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화. 드라우프니르 (6)
‘정신 나간 야만인이군.’
갑자기 패드립에 얻어맞은 에밀 자작이 처음으로 한 생각이었다.
대뜸 나타나선 그의 마법사를 죽이고, 사병을 이끌고 무장한 채 있는 자신을 모욕하다니? 이건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짓이었다.
“……우선.”
그러나 에밀 자작은 분노하며 야만인에게 달려들거나, 사병들에게 저 목을 잘라오라 시키지는 않았다.
잠깐 뜸을 들이듯 침묵하며 마법사의 얼굴을 박살 낸 돌조각과 거목처럼 단단해 보이는 야만인의 팔다리를 흘긋 살폈다.
‘제법 강하겠군. 흑익공의 대전사와 비교하면 어떨지…….’
마땅한 비교 대상이랄 게 없어 평을 내리기가 애매했다.
흑익공의 대전사는 어지간한 기사들은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괴물이니까.
그래도 갑자기 나타난 저 오만불손한 야만인이 그자와 동급이라 보기는 아무래도 좀, 그렇지 않나.
“나는 아르곤의 심장께 충성을 맹세한 영광된 기사요. 왕께서 하사하신 봉토를 수호하는 가장 날카로운 검이며 방패일지니. 너, 무도한 야만인아. 영광스러운 이름을 욕보이기 전에 너의 이름을 밝혀라!”
그리고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일단 탐색을 좀 해보자. 이름이나 좀 들어보고, 저 야만적인 놈이 자신을 왜 노리는지도 알아보고, 굳이 싸울 필요가 없다면 회유도 시도해보고…….
“말 존나게 많네.”
“뭐?”
다시 돌아온 무도한 대답에 자작이 눈을 가늘게 뜬 순간이었다.
쿵- 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안 그래도 거대하던 야만인의 몸이 숫제 거인처럼 보였다.
“무슨!”
쩌어엉─!
오러를 두른 검과 외날 도끼가 격돌한다.
다분히 기습적이었던 일격이었으나, 과연 근위기사라 해야 할지. 자작은 늦지 않게 반응할 수 있었다.
위에서 내려찍어진 도끼가 가한 힘은 오러로 강화된 기사의 육체를 완전 무너뜨릴 정돈 아니었다.
다만 에밀 자작이 타고 있던 말은 그렇지 않았고, 허리가 부러져 즉사했다.
“각하……!”
그 탓에 에밀 자작의 자세가 완전히 무너졌다.
아주 치명적인 빈틈이다. 기사를 상대로 기습을 성공시킬 수 있는 전사가 상대라면 더더욱.
“이거도 버티나 보자고.”
입꼬리를 끌어올린 야만인이 도끼를 다시 들어 올리는 게 보였다. 에밀 자작은 이를 악물며 오러를 전신에 넓게 퍼뜨렸다.
신체 강화였다. 오러의 가장 기본적인 사용법이면서, 동시에 가장 중요한 활용법.
어쨌거나 기사란 제 몸으로 직접 싸워야 하는 까닭에 그러했다.
“나를 우습게 보지마─라──!”
에밀 자작이 포효했다. 오러로 강화된 육체는 성량까지 늘려주는 건지, 멀리 떨어져 있던 이들의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겨우 이 정도로 날 꺾을 수는 없다!”
그래. 눈앞의 야만인은 분명 강하다.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함은 물론이고, 갑옷을 입고 오러로 신체를 강화한 에밀 자작을 낙마시킬 정도의 괴력을 가졌다.
그러나 에밀 자작은 자신의 승리를 의심치 않았다.
마법사들은 주문이란 신비를 다루고, 성기사는 신의 힘으로 강화된 육체와 축복을 다루며, 흑마법사는 흑마력으로 악마의 힘을 빌린다.
그에 반해 오러는?
오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사용자의 기량만 충분하다면, 신체를 강화하거나 거대하게 빚어낸 오러를 공성병기처럼 다룰 수도 있고, 한껏 응축해낸 오러를 마법처럼 멀리 쏘아 보내는 것조차 가능해진다.
어느 면에서건 특출나지는 않으나, 어느 방향으로건 활용할 수 있는 힘.
그게 오러다.
고작 무식한 육체만 가지고 날뛰는 야만인 따위가 가질 수 없는 것.
가진 기량을 모두 신체강화에 때려 박은 자작이 두 손으로 검을 움켜쥐고 올려 벴다. 푸른 오러의 빛살이 야만인의 도끼보다 먼저 도달했다.
‘이겼다…!’
에밀 자작은 거기서 승리를 확신했다.
야만인의 도끼는 아직 제대로 휘둘러지지도 않았으나, 자신의 검격은 힘이 최대치로 작용하는 지점까지 뻗어졌으니.
하물며 자신은 아까보다 더 많은 오러를 신체강화에 할애했다.
아무리 야만인의 근력이 인간의 그것을 상회하는 수준이라 하더라도, 그건 지금의 에밀 자작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대충 감이 좀 오는 것 같기도 하고…….’
역시, 샌드백으로는 깡통이 최고라니까. 의식적으로 손에서 힘을 빼던 칸이 씩 웃었다.
에밀 자작이 그에 불길함을 느꼈으나, 물러나기엔 너무나 늦은 뒤였다.
그렇게 에밀 자작의 검과 어정쩡한 위치에서 슬쩍 아래로 내려친 칸의 도끼가 맞부딪쳤다.
퉁…….
콰지지지직──!
결과는 삽시간에 났고, 놀라우리만치 격정적이었다. 칸의 도끼는 조금의 저항감조차 없이 에밀 자작의 검을 아래로 처박았다.
어떻게 버텨볼 새가 없었다.
충돌의 압력으로 눈동자가 튀어나올 것 같단 생각이 드는가 했더니, 에밀 자작의 몸은 망치로 두들긴 못처럼 쑤욱- 밀려 내려갔다.
땅 아래에서 무언가가 자작의 몸을 끌어당긴 것만 같았다.
“…….”
장내엔 침묵만이 감돌았다.
모두가 짠 것처럼 입을 닫고, 국왕의 근위기사였던 기사를 땅에 처박은 야만인을 향해 시선을 모았다.
“씨벌. 저건 꼼짝없이 뒈졌겠군.”
그 광경을 지켜보던 론이 허탈한 듯 중얼거리는 게 들렸으나, 급격하게 늘어난 힘을 제법 잘 조절한 덕분에 기분이 좋았기에 그냥 넘기기로 했다.
애초에 죽이지도 않았다마는.
“그래서. 너네 대빵은 내가 땅에 심어줬는데. 내가 복수를 좀 해보고 싶다 하는 놈. 손들어.”
“…….”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다.
왕가의 근위기사를 일격에 심어버린 야만인을 뭔 수로 상대하나? 사병들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다곤 하나, 누구도 고용주의 복수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버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충성도 산 자에게나 바치는 거지. 임금을 줄 고용주도 뒈져버린 마당에 충성은 무슨 충성?
털썩. 털썩.
그 광경에 칸은 속으로 이죽였다.
누가 중세놈들 아니랄까 봐…. 무릎꿇는 속도만 봐선 귀쟁이 암살자들보다 민첩 스탯이 높아 보이네.
“흠. 조금 더 약한 놈한테 시험해보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군. 칸이 정말 아쉽다는 듯 입맛까지 다시자,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은 사병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 보니 깡통이 하나 더 있었지.”
“나는 너와 싸울 생각이 없다. 자작과 적대하는 걸 보면, 필시 각하께서 보낸 용병일 터.”
“그렇기는 한데…….”
칸이 제법 튼튼해 보이는 깡통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에 오싹함을 느낀 장원 기사는 진심으로 칸과 싸우기 싫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했다. 잽싸게 검을 검집에 밀어 넣고, 갑옷을 벗어던지는 시늉까지 해가면서.
결국 칸은 입맛을 다시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 진짜 아쉽네.’
마지막으로 조금만 더 패보면 완전히 감이 잡힐 것도 같은데.
*
*
*
“드워프?”
“왜, 왜. 드워프 처음 보냐? 괴물 같은 녀석아!”
“이 새끼가 왜 시비야. 기껏 살려줬더니.”
한 대 쥐어박히고 싶나? 칸은 그 뒷말을 삼키며 배꼽에나 겨우 올까 싶은 드워프와 눈을 맞췄다.
“대충 알겠군.”
“뭐를 알겠다는 거냐!”
“부서진 모루의 장비들 말이다. 어째 정보창이 좀 뜨나 했더니, 드워프가 만들어서 그런 거구만.”
“정보창? 그게 뭔 개소리…….”
“하하! 말이 자꾸 헛나오는 걸 보니, 우리 드워프 친구가 피곤한가 보군. 그렇지? 그렇다고 하게!”
으읍! 읍! 론의 손아귀에 붙잡힌 드워프가 땅에 닿지도 않은 발을 동동 굴렀다.
“칸 형씨! 이 친구는 휴식을 좀 취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벌써 여기까지 온 건지나 좀 들려주게!”
“어떻게는. 백작 그 양반 문제 다 해결하고 소식이 끊겼다길래 온 거지.”
“자, 잠깐. 각하의 문제를 해결했단 말이냐? 야만인!”
‘이 새끼들은 말을 참 이쁘게 하네.’
내뱉는 단어마다 신경을 긁는 드워프와 깡통을 흘겨본 칸이 입맛을 다셨다. 진짜 눈 딱 감고 좀 팰까?
“하하…! 형씨라면 손쉽게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네. 역시 북부의 참수자……. 억!”
“그 이름 꺼내지 마라.”
“지금 처음 꺼냈잖나!”
원래 막타친 놈이 몰매를 맞는 법이지. 칸은 사회생활로 터득한 지혜를 곱씹으며 조금 진정된 드워프에게 말을 걸었다.
땅에 파묻힌 깡통에게 이것저것 묻기 전에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드워프들은 대부분 바다로 나갔을 텐데. 이런 깡촌에 남은 이유가 있는 건가? 그렇다고 장비를 열심히 만드는 것 같지도 않던데.”
실제로 아이템 정보창에 ‘대충 만들었다.’라는 문구가 있으니, 그 부분은 틀림없을 터였다.
애초에 드워프 중 자신만의 공방을 가질 자격을 가진 이들은, 인간 대장장이 중 명장이라 불리는 이들을 훨씬 상회하는 달인들이니까.
대충 만든 장비조차 아이템 정보가 뜰 정도라는 게 그 증거였다.
‘그럼. 그만한 장인이 깡촌에서 설렁설렁 시간이 때우고 있을 이유가 뭔가.’
칸이 궁금한 것이 그 점이었다.
“왜긴! 귀족이랍시고 뻗대고 있는 그놈 애비랑 약속한 게 있어서 그렇지! 빌어먹을 인간 놈. 나한테 감히 그딴 식으로 사기를 칠 줄은……!”
“부당한 계약 때문에 붙잡힌 거면, 그냥 나오면 될 거 아니냐. 드워프 왕국의 눈치를 봐서라도 널 어찌하진 못했을 텐데.”
“너희 인간들과 우리 드워프는 달라. 약속을 그렇게 쉽게 깨뜨릴 거면 뭣 하러 약속을 해? 어쨌거나 약속을 했으니 지키는 것뿐이야. 내가 제대로 일해야 한단 약속이 없으니까 대충 일하는 것뿐이고.”
그렇단 말이지.
칸은 거기까지 듣고 쉬고 있으라 말한 뒤, 직접 땅에 파묻은 깡통에게로 걸어갔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놈이 낑낑대며 몸을 이리저리 비트는 게 보였다.
“열심히 하네. 그렇게 살고 싶나?”
“놈……! 날 능멸하지 마라! 어차피 넌 날 죽이지 못해!”
어째선지 자기가 죽을 일이 없을 거라 확신하는 깡통을 보며 칸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왜, 왕가의 보복이 두려워서 널 죽이지 못할 거라 생각하나? 나야 받을 돈 받고 아르곤을 떠나면 그만인데. 그리고 서릿골의 전사들은 상대를 죽일 때 망설이지 않는다.”
“……!”
새삼 야만인에 대한 소문들을 떠올리고 지레 겁이라도 먹은 걸까.
깡통이 바이저 속에서 눈을 부릅떴다.
“애초에 헤펠트 백작이 의뢰한 게 널 죽이라는 거였는데, 그러지 않을 이유가 있나?”
“날 죽였다간 살아서 왕국을 벗어나지 못할 거다! 왕가의 기사들이 널 죽일 테야─!”
“글쎄…. 이제 와서 왕가가 적극적으로 뭔가 하진 않을걸.”
누구보다 네가 잘 알고 있지 않나? 전 왕가의 근위기사. 칸이 에밀 자작에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속달거리자, 갑옷 위로도 알 수 있을 만큼 에밀 자작이 흠칫 놀랐다.
‘네놈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냐.’는 눈빛이었다.
“글쎄, 숲에 사는 마녀가 알려줬던가?”
“그게 무슨 개소리…….”
“이해 못 하면 됐고. 이제부턴 건설적인 얘기로 넘어가지. 네가 무사히 살아남아서 목숨을 부지할 유일한 방도에 대해.”
칸의 말에 에밀 자작이 눈에 띄게 동요했다.
당연히 죽일 것처럼 행동하다가도 갑자기 살길을 열어주다니.
그저 단순무식한 괴물처럼 보이는 야만인이 말하는 건 꼭 능숙한 협상가 같았다.
‘야만인들은 그냥 사람처럼 생긴 짐승 아니었나?’
“내가 바라는 건 간단해. 이 무기를 어디서 났는지만 내게 알려주면 된다.”
“그건……!”
그러나 야만인이 갑자기 들이민 붉은 검을 본 것보다 놀랍진 않았다.
어떻게 저걸 가지고 제정신으로 있는 거지? 그자들은 마법사라도 단번에 홀릴 만큼 강력한 저주가 깃들었다고 했는데…!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군. 고민할 처지가 아닐 텐데.”
“…미개한 야만인 놈아. 정당한 결투로 거머쥔 승리라면 내 마땅히 승자의 권리를 존중하겠으나, 명예도 모르고 기습이나 하는 네 녀석을 어찌 믿는단 말이냐!”
대뜸 큰 목소리로 정당한 결투니, 기습이니, 떠들어대는 에밀 자작의 모습에 칸이 비웃음을 흘렸다.
속내가 뻔히 보인 까닭이다.
‘살아남을 가능성이 보이니까 자존심을 챙기고 싶은가 보지.’
과연 귀족의 처세술은 영악한 면이 있었다. 은근슬쩍 기습 때문에 졌다고 변명을 끼워놓는 꼴이라니….
과연 놈의 말이 효과를 본 건지, 빛보다 빠르게 투항한 병사들의 눈에 미약한 빛이 감돌았다.
칸의 입장에선 다소 마음에 들지 않는 반응.
다만 칸은 에밀 자작의 헛소리에 어울려주기로 했다.
‘원하는 정보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야, 그깟 자존심 정도는 세워줄 수 있지.’
“전투란 승리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네놈이 뭐라 떠들건 아무런 상관없어. 우리의 신이 그렇게 정했으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는 거짓말을 극도로 혐오한다. 신께서 그건 전사답지 않은 행동이라 정하셨으니까.”
“…….”
몹시 야만인다운 무식한 발언이지만, 덕분에 에밀 자작은 허무하게 패배하고 투항한 끝에도 나름의 자존심 정도는 챙길 수 있으리라.
칸의 예상은 정확했다.
그 말을 듣고 에밀 자작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과연 눈앞의 야만인의 말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야만인이 원하는 정보를 넘겨줘도 괜찮은 것인가. 그러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헝클였다.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에겐 죽어야 할 이유보다, 살아야 할 이유가 더 많았으니까.
“……그 마검은 네놈 손에 머리가 뭉개져 죽은 마법사가 가져온 것이다. 정확히는 그놈이 소속된 어딘가에서 보내온 것이었지.”
“소속이 있다고?”
설마 마탑은 아닐 테고. 아르곤 왕국에도 마법사 집단이 따로 있나? 그렇다기엔 너무 좆밥이던데….
그런 칸의 의문을 알아차린 듯. 에밀 자작이 긴가민가한 투로 첨언했다.
칸으로서는 도저히 넘길 수 없는 이름을 함께.
“그놈은 자기를 신비의 탐구자라고 했다. 그래, 분명히 진리의 추종자라고 했던가…….”
“진리의 추종자…?”
그 새끼들은 또 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