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야만전사-41화 (41/132)

#041화. 경계마을 (1)

갑자기 도시의 사병들과 시장을 한꺼번에 잃은 피카르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그나마 에밀 자작의 영향력이 강했던 모양인지, 당장 범죄가 들끓거나 그러진 않았지만 결국 시간문제였다.

정작 혼란을 일으킨 주범이나 다름없는 칸은 아무런 상관없다는 태도로 일관했고, 일행도 괜한 시비에 얽히기 싫다는 데에 동의했기에 별 탈 없이 피카르를 벗어났다.

그리고 북부로 향하기 전 들를 수 있는 마지막 도시에선 그냥 마이아의 신분을 활용했다.

“이런 데에는 또 쓸모가 있군. 지부장 말고 신분증이라 불러야 하나?”

“…….”

용병 조합 바그너 지부의 지부장이자, 아르곤 왕국 총지부장의 수족 중 하나인 마이아다.

조합의 지부가 작게라도 들어선 곳이라면 그녀의 용병패는 프리패스 출입증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조합에서 숙소까지 따로 배정을 해주니, 그냥 신분증 용도로 데리고 다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바그너에서 왕가로 전령을 보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아마 저쪽에서 나서기 전에 선수를 친 것이겠죠. 일단 최대한으로 이득을 볼 심산이 아닐는지.”

인간 신분증 덕분에 편하게 구한 숙소에서 여독을 푸는 동안, 조합의 직원들을 데리고 이곳저곳 쏘다니던 마이아가 바그너의 소식을 가져왔다.

바그너를 방치하고 떠난 게 신경이 좀 쓰였나 보지? 칸은 발등에 불똥이 떨어진 것처럼 바삐 움직이는 마이아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알아서 하겠지. 되도록이면 엿 먹는 방향으로 갔으면 좋겠군. 백작이 먼저 굽혀서 그것도 힘들겠지만.”

“그렇겠죠.”

마이아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일행보다 먼저 에르몽을 떠난 드워프였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백작이, 왕가에게 먼저 굽히는 건 당연한 수순.

‘왕국 서부의 정세가 크게 변하겠군.’

어쩌면 바그너를 대신해 노르딕의 주변이 새로운 용병 사업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될 수도 있으리라.

그렇게 된다면 네카르 산과 그 너머의 서부 대산맥의 개척이 성사되는 것도 마냥 허황된 가정은 아닐 터였다.

“크흠. 건설적인 얘기들 나누는데 미안하지만.”

“뭐냐. 디에고요.”

“디에고요가 아니라 디에고…. 아니 됐수다. 사실은, 얼떨결에 여기까지 내가 따라오긴 했는데…. 엄밀히 말하면 나는 당신들 일행이 아니잖아? 그냥 흐름에 몸을 맡기다 보니 이런저런 일에 휘말린 거였지…….”

눈을 데구르르- 굴리며 말하는 디에고의 모습은 어쩐지 겁에 질린 모양새였다.

그럴 만도 했다.

칸에게 목숨이 구해지고, 같이 바그너에 들어왔다가 흔들나무 숲까지 동행해서는 꼼짝없이 죽을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 막상 문제는 칸이 전부 해결했고,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드워프가 개조한 장비를 얻게 됐으니.

“그……. 그래서 말인데. 슬슬 난 여기까지 하고 갈라지는 게 맞지 않나 싶어서.”

그런 상황에 떠나겠다 말을 하는 건, 본인이 느끼기에도 염치가 없다고 느낀 것이다. 받아먹은 건 입 싹 씻고 튀겠다는 소리와 뭐가 다르다고?

그러나 디에고로서는 정말 간절한 바람이기도 했다.

기사를 아이처럼 다루는 야만인의 일행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어설픈 칼잡이에 불과한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었다.

“나도 은혜를 모르는 건 아니라고. 장비값은 내가 조합을 통해서 당신한테 지불할 테니까…….”

“누가 붙잡는다 한 적이라도 있나? 가고 싶으면 그냥 가라.”

“엥? 그, 그래도 되나?”

진심이냐고 되묻는 디에고를 본 칸이 되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나를 어떻게 본 거야 대체.

“그럼 뭐. 뒈지기 직전까지 끌고 다닐 줄 알았나? 이제는 알아서 해. 장비값은…. 그것도 너 알아서 하고.”

사실 돈이야 받아내려면 받아낼 수도 있겠으나, 귀찮아서 굳이? 라는 생각이 더 강했다.

게다가 칸은 여럿이서 움직이는 걸 선호하는 편이 아니었다.

‘데리고 다녀서 도움이 될 구석도 없고.’

“그래도 고생했으니 하나 충고하자면, 당분간은 노르딕도 가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도시가 좀 어지럽거든.”

“……이유가 궁금하긴 한데, 괜히 알면 큰일 날 것 같군. 차라리 그냥 가겠수다. 당분간은 남부에서 소일거리나 해야지.”

“그래. 고생해라.”

디에고는 고맙단 말을 남기고서 이른 아침에 숙소를 떠났다. 남부에 재밌는 소식이 생기면 알리겠단 말을 덧붙이고서.

칸 일행이 떠난 것도 디에고가 떠난 다음 날이었다.

“여기부턴 중간에 들러서 쉴 수 있는 마을이나 장원이 없네. 그래서 당분간은 노숙을 해야 하는데 불침번도 따로 정해야 하고, 마물의 습격도 잦을 테니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날마다 싸울 인원을 정하는 게 보통이지. 보통은 그런데….”

뻥!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구만. 도끼질 한 번으로 거대한 늑대 마물을 터뜨려버린 칸의 뒷모습을 본 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보통 용병들이 저 마물 하나 잡으려고 무슨 고생을 벌이는지는 차치하고. 칸이 있는 이상 마물로 애를 먹는 일은 생길 것 같지가 않았다.

“…이 파티의 경우엔 내가 길만 잘 잡으면 되겠군. 아마 큰 문제가 없다면 십 일 이내로 경계마을이 나올 걸세. 그때까지만 고생하면 돼.”

“경계마을? 이름이 특이하네요.”

“그야 그렇지. 애초에 부를 이름이 없어서 편의상 붙여진 이름이니까 말이야. 그러니 시장 같은 관리자도 없지. 왕국의 도시가 아니거든.”

“정말요?”

“그래. 원래는 용병들의 야영지에 불과했던 게, 사람이 모이고 모여서 점점 규모가 커지다 보니 지금의 경계마을이 된 거니까. 거길 관리하는 양반이 있기는 한데….”

론이 덧붙이기를, 그는 은퇴한 용병으로 은퇴 이후에 경계마을에 자리를 잡고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주변의 치안을 도맡았다고 한다.

경계마을이 서부와 북부 이동 간에 꼭 필요한 중간 경유지가 된 데에는 그의 역할이 컸다고도.

“좋은 사람이네요. 사실 나라에서 홀라당 집어삼킬 수도 있는 건데, 그냥 도와준 거잖아요?”

“음…. 그렇기는 하지. 듣기로는 작위를 고사했단 소문이 있기는 하네. 그게 사실인지는 그 양반만 알고 있겠지만.”

“확실히 그런 제안이 있긴 했습니다. 조합의 선배께서 그런 얘기를 했던 게 기억이 나는군요.”

그때 마이아가 나서서 소문이 사실임을 밝혔다.

“듣기로는 그때 총지부장이 골머리를 앓았다던가? 은퇴한 용병…. 촌장이라 불리는 자가 귀족 밑으로 들어가면, 조합 입장도 꽤 난처해졌을 거라고도 했었어요.”

“그런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자에게 작위를 제안하다니…….”

마이아의 말에서 뭔가 떠올린 게 있는 건지, 론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퍽 의미심장한 모습인지라 칸이 무슨 문제가 있냐고 묻자 론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마 형씨라면 제대로 판단을 내릴 테니. 굳이 내가 떠벌려서 선입견을 주고 싶지는 않군.”

“촌장이라는 녀석 얘기냐?”

“…으음. 맞네. 더 이상은 아까도 말했지만, 형씨가 직접 보고 판단하는 게 나아.”

자기 이름이 쇠망치 론이라 우길 때 말고는 고집을 부리는 경우가 드문 론이었다.

그런 녀석이 완고하게 입을 다무는 걸 보면, 촌장이라는 녀석에게 뭔가 있기는 한 모양.

‘나중에 보면 알겠지.’

칸이라고 딱히 궁금한 건 아니어서 촌장에 대한 주제는 흐지부지 넘어가게 됐다.

그 이후로는 호기심이 많은 얀이 이것저것 론에게 물어보는 형식으로 대화가 오갈 뿐. 아직 일행에 스며들지 못한 마이아나, 애초에 잡담에 관심이 없는 칸은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길잡이로 론을 고용한 것이 탁월한 선택이라는 게 증명됐다.

사람이 별로 없는 탓에 마물이 많아야 할 길을 지나는 와중에도 무리에서 떨어진 떠돌이나, 소수로 활동하는 마물만 마주칠 뿐. 정말 위험한 마물 서식지는 요리조리 피하면서 나아가고 있는 까닭이었다.

게다가 야생에서 조달할 수 있는 식재에 해박한 데다가, 요리에도 능숙해서 보존 식량이 떨어진 이후에도 배곯을 일이 없었다.

“한 이십 년 넘게 칼밥 먹고 살면 다들 이렇게 될 걸세.”

그는 크게 특별할 것 없는 재주라며 겸양을 떨었지만, 사실 용병 짓거리를 이십 년도 넘게 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업적이기는 했다.

칸처럼 초인적인 육체를 가진 것도 아닌, 순수 인간의 몸이기에 더욱더.

‘그렇게 살아남아서 스킬이 생긴 건지, 스킬이 있어서 살아남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대단히 귀한 인력임에는 부정할 여지가 없으리라.

“사실 이런 건, 북부 인근이나 북부 안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네. 마물보다 사람이 더 위험한 동네니까. 땅도 척박해서 현장에서 조달할 방법도 적고.”

“그쪽 동네가 좀 거지 같긴 하지. 땅도, 사람도, 마물도. 전부.”

론의 말에 핀잔을 주듯 중얼거린 칸이 눈살을 찌푸렸다. 북부에서 겪었던 거지 같던 일들이 새삼 떠오른 까닭.

땅이 척박한 게 문제인지, 아니면 그쪽 동네 유전자가 거지 같은 건지.

자칭 ‘북부인’이라는 것들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미들랜드에서도 특히 그런 성향이 더욱 짙었다.

자기 문제는 스스로 하라는 정도가 아니라, 곤란을 겪는 타인이 있으면 최선을 다해서 벗겨 먹으려는 놈들이 수두룩하게 깔린. 지구로 치자면 할렘에 가까운 곳이라고나 할까.

다른 동네에선 도적이나 강도 따위로 불리는 것들이 군벌을 형성한 경우가 흔했고, 심지어 귀족이 대놓고 강도질을 장려하거나 직접 강도질을 하는 게 바로 북부였다.

“거기 가서는 어수룩하게 굴지 마라. 특히 마법사는 더 호구로 보고 털어먹으려 드는 동네니까.”

“네, 네? 마법사가 왜요…?”

얀이 이해할 수가 없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법사가 호구라니? 어지간한 귀족보다 나은 대우를 받아온 얀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말이기는 했다.

“떠돌이 마법사들은 대개 속세에 어둡네. 그런데 자기가 마법사라는 이유로 대부분이 오만하고, 방만한 행동을 일삼지. 용병 업계에서는 야만인 다음으로 속여먹기 쉽단 말이 있을 정도니까.”

“야만인 다음이라니…. 전사님은 속이기 어려울 거 같은데요.”

“형씨야 다른 야만인들이랑 다르지. 야만인이라 하면 보통은 머리에 싸움밖에 안 든 경우가 대부분…….”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칸이 손가락을 세워서 론의 입을 막았다.

설마 뒤통수를 또 맞는 건가 싶어 손을 들어 뒤통수를 가린 론이 움찔대는 가운데.

“뭐가 오고 있다.”

“…오기는 뭐가.”

론이 무어라 반문하기도 전이었다.

집중해야 겨우 들릴까 싶은 소음이 론의 귓가를 파고들었고, 이내 그 소음은 일행 전체가 들을 만큼 가까워졌다.

투두두두두……!

론이 얼굴을 굳혔다.

안 그래도 북부의 흉흉함이 입방아에 오르내리던 시점에서, 다수의 기마가 정확히 일행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오고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좋지 않은 징조였다.

“환영이 격한데.”

그리고 유일하게 상대의 정체를 정확히 인지한 칸은 오랜만에 들른 고향에서 익숙한 걸 본 사람처럼 웃었다.

왕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북부의 명물과도 같은 마적 떼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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