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화. 정의의 신 (4)
베르타의 입술이 달싹이나, 들려오는 목소리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아니, 목소리라 표현하기조차 민망했다.
이건 계시다. 초월자의 의지가 머릿속을 직접 파고드는, 거부할 수 없는 명령과 같았다.
칸은 자신을 짓누르는 무형의 압박감과 초월적인 의지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베르타의 몸을 빌려 이 자리에 강림한 존재가 누구인지는 명백하다. 천칭과 검, 이 세상의 선악을 판별하고 징벌을 내리는 재판관이자 징벌자인 만신전의 여신.
“정의의 신.”
이윽고 칸이 눈을 뜬 순간. 그를 짓누르는 압박감은 온데간데 사라진 이후였다.
정의의 신이 자비를 베푼 게 아니다.
칸 스스로 초월자의 의지에 저항한 것이었다.
고작 필멸에 머무른 존재가 초월자. 그것도 만신전의 신격이 퍼뜨린 의지에 저항한다?
누구라도 믿지 못할 일이다. 초월의 자격을 거머쥐고, 초인의 위계에 오른 존재들이라도 쉬이 해낼 수 없는 이적.
칸 스스로도 이런 짓거리가 어떻게 가능한 건지는 몰랐다. 야만인의 강건한 육체가 영혼에 영향을 끼친 것일까. 그도 아니면 칸 본인의 영혼이….
[건방지구나. 전사신의 어린 대전사야.]
생각을 끊듯 날선 음성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그것만으로도 머릿속에서 천둥이 치는 듯했다. 입가에 비릿한 혈향이 퍼졌다.
시발, 무협지에 나오는 고수도 아니고. 고작 의지만으로 야만인의 강건한 육체를 해하는 정의의 신의 행동에 칸이 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어린 대전사야. 네가 진정 전사신의 사도라면, 응당 내게 예를 갖춤이 옳다. 나는 미들랜드의 모든 선악을 판가름하는 여신이요. 신성한 징벌자이니. 너는, 너의 신을 대하듯 나를 대하라.]
“나는 그 누구도 섬기지 않소. 당신이라면 이게 진실이라는 걸 알 수 있을 테지.”
칸은 짓씹듯 내뱉었다. 초월자에게 거짓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되돌아오는 반응은 칸의 예상을 한참 벗어났다.
[하찮은 재롱을 부리는구나. 겨우 필멸자 따위가 내 앞에서 당당히 의지를 드러내고, 거짓부렁을 일삼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네가 전사신의 대전사라는 걸 증명할진대.]
“그게 무슨…….”
[너의 격이 부족함을 생각하면, 내 앞에서 너는 갓난아이처럼 모든 것을 내보여야함이 옳다. 그러나 내 눈에 너는 모든 것이 흐릿하구나. 그게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전사신이 너를 보호하고 있다는 뜻이다.
머릿속을 파고드는 단호한 의지에 칸이 황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전사신이 날 보호하고 있다?
‘만나본 적도 없는 양반이 날 왜 지켜.’
지금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으나, 칸은 침착하게 표정을 추스렸다.
무려 정의의 신이다. 만신전 내에서도 상당히 높은 자리를 차지한 신격이 고작 야만인 필멸자 하나 속여먹겠다고 거짓말을 내뱉진 않을 터.
칸은 조용히 눈을 빛냈다. 오히려 여러가지 정보를 캐낼 기회라 여긴 것이다. 보통 초월자도 아니고, 만신전의 신격과 대화할 기회는 게임에서도 보통 없었으니까.
“…분명한 사실을 말하자면, 난 대전사가 아니오. 스스로 되고자 한 적조차 없거니와, 서릿골에는 엄연히 다른 대전사가 있소.”
[우둔하구나. 어린 대전사야. 내 어리숙한 검을 통하여 너의 싸움을 보았다. 그건 필멸자의 육체에 깃들 수 있는 힘이 아니지. 거인의 혈통이라도 이은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난 순수 인간이오. 서릿골의 혈통에 거인이 있지 않은 이상.”
[그래. 너희는 모두가 전사신의 후예이니, 거인의 혈통을 잇지는 못했음이라. 그렇다면 네가 품은 그 거대한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전사신이다. 너희 민족의 신이 네게 힘을 내린 것이란 말이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수렁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전사신의 힘이라고? 게임이 현실이 됐음에도 여전히 작동하는 스탯창과 스킬, 아이템 정보 등의 게임 시스템들이?
칸은 확신했다.
그건 아니라고. 현재 미들랜드에서 신이라 불리는 존재들은, ‘진짜 신’이라 불리기엔 부족함이 많았으니까.
그들은 그저 지나칠 정도로 힘을 많이 축적한 초월자들일 뿐이었다.
너무 강한 악마가 대악마라 불리는 것처럼. 초월자라는 분류에 얽매이기엔 너무 강대한 초월자가 바로 만신전의 신격인 것이다.
진짜 신이라 불려도 될 자격을 갖춘 존재들은 신화시대에 존재했다는 ‘옛 신’들 밖에 없다. 이 미들랜드의 태초와 맞닿은, 외차원의 존재들 말이다.
그리고….
‘정의의 신은 내 힘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칸의 초인적인 근력을 전사신의 힘이라 단정지었다.
그러나 칸이 가진 진짜 능력은 괴물같은 육체나, 스킬로 인해 발휘되는 필살의 일격이 아니었다.
그것을 모두 포함하는 ‘게임 시스템’이야말로 칸의 진짜 능력이라 할 수 있었다.
‘정의의 신 급의 존재마저 착각하게 만드는 이 괴상한 시스템이, 같은 초월자일 전사신에게서 비롯된 것일리는 없겠지.’
물론, 의문은 남는다.
초월자가 직접 쏘아낸 의지에 칸이 저항한 것과 정의의 신이 칸에게서 무엇도 읽어내지 못했다는 점이 바로 그러했다.
‘당장 어떻게 해결이 가능한 의문은 아니군.’
“…정말 내가 전사신의 대전사라고 칩시다. 내 힘도 전사신이 내려준 축복이고, 그 축복이 당신이 내 생각을 읽을 수 없게 보호하고 있다고 말이오. 그럼, 상황에 따라서 전사신이 이 힘을 마음대로 거두어갈 수도 있는 거요?”
[질문을 허락한 적은 없다만, 이번엔 특별히 답해주도록 하마. 불가능하다. 정확히는 그럴 수 있지만, 회수하는 과정에서 손실이 크기에 보통은 하지 않는 짓거리지. 신들이 사도를 함부러 들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니라.]
“…그렇군.”
시발, 그나마 다행인가. 칸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차원의 영혼을 다른 차원의 육체에 쑤셔박는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실현한 존재에게, 일반적인 상식을 적용할 수 있는 가에 대해서는 둘째치더라도.
자신의 빙의가 일종의 사도 계약이고, 게임 시스템을 신이 내려주는 힘이라 대입해본다면, 정의의 신의 대답은 지금껏 가져왔던 고민을 일부나마 덜어주는 것이었다.
갑자기 게임 시스템이 증발하면 어쩌나- 하는 고민을 말이다.
‘그런데 어째…… 묘하게 친절하게 굴지 않나?’
그러다 문득 의문이 고개를 들이민다. 게임 속 정의의 신의 모습과 지금 눈앞에 강림한 정의의 신에게서 느껴지는 괴리감은, 그 둘이 다른 존재라 착각할 만큼 크다.
그녀를 따르는 성기사들이 이유를 불문하고 플레이어를 적대하고, 간혹가다 정의의 신이 직접 강림해서 직접 플레이어를 끔살하는 경우마저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그 묘한 압박감도 사라진 지 오래다.’
뒤늦게 주변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사라졌단 사실까지 눈치챈 칸은 의아함을 품고서, 베르타와 두 눈을 마주쳤다.
그에 따라 정의의 신이 베르타의 몸을 빌려 얌전히 눈을 마주쳐온다. 시발, 진짜 뭐지?
“내 생각보다 더 친절하시군. 만신전의 신이라면 죄 오만한 족속이라 여겼는데.”
[내겐 너와 적대할 이유가 없다. 네가 저지른 무례에 대해서는 분노함이 옳으나, 나는 자비로운 천칭의 수호자이다. 그것이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면 응당 자비를 배푸는 것이 옳다.]
칸이 눈쌀을 찌푸리고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니까 멍청해서 봐줬다는 소리 아냐, 이거.
[또한, 너의 조력으로 검의 사도가 될 아이가 미혹에서 벗어났으니. 질문에 답해주는 정도야 대단할 것 없는 대가이니라.]
정의의 신이 내뱉은 선선한 답에 칸은 입술을 달싹였다.
“미들랜드의 신들은 미래를 내다보고, 필멸자의 운명을 꿰뚫는다 들었소. 그렇게 계시를 내려 위기를 극복하게 만든다고도. 하면, 내 조력이 없었을 경우에 아리에스가 어떻게 됐을지도 내다봤었나?”
[건방진 질문이구나……. 전사신의 어린 대전사야. 미래를 완전히 예지하는 건, 그 어떤 존재에게도 불가능하다. 단지 정해진 운명의 편린을 엿보는 것이지.]
“편린…….”
[또한, 그 아이의 운명은 너와 만남으로써 더 이상 읽을 수 없게 되었다. 한 줄기의 강이 바다와 만나며 더 이상 구분이 불가능해지는 것처럼. 거대한 운명은 주변의 모든 것들을 끌어들이니까.]
“…그게 무슨.”
[초월자의 미래는 본인조차 예지할 수 없는 법. 전사신의 신성을 받아들인 너 또한 마찬가지다. 초월자의 힘을 품고 있기에 필멸자 따위는 쉬이 가려버리는 것이지.]
칸은 오소소- 돋기 시작하는 소름을 애써 무시하며 대화에 집중했다. 아직, 정의의 신에게 물어볼 것이 남아 있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질문이 될 수도 있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질문해도 되겠소?”
[둘이 셋이 되어도 크게 다를바 없겠지. 그리하라.]
“만약, 초월자의 힘을 빌리지 않은 채. 태생적으로 거대한 운명을 타고난 필멸자가 있다면. 만신전이나 당신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 것 같소?”
[묘한 질문이구나. 그런 존재의 실존을 묻는 것이 아닌, 나와 같은 신격들이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서라.]
베르타의 눈에서 백색의 광망이 튀는 듯했다. 정의의 신이 지금 이 순간, 칸을 주시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광경이었다. 설마 그러한 존재가 바로 너냐? 라고 묻는 듯하여 칸은 애써 덤덤한 티를 냈다.
야만인의 몸뚱어리가 아니었다면 식은땀이 줄줄 났으리라.
머지않아 베르타의 눈이 본래 흐릿한 색을 되찾았고, 정의의 신이 칸의 머릿속에 의지를 흘려넣었다.
[그러한 존재가 정말 존재한다면, 만신전은 관망하면서 상황을 지켜볼 테지. 그게 우리에게 해가 될지, 악이 될지…. 천천히 판단한 뒤에 늦지않다 여길 테니까.]
“당신은 어떻소. 천칭과 검의 여신인 당신이라면.”
어울리지 않게 예스러운 호칭을 입에 담는 야만인의 노력이 귀엽다는 듯, 베르타의 입꼬리가 긴 호선을 그렸다.
[네가 말했듯. 나는 천칭과 검의 여신이니라. 하지만 정말 타고난 운명이 그토록 거대한 필멸자가 있다면, 나의 천칭에 올려놓을 수 없을 테지. 그럼 대답은 정해져 있지 않겠느냐?]
당연히 죽일 것이다.
머릿속에서 우르릉─ 하는 우레 소리가 울려퍼졌다. 마치 여신의 단호한 뜻을 대변하는 것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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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터 너머로 키보드와 마우스를 써서 게임을 플레이하던 과거. 직접 이 미들랜드에 빙의하여 살아가고 있는 지금. 그 둘의 어떤 차이가 정의의 신에게서 이렇게 극명한 태도 변화를 이끌어낸 것일까. 칸은 알 수 없었다.
아니, 의문은 하나로 끝이 아니었다.
정의의 신조차 이 미들랜드의 모든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건만, 자신은 이 미들랜드의 시작과 끝을 몇 번이고 지켜보지 않았던가.
심지어 여러 회차를 거듭하면서 더 나은 결과를 도출하거나, 더 끔찍한 결말을 도출하기까지….
사방의 끝이 없는 공간에 우두커니 놓인 막막함이 이러할까. 해답을 얻고자 시작한 질의응답에서 더 큰 고민만 떠안고 가는 기분이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자신의 빙의와 관련된 존재가 만신전의 신격조차 까마득히 내려다보는 엄청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 존재가 옛 신들 말고 또 있지는 않겠지.’
[의문은 또 다른 의문만 남지. 그래서, 질문은 여기서 끝인가?]
“끝이오. 덕분에 나름의 해답을 얻었소. 이젠 당신이 내게 뭘 바라는지 들을 차례인 것같소만.”
정의의 신은 칸의 넘겨짚는 말투를 나무라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베르타의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유쾌하다는 감정을 드러낼 뿐.
‘역시, 뭔가 바라는 게 있었던 건가.’
그 모습에 칸이 고개를 주억였다.
정의의 신이 사도로 내정한 아리에스에게 도움을 준 것이나, 그녀가 자신을 전사신의 사도 쯤으로 착각한 것만으로는 정의의 신이 베푼 호의를 모두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결국 내용이 관건이었다. 정말 얼토당토않은 부탁이 그녀의 입에서 나온다면, 당연히 거절해야 할 테니…….
[이곳, 아르곤 북부의 일이다.]
그때 마침 머릿속에 은은하게 파고드는 음성에 칸이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만약 아리에스가 보았다면 음흉하다 말했을 미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