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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야만전사-50화 (50/132)

#050화. 정의의 신 (5)

[어린 대전사야. 북부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이상현상에 대해선 알고 있느냐.]

“대충은 알고 있소. 그 어떤 힘으로도 고칠 수 없는 병이며, 이쪽 사람들 입에선 살아있는 시체라 불린다고도.”

[그건 병이 아니다. 그렇기에 만신전의 축복으로도 고칠 수 없지. 아니, 이미 죽은 것과 다를 바가 없음이라.]

정의의 신의 의지에서 노기가 묻어나온다. 그에 따라 칸의 머릿속에선 우르릉- 하는 우레 소리가 울려 퍼졌다.

[생명의 탄생과 죽음은 지극히 당연한 세계의 법칙이며, 필멸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에겐 아주 당연한 운명이다. 허나, 그것을 인위적으로 비틀고 있는 무도한 자들이 북부에 암약하고 있다.]

“그들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것이 있소?”

[나를 섬기는 모든 이들이 나의 눈과 귀란다.]

왕국은 제 앞마당이 아니라 모른단 말을 고풍스럽게도 하는구만….

칸은 여신의 뻔뻔한 답변을 속으로 씹어대며 질문을 골라냈다.

“그럼. 그 현상과 내게 시킬 일이란 게 무슨 관련이 있소?”

[그래. 너에겐 그 무도한 자들의 처리를 맡기마. 나의 아이들은 제각기 역할이 있고, 필멸자들의 나라 사이에 알력 또한 존재하니. 너만한 적임자가 없음이라. 어린 대전사야. 이대로 순환의 법칙에 균열이 계속된다면, 세상에 또 한 번 균열이 갈 것이다.]

‘또 한 번?’

묘하게 신경 쓰이는 대목이다. 최근 균열이 발생한 적이 있다는 건지, 과거에 그랬다는 건지…. 그러나 정의의 신이 의지를 전해왔기에 그 생각은 끊겼다.

[너의 역할은 그 무도한 자들을 처리하고, 나의 천칭이 영혼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까지 돕는 것까지다.]

“천칭?”

여신의 천칭이 누구인지 기억하고 있던 칸이 미간을 좁혔다. 그 미친 광신도 년이랑 동행하라고? 아니, 애초에 그 여자가 이쪽에 있단 얘기인가?

제5막, 다르킨 페레야스가 제국의 영토를 침범하는 순간. 성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나타나는 네임드 NPC인 여신의 천칭은, 칸의 입장에서 그닥 반갑지 않은 조력자였다.

그녀의 몸에 강림한 정의의 신이 플레이어를 끔살하는 이벤트가 이따금 발생하는 데다가, 플레이어를 이단자 취급하며 적대하기에 제대로 된 동료로 영입이 불가능한 까닭이다.

동시에 무작위 알고리즘으로 날뛰는 변수 덩어리여서, 플레이에 방해가 될 지경이었지.

“…당신의 검인 아리에스는 어쩌고?”

[그 아이는 지금 본산에서 나의 신성을 받아들이고 있다. 다른 아이들이 그걸 돕고 있지.]

“아, 그러시군…….”

뭐, NPC 각성 이벤트 그런 건가? 어쨌거나 그에게 도움을 주기로 약속한 아리에스가 강해지는 건 반길 일이다. 다르킨 때는 버스를 못 타봤으니까.

“영혼을 인도하기 위해 그 천칭과 동행해야 한다는 건 알겠소.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게 있소만. 살아있는 사람의 영혼을 그대로 뽑아내는 게 주문 따위로 가능한 짓거리요? 고대의 마법사들도 영혼을 다루지는 못했다고 들었소.”

마탑의 마구스, 제롬은 살아있는 시체에 관해서는 자세한 언급을 피했었다.

마탑의 연구를 소상히 밝히는 건 서로에게 위험부담이 크다는 이유였다. 다만 신화시대와 관련한 문제라는 것만은 분명히 밝혔었다.

그 말인즉, 마탑은 ‘살아있는 시체’가 영혼과 관련한 문제임을 짐작했거나, 이미 증명을 마친 것이다.

‘고대의 주문에 가장 해박한 집단이 바로 마탑이니, 당연히 신화시대와 연관이 있을 거라 생각했겠지.’

“영혼을 다루는 건 악마나, 극소수의 마녀들에게나 가능한 짓거리라 알고 있소. 그것들도 산 채로 영혼을 뽑아내는 건 불가능하고.”

[어린 대전사야. 전사신의 후손이라 생각하기 힘든 너의 지식에는 놀라게 되는구나. 다만 분명히 말해주자면, 주문으로 영혼을 다루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당장 네 허리에 있는 마검 또한 검에 영혼을 가둬놓은 물건이니까. 물론, 그 주문의 출처가 초월자. 그것도 상당한 격을 지닌 존재에게서 나온 것이라 가능한 것일 테지만.]

“예를 들자면…. 용 같은 초월종에겐 그닥 어렵지 않은 일이라는 건가?”

정의의 신은 그에 관한 언급을 피하려는 것처럼 침묵했다. 대답하기 싫다는 건지, 아니면 언급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건지….

“그럼. 그 영혼이란 걸 해방하려면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뭐라도 단서는 없는 거요?”

[그것은 머지않아 너의 손에 들어올 것이다. 내가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말이다. 어린 대전사. 너의 그 용력이 필요한 순간이 왔을 때, 도망치지만 않는다면.]

은근한 도발처럼 들리는 말이다. 칸은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지만.

“일단 전부 알겠소. 내 무력을 빌려서 일을 해결하고 싶다는 거지. 그럼 내게 뭘 줄지는 생각해두셨소?”

묘한 웃음소리와 함께 베르타의 손이 움직인다. 노인의 손가락이라 믿기 힘들 만큼 매끄러운 그녀의 손끝이 칸의 허리춤에 걸린 도끼를 향했고, 순백의 빛줄기가 쏘아졌다.

칸은 순간 멈칫했으나, 얌전히 그 빛줄기를 받아들였다.

[필멸자의 손길이 닿은 무구 치고는 나쁘지 않다마는. 신의 사도가 손에 쥘 만한 물건은 아니지. 다음에 전사신을 만난다면, 너는 사도의 품격에 걸맞은 무구부터 부탁하라.]

칸은 그녀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아이템 정보를 확인했다. 정의의 신의 신성이 깃들어 내구성과 무게가 강화되었다는 문구가 추가되어 있었다.

‘끝내주는데.’

[그 흑마법사에게서 구한 물건 또한 정화해주마. 그리고 너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끝마친다면, 성과에 따라선 권능의 조각을 내어줄 것이니.]

“화끈하시군. 얼굴도 본 적 없는 전사신이랑은 다르게 말이야.”

[입에 발린 소리라도 듣기는 좋구나. 전사신이 들었다면 더 유쾌했겠지. 그 물건은 어찌 사용할 요량이었느냐. 사악한 손길이 닿은 물건이니, 차라리 지금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문제가 생긴다면 곧장 해결해 줄 터이니.]

이렇게 아낌없이 베푸는 그녀를 누가 무자비한 징벌자라 매도할까.

만약, 그런 무도한 놈이 있다면 자신이 이 성스러운 도끼로 두 쪽을 내주리라. 칸은 그렇게 결심했다. 그도 그럴게….

‘어차피 시키지 않아도 했을 일인데, 이만큼 퍼주는 호구……. 여신이 어디에 있겠냐고.’

*

*

*

“와아. 이십 년이요? 제가 태어난 게 이십 년이 안 됐다고 들었는데, 대단해요…!”

“으허허허! 별것 아니야. 나보다는 이쪽 친구들이나, 안에 들어간 형씨가 더 대단하지!”

“정말요?”

구불구불 물결치는 적갈색 머리카락과 똘망똘망한 눈동자가 특징적인, 엘레나라는 이름의 소녀가 본인의 커다란 눈망울을 번뜩이며 물었다.

“저기 아가씨는 용병 조합에서도 꽤 지위가 높은, 젊은이들 중에서는 적수가 드문 친구란다. 솔직히 제대로 붙으면 나도 자신이 없을 정도야. 창 솜씨가 엄청나거든!”

“그래요? 그냥 봤을 땐 부잣집 아가씨처럼 생겼는데!”

“흐흐. 마냥 틀린 소리도 아니지. 엘드렛은 왕국에서도 이름 높은 기사 가문이니까. 돈도 엄청나게 많기야 하겠지.”

“와아….”

“쓸데없는 소리를.”

엘레나가 감탄을 토하고, 제멋대로 떠들어대는 론에게 혀를 찬 마이아가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엘레나의 관심은 또 다른 일행, 자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연배로 보이는 얀에게로 향했다.

“그럼 저 사람도 엄청 대단한 사람인가요?”

“음. 굳이 따지자면 저기 들어간 형씨를 빼고는, 저 친구가 가장 귀중한 전력이라 할 수 있지. 무려 마법사. 그것도 마탑의 마구스가 거둔 마법사니까. 어디 길가에 놓인 떠돌이들이랑은 급이 다르더라고.”

“그, 그 정도는 아닐 거예요.”

“얀. 자네는 너무 자신감이 부족해. 당장 왕국 귀족들이 고용한 마법사랑 비교해도, 자네 수준의 마법사가 드물 걸세. 용병 마법사들이야 비교할 가치도 없고.”

면전에 대고 쏟아진 칭찬에 얀이 멋쩍은 듯 웃었다.

“그분들이랑 전 방향이 다른 거 아닐까요…. 저 같은 경우엔 처음부터 전투에 나설 때를 대비해서 주문을 익히는 게 아니니까요. 실제로 싸움이 생기면 그분들이 더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

“그게 바로 모르는 소리라는 거야. 자네가 숨 쉬듯 뽑아내는 주문 하나를 위해, 떠돌이들은 온갖 호들갑을 다 떤다고. 마탑과 마탑 외 마법사들의 수준 차이는 자네 생각보다 더 심해.”

론의 단정에 얀은 오히려 더 아리송하단 얼굴이었다. 사실 어쩔 수 없는 반응이기는 했다.

평생 그가 봐왔던 마법사라곤 자기 스승이나, 마탑의 동문들, 그리고 이따금 교류하는 엘프 마법사들뿐이었으니.

하물며 제국을 벗어나 왕국에서 처음 상대한 마법사가 바로 ‘로렌의 마녀’인 데다가, 그다음에는 용의 비늘을 자기 몸에 이식한 흑마법사 다르킨 페레야스였다.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안 그래도 심약한 성정의 얀이, 저절로 겸손을 장착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마탑! 그럼 제국에서 오신 건가요? 혹시, 만신전 교회의 본산에 가보신 적이 있나요?!”

그러나 엘레나의 관심은 ‘얀의 마법이 얼마나 대단한가’가 아닌, 그가 제국에서 왔다는 쪽에 꽂혀 있었다.

어찌나 열렬한 관심을 내비쳤는지, 얀이 평범한 소녀에게 기가 눌려 뒷걸음질 쳤을 정도였다.

“그, 본산에는 제가 가 본 경험이 없네요…. 고위 사제님이나 성기사 분들은 뵌 적이 있긴 하지만요.”

“아, 그래요….”

그러나 엘레나의 관심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고위 사제나 성기사만 해도 평범한 신도들에겐 평생 한두 번 볼 기회가 있을까 말까 한 귀한 존재들이건만,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시큰둥했다.

“아쉽게 됐네요. 저는 평생 이 수녀원에서만 지내서, 본산에 가보는 게 꿈이거든요.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라고, 친구한테 들었어 가지구.”

“친구? 제국인 중에 아는 분이 있으신가 봐요?”

“네. 잠깐 이곳에서 지냈던 애가 있었어요. 제 또래지만, 정말 대단한…….”

그렇게 말하는 엘레나의 눈이 반짝거렸다. 대체 그 친구의 정체가 뭐길래, 고위 사제나 성기사의 얘기를 할 때도 시큰둥하던 소녀가 눈을 번뜩이나 의아할 만큼.

“그래서. 아직 얘기를 듣지 못한 일행분이 남았죠? 베르타 원장님이랑 같이 안에 들어간…. 야만인 말이에요.”

“아, 그랬지. 사실 형씨와 관련해서는 가장 할 말이 많기도 하지만, 막상 설명할 게 많이 없는 편이지.”

“어째서요?”

“……그게 말이야.”

비밀 얘기라도 속달거리듯 목소리를 낮춘 론이 혹시나 칸이 듣지는 않을까 주변을 둘러보곤 말했다.

“사실 나는 형씨가 거인의 후손…. 뭐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그동안 보여준 모습이 워낙 허무맹랑한 것들이라, 나로서는 뭐라 설명을 덧붙이기가 어려워.”

“거인이요?”

“그래, 거인. 거인들은 주먹으로 산을 부수고, 거대한 성벽을 발길질로 무너뜨렸다지. 내 생각에 형씨라면 성벽 정도는 주먹질로 박살 낼 수 있을 것 같다니까.”

엘레나는 론의 말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기 힘든 표정으로 짐짓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방긋 웃는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말이 안 되잖아요!”

“커흐흠. 얘야. 너가 형씨가 싸우는 걸 못 봐서 그런 거…….”

“에이, 참. 어리다고 그렇게 놀려먹을 거면 그냥 갈게요!”

엘레나는 그렇게 말하고선 정말 등을 돌려 떠나버렸다.

그리고 등을 돌린 엘레나의 표정은, 다른 수녀들과 달리 혼자 살갑게 다가왔던 순진무구한 소녀의 것이 아니었다.

‘거인의 후손……? 같잖은 소리를.’

무표정한 얼굴에선 기이한 열기가 감돌았다. 똘망하던 눈망울에선 심상치 않은 기세가 흘렀고, 평범한 소녀의 몸짓은 이제 수련을 거듭한 전사의 그것으로 변해갔다.

‘만신전의 신들께서 세상을 창조하며 낳은 마나의 은혜를 타고나지 못한 열등종. 게다가 실존조차 불분명한 야만신을 숭배하는 이민족 따위가, 신을 섬기는 종복들에게나 주어질 법한 힘을 가졌을 리가 없지!’

그것은 아주 당연한 상식이고, 진리였다. 적어도 엘레나에게는 그랬다.

‘아리에스. 네가 야만인 이교도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해서 어떤 자인가 알아보려 했는데. 미혹이 너의 눈을 가리기라도 한 걸까. 어떻게 저런 사기꾼들을……. 베르타가 말한 재액은 바로 이 이교도 무리들을 뜻하는 거였어.’

그녀는 생각했다.

베르타와 독대하고 있는 야만인을, 신께서 거주하는 이 신성한 성역에서 쫓아내야겠다고. 더 이상 더러운 것이 묻지 않게….

그때였다. 뭔가 믿기 힘든 광경을 목격한 사람처럼, 엘레나의 눈이 휘둥그레 커진 것은.

“이 기운은…!”

수녀원 내부를 거닐던 엘레나의 걸음에 다급함이 묻어났다.

몸가짐이 흐트러지지 않는 최대한의 속도로 내달린 그녀가 멈춰선 곳은, 베르타와 칸이 대면하고 있을 베르타의 방이었고 엘레나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활짝 열린 문 너머. 천칭과 검을 양손에 쥔 여인의 반투명한 형상이, 잿빛의 야만인을 감싸 안고 있었다. 또한 엘레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야만인의 심장에 자리한, 그녀가 모시는 여신의 신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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