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화. 호드 (2)
“내가 시킨 짓 아니다.”
반사적으로 나온 변명아닌 변명이었다. 현대인의 감성이 남은 칸에게 있어선, 어린 소녀의 사죄를 받고 있는 이 상황이 자신의 잘못처럼 느껴졌다.
그것도 보호자라 할 수 있는 베르타의 앞에서….
“엘레나. 그만 일어나렴.”
“그, 그래도. 베르타라면 느껴지잖아요? 저분의 가슴에 새겨진 여신의…….”
“엘레나.”
끄응. 베르타의 단호한 재촉에 엘레나가 쭈뼛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도 흘깃흘깃 칸의 눈치를 살피는 게, 진심으로 칸에게 큰 죄를 저질렀다 생각하는 듯했다.
정작 칸 본인은 그녀가 왜 저러나 알지도 못했다. 아니, 그전에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상황은 지켜봤습니다.”
다행히. 베르타는 여신을 강림시킨 와중에도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번거롭게 이런저런 설명할 필요가 없음에 칸이 안도의 한숨을 쉬곤, 지끈거리는 이마를 어루만졌다.
“그나마 다행이군. 당신마저 신의 선택이니, 뭐니, 헛소리를 떠들어댔으면 정신이 나가버렸을 테니.”
“아니요. 여신께서 당신을 선택한 건 분명한 사실이랍니다. 그 증거로, 당신의 가슴에 남은 여신의 신성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걸요.”
“…자세히.”
베르타의 말에 칸은 안 그래도 지끈거리던 머리가 더 아파왔다. 여신의 사제인 그녀들에게만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는 걸까. 베르타의 어조가 영 심상치않았다.
“사제나 성기사들도 여신의 힘을 빌려와 신성 주문을 쓰는 건 마찬가지잖소.”
“평범한 신도들에게 주어지는 신성력은, 만신전의 신들께서 당신의 신성을 필멸자라도 다룰 수 있게 열화시킨 것에 불과하답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대단히 강력한 힘이지만…….”
“신성은 달라요. 신격을 지탱하는 근원 그 자체니까요. 한낱 필멸자…. 아, 여신께서 선택한 전사께서 평범한 필멸자는 아니겠지만요! 본래 필멸자에게 주어질 힘이 아니죠. 당연히 그걸 가지고도 멀쩡히 살아있는 전사님도 대단하구요!”
베르타와 엘레나가 앞다투어 설명한 내용을 머릿속에 집어넣은 칸이 미간을 좁혔다. 신성을 가졌다는 게 아무래도 보통 일이 아니었나 본데.
‘게임에 이런 설정은 나온 적이 없으니까. 내가 알 리가 있나….’
애초에 만신전 소속 인물들과 호의적인 관계를 맺은 것부터, 게임에선 없던 일이었다.
그런데 이교도로 취급받는 야만인의 몸뚱어리로 그 어려운 일을 해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 신성이라는 거. 아무나 기운을 감지하는 게 가능한 거요?”
“그, 그럴 리가요! 신성은 초월의 증거라고요? 평범한 필멸자는 존재를 느낄 수조차 없어요.”
“엘레나의 말이 맞답니다. 저나 저 아이는 본디 여신을 가까이서 모시는 존재들이니, 그분의 신성을 알아보는 것이 당연한 일. 아무나 당신의 가슴에 남은 신성을 알아볼 일은 없을 거예요.”
“…불행 중 다행이군.”
“부, 불행이라니. 신성은 초월자들에게만 허락된 힘인데…….”
“그래 봐야 어떻게 쓸 줄도 모르는 애물단지지. 오히려 이걸 노리고 귀찮은 놈들이 꼬일 거란 생각밖에 안 드는데.”
그 말에 엘레나가 입을 꾹 다문다.
칸의 추측이 정답이란 뜻이었다. 필멸의 격을 벗어나지 못한 존재가 여신의 신성을 가슴에 품었으니, 사악한 악마들이 이를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다.
게다가 엘레나는 모르고 있지만, 칸의 가슴에는 여신의 신성만 남은 게 아니었다.
대악마의 적자이자, 세상을 집어삼키는 악마 아에카리스의 권능 조각이 심원의 성흔 아래 자리했다.
다른 악마는 몰라도. 여신에 의해 권능을 일부 상실한 아에카리스와의 충돌은 예정된 미래일 터.
‘어쩌면, 그걸 예상하고 저질렀을 가능성도….’
칸은 흡족한 미소와 함께 퇴장한 여신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내심 이를 갈았다. 득템했다고 마냥 좋아할 게 아니었나.
“뭐가 됐든 당장 신경 쓸 일은 아니군. 일단 북부의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먼저겠지.”
“살아있는 시체를 말하는 건가요? 역시, 무도한 자들을 징벌할 전사로 여신께서 전사님을 선택한 거군요! 아아. 야만인들은 전부 잔악한 이교도라 생각한 저를 용서하세요…!”
“그냥 받은 게 있으니 하는 거다.”
물론,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칸은 진리의 추종자들을 찾아가 족칠 예정이었다. 과거의 후회와 스스로의 목표를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정의의 신은 그걸 모른다. 그렇기에 칸에게 이것저것 내어주면서, 해결을 부탁하지 않았던가.
그녀에게 뜯어낼 콩고물이 아직 더 남았으리라 생각되는 만큼. 정의의 신의 착각을 굳이 바로잡을 필요는 없으리라.
‘그렇다고 정의의 용사 따위로 취급하는 건 사양이지.’
그 누가 2m가 넘는 근육질의 야만인을 보고 정의의 용사를 떠올리겠냐만은, 적어도 이 광신도 계집애는 그럴 용의가 넘쳐나는 듯했다.
“그러니까 전사님이니, 여신이 선택한 전사니, 거창한 호칭은 때려치워라. 그냥 칸이라고 불러라.”
“칸님!”
“그놈의 경칭은…. 됐다.”
상대하는 것만으로 정신력이 쭉쭉 깎이는 기분에 칸은 자리를 파하기로 했다. 마침 베르타가 강신의 여파로 극심한 피로를 호소했기에 칸은 엘레나와 같이 방을 나섰다.
‘이 꼬맹이도 어떻게 떼어내는 게 좋을 텐데….’
“왜 그러시나요? 제가 뭔가 거슬릴 만한 짓이라도…….”
“아무것도 아니다.”
잠깐 쳐다봤다고 호들갑을 떨어대는 그녀의 모습은 피곤을 유발하는 동시에, 뭔가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만신전 교회의 신도들 중에서도 각별히 신앙심이 깊은 이들과 비교해도 뭔가가 다르다고 해야 하나.
아마 정의의 신이 죽으라면, 즉시 검으로 자기 목을 쑤셔대지 않을까…. 칸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자결하는 소녀의 모습을 상상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정의의 신이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닐 텐데. 왜 그렇게 유난을 떠는 거지?”
“네?”
“너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단순 신앙심이라 치기엔 과해. 너한테 그런 자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알고 있답니다? 제가 이상하다는 것쯤은.”
칸은 무덤덤한 소녀의 대꾸에 흠칫 놀랐다. 싱글거리며 웃는 입꼬리와 달리, 말로 설명하기 힘든 빛깔로 반짝이는 눈동자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람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정말 광적으로 무언가를 숭배하지 않으면,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요.”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그야말로 끔찍한 말이었다.
고작 스물 언저리의 소녀가 뱉은 말이기에 더욱더. 대체 어떤 일들을 겪고 저렇게 비틀렸을까. 칸의 상상력으론 떠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엿 같은 중세.’
아리에스도 그렇고. 이 광신도 소녀도 그렇고. 정의의 신은 특이한 꼬맹이들을 데려다 사도로 삼는 취미라도 있는 건지….
“…알고 있으면 됐다. 다만 너무 귀찮게 굴지는 마라. 특히 날 대단한 사람처럼 떠받드는 건 금지다. 적어도 내 앞에서는.”
“왜요? 기왕 신성을 품게 된 거. 위업을 세우고, 명성을 퍼뜨려서 진짜 초월을 노려보는 것도 괜찮지 않나요?”
“난 그런 거 관심 없다. 귀찮아.”
그리고 엘레나가 착각하고 있는 듯하지만, 신성을 품은 건 칸이 아니라 지금은 성유물로 변한 아티팩트 심원의 방패다.
정작 칸 본인은 신성은커녕, 여전히 마나조차 다룰 수 없는 몸이었다.
“오. 형씨. 볼일은 다 보셨나? 활기찬 아가씨도 같이 왔구먼.”
“볼일은 끝났다.”
“그럼 이제 어쩔 건가? 예정대로 당장 떠날 건가?”
“아니. 당분간은 남을 거야.”
“잉? 어째서?”
북부에서 같이 행동할 일행들도 알아야 하는 일이기에, 칸은 방금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방금까지 정의의 신이 강림했다거나, 자신이 그녀의 신성과 악마의 권능을 갖게 되었다거나 하는, 쓸데없이 혼란만 가져올 정보들을 빼고 베르타가 의뢰를 했다는 식으로 적당히 거를 건 걸러낸 형태의 설명을.
“아, 그리고 베르타가 이 도시에 재액이 닥쳤다는 말도 했다.”
“재액…? 닥쳤다는 건. 벌써 도시 안에 문제가 발생했단 소리인가?”
“아, 그 부분은 제가 설명하는 게 좋겠네요!”
“…그래라.”
싱글거리는 얼굴로 앞에 나선 엘레나의 행동에 론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엘레나가 머지않아 여신의 천칭이 될 소녀이며, 범인의 정신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든 가치관의 소유자임을 모르는 까닭이다.
“계시는 여러분들이 수녀원을 방문하기 전에 내려진 거예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그 재액이 아닐까 의심했었는데….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구요!”
“어어……. 그거 다행이구먼.”
“그래서 말인데. 오늘 도시에 들어오면서 뭔가 본 게 없나요? 저희는 수녀원을 잘 안 벗어나는 편이라 소식에 어둡거든요.”
“음……. 특별할 건 없었네. 아, 근처 도시나 마을에서 몰려온 건지 피난민이 꽤 많았네. 도시의 상단이 짐마차를 잔뜩 가지고 복귀하는 것도 봤지.”
둘의 대화를 적당히 흘려들으며, 칸은 몸 상태를 점검했다. 어쨌거나 탐욕의 그릇의 효과로 체력이 상승했으니, 달라진 몸 상태에 적응할 필요가 있었다.
[레벨 25]
[근력 : 60] +1
[민첩 : 33] +2
[체력 : 35] +6
[지능 : 2]
비록 아이템의 효과라지만, 드디어 체력이 40을 넘어섰다. 지나치게 높은 근력에 비해 처지는 건 여전하지만, 엄청난 성장임이 틀림없었다.
애초에 스탯을 이만큼 올려주는 장비 자체가 무척 귀했다. 다르킨 페레야스가 괜히 제5막의 보스가 아니다. 드랍템의 성능부터가 차원이 달랐다.
‘이만하면, A등급 스킬을 쓰고도 여력이 조금은 남으려나…….’
물론, 현재 칸에게 있어 필살기나 다름없는 ‘끓어오르는 힘’을 초장부터 쓰는 게 아닌 이상. 보통은 스킬의 여파로 빈사 상태에 빠질 게 분명했다.
게다가 근력 스탯이 2배로 상승하는 이상, 체력 스탯의 부족함은 언제고 다시 문제가 될 터.
‘근본적인 해결법을 찾건, 가진 것들로 어떻게든 해결을 보건, 어쨌든 해결은 해야겠지.’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쪽을 꼽자면….
칸이 오른쪽 가슴, 또 하나의 심장처럼 자리한 탐욕의 그릇에 의식을 집중했다. 그러자 탐욕의 그릇에서도 반응이 돌아왔다.
“어……?”
얀이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칸이 일으킨 미세한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챈 것이다.
심약한 성정과는 달리, 마법사로서의 소양은 군계일학이라 할 만큼 특출난 천재가 얀이다. 괜히 마구스가 제자로 들인 게 아니라는 뜻.
그런 얀이 눈에 띄게 당황을 표했다.
“전사님. 그건……. 아니, 어떻게?”
아니, 경악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저, 전사님. 사실은 엄청난 마법사였던 건가요…? 아니, 야만인 분들은 마나가 없을 텐데. 대체 어떻게…….”
당연했다. 지금 칸의 주변에 생겨난 현상을 마법적으로 이해하고, 재현하기 위해선 마구스가 아닌 탑의 주인들이 직접 나서야만 할 테니.
오히려 마법의 재능을 타고난 얀이기에, 칸이 잠깐의 집중으로 실현한 기적에 더욱 경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게 마법으로 보이나?”
“아니요…. 마나의 흐름이 느껴지진 않아요. 집중하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희미한 변화…. 그럼 마법이 아닌 건가? 하지만, 마법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래, 어디 가서 악마로 몰릴 일은 없겠군. 혼란스러워하는 얀의 반응에 칸이 흡족한 듯 웃었다.
꿀렁─
그 웃음에 반응한 것처럼, 오른쪽 가슴팍 주변의 공간이 흐물텅 일렁인다.
일렁이는 공간은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듯했지만, 칸에게는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공간의 안쪽이 얼마나 되는지, 이걸 어떻게 작동시키고, 또 활용할 수 있을지가.
칸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걸쳤다.
‘아에카리스의 주머니…. 설마 이런 효과일 줄은 몰랐는데.’
설마, 이제 와서 인벤토리가 생길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