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화. 호드 (1)
칸은 무척 당혹스러웠다.
정의의 신의 배려로 피의 그릇을 당장 사용하기로 결정한 뒤, 눈알 크기의 붉은 구슬을 망설임없이 입 속에 털어넣었다.
그러자 물에 탄 가루처럼 스르르- 녹아든 피의 그릇이 오른쪽 가슴에 자리했다. 그 직후 극심한 고통이 뒤따랐다.
피의 그릇에 담긴 저주와 흑마력이 발동한 것이었다.
[어딜.]
정의의 신이 쏜 빛줄기가 닿기 무섭게 통증이 사라지긴 했다만, 문제는 그 이후에 벌어졌다.
[이 더러운 잡것이─!]
여신의 노호성이 우레가 되어 칸의 머릿속을 뒤흔든다. 그것만으로도 죽을 맛인데,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탕녀의 신성이 느껴지는구나. 감히, 나의 손길이 닿은 물건인 줄도 모르고 말이야.]
‘아에카리스!’
칸의 심상에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악마, 그것도 대악마의 적자 중 하나인 아에카리스가 피의 그릇을 매개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런 씹……!”
욕지꺼리를 내뱉은 칸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버티기 힘들었다. 오른쪽 가슴에 자리한 피의 그릇을 두고, 두 초월자의 힘이 충돌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쿵─! 쿵─! 쿵──!
그리고 점차, 칸의 오른쪽 가슴이 검게 물든다.
[흐흐. 만신전의 탕녀야. 화신체의 안위를 염려하는 것이냐? 겨우 그정도로는 내 권능의 조각을 심어둔 매개체를 능가할 수 없다─!]
베르타의 몸을 빌려 강림한 정의의 신, 피의 그릇 깊숙한 곳에 자신의 권능을 조각내어 심어둔 아에카리스. 두 초월자 간의 힘겨루기에서 아에카리스가 잠깐이나마 우위를 점한 것이었다.
[너. 건방진 필멸자야! 네가 이 그릇을 취하는 순간만을 고대해왔다! 오로지 너의 육체를 차지하기 위해─! 전사신의 대전사를 그릇으로 만든 하수인이라. 미들랜드를 피로 적시기엔 모자람이 없음이다!]
‘게임에서 이딴 이벤트는 없었는데!’
대체 어떤 이유로 피의 그릇이 아에카리스의 성유물 비스무리한 물건이 되었는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꼼짝없이 육체를 빼앗길 거란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다만 칸의 힘으론 저항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는 뭘 부수고, 쪼개고, 찢는 것에나 능하지. 이런 영역의 싸움에선 그야말로 무력했다.
“어떻게 좀. 해보시오…! 그렇게 자신하지 않았나……!”
결국 그에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어서 이 엿 같은 아에카리스의 힘을 소멸시켜달라 정의의 신을 닦달하는 것뿐이었다.
[겨우 대악마도 아닌, 그 일부에 불과한 잡것아. 감히 다른 신도 아닌 나의 앞에 모습을 보여? 제정신이 아니로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칸이 재촉할 필요도 없었다. 악마가 자기 앞에 뻔뻔히 나타난 것에 정의의 신이 활화산과 같은 분노를 터뜨렸다.
좁은 방 안에 갑작스레 나타난 순백의 광채가 눈부신 빛을 발한다. 태양을 가까이서 보는 듯, 시야가 금새 먹먹해졌으나 뜨겁지는 않았다. 오히려 칸의 몸을 감싸듯 따사로웠다.
[신성의 일부를 강림시키다니. 드디어 네년이 미쳤구나!]
[나는 선악을 판가름하는 천칭의 여신이요. 또한 악을 징벌하는 검의 여신이라. 너, 더러운 대악마의 적자야. 나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걸 후회해라!]
[이 만신전의 탕녀가…!]
쿵…! 쿵…!
‘아주, 쌍으로 지랄들을!’
정의의 신이 강림시킨 신성 탓에 앞도 안 보이고, 귀에 들리는 거라곤 오른쪽 가슴에서 두 초월자가 충돌하며 생겨나는 소리뿐.
게다가 간헐적으로 두 초월자가 칸의 머릿속에서 분노의 의지를 터뜨리는 탓에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과연 이 대치가 언제까지 이어질까. 무력하게 기다려야 하는 입장에 놓인 처지라 더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치이이익.
오른쪽 가슴에서 생겨난 작열감에 칸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진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과거 다르킨의 제자에게서 빼앗은, 아티팩트 중에선 최하품에 가까운 물건. 심원의 방패가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망가지고 있다는 징조였으니까.
그때 칸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번뜩였다.
이 상황을 타개함과 동시에 가장 큰 이득을 챙길 수 있는, 어쩌면 도박에 가까운 한 수.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
“아티팩트에 신성을 불어넣으시오! 이 악마가 피의 그릇을 매개체로 삼았던 것처럼……!”
대부분의 설명이 생략된 말이었으나, 정의의 신은 초월자다운 통찰력으로 칸이 생각한 바를 정확히 읽어냈다.
[이런……!]
악마, 아에카리스가 당혹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칸의 노림수가 그만큼 효과적이었다는 뜻이다.
아니, 오히려 상상 이상의 결과를 초래했다.
[이 탕녀가! 신성의 조각을 필멸자 따위에게 내리려는 것이냐! 제정신이 아니구나!]
[나는 정의의 신이다. 고작 이 정도의 손실로는 나의 신성을 훼손할 수는 없으리. 다만 너는 그 역겨운 하수인들로 하여금, 운신의 자유를 내어주던 더러운 위장을 일부 상실할 것이니. 이는 나의 아이들이 너의 주구들을 몰살할 단초가 될 것이다!]
둘의 대화를 통해 칸은 정의의 신이 대체 무슨 미친 짓을 저질렀는지 대강 추측하는 게 가능했다.
그녀는 칸이 제안했던 아티팩트를 매개체 삼아 아에카리스의 힘을 억제하는 수준을 넘어, 아예 강림시킨 신성의 조각을 아티팩트에 새겨넣고 있었다.
게임에선 초반부에나 사용하고 버릴 하급의 아티팩트가, 신의 성유물로 화하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피의 그릇을 통해 전해지던 아에카리스의 의지 또한 점차 소멸했다. 정의의 신이 새겨넣은 신성의 조각이, 피의 그릇에 내재된 아에카리스의 힘을 멀끔히 소멸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그 결과 칸을 괴롭히던 고통이 줄어들고, 머릿속을 꽝꽝 울리던 아에카리스의 의지가 이젠 모기 소리에 불과할 만큼 희미해졌다.
이윽고, 더 이상 손 쓸 도리가 없음을 깨달은 아에카리스가 격노하며 경고를 쏟아냈다.
[너, 만신전의 탕녀야. 이것이 너의 승리라 여기지 마라! 나는 머지않아 이 미들랜드에 강림해 모든 것을 먹어치울 것이니! 너희 만신전은 이를 막을 수 없을 거다! 그리고 그때. 이 필멸자는 반드시 나의 하수인으로 삼아 미들랜드에 재앙을 흩뿌리게 할 것이다!]
그것이 아에카리스의 마지막 발버둥이었다.
악마의 영향력이 완전히 소멸했음을 인지한 칸이 육체의 통제권을 되찾았고, 방 안을 환히 밝히던 여신의 신성 또한 심원의 방패…. 아니, 이제는 여신의 성유물이 된 그것과 완전히 융합했음을 확인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시작된 두 초월자의 힘겨루기가, 드디어 끝이 난 것이었다.
“시발. 진짜 못 해 먹겠네.”
고래 싸움에 등이 터져 죽을 뻔한 칸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지나치게 압도적인 사건을 겪고 나니, 꿈을 꾼 것처럼 머릿속이 멍했다.
벌컥-!
누군가가 방 문을 열어젖히기 직전까지 인기척을 감지하지 못했을 정도로-.
“아, 아아……! 정의의 신이시여!”
이번엔 또 뭐야. 등 뒤에서 들려오는 환희와 쾌락에 젖은 탄성에 칸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가, 얼굴을 왈칵 구겼다.
그곳에 있는 건 굽이치는 적갈색의 머리카락과 똘망똘망한 눈망울이 인상적인 소녀, 엘레나였다.
‘이 정신 나간 여자가 왜 여기서…….’
틀림없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저 광기 어린 눈동자와 넋이 나간 얼굴로 부르르- 떠는 몸짓은 너무나 익숙했다.
다르킨 페레야스가 본격적인 보스로 등장하는 제5막에 등장하여, 미친 듯이 날뛰는 민폐 덩어리 네임드 NPC. 여신의 천칭 엘레나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개 난장판이네, 진짜….’
*
*
*
대악마의 적자, 아에카리스.
그 존재에 대해서 칸이 아는 것들은 꽤 많은 편이었다.
일전에 다르킨이 썼던 흑마법 아에카리스의 구덩이가 바로 놈의 권능에서 비롯된 것이라든지, 놈이 지옥에서 거느리고 있는 악마 부산물들이 얼마나 강력한지, 놈 자신은 또 얼마나 강한지 말이다.
‘실제로 나중에 등장하니까. 싫어도 알 수밖에.’
놈이 마지막에 미들랜드에 강림하겠다 떠들어댄 것은 단순한 허언이 아니란 소리다.
만약 칸이 메인 스토리를 열심히 따라갔더라면, 언젠가는 미들랜드에 강림한 놈과 싸웠어야 했을 터였다. 그것도 목숨 하나로 말이다.
‘문제는… 메인 스토리랑 별개로 놈과 엮이게 됐다는 거지.’
설마 피의 그릇에 놈이 제 권능을 조각내 숨겨뒀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게임에서도 없던 이벤트였던 데다가, 정의의 신조차 놈이 제힘을 드러내기 전까진 알아채지 못했을진대.
‘그래도 썩 나쁘지만은 않은 상황이야.’
정의의 신이 자기 신성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으로, 아에카리스 또한 자신의 권능을 일부 상실했다.
그게 정확히 어떤 결과를 내놓을지는 지켜봐야겠으나, 놈이 하수인들에게 하사하는 주문이 대체로 까다롭기 그지없음을 고려하면 분명 호재였다.
게다가…….
[심원의 성흔]
─정의의 신의 신성과 결합한 고대의 아티팩트. 미들랜드 역사를 통틀어 드문 사례이며, 일종의 성유물로 화했다.
─정의의 수호 성역 :: 착용자와 착용자가 지정한 대상을 보호하는 성역을 전개한다.
─흑마력 저항 :: 흑마력과 관련한 모든 부정적 효과에 대한 저항력이 생긴다.
[탐욕의 그릇]
─다르킨 페레야스가 일평생의 노력을 다 바쳐 만들어낸 역작. 피의 그릇에 잠재했던 아에카리스의 권능, 그 편린이 남아 만들어진 우연의 산물.
─혈정 :: 피를 흡수해 저장하는 게 가능해진다.
─아에카리스의 주머니 ::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저장하는 아에카리스의 위장의 일부를 활용할 수 있다.
─체력 +4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호화로운 옵션의 장비를, 한 번에 두 개씩이나 얻었다.
하나는 ‘심원의 방패’가 정의의 신의 성유물처럼 변한 것이고, 또 하나는 피의 그릇에 아에카리스의 권능이 추가됐다.
양쪽 다 지금 시기에 입수하는 것이 불가능한 수준의 장비였다. 적어도 제3막 후반부에는 들어서야 가능하리라. 장비의 출처가 가진 특수성을 생각하면, 그 이상의 가능성을 품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아에카리스의 주머니라는 옵션. 내가 상상하는 그게 맞다면…….’
나중에라도 실험해 보면 되겠어. 악마의 권능을 실험하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았기에, 일단 뒤로 미룬 칸이 처음 들어왔을 때와 달라진 게 없는 장내를 살폈다.
정의의 신은 아에카리스를 물리친 게 흡족한 듯, 웃음소리와 함께 베르타의 몸에서 떠났다. 그 여파로 안색이 창백해진 베르타는 눈을 감고서 좀처럼 깨어나질 못했다.
그리고 집요하게 자신을 노려보는 시선이 또 하나.
“뭐냐.”
“…….”
두 초월자의 힘겨루기가 다 끝났을 즈음에 갑자기 쳐들어온 소녀. 아리에스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연배와 순진무구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내면은 미친 광신도 그 자체인 여신의 천칭 엘레나가 말도 없이 노려보는 상황은 보통 곤욕스러운 게 아니었다.
하물며 그 소녀의 시선이 자신의 오른쪽 가슴, 정확히는 심원의 성흔과 탐욕의 그릇이 자리한 위치였기에 더욱더.
‘성흔 때문인가? 아니면 탐욕의 그릇에서 악마의 흔적이라도 읽은…….’
어느 쪽이건 일이 귀찮게 흘러갈 것은 분명했다.
게임에서 그녀가 보여준 광기 어린 믿음을 생각하면, 감히 야만인 이교도 따위가 여신의 성유물을 소유하는 걸 가만 지켜보지 않을 가능성이 클 터였다.
비슷하게, 악마의 권능이 깃든 물건을 가슴에 박아넣은 꼬라지를 그냥 넘어가지도 않으리라.
물론, 눈앞의 그녀는 게임에서 본 여신의 천칭과 완전 다른 존재나 다름없었다. 아직은 사도가 되지 못한, 솜털도 제대로 안 빠졌을 것 같은 꼬맹이 아닌가.
‘그래. 미래의 광신도도, 어린 시절엔 순수한 꼬마일 수도 있잖….’
“아아…! 신께서 선택한 전사를 의심하고, 욕보인 저를 부디 벌해주세요!”
이마를 바닥에 찧을 기세로 부복한 엘레나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용서를 빌었다. 마치 신의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죄인처럼.
환장하겠네…. 지구에선 아직 학생에 불과할 소녀를 무릎 꿇린 30대 아저씨.
그야말로 뉴스에 나올 법한 광경이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은 칸이 어서 일어나라 말하려던 그때, 베르타가 눈을 번쩍- 떴다.
“…….”
“…….”
칸과 베르타의 두 눈이 마주치고, 기묘한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벌해주시옵소서─!”
엘레나의 비통한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