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화. 배후의 존재 (2)
“정말이지… 마음 같아선 다 때려치고 남부에 가서 휴양이나 즐기고 싶군.”
커흠- 커흠-
체면조차 잊고 흘러나오는 페란 자작의 본심에 도시의 행정관이니, 경비대장이니, 저마다 직책을 지닌 중늙은이들이 자기는 못 들었다 온몸으로 피력하는 것처럼 헛기침을 흘렸다.
‘쓸모없는 늙은이들.’
페란 자작은 그런 가신들의 작태에 혀를 찼다.
차라리 체통을 지키라 윽박이라도 질렀다면 모를까. 자리를 지키려고 벙어리 행세나 하는 꼴을 보라지. 저런 것들을 데리고 무슨 일을 하겠다고-.
“…쯧. 그래서, 알-라스델과 관련한 일은 어찌 되었소. 부관.”
“그것이……. 참, 설명하기 어렵습니다만.”
페란 자작의 눈매가 불만스레 좁혀졌다.
안 그래도 처리할 일이 산더미인데, 쓸데없이 어물쩍대는 부관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까닭.
저 부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를 보좌하는 대부분의 인력이 자작의 눈엔 영 불만족스러웠다. 마음 같아선 죄 파면하고 싶다마는….
‘저치들이라도 있어야 도시가 굴러간다는 사실이 원망스럽군.’
애초에 시장의 일을 돕는 게 가능하려면 글을 알아야 하는데, 글을 아는 평민 자체가 지극히 귀했다.
왕국의 젖줄이 흐르는 풍요로운 남부라면 또 모를까. 척박한 북부에서 일 처리가 빠릿하고 눈치도 좋은 평민을 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해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설명이나 하게.”
“옙! 알-라스델과 이어진 관도에 마물 시체가 잔뜩 깔렸다고 합니다. 그 숫자가 알-란자스를 덮친 마물 이상이라고….”
“적어도 일, 이백은 된다는 소리군.”
“예. 정보를 보낸 자의 추측으로는 야만인 일행이 한 것으로…….”
당연한 소리를 그럴싸한 추측처럼 지껄이는 부관의 입을 주먹을 들어 막은 페란 자작이 생각에 잠겼다.
‘그만한 숫자의 마물을 고작 여섯…. 아니, 수녀원의 계집애와 배신한 그 녀석을 빼면 넷이라고 보는 게 맞나. 그렇다면, 넷이서 백이 넘는 마물을 힘으로 돌파했다는 얘긴가? 덤벼드는 놈들을 모조리 제거하면서?’
용병조합의 아르곤 왕국 총지부장이 은밀하게 고용한 괴물들… 금패 용병들과 비슷한 수준의 실력자로 이루어진, 서릿골의 야만인이 주축이 된 용병 파티라.
‘베르타 경은 그 야만인을 몹시 어렵게 대했었지. 성기사단의 부단장이었던 그녀가 말이야…. 그만한 실력이 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게다가 그 야만인은 마물 군세를 조종하는 건 아룡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자세한 건 알-라스델로 보낸 조사대가 복귀한 뒤에 알 수 있겠지만, 페란 자작은 아룡이 적어도 오우거와 비슷하거나 그 아래 정도 되는 재앙이라고 추측했다.
즉, 그 야만인은 그런 괴물과 싸우고도 멀쩡히 살아 돌아왔다는 뜻인데….
‘믿기 힘들군. 고작 한 손에 꼽을 인원으로…….’
“저, 시장님. 죄송하지만 꼭 들으셔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만…….”
“뭐지?”
깊은 고민에 빠진 페란 자작의 눈치를 보던 부관이 용기를 내 목소리를 높였다.
“그, 그것이. 조사대의 인물이 전한 내용에는…. 아룡이 하나가 아닌 두 개체일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자작의 서늘한 시선에 움찔한 부관이 눈을 질끈 감았다.
본인이 말하고도 이게 헛소리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조사대의 보고서에 최중요 사항이라 강조된 게 아니라면, 그도 헛것이라도 봤느냐며 넘겼을 터였다.
그러나 자작의 반응은 그의 예상과 달랐다.
“그 부분, 자세히 설명하게.”
“네, 네엡…!”
설명을 재촉하는 자작의 눈에서 숫제 불똥이 튀는 듯했다. 설마 조사대의 헛소리를 믿는 건가?
“그… 알-라스델의 외성 바깥에 있는 목초지에, 거인이 짓뭉갠 것처럼 찌부러진 짐승형 마물 시체가 수십 구가 널브러져 있었다고 합니다. 거기에 야만인 일행이 토벌한 것으로 여겨지는 거대한 도마뱀 사체 또한…….”
“그게 아룡이군. 마이아, 총지부장의 수족이 수거를 요청했었지. 그리고?”
“그, 그리고. 그리고 알-라스델이…….”
붕괴했다고 합니다. 부관의 입에서 나온 말에 회의실 내부의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붕괴했다? 알-라스델이? 도시의 내란과 약탈자들의 횡행에도 기반 시설들은 모두 건재했던, 그 부유한 도시가?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마, 말 그대로입니다. 조사대의 보고서에 따르면, 알-라스델의 절반이 도저히 손도 못 쓸 정도로 망가져서 도시로써의 기능은 포기해야 할 것이라고…….”
부관은 자신이 보고서에서 확인한 내용을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알-라스델의 명물이나 다름없던 중앙 첨탑이 쓰러져 지면과 충돌한 결과.
지반이 붕괴해 도시의 삼분지 일이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파괴되었으며, 하수도 시설이 역류해 도시 전체가 오물을 뒤집어써 복구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는, 도저히 믿기 힘든 내용의 보고들.
“…….”
“…….”
회의실 전체가 적막에 휩싸였다. 부관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을 바라보는 페란 자작의 눈이 무시무시했다.
“자세한 보고는 이후 복귀한 이후에 올린다 적혀 있었으나……. 아마도 또 다른 개체의 아룡과 전투한 흔적일 거라는, 조사대의 사견이…….”
“어이가 없군.”
“죄, 죄송합니다…!”
“아니, 자네에게 한 말이 아닐세.”
어처구니없는 건 자네가 아니라 보고 내용이지. 페란 자작은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고, 책상을 톡- 톡- 두들겼다.
‘어째서 자세한 내용을 알려주지 않았던 건가 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군.’
부관이 전한 조사대의 보고를 짧은 사이 몇 번이나 곱씹은 페란 자작이었다.
하나만 있어도 어마무시한 재앙일 게 분명한 괴물이 아룡이다.
그게 하나도 아니고 둘, 심지어 전투의 여파로 알-라스델이란 대도시가 완전히 망가졌다고 한다.
그런 전투에서 승리하고, 멀쩡히 살아돌아왔다는 사실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치겠군.’
같은 정보라도 누구의 입에서 나오냐에 따라 신뢰도가 다르다.
만약 도시로 복귀한 야만인 일행이 같은 얘기를 했다면, 자작은 의심부터 하고 봤을 게 분명했다. 포상금을 뜯어내기 위해 전공을 부풀렸다든가 하는 의심을 말이다.
그러나 자작이 직접 보낸 조사대가 이와 같은 의견을 보고서에 넣었다면, 거의 사실이라고 보는 게 맞다.
그 야만인 일행은 고작 한 손에 꼽는 게 가능한 인원으로, 수백에 달하는 마물의 군세를 뚫고서 두 마리의 아룡을 연이어 격살한 것이다.
‘다섯 명이서 군대를 갈음할 수 있는 소수정예라…….’
“진짜 재앙은 아룡이 아니라, 그자일 수도 있겠군.”
“예? 그게 무슨….”
“다른 얘기다. 보고는 됐다. 조사대가 돌아오건, 당사자가 직접 입을 열건, 지금 결론을 낼 만한 사안이 아니군.”
나가 봐라. 자작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어루만지며, 손을 휘저어 가신들을 모두 내보냈다. 아무래도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성싶었기에.
그러나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가신들과 교대하듯, 사병 하나가 들어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날 만나고 싶어하는 자가 있다고?”
자작은 노한 기색으로 사병을 꾸짖으려 했다. 사실상 전시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언제 또 마물이 덤벼들지 모르건만, 누군지도 모를 작자의 편의나 봐주자고 자리를 비워?
“그. 각하께서 예의주시하라 일렀던 야만인이…….”
“당장 만나보겠다. 그를 안내한 뒤에, 그 누구도 회의실에 들이지 말도록.”
“옙!”
자작은 수하의 경례를 본체만체하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수녀원에서 난입한 야만인의 무례를 꾸짖던 과거와는 판이하게 다른 반응.
그럴 수밖에 없다. 대체 어떤 방식으로 싸웠는지는 몰라도, 전투의 여파만으로 거대한 도시 하나를 통째로 말아먹은 괴물과 만나는 것이니까.
스스로의 상태에 빈틈이 없음을 확인한 뒤에야, 자작은 애써 평안한 자세로 그를 위해 준비된 의자에 몸을 앉혔다.
걸어 다니는 재앙과 마주할 시간이었다.
*
*
*
“왔군. 앉게.”
“음?”
병사의 안내를 받으며, 기다란 원탁이 놓인 방으로 들어선 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또 갑작스런 접견 요청은 예가 아니니, 시간은 금이니, 난리라도 칠 줄 알았는데.”
“설마. 도시를 구한 영웅을 홀대할 만큼 경우가 없진 않네.”
“흠. 그런가?”
칸은 고개를 주억거리곤 의자 하나를 끌어다가 대충 앉았다. 기묘하게도, 상석에 앉은 자작과 완전히 마주 보는 형태였다.
“…우선, 자네에게 감사를 표해야만 하겠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본론을 묻지 않을 수 없군. 의식을 잃고 있었던 자네가 바로 날 만나러 온 이유가 있겠지?”
“눈치가 빨라서 좋군.”
마음에 든다는 듯이 씨익- 미소지은 칸이 곧장 본론을 꺼냈다.
“대강 경위는 마이아가 설명했다고 들었소. 그럼 그 경비조장의 얘기도 들었겠지?”
“물론. 그에 대해선 유감일세. 그의 실력이라면 도움이 될까 싶어 붙여뒀건만, 실은 배신자였다니.”
“뭐, 사람 속을 누가 알겠나? 실제로 피해 본 사람도 없고, 쩨쩨하게 그거 가지고 지랄할 생각은 추호도 없소.”
“아량 고맙군. 내 실수에 대한 질책을 위해 꺼낸 게 아니라면… 그자의 정보가 필요한가?”
칸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확실히, 머리가 잘 돌아가는 인간이야.’
“내가 찾는 놈들이랑, 그 자식이 연관이 있을 것 같아서. 아는 게 있다면 최대한 들어두고 싶은데. 전에 듣기로는 최근 부임한 자라고… 맞소?”
“맞네. 북부의 여러 도시가 패망하면서, 실력 있는 인재들이 여럿이 이곳… 알-란자스에 유입이 됐네. 그자도 그중 하나였지. 묵묵한 성정과 뛰어난 칼솜씨를 인정받고 직책에 앉혔어. 스스로 생각해도 꽤 파격적인 인사였지. 조금은 과시할 목적도 있었고.”
출신을 따지지 않고, 실력만 있다면 중용하는 도시란 걸 홍보하고 싶었나 보군.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문제는 그 사례로 꼽힌 녀석이 딴 맘을 품은 배신자였다는 것.
“물론, 이것저것 필요한 조사는 마쳤네. 그자가 원래 어디에서 뭘 하던 인간이었는지… 다른 도시에서 보낸 세작일 가능성은 없는지… 가능한 선에서 말이야.”
그러고도 경비조장 자리에 앉힌 걸 보면, 딱히 켕기는 게 없는 인간이었다는 뜻이다. 그도 아니면…….
‘자작의 능력으로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은폐를 잘했거나.’
“이름, 요른. 출신은 북부 중앙의 알-데세느의 변방 집성촌. 거기서도 자경단 비스무리한 역할을 맡고 있다가, 알-데세느의 시장이 살아있는 시체가 돼면서 도시가 패망. 쑥대밭이 돼가는 알-데세느를 피해 이곳에 왔다고 했지. 그리고 전부 사실로 밝혀졌네.”
“알-데세느라면….”
칸도 이름 정도는 들어본 곳이었다. 규모가 꽤 있는 도시로, 북부에선 알-라스델과 비슷한 급의 규모였을 터.
‘……역시.’
슬슬 규칙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살아있는 시체가 단순 불치병이 아니라, 진리의 추종자라는 집단이 의도를 가지고 행한 개짓거리란 걸 알고 있기에 가능한 추리.
다만 조금 더 확실한 단서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단서는, 눈앞의 속물적인 귀족이 충분히 알려줄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아니, 그의 눈치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위화감을 느끼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칸은 또 하나의 질문을 했다.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재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맞네. 나 또한 거기서 위화감을 느꼈었지.”
“그럴 수밖에. 눈에 뻔히 보이는 조건이 있으니까.”
“아니, 나처럼 위화감은 느껴도 자네처럼 의심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을 걸세. 신의 힘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병을 누가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는가는 둘째치고. 그렇게 돼서 이득을 본 이가 아무도 없지 않은가.”
“없기는 뭐가 없다는 거지. 자기 경쟁자들이 모종의 병으로 전부 사라지고, 그 땅까지 집어삼킬 기회가 생긴 인간이 있을 텐데.”
칸이 말하는 인물의 정체를 유추하는 데에 성공한 듯, 페란 자작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살아있는 시체로 패망한 도시들은 전부 북부에선 대도시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들의 시장이나, 그 도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간이다. 그리고 그 도시들 전부 비슷한 결말을 맞았지.”
“내란….”
또한, ‘그 인물’은 북부만이 아니라 북부 바깥의 경쟁자를 축출하는 데에도 열을 올려왔다.
가장 먼저 바그너와 피카르의 분쟁이다.
아르곤 정계에서 거물로 거듭나려는 바그너 백작을 견제하려는 귀족 세력이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 방법이 바로 한창 바그너와 분쟁 중인 피카르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피카르의 시장은 진리의 추종자를 수족처럼 곁에 대동하고 다녔는데, 정체도 모르는 마법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고 답했었다.
만약 후원자가 진리의 추종자를 지원이랍시고 보낸 것이라면, 거부할 수 없을 만도 하지 않나?
실제로 백작이 드라우프니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바그너는 진리의 추종자에 의해 아예 패망했을 터였다.
그리고 다음이 경계마을이다.
서부와 북부를 잇는 유일한 중간 거점.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무지막지한 수익을 걷어내고, 동시에 서부로까지 영향력을 투사할 수 있는 곳.
그곳에서 날뛰던 전직 알-라스델의 기병대장은 드라우프니르의 복제품 같은 마검을 지니고 있었으며, 경계마을을 차지하기 위해 움직였었다.
이번에 등장한 아룡도 다르지 않다. 자기 영향력을 확장하는 데에 혈안이 된 인간이 보기에, 정의의 신이 관심을 보이는 알-란자스 수녀원은 눈엣가시일 수밖에.
‘바그너, 경계마을, 살아있는 시체, 알-라스델에 나타난 아룡.’
별개의 사건으로 보자면 크게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이 모든 사건들을 엮어보면, 결과적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보게 되는 인간이 있지.”
북부의 대귀족이자, 과거 왕가의 정쟁에 끼어든 이후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가문 중 하나. 동부에 있는 칸의 조력자가 이르길, 언제든 칼끝을 돌릴 준비가 된 야심가라 평한 이.
또한, 마탑에서 인정할 만큼 뛰어난 마법적 재능으로 말미암아 전쟁터에서 수많은 활약을 떨쳤던 전쟁군주.
“데일론 후작.”
칸은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자가 이 모든 사건들의 배후에 있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