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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야만전사-39화 (39/132)

#039화. 북부 (2)

“으흐흐…. 진짜 끝내주는군.”

“그렇게 좋으세요? 저는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는데…….”

“얀, 자네는 다 좋은데 감수성이 영 떨어지는 게 문제일세. 이걸 보게나! 이 매끄러운 마감하며, 묵직한 무게감과 자루를 쥘 때 느껴지는 적당한 균형감!”

더럽게 신났네.

‘부서진 모루’의 장비를 보면서 눈을 빛내는 론을 지켜보던 칸이 피식 웃었다.

페네스의 뒤를 따라 에르몽이란 마을에 도착한 이후. 칸 일행은 촌장의 집으로 추정되는 넓은 집을 할당받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뭐. 말이 휴식이지. 사실상 억류 중이라 봐야겠지만.’

일행에게도 나쁘지 않았다.

칸이라면 모를까. 능숙하지도 않은 승마로 체력이 빠진 얀이나, 흔들나무 숲에서 한 차례 추격전을 벌인 일행들이 체력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이제 어쩌실 겁니까? 계속 이러고 있을 생각은 아니겠지요.”

뒤에서 들려온 여인의 목소리에 칸은 돌아보지도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잠깐 눈을 붙이고 오겠다며 침실로 향했던 마이아의 목소리는 방금 막 일어난 듯 가라앉아 있었다.

“바깥이 소란스러워서 깼습니다만…. 아무래도 심상치않습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움직이는 것이….”

“그게 나랑 뭔 상관이냐.”

“뭔 상관이냐니….”

정말 남의 얘기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칸의 모습이 황당했는지, 마이아가 헛웃음을 흘렸다.

“애초에 이곳에다가 우릴 가둬놓은 의도부터가 수상합니다. 뭔가 의도가 있다고밖에는….”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호들갑 떨 필요 없다.”

“호들갑이라니. 칸, 당신이야말로 무슨 자신감입니까? 백작이 제 병력을 전부 끌고 오면 어쩌려고요?”

“글쎄. 뒈지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줄 돈 주고 보내주겠지.”

백작이 제정신이라면 말이야. 칸은 그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쓸데없이 이것저것 떠들어도, 저 찔찔이가 납득할 거란 생각은 안 했기에.

“그냥 이렇게 생각해. 얌전히 잘 쉬다가, 저쪽에서 뭔가 해오면 그때 맞춰서 움직이면 된다고. 어차피 똥줄 타는 건 우리가 아니라 저쪽이다.”

칸이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더 따지고 드는 것도 그림이 좋지 않다 여긴 마이아가 얌전히 물러났다.

괜히 말꼬리나 붙잡다가 화를 돋굴 수도 있겠단 계산도 있었다.

다만 아예 가만히 있을 수 없었기에 창가에 의자를 끌어다 앉고선 바깥의 동태를 살폈는데, 머지않아 칸에게 알릴 만한 상황이 발생했다.

“저자가 여기는 왜……?”

기사들과 함께 사라졌던 드워프가 이쪽을 향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자기처럼 창 바깥을 살핀 것도 아닌데, 가만히 방 가운데에 앉아 그걸 알아차린 칸을 보며 마이아가 혀를 내둘렀다.

‘진짜 정체가 뭐야…….’

그녀가 알던 ‘참수자’ 시절의 칸도 어마무시했지만, 솔직히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아주 잠깐이나마 칸과 수를 겨뤄본 마이아이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때보다 더 강해졌다. 기술이나, 감각의 얘기를 떠나서 안 그래도 괴물 같던 힘이 더욱 강해진 듯했다.

그 사실을, 마이아는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무리 육체를 단련해도 순수 인간의 몸에는 태생적인 한계가 존재하는 까닭.

‘체내 마나량을 타고난 순수 인간들 중엔, 거인의 힘을 내는 괴물들도 있다곤 하지만….’

서릿골의 야만인들은 마나의 은혜를 받지 못한 반푼이 종족이지 않은가. 물론, 야만인의 육체가 그린스킨들처럼 태생부터 강인하단 것 정도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직접 겪기도 했고.

아무리 그렇다 해도, 오러를 다루는 기사를 압도하는 강함이라니? 어느새 그렇게 강해진 거지? 북부에서 헤어진 게 얼마나 되었다고!

‘그 사람이 말한 것처럼 정말 거인의 후손이라도 되는 건가….’

마이아는 멍청한 얼굴의 용병이 떠들어대는 말을 떠올리곤 찝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 알아서 하겠지….”

이제는 그냥 칸이 어쩌나 지켜보다가, 하라는 대로 움직이면 되겠지- 하는 마음가짐이었다.

그렇게 칸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이아에게 버스 승객의 마인드를 장착시킨 사이.

덜컥.

“뭐야. 문도 안 두들겼는데?”

“발소리로 알았다.”

“귀쟁이도 아니고. 그게 무슨 고블린이 마법 쓰는 소리야?”

문을 벌컥 열어젖힌 칸이 드워프를 안으로 들였다. 드워프는 자기 상반신보다 큰 봇짐을 등에 이고서 뒤뚱뒤뚱 걸었는데, 그 탓에 단번에 이목이 쏠렸다.

“뭘 보고만 있어? 와서 들어!”

멀뚱히 자신을 쳐다보던 시선이 거슬렸는지, 버럭 성을 낸 드워프가 론에게 봇짐을 넘기곤 폴짝 뛰어 의자에 앉았다.

“이게 다 뭔가?”

“뭐기는. 드워프가 가져올 게 장비말고 더 있어? 열어 봐!”

“장비?!”

안 그래도 ‘부서진 모루’의 장비가 드워프제라는 말에 신나있던 론이 숫제 잡아먹을 기세로 봇짐을 바닥에 내려놓고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오오……!”

쏟아지는 내용물을 확인한 론이 탄성을 내질렀다.

안에 든 것은 흔히 스워드 벨트라 불리는 허리띠와 암회색을 띤 체인메일, 한 쌍의 건틀릿과 장검 한 자루. 그리고 특이하게 쇠를 겉에 녹여 바른 듯한 검은색의 검집이었다.

“광산이랑 가까운 도시라 시설이 꽤 괜찮더라고. 붙잡혀온 놈들 장비 중에서 괜찮은 것 좀 뺏어다가 손을 좀 봤지. 시간이 부족해서 조금 서두른 감이 있지만, 나름 쓸만할 거야.”

드워프가 자기 입으로 쓸만하다 말할 정도면 상당한 물건일 게 분명했다.

안 그래도 ‘부서진 모루’ 장비에 환장하던 론이 미쳐버리고, 애써 관심 없는 척하던 마이아의 눈이 흘깃 굴러다닐 정도로.

“체인메일이랑 건틀릿은 너랑 거기 여자 창사가 써. 저 무식한 야만인은 거추장스러워서 안 입는 거 같으니까. 검은 그 촐싹대는 칼잡이한테 주고.”

“저, 정말 그래도 되나…?”

“제 것도 있다고요?”

“그냥 겸사겸사 한 거니까 대충 써! 어차피 오래 쓸 물건은 아니야.”

퉁명스런 대답이 들리긴 한 건지, 론은 활짝 웃으며 자기 몫의 장비를 냅다 들고 입어보기 시작했다.

마이아도 조심스레 칸의 눈치를 보다가, 칸이 고개를 끄덕이자 눈을 번뜩이며 장비를 챙겼다.

“그리고 너. 무식하게 힘센 야만인. 너는 허리띠랑 이 검집이야. 들어보니까 그 흉흉한 마검을 너가 가지기로 했다며?”

“그랬지.”

“누가 서릿골 놈 아니랄까 봐….”

드워프는 기가 차다는 투로 칸의 허리에 걸린 드라우프니르를 삿대질했다.

“그 검. 해괴한 게 씌여져 있어서 그냥 가지고 있으면 큰일 나. 왠지는 몰라도 넌 괜찮아 보이지만, 그래도 아무런 조치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그 검집을 쓰면?”

“그래. 서부 대산맥의 검은 철은 마나를 밀어내. 그걸 검집 안쪽이랑 겉면에 발랐으니까 검이 헛수작을 부리는 걸 어느 정도는 막아주겠지.”

겨우 검집 따위로 그게 가능한가? 그런 의문이 앞섰으나 칸은 얌전히 드워프가 건네는 검집과 허리띠를 받아들었다.

“간단한 주문은 검집으로 쳐내는 것도 가능할 거야. 그 이상은 네 실력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쨌거나 서부 대산맥의 마나를 듬뿍 머금은 철을 마구 때려 넣었으니까 말이야.”

같은 무게의 금보다 훨씬 비싼 거라고! 알아? 그 말에 칸은 눈앞의 드워프가 흔들나무 숲에 있던 이유를 깨달았다.

‘애초에 이 검집을 만들기 위해서였겠지. 드라우프니르한테 홀린 백작을 정신 차리게 하기 위해서.’

“잘 쓰지.”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지금이야 드라우프니르의 헛수작이 안 통하고 있지만, 혹시 모르지 않나? 게다가 주문을 쳐낼 수 있는 검집은 그 자체로 쓸만한 장비기도 했다.

“당연히 잘 써야지! 나중에 챙기고 갈 생각으로 꿍쳐둔 걸 다 때려 박은 거라고! 내 목숨값은 이거로 퉁치는 거야.”

“애초에 받아낼 생각도 없었다만….”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바그너에서 급하게 구한 검집 대신, 드워프제 검집에 드라우프니르를 밀어 넣은 칸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허리띠에 고정할 때는 검은 이쪽에 하고, 도끼는 이쪽에…….”

그 뒤에 드워프는 직접 허리띠의 정확한 사용법까지 알려주었고, 론과 마이아에게도 이것저것 훈수를 두고 나서야 만족한 듯 멈췄다.

“장비는 대충 이만하면 된 거 같고…. 그 칼잡이 놈 깨면 검도 잘 전해줘.”

“용건은 끝났나?”

“그럼 뭐가 더 있어? 나도 이제 바빠. 그 멍청한 자식이 날뛰기 전에 짐 챙겨서 튀어야 하거든.”

“튄다고요?”

애초에 마법사인지라 장비에 관심이 없던 얀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왜요? 누구한테서?”

“뭘 당연한 걸 물어. 헤펠트 놈이지. 그거 지금 제정신 아니야. 요즘은 제법 정신머리가 나아졌나 싶었는데, 조금 미끄러지니까 옛날 성격 나오더라고.”

괜히 엮여서 불똥 튀기 전에 튀어야지. 드워프는 탐탁지 않다는 투로 말하며, 덥수룩한 수염을 이리저리 꼬아대며 정리했다.

“뭐. 목숨값으론 과하다 싶을 만큼 일해줬으니까. 슬슬 떠날 때도 됐지. 그놈 애비한테 홀라당 속아서 몇십 년이나 해먹을 줄은 몰랐다마는.”

“어…. 그러니까. 헤펠트 백작이 돌발행동을 할 거란 소리죠? 지금.”

“그놈은 원래 그랬어. 예전에도 자기 멋대로에 뜻대로 안 풀리면 미친놈처럼 굴었거든. 그놈 애비가 뒈질 때도 불안해서 눈을 못 감았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그러니까 너희도 알아서들 조심하라고.

드워프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 채. 한껏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촌장의 집을 나섰다.

어째선지 족쇄를 벗어던지며 되찾은 자유를 만끽하는 듯 들뜬 뒷모습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

“…….”

정작 드워프가 떠나간 실내엔 정적이 찾아왔다.

귀찮은 일이 벌어질 거라는 것이 드워프의 입을 통해 확실해진 까닭이었다.

“이거 쓸만하네. 단검도 넣어 다닐 수 있고.”

태평한 건, 처음부터 그럴 수 있겠거니 생각하고 있던 칸뿐이었다.

“이거. 안에서 퍼질러 자고 있는 디에고도 깨워야 하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쪽엔 전사님이 있잖아요. 설마 덤빌까요?”

“백작을 오랫동안 봐 온 인간…. 드워프가 그렇다고 하잖나.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하지 않겠나….”

탄식하듯 내뱉은 론이 슬쩍 고개만 돌려 칸의 눈치를 봤다. 어쨌거나 이 파티의 중심은 칸이기 때문이다.

그게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다만.

“내 눈치 볼 거 없다. 안 그래도 움직일 생각이었으니까. 가서 디에고나 깨워.”

“역시! 형씨만 믿고 있었다네!”

우당탕!

그 말만 기다렸다는 듯 론이 요란을 떨며 디에고가 잠든 방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저. 그래서 정확히는 어쩌시려고요? 설마 그 백작도 땅에 파묻으려는……?”

“필요하다면.”

무성의한 대꾸에 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지금까지 같이 다니면서 느낀바. 칸이 그러겠다고 하면, 결국에는 정말 그렇게 된다는 걸 몸소 겪은 얀으로선 당연한 반응이리라.

‘이제 좀 쉬나 싶었는데!’

서릿골의 전사들은 전부 싸움에 미쳐 있다더니. 아무래도 그 말이 사실인 것 같다고 얀은 내심 생각했다.

그야 지금까지 칸과 동행하면서 본 거라고는 ‘문제 발생, 힘으로 해결’이 전부였으니까.

더 의문스러운 점은, 정말 대부분의 문제가 칸이 나서서 힘을 쓰면 해결이 된다는 것에 있었다.

‘힘이 충분하면… 굳이 머리를 쓸 필요가 없는 건가? 설마 스승님은 이걸 내게 가르치고 싶어서 전사님과 함께 떠나라 한 거였나?’

얀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얕은 경험과 실제로 겪은 현실 앞에서 마법사의 이성이 무너져내리는 중이라고 할까.

‘좋아. 그럼 일단 전사님 말대로 백작의 머리를 파묻어보자…! 뭐가 맞는지는 나중에 고민해보고…!’

만약 그의 스승인 제롬이 지금 얀의 생각을 알았더라면, 이마를 짚고 당장 마탑으로 돌아오라며 따졌을 법한 결론이었다.

“시벌…. 갑자기 또 뭔 일이야.”

“투덜거리지 말게. 여기 자네 무기도 있으니까. 무려 드워프제 검이라고!”

“뭐? 드워프제?”

그렇게 자고 있던 디에고가 합류하는 것으로 일행은 떠날 채비를 마쳤다.

마이아는 벌써부터 싸울 마음이 한가득인지 창 자루에 손을 가져간 상태였고, 착각에 빠진 얀도 쓸만한 주문을 속으로 골라내며 자기 로브를 입었다.

심지어 드워프제 장비에 취한 론까지 콧김을 훅훅- 내뿜고 있었다.

‘이것들은 왜 이래.’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싸울 의욕을 내보이는 일행들의 모습에 칸이 떨떠름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 미친 것들이 싸움을 못 해서 뒈진 야만전사한테 홀리기라도 한 건가….

‘하여간, 누가 중세 놈들 아니랄까 봐. 폭력적이기는.’

가볍게 혀를 찬 칸이 등을 돌려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가볍게 문을 밀어젖힌 순간, 무언가를 보고 놀란 칸이 흠칫- 멈춰섰다.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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