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화. 와이번 토벌전 (2)
과연 와이번의 속도는 어쭙잖게 내달려서 뿌리칠 만한 게 아니었다.
기기막측한 방법으로 거리를 벌렸다고 한들 일시적일 뿐, 하늘을 자유롭게 비행하는 와이번은 금새 칸의 뒤를 바싹 따라붙었다.
콰드득!
다급히 바닥을 굴러 와이번의 기습을 피한 칸이 혀를 찼다.
이후 본격적인 전투를 생각해 체력 배분을 신경 쓸 수밖에 없는 만큼. 도약 스킬을 무한정 써가며 추적을 따돌리는 건 고를 수 없는 선택지였다.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을 테고.
‘그래도 얼마 안 남았다.’
가장 먼저 성벽보다 높게 우뚝 솟은 첨탑이 보였다. 머지않아 알-란자스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규모의 성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괜히 북부에서도 손에 꼽는 부유한 도시라 불리는 게 아니란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칸이 활짝 열린 성문을 통과해 알-라스델 내부로 들어섰다. 알-란자스의 상단이 도시의 자원을 회수하고 돌아오는 길에, 성문을 열어두고 떠난 게 호재로 작용한 것.
후우웅!
물론, 하늘을 자유자재로 비행하는 와이번에겐 성벽조차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칸의 앞을 기어코 추월한 와이번이 아가리를 쩌억- 벌린다. 멀리서도 느껴질 만큼 후끈한 열기가 엄습하고, 사람 크기의 불덩어리가 놈의 아가리에 맺힌다.
칸은 허둥대지 않고 시야를 넓게 가져갔다.
외성구역의 건물은 생각보다 널널한 간격을 두고서 배치되어 있었다. 다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콰앙─! 화르르륵!
결코 느리지 않은 속도로 쏘아진 불꽃의 구체가 칸이 향하는 방향에 놓인 이층 건물을 통째로 불태웠다. 아예 퇴로를 막을 심산인 거다.
칸은 개의치 않았다.
으저적!
순식간에 허물어지는 건물을 그대로 뚫고 지나친다. 살갗이 타오르며 끔찍한 고통이 엄습한다. 이 정도 고통이야 새삼스럽지도 않지…!
빨갛게 달아오른 피부만 봐도 상상조차 못 할 고통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의 질주는 멈추지 않았다.
참는 건 익숙하다. 오로지 최단 거리로 내성에 진입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텼다.
“크오오──!”
퍼엉! 퍼엉!
두어 차례의 화탄 세례가 칸의 질주를 방해하듯 내려꽂혔지만, 그것도 화상을 입히는 정도에 그쳤다.
겨우 그 정도 고통으로는, 서릿골의 시험을 넘어선 야만전사를 막아설 수 없음이다.
‘불덩어리를 아가리에 쑤셔 넣는 정돈 되야지!’
무식하다 못해, 난폭한 질주의 끝.
외성과 내성을 가르는 내성벽이 코앞이었다. 도시에서 벌어진 내전의 여파인지, 내성의 문은 아예 박살이 난 상태였다.
그대로 성문을 지나쳐 내성구역에 들어서려던 칸이 멈칫- 속도를 늦췄다.
“───!”
화탄 세례가 통하지 않음을 깨닫고, 직접 몸으로 칸의 앞길을 막기 위해 와이번이 성문에 내려앉으려 하고 있었다.
쿠드드득!
단단한 땅조차 두부처럼 갈라버리던 발톱이 성문의 위쪽을 파고든다.
칸은 그제서야 놈의 속셈을 읽었다. 아예 성문 위쪽을 통째로 무너뜨려 길을 막으려는 것이다. 마치 인간의 건축물을 이해하고 내린 판단 같았다.
“빌어먹을…!”
게임에서조차 보여준 적 없는 지능적인 움직임에 칸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이제 와서 갑자기 지능이라도 상승한 거냐고…!
그러나 한가하게 불평이나 토로할 때가 아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성문의 입구가 완전히 무너져서 얼마간 걸음이 묶일 테고, 그건 결코 칸에게 좋은 소식이 되진 않을 테니까.
‘그냥 도약으로 뛰어넘을까?’
아니, 그건 불가능하다.
자칫 잘못하면 돌덩이에 깔리게 될 터였다. 더 나은 방법이 있을 텐데…!
그때 성문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던 칸의 시선이 외문을 감싸듯 설치된 측면탑으로 향했다.
둥근 형태의 측면탑의 벽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십자가 모양의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궁수들이 몰려드는 적을 안전하게 요격할 수 있게 만든 총안구였다.
‘저거다.’
칸이 눈을 빛냈다.
지이익─.
칸이 오른발을 치지직- 끌며 멈춰 서고, 도약을 뛰기 위한 진각을 즈려밟았다.
“크오오!”
와이번이 포효하며 발톱을 성문 윗부분에 꽂아 넣은 채로 고도를 올렸다. 콰드드드득─! 콰강!
굉음과 함께 돌무더기가 쏟아지고, 와이번이 비웃음을 담아 삼백안을 가늘게 뜬다. 이제 어쩔 거냐는 듯이.
“씹새가. 사람처럼 쪼개기는!”
일말의 당황조차 없이 칸이 도약했다. 길이 막혀버린 성문이 아닌, 측면탑을 향해!
“키익?”
칸이 영 엉뚱한 방향으로 뛰어오르자 와이번이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멈칫거렸다.
멍청한 도마뱀 같으니라고. 옅은 비웃음을 흘린 칸이 측면탑의 총안구에 손을 올려두었다.
드워프 하나 지나다닐 수 없는 좁은 틈새. 칸의 몸뚱어리론 두꺼운 팔뚝조차 집어넣을 수 없으리라.
하지만.
‘그만큼 넓히면 그만!’
쿠드드드드득!
총안구의 양쪽 벽면을 잡은 양손아귀의 핏줄이 곤두선다.
온 힘을 다해 쥐어 짜낸 악력으로 벽을 뜯어내듯 반대로 집어 당기자, 좁은 틈새가 순식간에 오크라도 비집고 들어갈 만한 통로로 변한다.
터억.
그대로 안에 들어선 칸이 먼저 좌우를 살폈다. 좌측은 와이번의 소행으로 통로 자체가 무너져 있었지만, 오른쪽 통로는 상태가 퍽 양호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다.
칸은 생각할 시간조차 없이 오른쪽 통로를 내달렸다.
바깥에서 분노한 와이번이 포효와 함께 날갯짓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는 정확히 칸의 머리 위에서 났다.
‘끈질긴 놈!’
기다란 통로를 따라 질주하던 칸이 다급하게 몸을 우측 벽면에 붙인다.
콰드드득─!
그 즉시 와이번의 아가리가 천장을을 부수고 통로에 난입했다.
“키햐아악!”
놈이 쩍 벌린 아가리를 쿵! 닫으며 부순 통로로 다시 사라졌다.
조금만 반응이 늦었더라면 몸뚱어리가 통째로 으적- 씹혔을 거란 생각에, 섬찟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흐른다.
‘시발. 호러 게임이 따로 없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칸이 다시금 통로를 질주했다.
와이번이 계속해서 벽을 부수고 아가리를 들이밀었지만, 다행히 워낙 요란한 소리를 동반하며 들이닥치는 덕분에 무사히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통로를 내달릴 수는 없었다.
‘분명 이 부근에 그 건물이 있었지…!’
물론,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도망만 다닌 건 아니었다. 와이번이 이따금 내성구역 쪽과 이어진 벽을 부수고 사라졌을 때. 도시의 구조를 최대한 눈에 담아둔 것.
그리고 칸이 생각한 최적의 위치가 머지않았다. 야만인의 동물적 감각으로 정확한 거리를 추려낸 칸이 아에카리스의 주머니를 열었다.
그때 와이번이 날갯짓할 때 나는 특유의 굉음이 칸의 귓전을 때렸다.
콰강! 쾅!
크고 작은 붕괴음이 일었다.
전자는 와이번의 발톱이 천장을 관통하며, 통로를 길게 헤집어대는 소리였고.
후자는 칸이 손에 집어 든 전투 망치로 벽을 부수며 통로를 탈출하는 소리였다.
‘찾았다.’
발아래로 펼쳐진 도시의 정경 속. 착지 지점과 멀지 않은 곳에 눈여겨보았던 건물이 있었다.
알-라스델이란 도시의 근간이나 다름없는, 거대한 마구간이.
도시 바깥의 목초지와 다르게, 알-라스델의 기병들과 귀족을 위한 시설일 게 분명한 마구간의 규모는 단연 독보적이었다.
물론, 도시가 패망한 현재 가져갈 만한 물건들은 모조리 약탈당한 뒤겠지.
하지만 칸이 바라는 물건은 멀쩡히 있을 가능성이 컸다.
타닥!
땅바닥에 안정적으로 착지한 칸의 움직임엔 군더더기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을 돌린 듯, 망설임 없이 마구간에 들어서 수색에 나선다.
“키에에엑─!”
뒤늦게 칸이 통로를 벗어났단 걸 알아차린 와이번이 분노의 포효를 터뜨리는 게 들렸지만, 칸은 할 일을 하기에 바빴다.
캉! 캉! 캉!
마구간 안쪽에서 정체불명의 쇳소리가 나자, 그 소리에 자극받은 와이번이 곧장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공중에서 날개를 크게 펼친다.
꿀렁- 꿀렁-
와이번의 목울대가 크게 요동쳤고, 아룡의 두꺼운 살가죽 너머로도 비칠 만큼의 광원이 목을 타고 흘렀다.
일전의 화탄이 아닌, 제대로 된 숨결을 내뿜으려는 것이었다.
캉…! 캉…!
그때까지도 쇳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기어코 숨결을 토해낼 준비를 마친 와이번이 입을 쩌억- 벌린다.
알-라스델의 하늘이 순간 번쩍! 밝아질 만큼의 빛은, 바실리스크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직후, 칸을 덮친 화염의 숨결과 닮아 있었으니.
투콰하아악!
하늘에 구멍을 냈던 용의 숨결이 마구간의 인근 땅을 먼저 휩쓸었다. 마치 퇴로를 차단하려는 것처럼, 천천히 불바다를 형성한다.
순식간에 도시의 일부를 불지옥으로 만든 용의 숨결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칸이 숨어든 마구간으로 경로를 비틀었다.
정확히 기계적으로 나던 쇳소리가 끊긴 시점이었다.
파앙─!
“키이익…!”
와이번의 입에서 숨결이 아닌, 비명이 흘러나왔다.
제아무리 뛰어난 눈을 가진 와이번이라도 소용없었다.
별안간 건물의 천장을 꿰뚫고 빛살처럼 날아든 투창이 와이번의 피막 날개를 관통했다.
그저 감각만으로 와이번의 위치를 특정. 숨결이 마구간을 덮치기 직전에 투창을 날려 피해를 입히고, 숨결의 경로를 크게 비튼 것이었다.
그야말로 짐승적인 감각이다.
오로지 전장을 누비기 위해 태어났다 여겨지는 야만전사의 전투 감각이란 그토록 대단했다.
‘원래는 몸통을 노렸는데…….’
그러나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였다.
방금의 투창으로 적어도 유효한 부상을 입히고 싶었건만, 숨결을 뱉어내는 와중에도 용케 몸을 비틀어 피하다니.
호락호락 당해주진 않는다 이거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 칸의 신형이 마구간의 벽을 뚫고 나타났다.
사방의 모든 길이 온통 불바다였다.
그러나 마나를 머금고 타오르는 불꽃이라면 모를까. 고작 숨결이 지나고 남은 흔적 따위로는 야만전사의 돌진을 막을 수 없음이라.
후우웅! 퍼엉─!
양손에 드라우프니르와 마검의 검집을 쥐고 휘두르자, 숨결이 남기고 간 불의 장벽이 걷혀나간다.
그러고도 끔찍할 정도의 열기가 칸의 살갗을 시뻘겋게 물들였지만, 당장 싸움에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니었다.
‘뒈지지만 않으면 돼!’
이 염병할 미들랜드에 빙의하고 얻은 가장 큰 교훈을 꼽자면, 그건 인간의 몸이 상상 이상으로 튼튼하다는 것이었다.
대자연이 만들어낸 마경이라 불리는 서릿골에서 맨몸으로 며칠 밤을 버티고, 추위에 적응할 즈음 찾아온 허기를 이기기 위해 영구동토나 다름없는 눈을 퍼먹고, 빼앗긴 수분을 공급하기 위해 독 덩어리나 다름없는 고블린의 피를 들이 삼키고, 호랑이조차 가볍게 물어 죽이는 서릿골 늑대와 맨몸으로 레슬링을 벌이다 온몸이 난자당한 끝에도 칸은 죽지 않았다.
고작 화상 따위로, 야만전사의 발을 묶어놓을 수는 없다는 뜻이다.
‘사실 인간이 아니라, 야만인의 몸뚱어리가 말도 안 되는 것 같긴 한데.’
칸은 비죽비죽 새어 나오는 웃음을 애써 억누른 채. 도시의 정중앙에 위치한 탑을 향해 뛰었다.
지옥불과 같은 와이번의 숨결이 남긴 열기를 들이마시고, 도약 스킬을 몇 번이나 반복 사용한 탓에 호흡이 거칠었지만, 어쨌거나 발은 움직였다.
그만하면 충분하다.
‘아니, 차고 넘치지.’
뒤쪽에서 와이번이 서둘러 자신의 뒤를 쫓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굳이 눈으로 볼 필요조차 없다. 체력 스탯의 상승과 함께 강화된 감각이, 극한의 상황에서 제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까닭이다.
중앙 첨탑까지의 거리. 그리고 와이번이 자신을 향해 거리를 좁혀오는 속도. 찰나의 순간 그 간극에서 자신의 동선을 머릿속에 그려낸 칸이 아에카리스의 주머니를 열었다.
차르릉─.
알-란자스에서 론에게 부탁해 구한 쇠사슬. 그리고 어지간한 방법으론 묶어두는 것조차 불가능한 군마를 위해 특별 제작된, 마법사의 주문으로 그 기능이 향상된 쇠말뚝.
그리고 용을 지상으로 떨구기 위한 거대한 질량 덩어리까지.
드디어, 와이번을 지상으로 끌어내리기 위한 준비물이 드디어 모두 갖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