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화. 북부 (3)
철컥. 철컥.
에르몽의 풍경이 아스라이 어둠에 잠겼을 무렵.
백작의 사병들은 저마다 주어진 숙소에서 풀어헤쳤던 무장을 다시 장비하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엄숙했고, 또한 비장했다.
“그 무시무시한 자작도 어쩌지 못했는데….”
“이거 정말 가능한 거 맞수? 형님. 이거 그냥 개죽음 아니냐고.”
“쉿. 조용히 해라.”
그러나 불안함마저 감추진 못했다.
저마다 수근거리는 내용의 주제는 하나였다.
그들이 야행에 나서는 표적. 그 괴물 같은 야만인을 어쩔 수 있는가?
그들에겐 초인의 상징과도 같은 페네스 경조차 언쟁에서 얌전히 물러나지 않았던가.
“이제 가자.”
“…제기랄. 살아서 아침을 볼 수나 있으련지.”
사병들은 두려움을 애써 감추며 숙소를 나섰다.
마침 옆집에서도 사병들이 준비를 마치고 나오고 있었고, 눈짓으로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는 집합 장소로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겉으로는 그랬다.
조금이라도 늦었다간 크게 경을 치리란 것을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항상 여유로운 귀족의 모습을 꾸며내는 헤펠트 백작이 다급하게 에르몽까지 온 게, 분노의 표출이란 걸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 왔군. 너희가 마지막이다.”
집합 장소는 에르몽 외곽에 있는 백작의 거처였다.
평소 같으면 에르몽 중앙에 있는 촌장의 집에 머무르는 게 맞겠지만, 그곳은 현재 야만인 일행이 차지하고 있었다.
“각하. 준비가 끝났습니다.”
인원을 점검하던 아투 경이 거대한 막사에 머무르던 백작에게 소식을 전했다.
철그럭. 철그럭.
백작은 마치 자기도 이 싸움에 나설 것처럼 판금 갑옷에 투구, 백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망토를 입고서 심복인 페네스 경과 함께 등장했다.
전장에서도 가벼운 무장을 선호하는 백작의 평소 성정을 생각하면, 꽤 놀라운 광경인지라 몇몇 사병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만큼 중요한 임무라는 걸까? 적의 수장을 사로잡은 용병의 뒤통수를 치는 게? 그건 아닐 터였다. 그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겠지.
“…긴말 않겠다. 가서 맡은 임무를 수행하라. 제대로.”
“예.”
대답은 작았다. 야음을 틈타 기습하는 것이 이번 임무였기에, 최대한 소음을 억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사병들이 촌장의 집으로 향했다.
야밤에 이게 뭔 소란인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던 에르몽의 주민들이 겁에 질려 머리를 집어넣는 게 보였다.
“각하. 에르몽은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그들의 시선에 불편한 듯 눈살을 찌푸린 아투 경이 느릿하게 따라오는 백작에게 가 물었다.
자작의 죽음을 완벽하게 야만인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선, 저들의 입을 단속할 필요가 있지 않겠냐는 뜻이었다.
“어쩌기는. 저들은 마지막이다. 에르몽이 전부 망가져야 그림이 살 테니.”
에둘러서 하는 표현이다.
하지만 아투 경은 백작의 말에 담겨진 속뜻을 쉬이 알아차렸다. 그리고 알맞은 처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한 방법이군요. 알겠습니다.”
사실상 에르몽을 야만인과 자작의 무덤으로 같이 없애겠단 말이었으나, 그건 아투 경에겐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사실이다.
에르몽과 그곳의 주민 모두. 결국 백작의 자산이다. 그걸 어떻게 활용하건 백작의 마음대로였다.
“정지.”
가장 선두에 있던 부관 하나가 정지 신호를 알렸다.
촌장의 집이 가시권에 들어온 것이다. 활을 쥔 사병들은 그에 묵묵히 시위를 걸고, 또 어떤 이들은 석궁을 장전했다.
그리고 후미에선 기름 먹인 횃불을 든 이들이 조심스레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야만인의 무력을 흔들나무 숲에서 직접 지켜본 페르마 경의 조언에 따라,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해 아예 불을 지르고 화살을 쏘아댈 작정이었다.
감시조의 전언에 따르면 야만인 일행은 촌장의 집 밖으로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에르몽 바깥으로 나간 사람조차 없으니,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 신세였다.
“던져!”
준비가 끝나기 무섭게 부관이 목소리를 높였다. 십수 개의 횃불이 날아가 촌장의 집에 부딪쳤고, 순식간에 불이 옮겨붙기 시작했다.
작은 마을의 집이라 해봐야 결국 목조 건물이다.
촌장의 집은 순식간에 화마에 휩싸였다.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 사이로 집에 틀어박힌 주민들의 비명이 새어나오는 듯했다.
우지끈.
기둥이 완전히 타버린 건지, 촌장의 집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났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이곳저곳이 새까만 잔해가 되어 스러졌다.
“안에서 버티려는 건가. 어리석군.”
백작은 비웃음을 흘렸다.
밖으로 나서봐야 화살의 표적이 될 뿐이라 생각한 건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 야만인 일행의 어리석음을 비꼬는 것이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지붕이 통째로 주저앉았다.
우드득. 우드득. 쾅!
만약 저쪽에 기회가 있다면 지금뿐이라는 걸 백작도 모르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가 소음을 꿰뚫고 크게 울려 퍼졌다.
“쏴라─!”
사방에서 날아드는 화살 세례. 수십 발의 화살이 형성한 탄막은 야밤에도 거뭇한 장막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회색 마탑의 마법사가 있다는 걸 인지한 이상, 화살 세례를 도중에 멈추는 건 어리석은 짓.
이어서 시위를 걸고 대기하던 이들이 화살을 쏘았다.
거진 일 분에 이어지는 일방적인 공세. 그 끝에도 야만인 일행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끝장났을 게 분명했다. 불에 타죽었거나, 건물 잔해에 깔려 죽었거나, 화살에 맞아 죽었거나….
“수색해라.”
부관의 지시에 사병들이 단창을 들고 조심스레 전진했다. 고작 십수 걸음의 거리가 길게 느껴졌다.
가까이 접근했다가 그 야만인이 불쑥 튀어나와 자신의 골통을 부수는 상상이 몇 번이고 떠올랐다.
마침내 창을 뻗으면 닿는 거리까지 당도한 사병들은 약속한 것처럼 침을 삼켰고, 큰 결심을 한 눈빛이 되어선 저마다 창을 건물의 잔해를 향해 내리찍었다.
푹! 푹! 푹!
잔해를 뒤적거리는 수준의 소심한 창질이 얼마간 이어졌을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나오는 게 없자 백작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이쯤이면 시체라도 나와야 정상 아닌가? 그새 잿더미가 됐을 리는 없고….
‘설마?’
“잔해를 파라! 안에 시체가 있는지 제대로 확인해!”
무언가 번뜩 떠올린 백작이 격앙된 투로 외쳤다. 사병들은 그제서야 창을 쑤시는 걸 멈추고 손을 움직여 잔해를 들어 옮겼다.
장정 수십이 달라붙어 잔해를 들고, 퍼내기 시작하자 거의 전소된 촌장의 집은 이제 원형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잔해를 파내면 파낼수록, 백작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갔다.
“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잔해를 파낸 뒤, 병사 하나가 무심코 외친 말에 백작은 투구를 바닥에 내던지며 분노를 터뜨렸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백작의 물음에 침묵이 감돈다.
그럴 수밖에. 촌장의 집은 에르몽에서도 가장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 사람의 눈을 피해 몰래 탈출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거기에 마을 외곽에도 백작의 사병들이 진을 치고 있으니, 어떻게 조용히 벗어난단 말인가?
그렇기에 모두가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백작의 분노가 사그라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백작의 바로 옆자리를 지키는 페네스가 조용히 투구 속에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
*
*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진심으로요….”
“그러게 말일세. 나는 한바탕 푸닥거리 해야 할 줄 알았는데.”
“왜 그랬을까요? 그분은.”
각각 마이아, 론, 얀이 내뱉은 말이었다.
아무래도 그놈 행동이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지. 칸은 어깨를 으쓱이며 별거 아니란 투로 답했다.
“기사니까.”
그 간결한 대답이 아리송했는지 일행은 눈을 끔뻑거렸으나, 칸은 구태여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이것만으로 충분한 설명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좀 의외긴 하군.’
칸은 조용히 론의 뒤를 따라 걸으며, 자신들을 몰래 밖으로 빼내준 기사. 페네스를 떠올렸다.
드워프가 떠나간 직후, 기다렸다는 듯 촌장의 집을 찾아온 페네스는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는 대신에 따라오라는 말만 남기고 어디론가 향했다.
이미 움직일 채비를 마쳤던 일행이었기에, 칸은 어쩔 속셈인가 보자는 심산으로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칸이 생각했던 잠복한 병사들의 기습이나, 갑자기 뒤를 돈 페네스의 기습 같은 건 없었다.
“지금이라면 조용히 빠져나갈 수 있을 거다. 마을 주민들도 각하가 오신 뒤로는 바깥의 동태를 함부로 살피지 못하고 있고, 네놈이 머무는 집을 감시하는 인원도 마침 교대하는 중이니까. 문의 출입도 내 수하가 맡고 있으니, 별다른 제지는 없을 거고.”
그때의 페네스는 안 그래도 핼쑥한 얼굴에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피로감이 짙어 보였고, 미리 준비해둔 설명을 멍하니 늘어놓는 것처럼만 보였다.
그리고 칸 일행이 에르몽을 벗어날 때까지도, 페네스는 우묵한 눈으로 칸을 바라봤을 뿐. 어떠한 행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서 칸은 페네스가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한 변명을 애써 내뱉는 것 같단 인상을 받았었다.
‘자기 주인의 뜻을 거스르는 기사라.’
기사들은 만신전 신의 앞에서 ‘충성의 서약’을 맺기에 절대 자기 주인을 배신할 수 없다.
한 가지 예외가 존재하긴 하나, 기본적으로 서약을 어겼을 경우 신의 징벌을 받게 된다.
그러니 페네스가 백작의 뜻을 거스르고 칸 일행을 보내준 것도 페네스의 기준에선 자기 주인을 위한 행동이라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페네스의 판단은 옳았다. 만약, 페네스 백작이 칸을 처리하려 들었다면 적어도 백작 본인은 무사하지 못했을 테니까.
‘아니, 이놈들 수준의 기사라면 여럿이 덤벼도 할만하려나……. 병사를 모조리 끌고 나오면 조금 까다롭기야 하겠지만.’
“그런데. 이대로 떠나면 조금 아쉽지 않겠습니까?”
이전에 보았던 에밀 자작과 페네스의 움직임을 머릿속에 그리며, 가상의 전투를 상상하던 칸이 고개를 슬쩍 돌렸다.
“뭐가 말이냐.”
“의뢰 보수 말입니다. 명목상의 현상금이긴 해도, 백작이 자작의 목에 내건 현상금은 상당합니다.”
그 말에 칸은 어이가 없었다. 그걸 니가 나한테 물어보면 어쩌라고?
“그건 니가 알아서 해야지. 바그너의 지부장이라며? 이럴 때 일하라고 수수료를 받아 처먹는 거 아니냐.”
“…당신이 그런 말을 하깁니까? 졸지에 바그너에서 쫓겨나게 된 사람 앞에서?”
“그럼 북부로 가는 김에 그놈 얼굴이나 봐야겠군. 가서 헤펠트 백작이 떼먹은 돈 받아내라고 멱살이나 붙잡으면 어떻게든 해주겠지.”
“그놈이라니. 설마……?”
마이아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칸이 말한 ‘그놈’이 자신의 직속 상관을 지칭한다는 걸 눈치챈 까닭.
물론, 그 사람이라면 상대가 왕국의 백작이라도 아무렇지 않게 돈을 회수할 능력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망했다…!’
정말 그렇게 일이 해결돼버리면, 가장 곤란한 것도 마이아였다.
기껏 경력 좀 쌓으라고 그럴싸한 자리에 앉혀놨더니 귀족한테 눈도장이나 찍히고, 도망치듯 북부로 되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지 않나.
“그, 그것만은…….”
“그게 싫으면 바그너로 돌아가서 돈 다 받아내던지.”
“염병…….”
상황이 안 좋아지면 입이 험해지는 건 완전 버릇이군. 칸은 자기도 모르게 욕을 내뱉고 있는 마이아를 그냥 무시했다.
‘이제 북부인가.’
북부는 칸에게도 인연이 있는 곳이었다. 그가 동부로 가게 되어 마녀와 엮이게 되고 오우거를 사냥한 것 모두, 동부에서 마주친 총지부장과의 만남이 계기였으니까.
그러나 그때와 지금의 동부는 판이하게 다를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칸 자신에게 있어서는 말이다.
‘북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상쩍은 일들, 거기에 진리의 추종자가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안 그래도 여기저기 일 벌이기 좋아하는 놈들이니까.’
어쩌면, 그곳에서 틸리를 마주하게 될 수도 있으리라.
물론, 그렇다고 해서 칸이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제롬이 말한 북부의 이상 현상과 ‘신화시대’가 정말 연관이 있는지 밝혀내고, 겸사겸사 마검과 얽힌 진리의 추종자 놈들과 틸리를 찾아내는 것.
‘다만 생각해볼 것은, 원 역사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졌었나에 대한 거다.’
게임에서의 아르곤 왕국은 다르킨에 의해 멸망하고, 망자들의 나라가 세워지는 거름이 되어 역사에서 그 이름을 지웠다.
예전엔 그 사실에 별다른 의문을 가지진 않았었다. 대륙의 중심과 비교하면 약소한 국가이니,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고 말았었지.
하지만 이제는 안다.
아르곤은 분명 메인 스토리가 벌어지는 대륙의 중심과 비교하면 여러모로 수준이 낮지만, 결코 사령술사 하나가 날뛴다고 해서 패망할 나라가 아니었다.
‘마녀가 말한 왕가의 비밀이 진짜라면, 더 그렇겠지. 게다가 왕가의 종친인 흑익공은 그 마녀조차 경계하는 강자라고 했다.’
결국 칸이 모르는 비사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이번 북부행에서, 그 비사의 일부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겠군.’
생각을 갈무리한 칸이 갑작스러운 빛에 눈을 찡그렸다.
어느새 새벽녘이 되어 밤하늘이 걷히고, 주홍빛 하늘이 일행을 비췄다.
마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처럼.
그리고 일행의 가장 뒤쪽에서 햇살이 눈이 부신 듯, 디에고가 얼굴을 찡그렸다.
‘시벌…. 그래서 나는 왜 아직도 여기 껴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