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화. 정의의 신 (1)
“오, 만신전이시여…….”
깨끗한 천 위에 죽은 듯 누워있는 호세를 한참 살피던 노인이 작은 탄식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거의 죽은 셈이나 다름없습니다. 팔의 화상이 심각한 것과는 별개로, 출혈이 심각해요. 따로 피를 흘린 것같지는 않은데 어떻게 이런 상태가 됐는지는…….”
경계마을의 의사라는 노인이 내린 소견은 딱히 놀라울 것도 없는 내용이었기에 칸의 반응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는 데에 그쳤다.
‘피를 빨린 건가. 어째 익숙한 꼬라지인데.’
얼음을 가져오라며 난동을 부리다가, 이제는 또 입을 꾹 다물어버린 드라우프니르를 슬쩍 흘긴 칸이 노인에게 살짝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고생하셨소.”
“아니, 아닙니다. 몹쓸 마적들을 홀로 처단하신 용사께 도움을 드렸으니, 이 노구가 오히려 영광이지요.”
위대한 전사께 만신전의 가호가 있기를. 노인은 그 말을 끝으로 칸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곤 방을 나섰다.
자기보다 배는 넘게 살았을 노인의 지극한 공경에 칸이 불편한 듯 표정을 구겼다.
‘만신전의 가호는 무슨…. 그 염병할 것들의 가호는 이쪽에서 사양인데.’
칸을 대하는 태도가 지극히 조심스러운 것은 비단 저 노인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혼자서 마적을 쓸어버린 모습에서 뭘 느낀 건지, 눈도 마주치기 전에 고개를 조아리는 것 아닌가.
특히 경계마을에서 나고 자란 어린 녀석들의 태도가 제일 극성이었다. 게다가…….
“그래서. 이놈한테 뭔가 듣기는 글른 것 같소만.”
“아, 네…. 그렇죠.”
촌장의 태도 또한 수상쩍었다.
묻는 말에 대답도 영 시원찮고,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치는 게 아닌가.
마나가 역류한 충격으로 머리에 이상이 생긴 건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래도 촌장, 당신이라면 뭔가 알고 있지 않나? 이 마을은 서부와 동부의 교역로니까. 남들은 모르는 정보도 꽤 알고 있을 텐데.”
“그, 그렇죠. 궁금하신 게 있으시다면, 아는 한에서 최대한…….”
“우선. 이놈의 출신이 좀 궁금하군. 이놈이 가진 장비는 절대 약탈 따위로 구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잖소. 게다가 이놈은 물론이고, 이놈 수하들 전부 마상전투에 굉장히 능숙했소. 평범한 마적은 그럴 수 없지.”
“원래 알-라스델에서 기병대장을 맡았던 자예요. 주변 영지에서 훈련 자문을 구할 만큼 기량이 뛰어난 데다가, 부하들의 충성도 대단해서 도시의 시장이 기사보다 아낀단 말이 있을 정도였죠.”
알-라스델이면….
‘일전에 경계마을로 가던 길에 죽인 마적들이 떨군 단검이 알-라스델 병사들의 징표였지.’
군마를 왕국 곳곳에 납품하는 것으로 유명한 도시란 말을 론에게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럼. 놈이 탈영하면서 도시의 군마를 죄다 챙기고 달아난 거요?”
“맞아요. 정확히 말하자면 탈영이라 하기는 어렵겠지만요.”
“탈영이라 하기는 어렵다?”
칸이 되묻자 촌장은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망설이는 듯, 잠시 고심하더니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혹시 북부의 이상현상에 대해서 알고 계시나요? 아직 다른 지역에 알려진 건 아니지만, 현재 북부 전역의 혼란은 전부 그 ‘이상현상’이 원인이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저는요.”
칸이 눈을 빛냈다. 북부의 이상현상, 칸이 북부로 찾아오게 된 이유가 그녀의 입에서 먼저 나온 것이다.
“대충 알고는 있소. 사람이 갑작스레 의식을 잃고 깨어나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걸 북부에서는 ‘살아있는 시체’라 불러요.”
살아있는 시체라. 모순적인 단어들의 조합이다. 언뜻 듣기엔 ‘언데드’를 떠올리게 하는 조합이기도 했다.
“육체는 멀쩡하게 살아있는 상태로 의식을 영영 되찾지 못하는 병…. 북부 사람들 사이에선 그렇게 얘기가 나돌고 있죠.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에요. 다만.”
촌장은 ‘살아있는 시체’가 된 사람들 중 멀쩡히 일어난 경우가 아예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사제의 치유는 물론이고, 민간의 의술과 금색 마탑의 포션. 그 어떤 방법으로도 치료가 불가능한 불치병이라고도.
“그 살아있는 시체라는 병이, 이 마적 놈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거요?”
“그가 있던 알-라스델의 시장이 갑자기 의식을 잃었는데, 나중에야 시장이 살아있는 시체가 됐다는 게 알려졌어요. 따로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 된지라 도시가 한동안 마비 됐었죠. 이 남자는 그 혼란을 이용해, 도시의 기사를 살해하고 자기 수하들과 함께 영지를 벗어나 마적이 된 거고요.”
뻔하다면 뻔한 이야기였다. 적어도 이 미들랜드에서는 말이다.
‘누구 뒤통수치는 게 일상인 곳이니까.’
칸은 그런 생각을 하며 눈앞의 반쪽짜리 귀쟁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의 시선을 받은 촌장이 뭐 마려운 개처럼 움찔댔다.
“왜, 왜요?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별거 아니요.”
그에 반해 이 경계마을을 만든 촌장은 미들랜드에서 보기 드문 인종일 게 분명했다.
엘프 혼혈이라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의 성정 자체가 그러했다.
아엘로스의 불새가 방책을 불사르기 직전. 목숨을 걸고 주문을 완성하던 그녀의 모습은, 이 미들랜드란 곳에 회의감을 가진 칸에게 있어선 퍽 인상적이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새삼스럽게 깨달은 사실이다마는. 칸의 일행인 론이나 얀, 그와 함께 싸웠던 아리에스도 미들랜드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냥 갑자기 궁금해졌소. 어째서 목숨까지 걸어가며 이 마을을 지키려 한 건지.”
“어…….”
촌장은 칸의 질문이 퍽 갑작스러웠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살풋 미소를 지었다.
마나 역류의 여파로 얼굴이 핼쓱했음에도, 순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글쎄요. 그때는 필사적이라 다른 생각을 하고 그런 건 아니었는데요. 그냥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시나요? 이곳에서 엘프는 존귀한 혈통이라 우러름받지만, 엘프의 혼혈은 저주받은 존재처럼 받아들여지는 걸?”
“…그건 몰랐는데.”
애초에 엘프와 인간의 혼혈이라는 게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만한 귀쟁이들은 열등종과 몸을 섞으려하지 않으니까. 설령 노예로 잡힌 엘프가 있다고 한들, 보통은 이종족간에 아이는 잘 태어나지 않는 편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유가 대충 짐작은 간다. 워낙 미신이 횡행하는 세상이지 않은가.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진다는 건. 어떤 관점에서는 기적이지만, 또 어떤 관점에서는 불길한 징조지.”
“맞아요. 너무 오래된 일이라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제 어머니는 저를 낳고서 화형을 당하셨다고 해요. 엘프 마녀가 인간을 홀려 실험체를 낳았다……. 그게 제 어머니가 죽은 이유였죠.”
“고달프셨겠군.”
“네. 힘들었죠. 아버지는 정체도 모르고, 엘프의 용모는 먹잇감이 되기 쉬우니까요. 그런 절 거둬주신 분이 제 의부세요. 어디를 가도 볼 수 있는 평범한 용병이셨죠.”
칸은 그 의부는 어떻게 됐냐는, 눈치없는 질문은 굳이 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얀과 비슷한 연령대로 보이지만, 실제로 그녀는 칸의 배는 넘게 살았을 테니까.
“저를 키우려고 엄청 고생하셨어요. 노려지기 쉬운 짐덩어리를 지키려다 많이 다치기도 하셨고, 그 상처가 곪아서……. 말이 좀 샜네요. 그래서 물어보신 게 제가 이 마을을 지키려고 한 이유였죠?”
그녀는 아련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바쁘게 움직이는 청년들과 그들을 호통치며 인솔하는 퇴역 용병들의 모습이 비쳤다.
“의부께서 말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 있었어요. 여행자들이 쉼터처럼 쓰는 장소가 있는데, 나중에 은퇴하면 그곳에서 사람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여관을 만들겠다고요. 장사하기 딱 좋은 위치라나…….”
“안목이 대단한 사람이었군.”
“네, 정말 그랬죠. 덕분에 이런 훌륭한 장소가 생긴 셈이니까.”
거기까지 들으면 충분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노년에 접어들었을 나이의 그녀는, 여전히 어린 시절 의부가 남긴 유언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별난 사람이시군. 당신도. 당신 의부도.”
“하하. 제가 보기엔 전사님이 가장 별난걸요?”
“전사님이 아니오.”
“네?”
“칸이라 부르시오. 코르디의 아들 칸. 그게 내 이름이니까.”
“아…….”
그녀는 커다란 눈망울에 놀란 감정을 숨기지 않고서 입을 벌렸다. 그리고는 엘프다운 아름다운 얼굴에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요, 칸. 저는 네리아에요. 네리아 이스트우드. 동쪽 숲에서 절 마주친 의부께서 붙여주신 이름이죠.”
그렇게 말하는 촌장…. 네리아에게선 이전에 보여주었던 머뭇거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잘 부탁하겠소.”
“저도요.”
이 마을의 촌장으로 지내는 그녀를 또 볼 일이 있을까. 칸은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했다.
아리에스의 과거와 고민을 얼추 짐작하면서도, 끝까지 파고들지 않았던 것처럼. 칸은 필요 이상으로 깊은 관계를 맺는 걸 일방적으로 거부해왔다.
과거에 겪은 쓰라린 경험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도 있으나, 언젠가는 이 미들랜드를 떠날 거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 엿 같은 미들랜드에서 그는 여전히 이방인이었고, 어떻게든 되돌아가기 위해 세계 곳곳을 방랑하고 있는 처지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미들랜드란 세계도, 마냥 더럽고 추악함만이 가득한 한 곳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
*
*
“무슨 얘기를 그렇게 열심히 한 건가?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네.”
“죄, 죄송해요. 얘기가 좀 길어져서…….”
“흠. 어째 얼굴이 붉은데…? 설마 시간이 오래 걸린 게? 어억!”
“시답잖은 소리나 할 거면 두고 간다.”
론의 헛소리를 상냥한 어루만짐으로 차단한 칸이 훌쩍 뛰어 마차에 올라탔다. 튼실한 지붕과 넓찍한 내부를 갖춘, 네리아가 의뢰의 보수로 내어준 물건이었다.
“아, 전사님! 마차를 미리 살펴봤는데, 제가 알던 거랑은 많이 다르더라고요! 엄청 딱딱하고 흔들려요! 아르곤 특유의 문화인 걸까요? 여행의 즐거움을 몸으로 만끽하라는?”
“그건 그냥 제국의 마차랑 비교해서 그런 겁니다. 이 정도도 충분히 훌륭해요.”
“네? 훌륭하다고요……?”
진작 마차에 타서 기다리던 얀이 순진무구한 얼굴로 왕국의 낙후함을 씹어대면서 칸을 반겼고, 마이아가 그런 얀에게 진실을 알려주고선 칸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마을에서 보수로 내준 것들은 전부 실었습니다. 이것저것 많더군요. 금화부터 시작해서 이런저런 식자재에, 여분으로 쓸 수 있는 장비……. 나름 분류는 해놨는데, 나중에 직접 확인하는 게 좋을 겁니다. 전부 당신 몫으로 나온 거니까.”
“고생했다.”
“흐흠. 그런 말 들으려고 한 거 아닙니다만.”
‘아니기는.’
입꼬리 씰룩이는 게 다 보이는구만. 바그너에서도 느꼈던 거지만, 어지간히도 인정 욕구가 강한 여자였다.
아마 수인이었으면 꼬리라도 살랑거리고 있지 않았을까.
“형씨! 출발할 준비 다 끝났네! 준비 다 끝나면 말하라고!”
그때 론이 외쳤고, 칸은 작게 난 창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바로 앞에 나타난 네리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방긋 웃었다.
“벌써 출발하신다니 아쉽게 됐네요. 칸.”
“나중에 일이 있으면 또 들르겠소.”
“그래요. 저는 언제나 이곳에 있을 테니, 나중에 쉬고 싶으실 때 오세요.”
혼혈 엘프인 그녀라면, 정말 언제 찾아가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칸은 대답 대신에 고개를 주억여 긍정했다.
“아, 그리고 이것도 가져가세요. 조금 성의가 부족한 것 같아서…….”
네리아가 내민 건 단검과 장검 사이쯤 되는 길이에 검신이 송곳처럼 끝에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의 검이었다.
게임에서는 스틸레토로 분류하는 단검들과 비슷하다고 할까.
“제가 용병 시절에 쓰던 검이에요. 주문 각인에 용이한 특수한 철을 소재로 썼고, 트롤 가죽도 쉽게 뚫을 정도로 예리하답니다. 덤으로 제가 이것저것 각인을 새기기도 했고요.”
“좋은 물건이군. 내가 받아도 되겠소?”
“물론이죠. 제가 가지고 있어봤자 창고에서 썩힐 뿐이니까요. 칸에게 도움이 된다면 더 좋겠죠.”
칸은 솔직하게 감사를 표했다.
그녀가 어느 수준의 마법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엘프들이 전부 뛰어난 주문쟁이라는 걸 생각하면 상당한 물건임에 틀림이 없으리라.
마적단을 처리한 대가로 받은 이두마차와 북부 혈통의 군마 두 마리, 금화와 식량들보다도 훨씬 값진 선물이었다.
“칸은 마나가 없으니까, 마석도 조금 넣어놨어요. 각인한 주문은…….”
네리아는 검에 각인된 주문에 대해서 한참을 설명했고, 칸은 굳이 서두르지 않고 그녀의 설명을 끝까지 경청했다.
“그럼.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또.”
“그러지.”
둘의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정말 다음에 만날 순간을 기약하듯이, 구태여 미련을 남기지 않으려는 듯했다.
시원시원한 태도로 이별을 고한 뒤, 자기 자리를 찾아 앉은 칸이 마부석 쪽의 벽을 두드렸다.
퉁- 퉁-
신호를 알아들은 론이 출발하자 덜커덩- 흔들리며 마차가 나아가기 시작했다.
다르킨에게서 얻은 ‘피의 그릇’을 정화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도시, 알-란자스를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