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야만전사-55화 (55/132)

#055화. 호드 (5)

일행은 칸이 말한 ‘호드’의 위험성을 몸소 실감했다. 그리고 어째서 아룡이 개체를 가리지 않고, 오우거와 비견되는 괴물로 분류되는지도.

“염병, 끝이 없네…! 이거 진짜 말도 안 되잖아!”

“아가씨! 뒤!”

“이런 씹─!”

칼날 늑대 두 마리를 창으로 꿰뚫어 죽인 마이아가 뒤로 물러나며 창대를 강하게 휘둘러쳤다.

시야의 사각을 노리고 접근한 고블린이 그에 얻어맞고 나뒹군다.

안도의 한숨을 내쉴 틈이 없었다. 땅에 내려앉기 무섭게 숨을 들이킨 마이아의 창이 불을 뿜었다. 쩌억! 쩌억!

창을 봉처럼 휘둘러 접근한 마물을 밀어낸다.

평소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을 터였다. 드워프가 만들어준 창의 위력과 마이아의 창술이 합쳐지면 고블린 따위의 마물은 일격에 쳐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마물의 숫자가 숫자였다.

“뒈져!”

콰드득!

날카로운 창촉이 마물의 급소를 관통하고, 손목을 비틀어 마물들의 숨통을 끊은 마이아가 거칠어진 호흡을 애써 가다듬었다.

‘끝이 없어….’

죽이고, 또 죽여도 다시 빈자리를 채우듯 몰려드는 마물들.

이후 이어질 전투를 생각해 체력을 온존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파도처럼 밀려드는 마물을 보면 무심코 힘이 들어가고 만다.

주로 조합의 규칙을 어긴 용병들을 상대하던 마이아에겐 낯선 형태의 전투였다.

“나랑 얀이 전열을 맡을 테니, 조금 쉬게!”

“쉬기는, 대체 어디서 쉬라는 겁니까…!”

기백에 달하는 마물을 상대하면서도 자잘한 부상조차 입지 않은 건, 그나마 론이 쇠망치를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일행의 선두를 지키고, 이따금 얀이 주문을 투사해 숫자를 줄인 덕분이었다.

‘무엇보다 저 괴물 같은 작자가 없었으면, 금세 전멸했을 거야….’

얀의 주문이 전방을 휩쓰는 걸 보며 호흡을 고르던 마이아가 시선을 흘겼다.

콰가가각! 쩌엉! 쾅─!

일행이 전투를 벌이는 곳보다 더 앞쪽.

마물의 파도 너머로도 확연한 존재감을 자랑하는 거구의 야만인이 보였다.

드워프제 도끼와 붉은 마검이 번뜩일 때면 마물들이 육편이 되어 휘날리고, 굉음과 함께 핏물과 먼지가 뒤섞여 용오름을 일으킨다. 그야말로 인간을 벗어난, 초인의 전투.

그녀는 확신했다. 칸이 혼자 쳐죽인 마물의 숫자가, 일행의 전부를 합쳐도 훨씬 많으리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황이 지지부진한 것은, 마물의 규모가 상상 이상으로 많기 때문이었다.

‘아니, 우리가 발목을 잡고 있는 건가….’

으득.

마이아가 뿌득 이를 갈았다.

기사 가문의 차녀로 태어난 그녀는, 혈육들 사이에서도 빼어난 재능을 타고난 편이었다.

다만 아르곤 왕국의 귀족가에선 여인의 몸으로는 제아무리 큰 재능을 타고나도 한계가 존재했다. 그래서 용병이 됐고, 총지부장에 눈에 들어 나름의 성과를 얻었다.

엘드렛 가문의 체계적인 훈련으로 재능을 갈고닦은 마이아였다. 용병들의 어설픈 칼질로는 대적 자체가 불가했다.

거기에 총지부장의 권위가 더해지면서 그녀는 실패를 모를 정도로 성공가도를 이어나갔다.

‘제기랄……!’

그런 마이아가 처음으로 실패를 겪고, 절망하게 만든 것이 바로 참수자… 칸이었다.

북부에서 큰 사건 사고를 몰고 다니는 야만인과 접촉해보라는 총지부장의 명령.

그녀는 문답무용으로 참수자라 불리는 야만인에게 덤볐고, 완벽하게 패배했다.

싸움이랄 것도 없었다. 칸이 휘두른 도끼와 창을 맞댄 순간 그녀는 죽음을 느꼈고, 야만인의 가벼운 변덕으로 그녀는 살아남았다.

‘멋대로 덤비더니, 왜 갑자기 지리고 난리야 찝찝하게…. 내 취향은 그렇게 마이너하진 않은데.’

치욕과 공포를 끌어안고서 총지부장이 있는 본부로 복귀하고, 멋대로 전투를 벌인 죄로 근신 처분을 받았다.

이후 총지부장의 부탁으로 야만인이 동부로 떠난 뒤에 머리를 식히라며 바그너에 처박혔다.

일종의 유배였다.

“다 뒈져……!”

마이아의 창이 크게 호선을 그렸다. 거리에 들어온 마물들의 목이 쩌억- 벌어진다. 그녀가 정한 영역에 접근하는 마물의 말로는 그와 같았다.

창촉으로 급소를 찢고, 창대로 후려쳐 머리를 짓이기고, 이따금 창을 휘두를 수 없는 거리까지 접근한 놈이 있다면 건틀릿으로 머리통을 부쉈다.

“씨발! 다 덤비라고!”

바그너에서 칸과 재회했을 때, 마이아는 그때의 공포감과 다시 마주해야만 했다.

마치 칸의 수족이라도 된 것처럼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바그너의 지부를 내팽개치게 된 것은 그래서였다.

도저히 그의 뜻을 거부할 수 없었다. 참수자라는 존재가 그녀에게 새긴 공포는 그토록 강렬했다.

쒜에엑! 캉!

손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저항감에 마이아의 눈이 불을 뿜는 듯했다.

멧돼지를 닮은 마물, 디-호그가 그녀를 들이받기 위해 돌진해오고 있었다. 어지간한 날붙이로는 흠집조차 내기 힘든 괴물의 돌격은, 그녀와 같은 창사에겐 치명적이었다.

마이아의 대응은 간단했다.

창끝을 땅에 찍으며 튕기듯 펄쩍 뛰어 디-호그의 등에 올라탄다. 디-호그가 곧장 발작하며 그녀를 떨어뜨리려 했으나, 마이아의 손이 더 빨랐다.

퍽! 퍽! 콰직…!

그녀의 건틀릿이 디-호그의 가장 연약한 부분인 눈두덩이를 못처럼 두들겼다. 단숨에 골통이 뭉개진 디-호그가 힘을 잃고 쓰러졌고, 마이아도 바닥을 굴렀다.

“쿨럭! 커흑.”

시체의 핏물과 흙먼지를 집어삼킨 그녀가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마물을 더 처죽이기 위해서.

‘언제까지 쫄아 있을 거야. 마이아 엘드렛…!’

마이아는 잠깐 못 본 사이에 더 강해진 칸을 보며 생각했다.

마나도 없는 열등종의 몸으로 저토록 강해진 비밀이 있지 않을까. 마녀의 실험을 받았다든가, 론이 떠드는 헛소리처럼 거인의 피라도 타고났든가….

그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그녀는 묵묵히 칸을 따라다녔고, 이내 깨달았다.

‘내가 머저리 같은 용병들이나 때려잡으면서 잘난 척할 시간에, 그는 이런 전장을 매번 전전한 거야.’

당연히 강해질 수밖에 없지 않나.

강해지지 않으면 죽을 테니까.

실전을 거듭해 스스로를 갈고닦아야 진짜 기사라 할 수 있다는, 엘드렛 가의 가르침을 진정 이해한 마이아였다.

그리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렇게 칸을 따라다니며 위험한 전투를 계속 겪는다면, 그녀도 칸처럼 강해질 거라고 말이다.

“다 덤벼─!”

그렇게 생각하니, 육체의 고통 따위는 별로 중요치 않게 느껴져서- 마이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전투를 수도 없이 겪은 칸이라면, 고통이 곧 성장의 발판이라 여기리라 생각하며…….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오해가 쌓이는 순간이었다.

*

*

*

후욱─.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움직인 칸이 묵직한 호흡을 토했다. 쉬지 않고 움직이던 양팔도 늘어뜨린 채.

어느샌가 덤벼드는 마물의 숫자가 줄어들어서, 손으로 셀 수 있을 만큼의 규모가 됐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확실히. 체력이 말도 안 되게 늘었어.’

스탯은 서로 상호보완적일 수밖에 없다.

근력이 높다면 그 출력을 버틸 체력이 필요했고, 반사신경과 동체시력을 높여주는 민첩이 있어야 범인의 것을 초월한 육체를 매끄럽게 다루어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즉, 스탯의 불균형을 해결해야 육체의 성능을 제대로 이끌어 낼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전부 약해빠진 놈들밖에 없어서 적당히 힘을 빼긴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고무적인 성장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족히 이백 마리는 상대하고도 호흡이 잠깐 거칠어졌을 뿐, 여전히 컨디션은 만전에 가까웠으니까.

게임 시스템의 말도 안 되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

미들랜드의 전사들은 으레 육체의 성장이 한계를 맞이함과 동시에 정체기를 갖기 마련이지만, 칸은 스탯을 성장시킬 때마다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다.

‘이만하면, 그것들이랑 붙어도 허무하게 뒈질 정도는 아니겠어.’

‘미들랜드 퀘스트’의 망겜식 파워 인플레의 주범. 현재는 대마경 토벌에 발이 묶여 메인 스토리에 개입할 수 없는, 초인들 말이다.

‘뭐. 그것들이 등장하는 건 현 황제가 뒈진 이후일 테니, 지금 생각해봐야 시기상조일 테지.’

황제가 죽는 게 정확히 언제였더라…? 기억을 곰곰이 되짚어보던 칸이 일행의 접근을 알아차리곤 상념에서 벗어났다.

“형씨. 뒤쪽도 얼추 정리는 끝났네. 나머지는 마이아 아가씨가 열심히 싸워주고 있거든.”

쇠망치를 휘두르며 나머지 일행을 지키던 론이었다. 그런데 상황을 정리하는 그의 얼굴이 어째 떨떠름했다.

그리고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싶어 물어보려던 칸의 얼굴도 떨떠름하게 변했다.

“으하하하! 더 아프게 해 봐! 나는 더 강해진다아─!”

“크흠. 아주 열심히 싸워주고 있지…….”

“저건 또 왜 저러냐.”

“모르겠네. 싸우던 도중에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던 거 아니었겠나…?”

심경의 변화? 주화입마가 아니고? 이제는 아예 창을 놓고 건틀릿으로 마물을 때려죽이기 시작한 마이아를 보며, 칸이 얼굴을 구겼다.

원래도 대뜸 바지에 실례나 해대는 해괴한 습관을 가진 녀석이었는데, 이젠 처맞으면서 좋아하는 설정까지 더해졌다.

‘이만하면 설정 과다인데.’

“마이아 양도 역시 귀족 가문의 핏줄이 흐르긴 흐르는구먼.”

“그건 또 뭔 소리냐.”

“아니, 그런 말 있지 않나? 귀족들 중에는 해괴한 성향을 가진 양반들이 많다는…. 마이아 양도 엄연히 귀족가 혈통이니. 고통을 즐기는 것도 그럴 수 있겠거니 싶네만.”

“뭐, 귀족들은 변태 DNA라도 공유하는 거냐?”

“DNA? 그건 또 뭔 말인가.”

“…그런 게 있다. 마이아는 혼자 즐기게 두고, 다시 움직일 준비나 해. 언제 또 몰려들지 모르니까.”

칸의 지시에 론은 군말 없이 알겠다 답하고서 일행이 있는 쪽으로 되돌아갔고, 칸은 자신이 만든 주변의 참상을 되새김질하듯 눈으로 훑었다.

‘고블린, 코볼트, 칼날 늑대, 디-호그, 드루그….’

온갖 마물의 시체가 사방에 즐비했다. 칸의 공격에 맞은 놈들은 전부 시체가 온전하지 못했기에, 가히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이 유심히 시체를 살피는 이유가 있었다.

‘게임 기준으로 잡몹밖에 없다.’

마물 호드의 강함이 곧 마물을 지배하는 아룡의 강함이다.

그런 면에서 아룡의 수준이 생각보다 낮을 가능성이 올라갔다 말할 수 있겠지. 하지만…….

“전사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원래 호드라는 게 이런 식인가요? 마물들의 움직임이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요. 단순 착각이라면 다행이겠지만, 꼭 처음부터 저희를 노리고 덤빈 것 같아요.”

칸의 의문에 화답하듯, 론과 교대하는 것처럼 다가온 얀이 질문했다.

“그건 아닐 거다. 아룡은 보통 자기 영역에 은둔하는 걸 선호하니까. 아룡에게 지배당하는 마물들도 용의 영역이나 지킬 따름이지. 보통은.”

“이번엔 저쪽에서 덤볐잖아요? 그럼 여기부터 아룡의 영역이라는 걸까요?”

칸은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알-라스델이 가깝다 했으니 그건 아닐 거다. 그것들은 번잡스러운 걸 좋아하지 않아. 도시 주변을 자기 영역으로 삼는 건 보통 하지 않는 짓이지.”

“그럼……. 이 마물들은 왜 저희를 덮친 걸까요.”

칸이 의아하게 여긴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알-라스델과 알-란자스의 길목을 아룡의 군세가 점거하고 있음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거기에 일행이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전부터, 미연에 접근을 알아차린 것처럼 마물이 들이닥친 건-.

‘뭐가 어쨌건, 이 앞에 기다리고 있을 놈이 평범한 놈은 아니란 얘긴가…….’

칸은 복잡하게 엉켜가는 생각을 단호히 끊어냈다.

게임에서의 공략이라면 모를까. 현실에선 쓸데없이 머리를 굴려봤자, 상황이 제대로 풀리는 법이 없다는 걸 몸소 깨달았기에.

“일단 가보자고. 알-라스델에.”

대체 어떤 개 같은 상황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가보면 알게 되리라.

그리고 하루를 꼬박 나아가 알-라스델에 도달한 일행들이 마주한 것은, 다른 도시에서 몰려든 피난민이나 도시의 재물을 노리고 숨어든 도적 따위가 아니었다.

“크르르륵─.”

“우우오오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해진 마물의 군세와.

키이익─────!

인간이 가진 원초적인 공포를 이끌어 내는, 귀를 찢는 듯한 용의 포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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