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화. 배후의 존재 (1)
사실상 무지막지한 질량의 폭격이나 다름없었다. 아파트가 붕괴해 지상을 덮치면 이럴까.
첨탑은 이제 막 쇠사슬을 끊고서 도망치려던 와이번을 덮치고, 그대로 낙하해 지반과 충돌했다.
투콰──! 콰가가가각─!!!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굉음이, 땅을 뒤흔드는 진동과 함께 바닥에 웅크린 칸을 덮쳐왔다.
안 그래도 먹먹했던 귀가 숫제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세상의 소리가 사라지고, 너덜거리는 몸뚱어리가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한참을 나뒹군다.
‘씨이… 발!’
불굴의 의지가 해제된 직후, 칸의 몸 상태로는 전신을 두들기는 고통에 이를 악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나마도 몸을 웅크릴 수 있었던 건 레벨업과 동시에 체력이 하나 오른 덕분이었다.
퍽! 퍽! 쿠당탕─!
이 난리통에도 첨탑의 붕괴가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엔 건물들이 멀쩡히 있었다.
딱딱한 뭔가에 등허리를 부딪치고 멈춘 것도 그 탓이겠지. 꼭 싸우고 나면 이 난리라니까…!
정신없는 와중에도 욕지거리로 마음을 가라앉힌 칸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오우…….”
스스로가 만든 참상을 목격한 가해자의 첫마디였다.
첨탑과 부딪친 건물이 박살 난 것은 기본이오. 충격을 이기지 못한 지반이 아예 붕괴해 마치 첨탑의 잔해가 땅속으로 파고든 모양새였다.
모르긴 몰라도, 수습하려면 깨나 고생하겠거니- 생각한 칸이 끙 소리를 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욱씬.
잠깐 땅을 짚었을 뿐인데 손이며 관절이며 몸뚱어리 곳곳이 비명을 내질렀다. 당장 드러누우라고 협박하는 것처럼 말이다.
‘얌전히 그럴 때가 아니라고.’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저번 다르킨 토벌전 때와 다르게 무기를 잃어버리진 않았다는 것이었다.
본능적으로 주머니를 열어 장비를 집어넣은 스스로를 칭찬한 칸이 쿨럭- 피를 토했다.
“으, 씹. 모래 들어갔네.”
‘돌도 좀 씹은 것 같은데….’
야만인은 이도 튼튼해서 다행이군. 치과조차 없는 이세계에서 이라도 나갔다간 큰일이지 않은가.
시시한 농담을 주워섬기며 칸이 향한 곳은 와이번의 시체가 있으리라 추정되는 지점이었다.
확인 사살을 하러 가는 건 아니었다. 경험치가 들어온 것으로 놈의 죽음은 이미 확실해진 상황이니.
‘시체라도 좀 건지면 좋겠군.’
와이번의 사체는 어디를 가도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는 희귀 소재였다.
실력 있는 대장장이와 안면이 있다면 고등급의 장비를 제작하는 것도 가능하고, 마탑의 마법사들과 연줄이 있으면 마도구 제작 의뢰를 부탁하거나 대단히 비싼 값에 처분하는 것도 가능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와이번의 뼈를 가공해 만든 도끼 하나만 만들어도 족했다. 거기에 제롬을 시켜서 주문을 각인하고, 정의의 신을 어떻게 꼬셔서 다시 축복을 걸어달라 부탁하면…….
“참 좋았을 텐데….”
와이번이 파묻힌 장소를 어림짐작해 도착한 칸이 시선을 떨구었다.
첨탑이 충돌한 여파로 움푹- 꺼진 지면은 도저히 뭘 찾을만한 환경이 아니었다.
‘이거 찾으려면 고생깨나 하겠어.’
도저히 지금 상태로는 엄두조차 나질 않았기에, 칸은 입맛을 다시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라도 찾든가 해야겠네.’
사실상의 포기 선언이었다.
일단은 레벨이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무적이었으니. 무엇보다 당장 중요한 건, 이 와이번과 바실리스크의 등장에 개입한 배후였다.
단서가 없지는 않다.
알-란자스에 경비조장으로 있던 녀석. 그놈을 파보면 뭐라도 단서가 나오겠지. 혹여나 이 난리통에 죽어버렸다 해도 알-란자스의 시장인 페란 자작을 추궁해보면 될 일이다.
그 수상쩍은 놈을 경비조장 자리에 앉힌 장본인이라면, 뭐라도 아는 게 있지 않겠는가.
“……일단, 알-란자스로 돌아가야겠군.”
만신창이의 몸뚱어리로 알-란자스까지 걸어서 복귀할 생각에 울컥 차오르는 한숨을 애써 되삼킨 칸이 고개를 돌렸다.
“형씨…! 무사한 거요?! 있으면 대답해보쇼……!”
“전사님─! 죽었으면 죽었다고 알려주세요─!”
“저 염병할 주문쟁이 자식이….”
칸은 저 싸이코패스를 어떻게 혼내줘야 할까 고민하다, 저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았다. 그걸 본 일행이 허겁지겁 달려오는 모습이 감겨가는 시야로 흐릿하게 보였다.
‘아, 이것도 오랜만인데.’
일행의 얼굴을 보고서 마음이라도 놓은 건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수마가 덮쳐온다. 어떻게 저항해보려 하다가도, 칸은 구태여 버티지 않았다.
“형씨! 형씨……!”
그렇게, 시야가 암전했다.
*
*
*
미들랜드엔 믿을 놈은 없다, 라는 말을 강박처럼 되새기던 예전 같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눈을 뜨기 무섭게 떠오른 생각이었다.
‘많이 풀어졌군.’
일행 모두를 동료가 아닌 길동무 정도로 생각하려던 게 무색할 정도였다.
아무리 지쳤다고 하지만, 그 녀석들의 얼굴을 보자마자 냅다 드러누워 버리다니. 칸은 제 머리가 어떻게 돼버린 게 아닐까 의심하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다음부턴 조심해야겠어.’
정신을 잃은 상태로 칼침이라도 맞았다간, 지구로의 귀환이고 뭐고 없을 테니까.
정말 안전하다 확신할 수 있는 장소거나,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조건이 아니라면 제대로 휴식을 취한 적 없는 칸에게 이번 일은 무척이나 이례적이었고, 동시에 스스로를 질책하게 하는 실수였다.
불굴의 의지를 사용한 여파가 이렇게 지독한 건지, 아니면 그 상태에서 끓어오르는 힘을 사용한 데다가 이리저리 구른 탓인지…….
‘컨디션 자체는 만전에 가까운 것 같은데….’
몸의 어딘가가 고장 난 것처럼 삐걱댔다. 움직이기는 움직이는데, 관절이나 근육 따위가 뻣뻣하다고 해야 하나….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상태를 점검하던 칸이 뒤늦게 느껴지는 무게감에 눈을 씰룩였다.
“이 녀석은 왜 여기서….”
어째 하반신이 무겁다 했더니, 구불진 적갈색 머리카락이 칸의 다리 맡에 흐드러지게 펼쳐져 있었다.
장차 여신의 천칭이 되는 소녀, 엘레나였다.
‘뭔 상황이래.’
여신을 대신해서 감시라도 하러 온 건가? 반쯤 멍한 머리로 떠올린 생각은 겨우 그 정도였다.
칸은 엘레나를 흔들어 깨우려다 뻗은 손을 도로 되돌렸다.
대신 고개만 움직여 자신이 잠에 든 방을 살폈는데, 어째 처음 보는 방치고는 익숙한 구조와 외관이었다.
‘알-란자스 수녀원이군.’
이전에 본 베르타의 방과 거의 흡사한 걸 보면, 아마 틀림없겠지.
문제는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는 거다.
마지막에 기절한 위치가 알-라스델인 걸 생각하면, 적어도 며칠은 꼬박 정신을 잃고 잠만 잤다는 소린데….
“시발, 이 짓거리도 두 번은 못하겠군.”
불굴의 의지 상태에서 A등급 스킬을 사용한 것의 후폭풍을 몸소 실감한 칸이 마른 세수를 했다. 물론, 근력 스탯이 지나치게 돌출된 것도 문제의 일부이리라.
“…아으.”
“뭐야, 깼나?”
“아… 일어나셨네요!”
그때 칸의 혼잣말에 엘레나가 몇 번 뒤척이는가 싶더니 잠에서 깨어났다.
변방 수녀원의 소녀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화사했던 얼굴이 퍽 초췌했다. 거기에 알 수 없는 찝찝함을 느낀 칸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얼마나 정신을 잃었던 거지?”
“어젯밤에 알-란자스로 돌아와서… 지금이 낮이니까 얼추 나흘은 꼬박 주무셨네요. 사실 그것도 기적이에요. 처음 몸 상태는 정말이지… 트롤이 주무르다 버린 시체처럼 엉망이었다구요.”
“그것참, 재밌는 비유구만.”
“농담 아니라 진짜예요. 생명력이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여서, 어떻게 치료할 방법도 없어서 큰일이었으니까.”
짐짓 화난 표정으로 자신의 몸 상태가 얼마나 쓰레기였는지 설명하는 엘레나의 앞에서 칸은 떨떠름하게 고개만 주억일 뿐이었다.
“그래도 대단한 육체네요. 오러로 육체를 강화한 기사나, 신성력으로 육체를 개변한 성기사처럼. 어떤 면에서는 훨씬 우월할 정도구요.”
힘 하나만큼은 압도적이긴 하지. 그 말을 속으로 삼키곤, 침대에서 아예 벗어난 칸이 몸을 쭉쭉 뻗으며 말했다.
“내 몸뚱어리가 어떤가에 대해선 나중에 토론하기로 하고…. 상황을 좀 알고 싶은데.”
“으음……. 그간 있었던 일만 알려드리자면, 알-란자스도 한바탕 난리통에 휘말렸어요. 갑자기 마물들이 습격해와서 서쪽 성벽은 아예 무너졌다고….”
와이번이 죽으면서 지배력에서 벗어난 마물들이 날뛴 모양인데. 칸은 그리 분석하면서 엘레나의 이어진 설명을 얌전히 경청했다.
“경비조장. 그놈 시체가 사라졌다?”
“사실 사라진 건지, 마물들한테 짓밟혀서 찾을 수 없게 된 건지는 정확하지 않아요. 칸이 와이번과 알-라스델로 향한 뒤에, 저도 그자를 기절시키고 뒤따랐거든요.”
“…어지간하면 죽었다 보는 게 맞겠군.”
어딘가 찝찝함은 남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정황이다.
백을 가뿐히 넘는 마물 군세가 진군하는 한 가운데에 기절한 인간이 어떻게 살아서 도망친단 말인가.
마물에게 짓밟혀서 시체가 완전히 뭉개졌거나, 굶주린 마물이 집어삼켰다 보는 게 옳겠지.
“마이아가 페란 자작에게 그자의 수색을 요청할 거라 했으니, 뭐라도 결론이 나오겠죠. 애초에 경비조장을 일행에 붙인 장본인이니 더 열심히 찾지 않겠어요?”
“마물 습격의 뒷수습에, 배신자의 수색이라. 그 양반도 힘들겠어.”
“흥. 다 본인 잘못이죠! 그자가 절 쑤시기라도 했다면 어쩔 뻔했어요?”
‘가뿐히 제압해놓고 뻔뻔하긴…….’
어쨌거나 이 맹랑한 계집애의 말이 영 틀린 건 아니었다.
길잡이 겸 감시역으로 경비조장을 억지로 일행에 떠맡긴 것이 바로 자작 본인이었으니.
무엇보다 칸이 와이번을 사냥하지 않았더라면 알-란자스는 폐허 내지는 불바다가 되었을 터.
당연하지만, 이런 수고스런 잡일 정도는 그가 하는 것이 맞았다.
“그래. 뒈졌는지, 용케 도망쳤는지 모를 놈 얘기야 그만하지. 그보다는 와이번이다.”
칸의 말투에 진중함이 깃들자, 재잘재잘 떠들던 엘레나도 차분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 와이번. 내가 아는 와이번과는 어딘가 달랐다. 어설프게 지능이 높았다고 해야 할까….”
“그야 그렇겠죠. 평범한 마물이 아니라, 빈껍데기에 뭔가 집어넣은 해괴한 존재였으니까요.”
빈껍데기라. 칸은 엘레나의 입에서 나온 익숙한 단어에 눈을 빛냈다. 지금은 아에카리스의 주머니에 들어가 있는 드라우프니르도 와이번을 보고선 같은 얘기를 했었다.
“그 빈껍데기라는 거. 정확히 무슨 얘기냐.”
“말 그대로예요. 모든 생명에게 응당 있어야 할 게 없었으니까요. 아니, 다른 거로 대체 되었다고 하는 게 맞으려나….”
“대체 됐다? 뭐가.”
“영혼이요.”
칸의 상상력을 한참 넘어서는 대답이었다. 영혼이라니?
“그 와이번이 나타나고, 여신께서 제게 권능을 내리셨어요. 아리에스의 권능은 곁에서 보셨죠? 흑마력의 잔흔을 쫓을 수 있게 하는 후각. 저의 경우엔 영혼을 엿보는 ‘눈’이었어요. 그 눈으로 와이번을 살폈더니, 영 엉뚱한 게 보였죠. 으음…. 뭐라고 표현하는 게 좋을까.”
신중하게 표현을 골라내던 엘레나가 짝- 손뼉을 쳤다.
“영혼을 진흙처럼 반죽해 만든 무언가… 라고 하면 이해하기 편하실까요?”
굉장히 난해한 표현이었으나, 대충 맥락만은 이해했다.
‘이딴 짓거리를 하고 있었나. 진리의 추종자….’
‘살아있는 시체’에서 뽑아낸 영혼으로 놈들이 모종의 실험을 하고 있으리란 것쯤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영혼을 직접 만져서 아룡에게 집어넣고선, 그 아룡을 조종한다?
게임에서도 진리의 추종자가 이런 해괴한 주문을 다룬 적은 없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칸에 의해 틸리가 정사에 개입하면서 생겨난 변수다.
그리고 드라우프니르와 유사한 힘을 부리는 마검을 복제에 뿌리는 것도, 실험의 일부일 터.
이 실험들의 끝에 대체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상상조차 불가능했다.
그러나 칸은 오히려 의욕이 샘솟았다.
이미 깃들어있는 영혼을 빼내고, 다른 영혼을 집어넣는 해괴한 주문이라니.
멀쩡히 잘살고 있던 현대인이었다가, 미들랜드의 야만인에게 빙의한 누군가의 상황과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어 보이지 않나.
‘대체 뭔 개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꼭 봐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