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화. 경계마을 (3)
“기온 씨! 벌써 돌아오셨군요!”
“아저씨. 그 빌어먹을 놈들은 어쨌어요?”
경계마을에 들어서기 무섭게 문 주변에서 경비를 서던 녀석들이 달려들었다.
멀리서 봤을 땐 퍽 기강이 바로 섰던 정예 같던 이들은 알고 보니 풋내도 다 빠지지 않은 젊은이들이었다.
대충 보니 기온이 데리고 나왔던, 얀과 비슷한 연배의 용병들과 비슷해 보였다.
“마을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오.”
그들을 일일이 상대해주고 나서야 빠져나온 기온이 툭 하고 내뱉은 말이었다.
“경계마을에 정착하는 이들 대부분이 은퇴한 용병이거나, 그 비슷한 인간들뿐이라 아이들도 커서 결국 지아비를 닮더군. 대부분 용병으로 일하고 있소.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기술을 알려주기도 하고.”
“신기하군.”
교육이란 것에 인색한 미들랜드의 환경상, 용병들은 자기가 가진 기술을 무형의 자산쯤으로 여기니까.
어지간해선 남에게 알려주지 않는 게 보통이었다.
만약 기온의 설명이 사실이라면, 경계마을은 이 팍팍한 미들랜드에서 어지간해선 나오기 힘든 이타적인 마을이었다.
“그 촌장이라는 자의 수완인가?”
“맞소. 그분이 정착한 이들에게 내세운 단 하나의 조건이지. 마을의 이웃끼리는 가족처럼 지낼 것.”
그 말을 듣고 있자니 칸은 ‘촌장’이라는 인물에게 호기심이 일었다.
대체 뭐 하는 작자길래 이 지옥 같은 미들랜드에서, 21세기 지구도 이루어내지 못한 공동체를 만든 건지.
게다가 뭔가를 죽이는 데에 이골이 난 은퇴 용병을 충성스러운 수족으로 만들다니. 이런 촌구석에 있다고는 믿기 힘든 수완이었다.
“한번 만나보고 싶군.”
“…안 그래도 촌장께 가는 길이니, 걱정 마시오. 첫 방문자는 보통 촌장께서 직접 만나보시거든.”
“그럼 다행이고.”
만족스런 대답에 슬쩍 웃은 칸이 기온을 따라 경계마을 내부를 거닐었다.
그러면서 주변을 살펴보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이 엿 같은 세계에 떨어진 뒤로는 보기 힘든 활기가 느껴진 까닭이었다.
험상궂은 중년 남자의 아래에서 검이나 창 따위를 휘두르는 청년들의 모습. 별다른 호위도 두지 않고 가판을 열고서 장사하는 상인의 모습. 칼잡이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장난치는 어린아이들….
‘별세계 같군.’
정말 그랬다.
어디를 가도 잠재적 강도, 현직 살인마 취급을 받기 일쑤인 용병들이 평범한 사람들과 자연스레 섞여서 일상을 구가하고 있었다.
이 미들랜드에서 이토록 평화로운 광경을 보리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 언뜻 느끼기에 목가적이다 싶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미들랜드가 아닌 홀로 동떨어진 외딴 섬에라도 온 기분을 느끼며, 칸은 기온과 함께 유독 큼지막한 건물 앞에 당도했다.
마을 회관을 겸하는 건지 이런저런 사람들이 오가는 게 보였는데, 기온은 그 큼지막한 건물이 아니라 뒤쪽에 웬 창고 같은 작달막한 건물의 문을 두드렸다.
“기온입니다. 임무 도중에 손님이 있어서…….”
“들어와요.”
그리고 작은 건물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칸의 눈가가 씰룩였다. 젊은 여자 목소리?
끼이익-.
외관만 보면 창고 같았던 건물의 내부는 정갈하게 꾸며진 원룸 같았다.
목재로 만든 가구들은 전부 실력 좋은 장인이 만든 듯 고아한 풍취가 느껴졌고, 어쩐지 내부에선 퀴퀴한 냄새가 아닌 숲속에서나 맡을 수 있는 향기가 나는 듯했다.
“기온. 수고가 많았어요. 그리고 뒤쪽은…….”
그 안쪽.
침대에 누워 상반신만 일으킨 채 일행을 반기는 여인이 있었다.
구불지게 흘러내리는 연한 주홍빛의 머리카락과 그를 닮은 눈동자. 이유가 뭔지 안색이 창백했으나, 그것조차 어울린단 말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칸의 미간이 슬쩍 좁혀졌다.
“손님인가요? 처음 보는 분도 계시고. 익숙한 분도 계시네요.”
“예. 임무와 관련해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마을을 들를 예정이라 해서 제가 직접…….”
기온과 사무적인 얘기를 나누는 것을 보면, 그녀가 이 경계마을의 ‘촌장’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상한 점은 그녀가 무척 젊은 여인이라는 것이었다.
대충 얘기를 들어보면 경계마을의 ‘촌장’은 처음부터 그녀였던 모양인데, 그게 말이 되려면 이미 꼬부랑 할머니가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시간이니까.
다만 지금은 그 부분에 대해선 이상하게 여기지 않아도 괜찮았다.
“엘프?”
얀이 자기도 모르게 흘린 말에 여인…. ‘촌장’이라 불리는 엘프가 싱긋 웃었다.
그것만으로 실내가 환히 밝아지는 것만 같아서, 칸은 저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
‘이런 시발. 귀쟁이가 여기에 왜 있어.’
*
*
*
엘프. 중세 판타지 작품에선 아주 흔하게 등장하는 이종족이다.
인간과 닮은 겉모습에 ‘미의 종족’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외형, 그리고 수백 년을 넘게 살아가는 장생족.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느긋하며 태평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 들어선 반드시 오크랑 엮는 전통 비스무리한 것이 있다는데, 칸이야 그쪽 관련해선 아는 바가 없기에 엘프하면 ‘태평한 놈들’이란 이미지가 강했었다.
미들랜드 퀘스트를 하기 전까지는.
‘저 섬나라 혐성 종족이 촌장이라고?’
촌장이 싱긋 웃자 함께 쫑긋거리는 뾰족귀를 본 칸이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는 주먹을 가라앉혔다.
론이 괜히 ‘촌장’을 두고 의미심장한 말을 꺼낸 게 아니었군.
“그쪽이 촌장이오? 이 경계마을을 만들었다는, 그 촌장?”
“놀라셨나 보네요. 서릿골에서 온 전사분.”
놀라다마다.
미들랜드 퀘스트에 등장하는 엘프들은 매체에 흔히 등장하는 태평하거나, 음탕한 엘프와는 무척 거리가 머니까.
아름답고 장생하는 부분만 빼고.
“…하하. 어떤 생각이신지 알겠네요. 다만 저는 엘프가 아니랍니다. 정확히는 순수 엘프가 아니죠. 그게 제가 낙원이 아닌 미들랜드에 있는 이유고요.”
촌장이 쓴웃음을 지으며 의외의 말을 꺼냈다.
칸은 그게 무슨 개소리냐며 반문하려다가, 처음으로 그녀의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이 어색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혈통에 따라 나뉘지만, 미들랜드의 엘프들은 대개 녹색 혹은 다갈색을 띠었다.
그런데 눈앞의 촌장은 아르곤 왕국에서 종종 보이는 주홍빛에 가까웠다. 귀끝이 묘하게 뭉툭한 것같기도 하고….
그제서야 칸은 그녀가 반쪽짜리 귀쟁이임을 눈치챘다.
“…하프였군.”
“네, 맞아요. 어머니가 엘프셨죠. 본 적은 없지만, 아마 노예나 그 비슷한 처지에 저를 낳으셨던 게 아닐까 생각해요.”
“고생이 많았겠는데.”
“하하. 글쎄요? 저는 나름대로 만족하고 살았답니다. 반쪽이라도 엘프인지라, 쓸만한 재주가 많았거든요. 잘 늙지도 않구요.”
촌장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더니, 아주 밝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칸은 귀쟁이의 얼굴에서 저렇게 밝은 웃음이 나온다는 것에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착한 귀쟁이라니. 이게 무슨…….’
“으음. 제가 손님을 모셔두고 괜한 소리를 꺼냈네요. 최근 날뛰는 마적들을 마주치고 잡아주셨다던데, 정말 감사드립니다.”
촌장은 정중하게 고개를 꾸벅였다.
그에 지레 당황한 얀이 마주 고개를 숙이는 게 칸의 눈에 들어왔다.
낙원의 엘프와 마주칠 일이 꽤 있는 마탑 출신이라 그런가. 얀도 촌장을 어찌 대해야 할까 헤매는 듯했다.
그 모습이 제법 재밌었는지, 촌장이 후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최근 마적들의 움직임이 영 심상치 않아서요. 원래는 암묵적으로 건들지 않던 경계마을까지 영역을 넓혔더군요. 그래서 여행자들이나 용병이 습격당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전사님 손에 한번 호되게 당했으니. 조금은 덜해지겠어요.”
“토벌할 생각은 안 해봤나? 당신네 전력을 생각하면, 마적 떼 정도는 어떻게 해봄 직할 텐데.”
나름 이 자리에서 안면이 있는 론의 제안에 촌장이 웃음을 옅게 흐렸다.
“당연히 해봤지요. 실제로 현역에서 물러나신 마을 주민, 경계마을을 자주 찾아주시는 현역 용병분들과 함께 마적의 소굴로 추정되는 곳을 기습했고요. 그런데…….”
실패했어요. 촌장이 우울한 투로 읊조렸다.
“전력을 숨겨놨더라고요. 평소 약탈에 나서는 인원이랑은 차원이 달라요. 아마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정규군 출신 탈영병들이 모인 탓이겠죠.”
“그래도 나름 선전은 했소. 숫자를 꽤 줄였지. 문제는 상황이 다급해지자 등장한 ‘진짜 전력’들이었소. 뜬금없이 중갑기병이 튀어나오더군. 만약 촌장께서 도움을 주시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절반은 넘게 죽었을 터.”
그 말에 칸은 할 말을 잃었다. 뭐, 중갑기병? 요새는 마적이 갑옷도 입고 다니나?
“더 이상 마적이라 볼 수도 없겠군. 이 상태가 유지되면, 마을도 위험할 거고.”
“그렇죠…. 이 마을이 당장 공격을 받고 무너지진 않겠지만, 마적 떼가 활개를 친다면 경계마을이 유지될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내가 어린 친구들을 데리고 나선 거였소. 약탈에 나서는 어중이떠중이들은 나 혼자서도 해볼 만하니까. 약탈도 막고, 아이들의 훈련도 겸해서.”
“잠깐. 그러면 조합에는 따로 지원을 넣어봤나요? 총지부장께선 당신이 도움을 요청한다면 충분히 도움을 주실 거에요.”
용병 조합의 소속인 마이아는 경계마을이 혼자 일을 해결하려 하는 것을 이상하게 본 모양이었다.
‘하기야, 중갑기병까지 보유한 집단이라도 그 녀석이라면 충분히 쓸어버리겠지.’
일전에 본 총지부장의 실력을 떠올린 칸이 내심 동의하는 가운데. 촌장은 고개를 저었다.
“대신 그는 대가를 요구하겠죠. 경계마을에 조합의 자리를 내어달라거나, 귀족들과 거리를 두라는 대가를요. 그건 안 돼요. 경계마을은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쉼터여야 하니까. 어떠한 집단이 영향력을 펼치는 건, 마을의 의의에 어긋난답니다.”
“그런….”
“하지만. 용병의 도움을 구할 수는 있겠지요. 저희 측에서 정당한 대가를 드림으로써 말이에요.”
뼈가 있는 말이었다.
총지부장이 조합의 소속이 아닌, 한 명의 개인으로 도움을 주겠노라 약조한다면 마다하지 않겠다는.
‘그렇게 될 일은 없지.’
총지부장을 가까이서 수행한 마이아라면 그 사실을 칸보다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조합의 이익을 위해서는 열등종이라 불리는 야만인한테 무릎까지 꿇을 수 있는 사내 아니던가.
아르곤 용병계에선 손에 꼽는 경력을 지닌 론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크흠- 헛기침 소리를 내며 주의를 환기했다.
“뭐. 우리끼리 여기서 그런 복잡한 얘기 해봐야 의미가 없네. 중요한 건 그 마적들을 어찌할 것이냐는 거지. 가만히 두고만 볼 생각은 아니지 않나?”
“우선 귀족이나 조합이랑 엮인 분을 제외하고, 개인으로 움직이는 용병분들 중에 그 중갑기병들을 맡으실 만한 분을 물색해 보려고요. 쉽지는 않겠지만…….”
“그런 거라면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있나…?”
“네? 그게 무슨 말…. 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하던 촌장의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러 자기쪽을 향하자, 칸이 뭐 어쩌라는 식으로 마주 노려보았다.
그러나 촌장은 가만히 생각에 잠긴 듯 칸을 바라보다가, 또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큰 결심을 한 사람처럼 눈을 빛냈다.
‘말없이 표정만으로도 시끄러울 수가 있었나.’
눈앞의 반쪽짜리 귀쟁이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는 몰라도, 자신이 귀찮아질 거란 사실만은 분명했기에 칸이 먼저 거절의 말을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촌장! 큰일 났습니다! 마적 놈들이 방책 바깥까지……!”
덜커덩-!
문이 부서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큰 소리였다.
그만큼 급하다는 뜻이었고, 문을 열어젖힌 청년의 안색이 굉장히 창백하다는 점에서 장내의 모두가 짜기라도 한 것처럼 칸을 바라보았다.
‘제기랄. 엿 같은 중세…….’
그래, 얌전히 안 지나갈 줄 알았지. 속으로 중얼거린 칸이 도끼 손잡이로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의뢰금이나 넉넉히 준비해두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