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야만전사-63화 (63/132)

#063화. 배후의 존재 (3)

“데일론 후작… 그래. 데일론 후작이라면, 충분히 그럴 의지가 충만한 자이긴 해. 자기가 아르곤 왕국인이 아닌, 과거 북부 공국의 후계자라 여기는 인간이니.”

“로렌의 마녀도 비슷한 얘기를 했었다. 그쪽 핏줄은 대대로 비슷한 향수병을 앓고 있다고. 광기에 가까운 향수병을.”

“…그 마녀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확실하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도 데일론 후작을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열 번의 전장을 모두 승리로 이끈 상승의 장군이면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최악의 학살자일세. 거기에 오랫동안 후작과 함께한 정예병들은, 왕가의 그것과 대적할 수 있을 정도라는 것이 정론이야.”

페란 자작은 긴 한숨을 토하듯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건 나나, 자네의 선에서 해결이 가능한 문제가 아닐세. 왕가가 나설 문제지. 어쨌거나 후작이 북부 일통 내지는 승작을 노리고 있다는 건, 왕가의 입장에서 용납할 수 없는 야욕일세.”

“왕가는 나서지 않는다. 그럴 상황이 아니라고, 여러 입에서 비슷한 얘기를 들었거든.”

“로렌의 마녀. 그녀도 그렇게 말하던가?”

칸은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정말 그렇다면, 어떻게 손 쓸 방법이 없군.”

“다른 귀족들과 연합해 후작에게 대항한단 선택지는 없나?”

“불가능해. 애초에 북부의 땅덩어리는 지나치게 넓고, 각 도시가 각자도생하는 형태에 가까우니까. 알-라스델이 멀쩡했더라면 그곳을 중심으로라도 뭔가 해볼 수 있겠지만….”

칸은 혀를 찼다. 알-라스델을 노린 이유가 이거였나.

“무엇보다 우리는 더 이상 영주가 아닌, 일개 시장일세. 국왕을 대신해 도시와 그 주변의 땅을 관리할 뿐인 관리자. 사병의 수는 전의 절반도 채 되질 않으며, 전쟁 수행에 큰 도움이 될 마법사조차 제대로 고용하려면 왕가의 승인을 받아야 하지.”

톡- 톡- 페란 자작이 책상을 손끝으로 두들겼다.

“정녕 왕가가 북부에 개입할 수 없다고 한들, 이제 와서 전력을 모아봐야 늦어. 그에 반해 후작이 왕가를 대리해 전장에 나선 것은 비교적 최근이니, 동원할 수 있는 정예병의 숫자가 상당할 걸세. 게다가 정황상 아룡이라는 괴물까지 조종하고 있지 않나?”

“다른 도시의 도움은 바랄 수 없단 거군.”

“오히려 방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지. 오히려 후작에게 연줄을 대는 도시가 꽤 될 걸세. 애초부터 북부는 왕가에게 홀대받는단 열등감에 찌든 곳이니까.”

당장 나라고 크게 다르진 않군. 페란 자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여신께서 도시를 돌보시지 않았다면, 나부터가 얌전히 후작의 편으로 돌아섰을 테니까.”

자작은 얼굴에 덕지덕지 묻은 피로감을 지워내듯 마른세수를 두어 번 하더니, 엄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북부의 혼란에 관심을 가지고, 개입하는 연유에 대해선 묻지 않겠네. 다만 이것 하나만은 약속하지. 자네가 도움을 바란다면, 가능한 선에서 최대한의 조력을 다하겠네.”

알-란자스에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말이야.

*

*

*

꺄르륵.

페란 자작과 나눴던 대화를 되새기던 칸이 주변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와……. 저 근육을 좀 보세요. 자기 힘자랑하던 용병들보다 배는 두꺼워요. 언니.”

“쉿! 야만인은 대륙인을 반으로 접어버리는 게 취미랬어. 괜히 눈에 띄었다가는…….”

“뭘 반으로 접는단 거냐. 사람이 폴드폰도 아니고.”

꺄악- 도망가!

칸이 눈을 흘기자 수녀원의 계집애들이 꺄르륵 웃음을 터뜨리며 이리저리 흩어진다.

거구의 야만인을 보고 무서워하던 처음의 모습은 어디 가고, 오히려 사람 같지 않은 칸의 몸뚱어리를 구경하러 모여든 것이다.

지난 며칠 정양을 이유로 수녀원에서 지낸 덕분일까.

어린 소녀들은 그 나이대의 열렬한 호기심에 예외를 두지 않고, 칸에게 이런저런 관심을 보였다.

“용서하세요. 다들 말로만 듣던 야만인과 함께 지내다 보니,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을 거예요.”

전혀 어린애 같지 않은 어린애와의 대화가 많아진 것은 당연지사. 의젓한 표정의 엘레나가 칸의 옆자리를 툭툭 털고서 냅다 차지해버렸다.

“몸은 좀 어때요? 칸.”

“멀쩡하다. 와이번 하나는 더 때려잡아도 괜찮을 정도로.”

“그만한 괴물이 하나 더 나타나면 엄청 큰일이라구요? 우리 신께서 당신께 드려야 할 보상이 늘어나잖아요.”

“더 나타나길 바라야겠군. 만신전 교회가 그렇게 부자라던데.”

“흐음…. 저한테는 낯선 얘기네요. 이 좁아터진 수녀원에서만 반평생을 살아서.”

복잡한 사연이 느껴지는 말에 칸은 그냥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그녀가 칸을 대하는 언행이야 처음과 비하자면 상당히 편해졌지만, 그 안에 숨겨진 광신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정의의 신이 성흔에 신성을 새겨넣은 이래로, 엘레나가 칸을 바라볼 때 보내는 시선은 이따금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대체 어떻게 되먹은 과거를 가졌길래, 스물 언저리의 꼬맹이가 저런 눈을 하고 있는 건지….

아리에스도 그렇고. 정의의 신이 사도를 뽑는 기준에 대해서, 상당히 의심해볼 만한 구석이 많은 것 같았다.

기구한 사연을 가진 꼬맹이들을 수집하는 괴상한 성향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어차피 그것도 이제 끝 아니냐. 곧 있으면 수녀원을 떠나있어야 할 테니까.”

“그렇죠. 덕분에 바깥 구경도 좀 하겠네요! 아, 이번에는 어디로 간다고 하셨죠?”

“로-엘펠란.”

과거 엘펠란 공국이란 이름으로 존재했으며, 아르곤 왕국에게 복속되어 이제는 하나의 지방으로만 이름을 남기게 된 땅.

대부분의 귀족이 ‘시장’으로 불리며 도시를 관리하는 아르곤 왕국에서. 드물게 영지의 형태로 존재하는 땅이기도 했다.

그리고.

“데일론 후작이 주인으로 있는 땅이기도 하지.”

칸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어딘가를 응시하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론이 준비를 끝내는 대로 출발할 거다. 너도 인사를 나눌 사람이 있으면, 그 전에 끝내는 게 좋을 거야.”

그 말에 엘레나는 싱긋 웃으며, 준비는 진작에 마쳤노라 답했다.

일행의 마차가 알-란자스를 출발한 건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이후였다.

물자야 경계마을에서 넣어둔 것들이 한참 남았기에 따로 보충하지 않았고, 그나마 챙길만한 전리품들… 바실리스크의 시체 같은 건 칸이 따로 아에카리스의 주머니에 수납한 덕분에 마차는 매끄럽게 관도를 달렸다.

“페란 자작. 그 양반 솜씨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난리통을 수습하자마자, 관도에 널린 마물 시체부터 수거할 줄은…. 시체가 보통 많은 것도 아니었을 텐데.”

그때 마부석에서 마차를 몰던 론이 짐짓 놀란 투로 중얼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굳이 대답을 구하려고 떠든 말은 아닌 듯했는데, 여정의 지루함을 달래고 싶었던 건 론 뿐만이 아니었다.

“저는 아직도 신기해요. 살면서 아룡을 둘씩이나 마주치고, 수백 마리 마물한테 쫓기는 경험을 하게 될 줄은 몰랐거든요. 마탑에만 박혀 있었다면, 이런 경험은 평생 못 겪고 살았겠죠.”

“흐흐. 그것보단 형씨랑 다니게 된 탓 아니겠나? 온갖 사건 사고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니까.”

“어, 음. 저는 잘 모르겠네요.”

“아니, 확실해! 내 일평생 최대의 모험을 최근 다 겪고 있네. 타락한 사제에 용의 모습을 한 흑마법사를 토벌하고, 드워프도 만나보고, 이제는 정체불명의 마법사 집단을 추적하면서 아룡까지 마주치지 않았나?”

“타락한 사제? 용의 모습을 한 흑마법사? 그건 무슨 소립니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단어에 마이아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론은 흐흥- 콧소리를 내며 뜸을 들이더니, 잘난 체하는 투로 입을 열었다.

“마이아 아가씨가 합류하기 전의 이야기라네. 얀도 그때 만났지. 그렇지 않나?”

“그랬죠. 제 사제를 해친 흑마법사를 잡으려고 왔다가, 이렇게 전사님과 같이 다니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요.”

“흐흐. 나라고 어찌 알았겠나? 가끔 하는 생각이지만, 나중에 형씨의 모험담이 영웅 서사기처럼 퍼질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 ‘위대한 용사’ 모험기도 그렇지 않나. 수상한 음모를 꾸미는 악적들을 물리치는 용사와 우연한 계기로 함께하는 동료들…….”

“하하. 정말 그렇다면, 저는 서장에 잠깐 등장했다가 퇴장하는 조력자쯤 될까요?”

“자네가 그 정도면, 나는 이름도 남기지 못할 거야!”

“그보다는, 그 타락한 사제와 흑마법사의 얘기나 들려주십시오.”

“그게 그렇게 듣고 싶나? 흐흠. 알려주지 못할 것도 없지!”

소란스러운 것들.

칸은 저를 영웅 서사시의 주인공쯤으로 묘사하는 론의 개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눈을 감아버렸다.

애초에 야만인이란 족속에게 영웅이란 단어는 가당치도 않았다. 그림이 안 나오지 않나.

‘용사는 금발에 호리호리한 미청년이 국룰이거늘.’

대대로 내려오는 유구한 전통을 깨버리다니. 미개한 중세 놈들 같으니.

그렇다고 론의 입을 아예 막지는 않았는데, 로-엘펠란까지 이동하는 동안 심심함을 달래려면 뭐라도 얘기하는 게 최고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생각할 거리도 좀 있고…….’

그건 다름 아닌 로-엘펠란의 영주인 데일론 후작에 관한 고민이었다.

그가 애초부터 진리의 추종자인 건지, 아니면 진리의 추종자가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인지, 그에 대한 고민이 배후를 알아차린 날부터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실 전자나 후자나 뭐가 다르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칸이 생각하기에 그 둘은 천지 차이나 다름없었다.

‘후자의 경우엔 협력하는 진리의 추종자만 제거하면 내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지만…….’

만약 전자라면… 어떤 뱡항으로건 끝장을 보기 위해 후작 본인을 죽여야만 할 터였다.

귀족 살해에 대해선 대수롭지 않다는 생각을 가진 칸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번엔 경우가 많이 달랐다.

데일론 후작쯤 되는 상급 귀족이 야만인에게 살해당하면, 적어도 왕국 전체가 흔들릴 게 분명했다.

그와 적대하던 귀족들조차 들고일어나서, 감히 귀족의 명예를 실추시킨 죄를 물으라 난리를 치겠지.

사실상 왕국 전체가 적으로 돌아설 거란 얘기다.

다수의 기사가 병사를 이끌고 수시로 덤벼대면, 제아무리 칸이라도 곤란을 겪게 될 터. 현상금 사냥꾼들도 개미 떼처럼 몰려들 테고.

‘쯧. 그렇다고 족치지 않을 수도 없나.’

애초에…….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쓰면서 사람 족치는 건, 내 방식이 아니지.’

야만전사에게는 야만전사에게 어울리는 방식이 있는 법. 귀족 살해의 후폭풍 따위는 후작을 족치고 나서 고민해도 늦지 않는다.

어차피 진리의 추종자를 족치면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게 되면, 큰 미련 없이 아르곤을 떠날 수 있으리라.

‘여차하면 그냥 다른 나라로 튀면 되겠지. 뭐.’

그것도 아니면, 그냥 정의의 신이 시켰다고 하던가. 그 양반도 양심이 있으면 그 정도는 용서해주겠지. 의뢰를 맡긴 것도 분명한 사실이고.

칸은 지난 며칠 계속해서 그를 괴롭혀온 고민을 깨끗이 지워버렸다. 우선은 당장 처리할 일에 집중하는 것이 옳았다.

‘북부의 현자라고 했던가.’

이전에 경계마을의 네리아가 알려준 소문이었다. 현자라고 불리면서 북부 이곳저곳에 나타나 사람들을 돕는, 선량한 마법사의 이야기….

칸은 그 소문을 듣자마자 구린내를 맡았더랬다.

그야 당연하지 않나. 선량한 마법사라니.

‘겸손한 엘프 같은 소리하네.’

분명 뒤에서는 수상쩍은 인체 실험을 하고 있던가, 데일론 후작을 도와서 뭔가 일을 꾸미고 있던가, 하여간 모종의 개수작을 부리고 있을 게 뻔했다.

우연찮게도, 현자는 로-엘펠란으로 가는 길목에 머무르는 중이라는 페란 자작의 조사 결과가 있었다. 마침 동선도 겹치겠다, 아예 이번 여정의 첫 표적으로 삼은 것.

‘어디, 어떤 개짓거리를 하고 있나 보자고.’

확신과 함께 로-엘펠란에 도착한 뒤.

현자가 머무르고 있다는 마을 어귀에 도착한 칸과 일행은, 뜻밖의 상황과 맞닥뜨렸다.

“감히, 오만불손한 용병들이 또 현자님을 노리고…!”

“전부 무기를 들어! 이번엔 우리가 현자님을 구하는 거다!”

아니, 현자 나오라고 아직 말도 안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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