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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야만전사-57화 (57/132)

#057화. 바실리스크 토벌전 (2)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엇이 말이오.”

수염을 쓸어넘기며 답하는 중년인이 느긋한 태도로 되묻는 반면. 전신을 가리는 로브로 신분을 감춘, 이 주변에선 마법사라고만 불리는 자가 딱딱한 어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알-라스델.”

“흠.”

“자칫 잘못했다면, 조합의 그자가 냄새를 맡고 움직일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자라면. 총지부장, 그 집요한 녀석을 이르는 것인가?”

마법사의 얼굴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긍정의 의미였다.

“안 그래도 이상현상의 연관성을 의심하고 있다 하니, 만약 각하가 알-라스델에 무언가 했음을 알아차리고 움직이기라도 한다면……. 일이 귀찮아질 겁니다. 조합이 작정하고 움직인다면 각하라도 조심스러워질 테지요.”

“물론, 그렇지.”

중년인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용병 조합. 참으로 곤란한 집단이야. 제국에서 생겨난 인간 백정들의 모임이, 설마하니 타 국가의 영토에서까지 영향력을 투사하다니? 그것도.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벌레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말이야.”

“…….”

“왕가라도 북부에선 제 영향력을 펼치지 못해. 물론, 지금의 왕가에게 그럴 여력이나 있겠냐마는. 조합의 작태가 대단히 불손하다는 건 분명한바. 나의……. 아니, 우리의 계획을 위해서라면 이쯤에서 눌러줄 필요가 있을 터.”

마법사는 침묵했다.

“자네들은 그자를 잘 모르니 내 알려줌세.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했나? 아니. 그자라면 진작에 내 움직임을 읽고, 알-라스델에 뭔가 손을 썼어도 이상하지 않아. 어쩌면 직접 움직일 가능성도 있고.”

“그자가 직접 움직이면 문제가 될 소지가 있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그자는 본디 제국에서 악명을 떨치던…….”

“걱정이 과하군. 알-라스델에 뭐가 있는지 알면서도.”

“각하. 그자는 혼자가 아닙니다. 은밀하게 길러낸 수족들과 함께라면, 알-라스델에 가져다 놓은 바실리스크는 확실하게 토벌당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되면?”

중년인이 씨익- 웃었다.

“진짜 재앙이 알-라스델과 그 주변을 모조리 쓸어버리겠지. 거슬리는 총지부장과 그 수족까지 함께. 우리는 그때 가서 폐허가 된 그곳을 집어삼키면 돼. 그럼 자네들은 새로운 ‘밭’을 얻게 되는 것이고. 나는 내 목표에 한 발자국 다가가게 되는 것이니.”

차라리, 그자가 알-라스델에서 바실리스크를 죽여줬으면 좋겠군. 중년인의 읊조림에 마법사는 허리를 꾸벅- 숙이고선 조용히 물러난다.

그렇게 홀로 남게 된 중년인은 장식처럼 얼굴에 걸어두었던 웃음을 거두었다.

‘그 이후엔, 쓸모가 없어진 자네들도. 손을 좀 봐야겠지만 말이야. 그건 그때의 즐거움으로 남겨둬야겠지.’

“지금은 알-라스델에서 들려올 소식을 즐겁게 기다리도록 할까…….”

알-라스델 인근의 지방이 와이번에 의해 초토화되었다는, 상상만 해도 유쾌한 소식을 말이다.

*

*

*

“칸 형씨─!”

론의 입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이 터져 나온다.

마이아는 설마 그 참수자가 이리 허무하게 죽었을 리가 없다며 중얼거렸고, 얀은 하늘에서 내려꽂힌 불꽃의 압도적인 화력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적색 마탑의 마구스가 충분한 노력을 들여 전개한 고위계 주문이 이러할까.

콰하하하학!

마치 하늘에 구멍이 뚫렸고, 그 구멍에서 화염의 폭포가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세 일행 모두가 그와 같은 감상을 느꼈다. 그만큼 압도적인 광경이오. 화력이었으니.

‘대체 누가…!’

얀의 냉철한 사고는 동료의 죽음에도 제 역할을 잊지 않았다.

마법사란 본디 그런 것이다. 심약하고, 어리숙하게만 보이던 얀이지만 마탑의 마구스가 제자로 들인 이유가 있었다. 마법사로서의 재능이 얀에게는 존재했다.

그는 직전의 불꽃이 적색 주문의 하나라 판단했다. 당연한 판단이었다. 마탑에서 세월의 반을 보낸 얀에게, 이만한 불꽃을 다룰 능력이란 오로지 마법뿐이었다.

‘적어도 마구스 이상…!’

또한, 북부의 여정에서 알게 된 ‘정체불명의 마법사 집단’의 존재를 의식한 끝에 내려진 결론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행의 전력 비중에서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칸이 허무하게 죽은 지금. 마법사 얀은 무슨 행동을 취해야 하는가.

‘도망쳐야 해…!’

이성과 본능이 동시에 같은 결론을 도출해냈다.

얀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다, 문득 멍한 얼굴로 칸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는 동료들에게 생각이 미쳤다.

자연스레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엘레나 씨?”

그런데 칸의 죽음에 당황해 몸이 굳지 않은 일행이 또 있었다.

콰직…!

갑자기 일행에 참가한 어린 사제. 연약한 소녀라고만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플레일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놀라운 체술까지 익힌 성전사.

지금막 경비조장의 머리를 플레일로 스치듯 때려 기절시킨 엘레나가 짐짓 화가 난 얼굴로 일행을 향해 일갈했다.

“가만히 뭐해요! 싸울 준비 안 하고? 얌전히 죽어주려고?”

그야말로 초인이나 다름없는 칸이다. 그런 그를 일격에 잿더미로 만든 존재와 싸우라니? 일행의 벙찐 얼굴에서 그러한 생각을 읽은 듯, 엘레나가 한심하단 표정이 돼선 외쳤다.

“여신께서 선택한 전사가 죽었을 리가 없잖아요!”

“여신께서……. 전사님을 선택했다고요?”

영문모를 소리다. 엘레나는 정의의 신을 모시는 사제이니, 정의의 신이 칸을 선택했다는 말이 될 텐데. 만신전의 신이 서릿골의 야만인을 택했다는 얘긴가?

완전히 상식과 동떨어진 얘기였다. 마법사의 이성이 헛소리라 부정하지만, 칸의 행보를 가까이서 지켜본 얀의 본능은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우우우웅──!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화염의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듯, 순백의 광채가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지더니 알-라스델의 하늘을 가득 채운다.

순백의 광채는 모든 불꽃을 흩어버리고 나서 그 빛으로 사방을 한 번 더 밝혔는데, 그 빛의 중심에 선 신형을 본 일행이 멍한 얼굴로 감탄사처럼 같은 단어를 내뱉었다.

“신의 사도…….”

신형의 정체는 바로 잿더미가 됐을 거라 확신한 칸이었다.

여신의 빛을 다루는 야만인의 모습에, 일행의 얼굴은 아연하다 못해 경악을 머금었다. 정말 정의의 신이 야만인을 사도로 선택했다는 건가?!

그게 무슨 뜻인지는 미들랜드의 주민이면서, 만신전의 신앙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자라면 누구나 떠올릴 수 있으리라.

“형씨가 여신의 대리자가 된 건가!”

칸을 둘러싼 수많은 오해들 속, 여신의 대리자라는 새로운 오해가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

*

*

‘하마터면 뒈질 뻔했네.’

가늘게 뜬 눈으로 구름이 밀려 나가 탁 트인 하늘을 응시하던 칸이 조용히 드라우프니르를 꺼내 들었다.

방금의 기습에서 칸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여신의 신력이 더해지며 성유물로 진화한 ‘심원의 성흔’ 덕분이었다.

과연 성유물이라고 해야 할지. 본래 성능으론 조금도 버티지 못했을 테지만, 심원의 성흔은 완벽하게 칸을 공격에서 보호해냈다.

그의 주변을 불사지르는 불꽃 탓에 잠깐 호흡이 곤란해지긴 했다마는.

‘뭐. 살았으면 됐지.’

그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바로 하늘에서 불꽃을 떨어뜨린 존재에 대한 것.

칸의 입에서 실소가 터진다.

나름 보스라 생각한 놈이 어째 허무하게 쓰러진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페이크 보스였고 진짜 최종보스가 등장한 격 아닌가.

“호드의 규모가 어째 부족하다 싶었는데, 바실리스크도 호드의 일부였다는 거겠지….”

아룡을 지배해 부린다니, 터무니없는 추측이지만 칸은 거의 확실하다 여겼다.

그야 하늘에서 이만한 불꽃을 떨어뜨릴…. 아니, 쏘아낼 수 있는 존재라 해봐야 그닥 많지 않았으니까.

펄럭─! 펄럭─!

그 추측이 맞노라 답하듯, 커다란 날갯짓 소리와 함께 구름을 걷어내며 존재가 있었다.

마치 원근감을 무시하는 것처럼 멀리서도 그 위용이 퇴색되지 않는 거대한 몸체. 박쥐의 그것과 닮았으나 크기에서 비교조차 안 되는 한 쌍의 날개와 이마에 솟아난 굵은 뿔. 그리고 타오르는 불꽃을 가둬놓은 보석과 같은 삼백안.

그 모든 외형적 특징들이 칸에게 정답을 알려주었다.

“시발.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진짜였네.”

칸이 일행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휘말리기 싫으면 도망쳐라.”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 일행이 되묻기도 전이었다.

[빈 껍데기 주제에! 어서 저 가짜를 찢어 죽여라!]

니가 날개라도 달아주든가. 원념이 하는 말에 핀잔을 주던 칸이 문득 발아래에 거대한 그림자가 졌음을 깨달았다.

‘그래. 직접 쳐 죽이러 오시겠다 이거지.’

제 숨결을 맞고도 멀쩡한 인간을 직접 찢어 죽이고자, 와이번이 지상을 향해 강하한 것이었다.

꽈아악.

저도 모르게 마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와이번. 게임에서도 중반부에 접어든 캐릭터가 만전의 준비와 걸출한 동료 NPC를 대동하고서 토벌을 노려볼 수 있는 레이드 몬스터.

개체의 강함과는 별개로, 날 수 있다는 특수성 탓에 까다롭기로는 오우거 이상인 뉴비 분쇄기이기도 했다.

비행 능력과 마물을 지배하는 아룡 본연의 특성, 어지간한 방어 마법은 죄다 무시하는 압도적인 화력의 브레스는 중반부에 이르러 다수의 A등급 스킬과 걸출한 장비로 무장한 캐릭터라도 끔살 당할 만큼 위협적인 까닭.

‘그런 놈이랑 이렇게 맞닥뜨릴 줄은 몰랐는데….’

성기사인 아리에스와 마구스 제롬이 함께 싸워주었던 다르킨 토벌전과는 상황이 천지 차이다.

물론, 그때에 비하면 칸 본인도 성장하긴 했으나 상황은 최악에 가까웠다.

“크오오오오오──!”

와이번의 포효가 잠시 청각을 마비시킨 건지, 귀가 먹먹했다.

‘탐욕의 그릇을 장비하기 전이었으면, 볼 만했겠어.’

어째 저절로 나오는 헛웃음을 참아낸 칸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사라진다.

어느새 놈의 촘촘한 비늘이 전부 보일 만큼 거리가 좁혀진 상태였다. 할 수 있을까.

그러한 불안감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지만, 더욱 의식하여 마음을 다잡았다.

‘할 수 있냐니.’

콰드드득!

앞으로 내디딘 왼발이 땅을 깊숙이 파고든다.

잔뜩 긴장해 뻣뻣해진 근육을 풀어주며, 당장이라도 뛰어오를 준비를 마친 칸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몸이 가볍다. 단순 착각이 아니다. 비록 바실리스크와의 전투가 짧았다고는 하나, 그만큼 밀도가 높은 전투였기에 체력 소모가 꽤 있는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몸 상태는 만전.

아니, 그 이상이었다.

‘실제로 스탯이 늘었다.’

근력 스탯은 변동이 없었으나, 지능을 제외한 나머지 스탯이 소폭 상승한 게 보였다.

설마 엘레나가 축복이라도 걸어둔 걸까- 하는 생각에 고개를 돌리려다, 자기 몸 주변에 흐르는 붉은 아지랑이를 본 칸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내 피라도 빨아간 거냐?’

그게 아니란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정말 그랬다면 진작에 알아차렸을 테니까.

바실리스크에 이어 와이번까지 조우한 녀석이, 지금까지 꽁꽁 숨겨두었던 뭔가를 꺼낸 것이리라.

[죽여라……! 저 빈 껍데기를 어서─!]

그게 맞다고 대답하듯 원념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진다. 새끼, 꼴에 용살검이라 이거지.

뜻밖의 조력이었다.

민첩과 체력이 조금 늘어났다고 해서 와이번과의 격차가 크게 줄어들 리도 없겠지만…….

‘이만하면 나쁘지 않아.’

무엇보다, 하늘을 나는 도마뱀을 죽이기 위한 준비도 마침 알-란자스에서 해둔 상태였다.

잠깐 정신을 집중하자 주변 공간이 열린다.

그러자 아에카리스의 주머니 안에 든 물건들이 전부 세세하게 느껴지고, 칸은 그중에서 하나를 집어 들었다.

‘어디, 해보자고.’

너무나 갑작스러운, 와이번 토벌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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