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화. 경계마을 (2)
말의 얼굴에 씌운 검은 마스크와 비슷한 검은 두건을 머리에 두른 마적 떼의 모습은 자기들 정체를 과시라도 하는 것 같았다.
다만 행색이 우습다고 해서 저들의 전력까지 얕잡을 수는 없었다.
경무장한 인마가 눈에 보이는 것만 열 기. 단순히 머리만 들이박아도 몇 배에 달하는 보병을 으깨버릴 수 있는 전력이었다.
“아직 완전히 북부에 들어선 것도 아닌데…?”
일행 중에서 가장 연륜이 깊은 론이 당황하여 중얼거리는 가운데. 저쪽에서도 칸 일행을 발견한 건지 뭐라 뭐라 소리치는 게 보였다.
다분히 적대적인 몸짓으로 삿대질을 해가며 칼을 뽑아 드는데, 아무래도 싸움을 피하기란 어려울 성싶었다.
“어. 어떡할까요…? 주문을 쓸 여유는 되는데, 숫자가 좀…….”
얀의 우는 소리를 들으며 칸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뻥 뚫린 들판과 길이 전부였다. 마상돌격에서 몸을 가려줄 장애물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쯧.”
결국 칸이 혀를 차며 앞으로 나섰다.
“내 뒤에서 웅크리고 있어라. 가능하면 주문으로 말을 노리고. 마이아랑 론은 얀을 지켜.”
그렇게 말한 칸이 허리띠에서 도끼를 뽑았다. 묵직한 무게감이 손을 타고 전해졌고, 말을 탄 도적들의 얼굴 표정이 보일 만큼 거리가 좁혀졌다.
“비켜라──!”
“뒈지고 싶지 않으면 꺼져!”
“이 새끼들이 도로 전세 냈나.”
잔뜩 성이 나서 외치는 놈들을 향해 중지를 치켜세운 칸이 도끼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 모습을 본 마적들도 몸통이 넓찍한 검을 하늘을 향해 곧추세웠다.
저들끼리 부딪치지 않으려 양쪽으로 넓게 퍼진 대형을 생각하면, 칸과 실제로 부딪칠 기마의 숫자는 고작 둘뿐이었다.
물론, 어지간한 상황에선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위력을 내겠으나-.
“원래 길에선 사람이 먼저야. 씹새들아.”
콰직-!
초인적인 근력을 가진 야만전사의 도끼는 거침이 없었다.
말 위에서 내리친 검격은 잠시도 버티지 못했고, 두 기의 인마가 으저적- 소리를 내며 땅에 처박혔다.
“손맛이 괜찮은데.”
마상돌격을 정면에서 으깨버리고도 고고히 두 다리로 선 모습은, 적들로 하여금 절로 겁을 집어먹게 할 정도였다.
마적들은 고삐를 돌릴 생각조차 잊고 칸 일행을 쌔앵 지나치고 말았다.
그리고 뒤늦게 눈을 번쩍 떴다. 시발, 내가 뭘 본 거야?
“미, 미친. 괴물이다! 튀어!”
“회색 그린스킨이다! 저게 무슨 인간이야…!”
‘저 씹새들이…?’
칸이 얼굴을 왈칵 구기고 도끼를 집어 던지려다가, 마적들이 멀어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말을 타고 도망치는 놈들을 쫓으려면, 적잖이 힘을 빼야할 게 분명했기에.
‘경험치 거리도 안 될 놈들 같으니….’
“가, 갔네요?”
“이게 대체 뭔…….”
갑자기 들이닥쳐선 지레 겁을 먹고 줄행랑 치는 마적들의 행동에 벙찐 일행이 저마다 입을 열었다.
그야 사람이 제자리에서 기병의 충격을 냅다 박살 내는 걸 보면 놀랄 만도 하다마는-.
“그래서. 뭐 하는 얼간이들이야?”
도끼에 묻은 피를 휘휘 털어낸 칸이 눈쌀을 찌푸렸다. 이거 완전 뺑소니라도 당한 기분인데.
실제로는 뻉소니를 친 차가 박살이 나버렸지만….
“……뭔가 얼빠진 놈들이긴 해도, 마적이 벌써 나타나는 건 이상하군. 보통 경계마을 근처로는 얼씬도 안 하는 놈들인데.”
“뭔가 일이 생긴 거 아니겠습니까?”
“마이아 아가씨도 경계마을에 들러봤으면 알 텐데. 그쪽은 마적이 숫자만 믿고 어떻게 해볼 곳이 아니라네.”
“그건 맞지만, 마적들이 경계마을을 넘어서 약탈하러 나오는 것부터가 이미 이상하지 않습니까.”
용병 둘이서 알아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자기가 으깨놓은 시체를 눈으로 훑던 칸이 돌연 쪼그려 앉았다.
‘이건…….’
두 시체의 품에서 똑같은 형태의 단검이 나왔다. 그것도 검집, 손잡이, 검신의 형태가 완벽히 일치했다.
같은 사람에게서 만들어진 물건이란 소리였고, 품질이 썩 좋지 않은 걸 보면 실전에 쓰기 위한 물건이라기보단 장식에 가까운 듯했다.
“론. 이 단검을 봐라.”
“단검?”
한창 마이아와 열띤 토론을 나누던 론이 칸의 부름에 쪼르르- 달려와 단검을 살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지, 단검을 한참 노려보던 론이 앗! 탄성을 터뜨렸다.
“이거. 아무래도 알-라스델의 병사들이 쓰는 물건 같네만. 형씨의 목적지인 알-란자스랑은 며칠 거리에 있는 도시인데, 거기 병사들 물건이 왜….”
“병사가 도적으로 전직하는 게 드문 일은 아니지. 특히 북부에서는.”
칸의 말이 맞았다.
북부는 부유한 몇몇 도시가 아니고서야 대부분이 빈곤한 상태로 한 해를 보내니까.
소도시나 마을의 병사가 도적으로 둔갑해 약탈을 다니는 일은 퍽 흔했다.
다만 론은 칸의 추측을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알-라스델은 작은 도시지만 혈통이 좋은 군마를 납품하는 거로 돈을 벌어들여서 꽤 부유한 편이라네. 도시 주변이라면 모를까. 여기까지 와서 약탈이나 할 정도는 아니야.”
“그럼. 이것들은 뭐냐.”
“글쎄. 알-라스델의 병사가 탈영을 했다거나…?”
론은 자기가 말하고도 그닥 그럴싸하지 않다 여겼는지 말끝을 흐렸다.
칸은 대체 뭐지 하는 심정으로 뒷머리를 북북 긁다가, 그냥 가던 길을 가기로 했다.
북부에서 마적이 날뛰는 게 뭐 큰일이라고.
그냥 사업장을 좀 넓혔다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칸은 스스로도 믿지 않는 말로 대충 납득해버렸다.
“가자. 일단 경계마을에 가서 잠이나 푹 자자고.”
론의 말로는 경계마을까지 고작 반나절 거리만 남은 시점이었다.
투두두두두두……!
“이런 시발.”
대뜸 욕부터 내뱉고 본 칸이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눈을 부라렸다.
경계마을로 향하는 길을 타고 쭈욱- 내달리는 다섯 기의 인마가 보였다.
‘또 지랄이네, 이것들.’
검은 마스크를 쓴 마적 떼를 쫓아낸 것이 바로 최근이었는데, 또 말을 타고 달려드는 무장집단을 마주치니 벌컥 짜증부터 났다.
칸은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자기 할 일은 잊지 않았다. 도끼를 들고 인마의 돌격을 맞받아칠 준비 말이다.
그런데 칸의 예상과 달리, 이번에 등장한 놈들은 칸 일행을 발견하자마자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그리고 서로 대화가 가능할 정도의 거리까지 좁힌 이후엔, 완전히 멈춰버렸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칸이 의아해하는 사이, 그의 뒤쪽에서 론이 외쳤다.
“자네들 자경단 아니야? 왜 여기까지 나왔나?”
“……떠버리?”
“떠버리라니! 쇠망치라니까!”
서로 잘 아는 듯한 말투에 바짝 힘을 주고 있던 칸이 팔을 늘어뜨렸다. 당장 주문으로 말을 공격할 것처럼 얀의 어깨도 축 늘어졌다.
“뭐냐.”
“아. 저 친구들은 마적이 아닐세. 경계마을의 자경단 친구들이지. 척 보기에도 다들 인물이 도적이라기엔 괜찮지 않나?”
“인물이 괜찮아…?”
칸이 떨떠름한 시선으로 ‘자경단’이라는 네 명의 청년과 한 명의 중년인을 훑었다.
통일되지 않은 무장에 소속을 나타내는 물건도 없었다. 수가 많은 어린 놈들은 확실히 도적이라기엔 때깔이 괜찮았는데, 인물이 괜찮다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외모를 평가했을 때, 착하게 생겼다는 말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올 정도라고 할까. 그냥 평범했다.
“…뭐냐. 한동안 서부에 박혀있겠다고 떠난 놈이 여기는 왜 다시 왔어?”
그때 일행의 리더로 보이는 중년인이 론을 향해 물었다. 그는 얼굴에 잔 흉터가 많았는데, 전형적인 칼밥 먹은 인간의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왜기는. 용병이니까 의뢰 때문이지. 여기 형씨 길잡이로 왔네. 북부에 볼일이 있다고 해서-.”
“이쪽이?”
중년인이 론의 말을 툭- 끊어먹으며 칸의 행색을 요리조리 살폈다.
그러다 흉악한 근육과 무시무시한 도끼가 눈에 띄었는지, 다음에 입을 열 때 태도가 다소 누그러진 채였다.
“야만인이라. 북부에선 도저히 손님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인종이구려. 설마 소문의 참수자 본인이시오?”
헙. 중년인의 물음에 가장 후미에 있던 얀이 놀라서 입을 꾹 다물었다. 다행히 중년인은 눈치를 못 챘는지, 칸에게 시선을 못 박은 그대로였다.
“…글쎄. 참수자란 이름을 쓴 기억은 없는데.”
“그렇소?”
중년인은 칸의 말을 믿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마이아가 칸의 거짓말을 비난하듯 뒤통수를 째려보는 것이 느껴졌으나, 칸은 당당했다. 애초에 자기들이 멋대로 붙인 별명 아닌가?
“그래서. 저 녀석이 하는 말을 듣자 하니. 그쪽은 경계마을의 자경단이고, 보통은 여기까지 나오는 경우가 없다는 듯한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일? 생겼지. 요새는 일이 없을 때가 드물다고 해야겠지만.”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요.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 북부의 상황이 아주 어지럽거든. 웬 미친 것들이 자기를 북부의 새로운 군주라고 난리를 치질 않나. 멀쩡한 마을이나 장원이 하룻밤 사이에 폭삭 망하질 않나….”
“진짜 문제는 마적들입니다! 원래는 이 근처도 얼씬 못하던 것들이 갑자기 영역을 넓혀서는!”
가만히 중년인의 말을 듣다가 대뜸 열이 뻗쳤는지, 젊은 놈 하나가 버럭 외쳤다.
칸은 무심한 투로 고개만 까딱거렸다. 더 설명해보란 의미였다.
“원래 경계마을은 마적들이 날뛰지 못하는 일종의 안전지대였습니다. 괜히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저들도 잘 알았으니까요. 그런데 촌장님이 그렇게 되시자마자…….”
“그만!”
중년인의 성난 목소리가 청년의 말소리를 파묻었다.
갑자기 혼이 난 청년은 잔뜩 풀이 죽어선 어깨가 축 처졌고, 화를 낸 중년인도 그닥 표정이 편치는 않아 보였다.
‘문제가 있기는 있나 본데.’
청년과 중년인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읽은 칸이 팔짱을 끼며 생각했다. 이것도 설마 제롬이 말한 ‘북부의 이상현상’과 관련이 있는 건가.
“아무튼. 요새 북부 정세가 영 심상치 않소. 그래도 볼일을 보겠다면야 말리진 않겠지만, 일단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충고 고맙군. 그래서 여기까지 나온 이유는?”
“최근에 검은 두건을 쓴 마적 떼가 경계마을을 지나쳤소. 우리는 그걸 추격해서 나온 참이고. 안 그래도 물어보려 했는데, 그들을 보았소?”
“봤지.”
칸이 대충 눈짓하자, 의중을 알아차린 론이 배낭에서 피가 묻은 검은 두건을 꺼냈다. 일전에 칸의 도끼로 으깼던 마적의 물건이었다.
“그들과 마주쳤었군!”
“그래. 그런데 쫓을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거다. 이미 한참 도망가버려서 늦었어.”
“…그런가.”
중년인은 의미모를 눈빛으로 두건을 바라보다, 조용히 말머리를 돌렸다.
“따라오시오. 나 대신 두 놈이나 처리해준 대가라 하기는 뭐하지만, 바로 관문을 통과할 수 있게 도와드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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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인. 스스로를 기온이라 밝힌 그는 자기가 한 말을 지켰다.
실제로 관문에서 거쳐야 할 이런저런 신분 증명을 전부 넘겨버린 덕분에 여정의 속도가 붙었다.
칸이 대충 보아하니 론의 존재가 경계심을 많이 누그러뜨린 모양인 듯했다.
“나도 원래는 용병이었소. 십 년인가 해먹다가 예전에 은퇴해서 경계마을에 눌러앉았지. 그런 나보다 오랫동안 해먹고서 팔팔한 현역으로 있는 친구 아니오? 경계마을에선 그만한 증명이 또 없지.”
“흐흐. 보셨소? 칸 형씨. 내가 이런 사람이라네.”
“다소 입이 체면을 깎아 먹는 면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용병으로서는 아르곤에서 손에 꼽지.”
“그게 무슨 소린가. 기온!”
대충 시답잖은 잡담이 오가고, 일행의 분위기도 많이 누그러졌다.
다만 기온의 인솔하에 나섰다는 젊은 용병들은 칸 일행을 그냥 본체만체했는데, 뭔가 어색해서라기보다는 껄끄럽다는 눈치였다.
‘알 게 뭐람.’
딱히 관심 있게 살펴야 할 반응은 아니었기에 칸은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어차피 경계마을이 시야에 비칠 만큼 가까워졌으니까. 불편한 동행도 여기서 끝이란 소리다.
“슬슬 보이겠군. 저거요.”
“와…….”
기온의 말에 반응하듯 얀이 탄성을 터뜨렸다. 경계마을의 외관을 보고서 사뭇 감탄한 듯했다.
칸도 그 반응이 내심 이해가 갔다.
칸의 키보다 높은 방책이 넓게 둘러쳐져 있고, 중간중간 경계탑을 세워놓았는데 퍽 인력이 남아도는 건지 경계서는 인원이 꽤 됐다.
그리고 방책 바깥에는 얕게나마 해자가 있어서 무리하게 뚫으려면 퍽 애를 먹을 성싶었다.
그리고 튼튼한 목재로 만든 대문은 장정 여럿이 달라붙어도 꿈쩍도 않을 듯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기사처럼 판금 갑옷을 입은 이들이 문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보통 기사쯤 되는 인물이면 장원의 주인이거나, 도시 귀족의 최측근이기 때문에 문을 지키는 잡일에 나서는 법이 없다.
그렇기에 기사로 추측되는 이가 문을 지키고 있는 건, 다소 비현실적인 광경이기도 했다.
‘그냥 갑옷만 입은 용병 같긴 하지만.’
그때 일행의 가이드라도 된 것처럼 앞서가던 기온이 자연스레 말머리를 돌렸다. 말에 올라탄 그의 모습 너머로 경계마을의 풍경이 겹쳐지는 순간. 기온이 옅게 웃었다.
“여행자들의 휴식처, 경계마을에 어서 오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