“모르는 게 낫네. 알아서 좋을 게 없어. 내 자네를 위해 진심으로 하는 충고일세.”

드워프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이 인간은 머리가 좀 아픈 건가? 하고. 왜, 그렇지 않나.

아는 건 쥐뿔도 없는 주제에 흔들나무 숲까지 기어들어 와놓고는, 이제 와선 웬 이상한 놈이 오기 전에 도망을 쳐야 한다니.

그 이유가 이유인지라 더 이해하기 힘들었다.

“칸 형씨 성격이라면 상대가 귀족이라고 가만히 있지 않을 걸세…. 아니, 더 좋다고 목이나 부러뜨리겠지. 싸움에 환장하는 양반이니까.”

“그 칸이라는 놈은 인간이 아니라 그린스킨 투사라도 되는 거냐? 무슨 미친 소리야?”

“그 비슷한. 좀 더 끔찍한 거라 생각하게. 어쨌든 여기 가만히 있다가는…….”

오, 이런-. 한창 ‘칸’이라는 인간의 끔찍함을 설파하던 론이 이마를 짚었다.

그 행동에 눈쌀을 찌푸리던 드워프도 고개를 돌렸다. 울타리 너머, 론 일행이 지나온 방향을 향해.

“염병! 꼬리를 달고 왔잖냐!”

“추적은 완전히 뿌리쳤었네! 이건 아마도 흔적을 쫓은 게 아니라…….”

“조심──!”

마이아가 목소리를 높인 동시에 세 명의 용병과 드워프 장인 하나가 몸을 바싹 낮추었다. 거의 땅바닥에 입술을 가져다 대듯이.

쾅!

화끈한 열감이 일행을 덮쳤다. 다행히 직격은 아니고, 울타리를 불태우는 것에 그친 듯했으나, 안타깝게도 다행이라 여길 수 없었다.

“헤펠트. 그 버러지가 또 무슨 잡것들을 부리나 했는데. 고작 용병 셋? 완전 김이 새는군.”

몹시 중후하고, 듣는 것만으로도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모두는 그 목소리에 하나의 이름을 떠올렸다. 에밀 자작.

“고개를 들어라. 일부러 다치지 않게 조절했으니.”

“제기랄. 저 양반 기사라 하지 않았나? 왜 마법을 쏴대고 지랄이야…!”

“저기 마법사가 있잖아. 멍청한 놈아!”

그 와중에도 티격대던 론과 드워프가 가장 먼저 몸을 일으켰다.

다음으론 죽상이 된 디에고가 마이아의 눈치를 보더니,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이제야 보는군. 드워프.”

“퉤! 나는 보고 싶지 않았다!”

면전에 대고 침을 뱉는 행동에도 에밀 자작은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바위와 같은 사내다.

그를 마주한 모두가 그런 생각을 했다.

갑옷 자체에 주문을 각인한 듯 이런저런 선이 갑옷 위로 죽죽 그어져 있었으며, 아직 뽑지 않은 검은 척 보기에도 뛰어난 명검 같았다.

거기에 자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서코트를 걸친 에밀 자작의 모습은 그야말로 기사의 귀감이었다.

“흠. 적어도 백작이 가장 신임하는 페네스. 그자가 걸려들기를 바랐는데, 이래서는 수지가 안 맞는군.”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놈에게 제 친구가 죽었습니다. 다음에 마주치면 꼭 죽이게 해주십시오!”

그의 뒤로 나란히 도열한 사병들은 일말의 흐트러짐도 없이 전열을 갖춘 상태였다.

호기롭게 떠드는 입과 달리, 머리로는 혹시나 벌어질 전투에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거야 저 드워프만 손에 넣으면 모두 가능해질 일이다. 대산맥에서 내려온 마물 서식지가 전부인 척박한 도시를, 지금의 자리까지 올려놓은 부서진 모루 공방의 장인….”

“장인은 무슨 육시럴 소리 하네. 나 잡아간다고 무기 같은 거 안 만들어 줘! 약속한 기간만 끝나면 어차피 이 염병할 대륙은 당장 떠날 거라고!”

“글쎄. 그건 내가 고려할 문제는 아니군. 일단 잡아두면 뭐라도 되지 않겠나. 드워프.”

에밀 자작은 그렇게 말하며 자기 곁에 선 인물을 향해 눈길을 줬다.

몸태와 얼굴을 전부 가리는 펑퍼짐한 로브에 주문을 저장한 지팡이. 전형적인 마법사의 차림새였다.

론은 그 마법사를 본 순간 확신했다. 저 마법사가 주문을 부려서 이쪽을 추적했구나!

“다음에는 직접 맞출 거다. 뭐, 운이 좋다면 마법을 피할 수도 있겠지만, 운이 계속 이어질 리가 없으니. 불에 타죽는 건 매한가지겠지.”

“나, 나는 억지로 끌려온 거요! 그냥 짐꾼이라고!”

졸지에 화형을 당하게 생긴 디에고가 억울한 듯 외쳐보았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긴 시간 바그너의 용병들과 싸웠던 에밀 자작과 그의 사병들에겐, 디에고를 찢어 죽일 동기가 넘쳐났으니까.

“멍청한 소리 말고 안으로 들어와! 방벽으로 써먹을 물건들이 안에 있다!”

드워프가 버럭 외친 순간이었다.

마법사의 지팡이가 붉은빛을 번뜩이더니 사람 머리통만 한 화염구를 허공에 둥둥 띄웠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투척된 화염구가 닿기 전, 일행은 드워프의 말을 따라 안쪽으로 깊이 들어갔다.

포위당한 상태에서 스스로를 가두는 꼴이나 다름없었으나, 정면에서 뚫을 방법도 없는지라 살아남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퍼엉-!

빈 바닥에 떨어진 화염구가 높다란 불기둥을 일으키곤 흩어졌다.

로브를 입은 마법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무어라 중얼거리며 새로운 주문을 준비했다.

“천천히 조여라.”

그리고 석궁과 단창으로 무장한 에밀 자작의 사병들이 포위망에 갇힌 사냥감을 향해 거리를 좁히듯, 넓게 퍼진 채 폐광 안쪽으로 진입했다.

“거기 바닥에 보면 대충 만든 발리스타가 있을 거다! 그거나 쏴 재껴!”

한편 폐광 시설 안쪽으로 먼저 발길을 옮겼던 론 일행은 휘둥그레 눈을 뜨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는데, 급조한 것으로 보이는 발리스타 두 대와 나무를 촘촘히 엮어 만든 튼튼한 방책이 그들을 반긴 탓이었다.

이 폐광 시설에 얼마나 숨어있었길래 이만한 방어책을 준비해놓은 걸까.

아니, 시간이 있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닐 터였다.

드워프. 재료만 있다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는 장인들의 종족이기에 가능한 기행.

“어이! 망할 깡통아! 그만 비적대고 나와서 도와! 그놈들이다!”

그리고 뜻밖의 전력이 더 있었다.

한쪽 모퉁이가 찌그러진 투구를 쓴 기사가 이제 막 갑옷의 정비를 마친 듯, 관절 부위를 움직이며 앞으로 나섰다.

안에서 대강의 대화를 엿들은 건지, 별다른 설명을 거치지 않고도 헤펠트 백작의 장원 기사는 자신의 소임을 찾아 자리로 갔다.

드워프가 직접 엮은 나무 방책의 틈 사이로.

“이, 이만하면 제법 해볼 만할 것 같기도…….”

“병신같은 소리 말고. 바리스타나 잡으시죠. 시간만 끄는 것도 겨우일 테니까.”

씹어뱉듯 경고한 마이아가 창을 쥐었다. 적은 최소 삼, 사십이 넘는 정예 병사들이고 거기에 마법사와 전 근위기사까지 더해졌다.

그에 반해 이쪽은? 드워프 하나, 부상을 입은 듯 기세가 시원찮은 기사가 하나, 용병치곤 괜찮은 실력의 칼잡이와 감이 좋은 베테랑 용병, 그리고 그녀 자신.

대충 나열만 해도 절대적인 열세임을 알 수 있는 격차다.

가장 절망적인 건 마법사의 존재였다.

적색 마법을 구사하는 마법사를 상대로 나무 방책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불태워라─!”

그때 마법사의 또 다른 적색 마법이 위용을 뽐냈다.

다섯 개의 불화살이 방책과 그 사이에 끼듯 몸을 드러낸 기사를 향해 쏘아진 것.

화르륵!

불꽃으로 이루어진 화살은 방책에 꽂히고 불티를 흩뿌린다.

그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하고, 땀이 날 지경이었다.

촤악─! 두 개의 불화살은 기사가 휘두른 푸른 오러에 닿아 소멸했으나, 순간적으로 기사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갑옷의 안쪽까지 파고드는 열기마저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쏴─! 석궁이 바닥날 때까지 전부 쏘란 말이다!”

그때 깃발로 장식된 투구를 쓴 사내, 사병들의 부관쯤 되는 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쒜에에엑! 터더더덕!

십수 개의 석궁 화살이 방책에 꽂혔다. 드워프가 급조한 방책은 제법 버텼으나, 구멍이 숭숭 뚫려서 얼마 버티지 못할 성싶었다.

“…방책이 무너지면 발리스타로 마법사와 에밀 자작을 동시에 노려라. 그리고 생긴 틈을 타 드워프와 함께 탈출해.”

장원 기사의 제안은 그러한 결론에 따라 내린 것이리라.

전력은 열세고, 가진 장비조차 부족하니, 가장 중요한 드워프만이라도 살려 보내려는 것.

그걸 알아차린 마이아가 입을 오물거렸다. 씨발 놈아, 니 눈엔 여기서 탈출이 가능해 보여?

“탈출은 무슨 저기 뛰어들어서 뒈지라고?”

죽음을 각오한 기사의 체면을 봐서라도 기껏 참았건만, 디에고가 일생의 억울함을 담아 외쳤다.

평소라면 감히 엄두도 못낼 과감한 행동.

문제는, 그러는 와중에 방책이 부서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펑─!

다시금 쏘아진 화염구가 위태위태하던 방책에 정확히 내리꽂혔다.

“쏴! 지금 당─장─!”

더는 한가하게 설득이나 할 시간이 없었다.

피가 터져라 외친 장원 기사가 오러를 불사지르며 뛰쳐나간다.

텅! 텅!

드워프가 손수 급조한 발리스타에서 쏘아진 건 화살이 아니라, 거진 창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설마 폐쇄된 폐광 내부에 발리스타가 있을 거라 상상조차 못 한 사병들의 반응은 굼떴고, 말에 올라탄 에밀 자작과 그 아래에 선 마법사를 향해 눈 깜짝할 새에 쇄도했다.

“흥!”

쩌어억!

“시발. 말도 안 돼……!”

그러나 이어진 광경에 디에고가 경악했다.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흘린 에밀 자작이 검을 휘둘러 발리스타를 반으로 쪼개버렸다. 저게 가능한 일인가? 발리스타로 쏜 창을 정확히 벴다고?

‘근위기사라더니. 진짜 괴물이잖아!’

사색이 된 디에고가 서둘러 일행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수라도 내보라 재촉하기 위함이었고, 론과 마이아의 표정이 좋지 않음을 확인한 이후엔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여기서 허무하게 뒈진다고? 그 무식한 야만인 손에 억지로 끌려다니다?

“시벌. 이거 진짜 엿 됐군.”

길잡이로 고용됐다는 론도 같은 생각을 한 건지, 낭패감이 역력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게 보였다.

그러나 디에고의 짐작은 틀렸다.

론이 한 말의 의미는 가만히 있어도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직감이 머릿속에서 번뜩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누가 봐도 꼼짝없이 뒈졌노라 생각할 법한 상황에서 말이다.

이 경우에는 셋 중 하나다.

직감이 오랜만에 틀렸거나, 아니면 이 상황을 직접 타개할 방법이 생겼다거나, 그도 아니면…….

“꺼져라! 오러도 제대로 못 다루는 애송아!”

“커헉!”

‘제길. 글렀군.’

기세 좋게 뛰쳐나간 장원 기사가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꼴을 본 론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는 이 불가능한 문제를 해결할 무언가가 뭔지 확신했기 때문에.

“그냥 뒤로 오게. 괜히 뛰쳐나갔다가 휘말리지 말고.”

“휘말리다니. 대체 뭐에….”

“뭐기는.”

진짜 괴물한테 휘말리지 말라는 소리지. 론이 영문모를 말을 입에 담은 직후였다.

퍽…….

단단한 것들끼리 부딪칠 때 나는 소리가 단말마처럼 울려 퍼졌다. 아주 작은 소리였건만, 전장의 소음을 잡아먹을 만큼 크게 들리기도 했다.

그다음엔 철퍼덕- 소리가 났고, 로브로 얼굴을 가린 마법사의 몸이 기우뚱 쓰러졌다. 그 바람에 로브가 벗겨졌다.

“허억…!”

누군가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마치 포대처럼 화염구를 쏘아내던 마법사의 몸이 기우뚱 쓰러진 까닭이다.

대체 누가…. 아니, 그 이전에 에밀 자작이 보호하고 있는 마법사를 대체 무슨 수로 암살한 거지?

“누구냐─!”

너무나 갑작스럽게 하나뿐인 마법사를 잃어버린 자작이 노호성을 터뜨렸다.

“나다, 이 씹새끼야.”

그리고 돌아온 대답에 자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웬 시정잡배가 지껄인 것처럼 저급한 대답이 돌아온 탓이었고, 그 익숙한 헛소리에 론이 이마를 짚으며 ‘오. 제기랄.’하고 침음했다.

“뒈지기 싫으면 나가 있어…. 라고 말하고는 싶은데, 딱히 살려줄 놈은 안 보이는군.”

자작의 마법사를 죽이고, 자작 본인을 모욕한 목소리가 두 집단 사이로 천천히 걸어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에는 큼지막한 외날 도끼를. 허리춤엔 용살검 드라우프니르를. 등에는 바위처럼 묵직한 쇠망치를 짊어진 남자가 말했다.

“어서 덤벼라. 에미 자작인지, 에밀 자작인지. 빨리 조지고 돈이나 챙기게.”

21세기 키보드 워리어의 걸쭉한 입담에 자작의 얼굴이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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