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야만전사-64화 (64/132)

#064화. 배후의 존재 (4)

현자의 ‘현’ 자도 꺼내지 않았건만, 칸 일행을 보자마자 밭이나 가는 농기구와 어설픈 목창을 따위를 든 촌부들의 무리가 앞을 막아선다.

“이, 이 사람들이 왜 이러나? 우리가 뭘 했다고….”

“흥! 이젠 행색만 봐도 알지! 또 약탈이나 하러 온 용병아니야?!”

“현자님이 계신 이 마을이 부유하단 소문을 듣고 몰려오는 용병이 하나둘이 아닌데, 양심도 없는 것들!”

그들은 마부석에 앉은 론이 진정하라고 말을 해봐야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되레 살기등등한 태도로 마차를 포위하려는 낌새마저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바깥의 소란에 마차에 탄 일행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심상찮은 낌새를 이미 느낀 마이아가 창을 손에 쥐고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이 사람들이 웬 죽일 기세로 막아서지 않나….”

“저 여자! 무기를 들었어!”

“또 약탈하러 온 연놈들이 확실하다! 전부 싸울 준비해!”

마치 벽을 상대로 호소하는 것같았다. 다양한 연령대, 남여를 가리지 않고 몰려든 사람들이 눈을 부릅뜨고 전투에 대비하는데, 가히 이질적이다 싶을 정도로 적대적이었다.

“이거, 형씨가 좀 봐야겠는데…?”

“그러려고 했다.”

처벅.

마지막으로 마차에서 내린 칸이 무덤덤한 눈으로 주변을 흘긴다.

어지간한 대륙인보다 머리 하나 더 큰 키에 굵직한 팔다리, 흉악한 근육의 야만인이 모습을 드러내면 보통은 움츠러들기 마련이다.

그건 드잡이질에 익숙한 용병이나, 오만한 마법사건, 예외없이 그랬다.

그런데 지금 일행의 마차를 포위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감히, 오만불손한 용병들이 또 현자님을 노리고…!”

“전부 무기를 들어! 이번엔 우리가 현자님을 구하는 거다!”

거구의 야만인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건지, 성큼성큼 마차를 향해 거리를 좁혀왔다.

“이거 어쩔 거요? 형씨.”

“당연한 걸 묻네요.”

론의 물음에 대답한 건 뜻밖에도 엘레나였다.

어느새 플레일을 손에 휘감은 엘레나가 당장이라도 촌부들의 머리통을 으깨버릴 것처럼 자세를 잡는 것이 아닌가.

“잠깐, 잠깐!”

누가 봐도 무력행사로 쫓아내겠다는 언행에 대경실색한 론이 엘레나의 앞을 막아섰다.

“설마 저들을 다 힘으로 뚫고 지나가잔 말인가?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야…! 게다가 자네는 정의의 신을 모시는 몸이지 않나!”

“그래서죠. 됐으니까, 비켜요. 어차피… 그쪽 성격에 못할 거라고는 생각했으니까. 저 혼자서도 충분히 가능해요.”

“가부의 문제가 아니네!”

“…….”

론은 명랑한 소녀라고만 여겼던 엘레나가 보여주는 새로운 면모에 얼이 다 나갈 지경이었다.

의미모를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소녀의 눈빛이, 어째선지 소름끼쳤다.

“형씨! 형씨가 무슨 말이라도…….”

결국 믿을 구석은 칸 뿐이었다.

마차를 포위한 무리는 대략 오륙십에 달하는 숫자였지만, 칸 일행에게는 귀찮은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일반적인 편견과 달리, 칸은 민간인이나 다름없는 자들과는 굳이 부딪치지 않으려 하는 성격이었다.

아마 싸울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 까닭이리라. 론은 그러한 칸의 성격에 기대를 품었으나-.

“뭐, 치울 필요는 있어 보이는군.”

당장이라도 그 큼지막한 주먹으로 촌민들의 골통을 깨부술 것처럼, 몸을 푸는 칸이었다.

‘어째서!’

론이 입술을 깨물었다.

엘레나와 칸이 나서면 일대학살이 벌어질 것은 명정했다.

그건 옳지 않다. 거슬린다는 이유로 아무렇게나 죽이고 다치게 한다면, 인간 백정으로 살아가는 여타 용병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다시, 다시 생각해보게!”

숫제 애원하는 투로 말하는 론을 보며, 칸이 작게 한숨을 토했다. 누구는 좋아서 이러는 줄 아나.

그 중얼거림을 들은 론이 무어라 의문을 표하려던 그때.

“이런, 손님맞이가 좀 늦었군.”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유독 선명하게 울려퍼졌다. 론이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킬 정도였다.

“혀, 현자님!”

“다들 물러나! 현자님께서 오셨다…….”

그리고 마차를 포위한 채 다가오던 촌민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저마다 손에 든 쟁기나 목창 따위의 무기를 내리고, 물러난 것.

같은 언어를 쓰는 게 맞나, 의심이 들 만큼 막무가내로 굴던 이들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순종적인 모습이었다.

“그쪽이 현자인가?”

“스스로는 그렇게 칭하지 않지만, 그렇게도 불리고 있지.”

늙수그레한 목소리의 주인은, 그 음성 만큼이나 노쇠해보이는 노인이었다.

검버섯이 잔뜩 피고, 깊은 주름이 진 얼굴. 펑퍼짐한 로브 너머로도 알 수 있을 만큼 굽은 허리와 부러질 것처럼 얇은 손목. 손에 쥔 지팡이가 없으면 제대로 걷지도 못할 듯한, 그런 노인.

조금만 생각해도 소문의 ‘현자’와 동일시하긴 어려운 모습이었다. 아무리 마법사가 몸을 쓰지 않는 족속들이라지만, 걷는 것도 겨우인 노인네가 사람들을 구하고 다녀?

“왜 찾아왔는지. 짐작하고 있나?”

그러나 칸은 노인이 소문의 현자임을 의심하지 않는 듯했다.

“글쎄. 그리 흉흉한 살기를 품고 날 찾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데, 보통은 탐욕스런 눈으로 찾아오길 마련이거늘…….”

노인의 반응도 정상적이진 않았다.

“클클……. 뭐, 상관없나. 어쨌거나 환영하네. 기다리던 손님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문전박대를 할 만큼 야박한 사람이 아니거든.”

오크의 목을 뽑아서 죽일 법한 야만인이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살기를 줄줄이 풍기는데도, 노인은 정말 뜻밖의 반가운 손님이라도 맞이하는 것처럼 굴었다.

“따라오게.”

“그러지.”

“자, 잠깐. 형씨……?!”

아무렇지도 않게 안으로 들이는 노인이나, 그걸 또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칸이나. 론이 보기에 둘 다 결코 정상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촌민들과 마주친 이후로 모든 게 비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듯했다.

척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용병들에게 싸움을 거는 촌민들이나, 정의의 신을 모시는 수녀면서 그걸 또 다 쳐죽이려 드는 엘레나나, 평소라면 귀찮다고 넘어갔을 칸이 손을 쓰려하는 거나, 갑자기 등장한 자칭 현자의 태도까지 전부.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가….’

론의 혼란과는 별개로, 일행은 자칭 현자의 뒤를 따라 그가 머무르는 마을에 무혈입성했다.

목숨을 걸고 서라도 일행을 막아설 것같던 촌민들도, 초원을 거니는 양처럼 속속이 흩어졌다. 물론, 마을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촌민들과도 마주쳤지만-.

“오, 현자님!”

“현자님! 덕분에 몸이 다 나았습니다!”

“저번에 밭을 다 정비해주셔서, 조만간 결실을 볼 수 있을 것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현자님!”

그저 현자에 대한 칭송을 늘어놓으며, 다시 자기 일에 매진할 뿐. 그들은 일행의 모습이 눈에 안 들어오는 것처럼 굴었다.

이 또한 론의 눈에는 위화감 가득한 광경이었고, 어딘가 나사가 빠진 것처럼도 보였다.

“그래, 그래. 다음에는 몸 좀 조심히 쓰게.”

“그거야 자네들이 노력한 덕분이지. 나야 주문 몇 구절 읊었을 뿐이고.”

현자는 사람들의 말에 일일이 답변을 해주었다.

그 자애넘치는 모습은, 사람들을 구하고 다닌다는 소문 속의 현자를 떠올리게 해서 론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정말 저 늙은 노인이 소문의 현자이고, 북부의 혼란을 배후에서 조장한 정체불명의 마법사 집단 소속이 맞는 건가?’

정말 그렇다고 한다면, 그건 더 이상한 일이라고 론은 생각했다.

‘본인이 저지른 짓거리로 인해 고향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수천… 아니, 만 명은 가뿐히 넘길 텐데도. 저렇게 뻔뻔히 사람들의 앞에서 구원자 행세를 한다는 게….’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일까?

제아무리 주문쟁이들이 공감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정신병자라고들 하지만, 그들도 결국 인간이기에 최소한의 선은 존재했다.

‘악마다.’

그도 아니면 섬나라 엘프거나, 마녀일 것이다.

사람을 가축으로 보는 그것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짓거리니까.

“자네 눈빛이 영 불손하군. 그래도 손님이라고 들였는데 말이야.”

“……!”

론이 대경실색하여 뒷걸음질 쳤다.

노인의 우묵한 눈동자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마치 공간을 접고 론의 앞에 당도한 것처럼, 아무런 기척조차 없었건만.

“뭘 그리 놀라나? 그래도 소문의 현자라면, 이 정도 장난은 가능하겠지. 안 그런가? 사람 말을 하는 야만인 친구.”

“현자가 아니어도 가능은 하겠지. 주문쟁이들은 그런 눈속임을 워낙 좋아하니까.”

“클클! 주문쟁이라. 그런 멸칭을 본인 앞에서 쓰는 건가? 야만인답군! 하지만 맞는 말이야. 마법사는 눈속임을 아주 좋아하지.”

장난쳐서 미안하구만. 노인은 아무렇지 않게 론의 어깨를 툭- 툭- 두들기곤 다시 일행의 맨 앞에서 걷기 시작했다.

“괜찮으세요?”

“괘, 괜찮네.”

얀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론은 제대로 대답할 정신조차 없이 그저 괜찮단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었다.

화악-

그러던 도중, 론은 갑작스레 머리가 맑게 개는 듯한 감각을 느끼곤 흠칫 몸을 떨었다.

“정신 차려요. 그 상태로는 짐짝밖에 안 되니까.”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았다.

무심하게 경고를 던지며 지나친 엘레나가 모종의 수를 써준 것이리라.

론은 그녀의 뒷모습에 고개를 주억이곤 다른 일행에 뒤쳐지지 않게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자, 도착했네. 여기가 목적지야.”

노인이 지팡이 끝으로 땅을 콕콕 찍으며 말했다. 그 말에 론이 얼굴을 찡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노인이 말한 목적지는 어떤 장소라 할 것도 없는, 한창 벌목이 진행 중인 숲의 빈 공터였다.

“손님 대접이 영 부실하군. 앉을 의자도 없고.”

“워낙 갑작스럽지 않았나? 나도 마음 같아선 자네와 느긋하게 차라도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고 싶어. 그야, 신기하지 않나. 내가 아는 야만인은 사람 말이 이렇게 능숙하지 않은데. 내 눈에 자네는, 사람이 야만인의 탈이라도 뒤집어쓴 것 같아.”

“그거 우연인데.”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론이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미소짓고 있는 칸의 눈을 본 순간 몸이 반응했다.

마치, 먹잇감을 두고 군침을 흘리는 포식자와 마주한 것처럼.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거든.”

“비슷하다? 무엇이?”

“내가 아는 주문쟁이들은, 사람처럼 말하는 걸 무척 어려워하는데. 너는 제법 사람처럼 말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난데없는 주문쟁이 비하에 얀이 움찔했다.

그러나 노인은 빙그레 웃을 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기분 나쁜 기색조차 없었다. 그저 지그시- 칸을 응시했다.

“그래, 그 눈이었어.”

“내 눈이 뭔가 이상한가?”

그렇게 말하는 노인의 눈은 웃고 있었다. 여느 짓궂은 노인들이 그런 것처럼. 장난스럽게.

‘쯧. 설마 했는데, 정말 그놈일 줄은.’

칸은 저런 눈웃음을 본 경험이 있다.

이곳 미들랜드로 빙의하기 전, 모니터 너머로 지긋지긋하게 말이다.

“슬슬 장난은 그만하지. 보아하니, 처음부터 이쪽이 올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

노인은 칸의 말에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인형처럼, 일말의 미동조차 없이 눈웃음 지을 뿐이었다.

“수작질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이런 싸구려 연극에 누가 속는다고. 하기야, 사람 감정도 모르는 놈이 겉가죽만 흉내 내봐야 그건 흉내일 뿐. 연기라고 말할 수도 없나.”

“칸.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론의 의문이 제대로 끝맺음을 맺지 못하고 묻힌다.

크하하하하하──!!

그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던 노인의 굉소였다. 그 소리가 론의 말소리를 파묻고, 빈 공터에 메아리치며 점점 커져만 갔다.

다른 일행도 놀라긴 마찬가지였고, 오직 칸과 엘레나만이 평정심을 유지했다.

“하하하하─!! 하하하…….”

그리고 이내 노인의 굉소가 멎는다.

“흐. 이거 놀라운데. 마탑의 꼬맹이는 눈치조차 못 채고 있건만, 웬 계집애와 열등한 야만인이 알아차릴 줄은.”

대체 어떻게 알아챈 거냐? 그렇게 묻는 노인의 목이 기괴한 각도로 꺾인다.

안 그래도 심약한 얀이 그걸 보고 기겁하여 비명을 질렀다.

“키히히. 저 얼빠진 반응을 봐! 그 대단하신 마탑의 마법사도 꿰뚫지 못한 눈속임을 어떻게 간파한 거지? 응? 어서 알려줘! 궁금해. 궁금해 미치겠어!”

‘미친놈.’

안 그래도 불쾌한 놈이었는데, 게임이 아닌 현실에선 불쾌감을 넘어 혐오스러운 수준이었다. 늙은이 주제에 어린 소년 코스프레나 하는 다르킨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어서 대답─해─! 지금 날 무시하는 거야?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 건가? 꼭 내가 이해 가게 만들어줘야 하는 걸까─!”

킥킥킥! 격한 분노를 터뜨린 직후에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린다.

감정의 굴곡이 지나치게 격하다. 그러나 칸은 저것조차 연기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저건 그런 놈들이다.

“인형술사.”

우뚝─.

칸의 나직한 말에 노인이 태엽이 다 감긴 인형처럼 동작을 멈춘다.

그 또한 불쾌하긴 마찬가지라, 칸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니면, 이렇게 불러야 하나?”

“너…….”

“최악의 실패작이자, 되다 만 모조품.”

“너어어어──!”

노인… 아니, 인형술사가 처음으로 제대로 된 반응을 내비치고.

칸이 기껍다는 듯 웃으며 인형술사의 역린이나 다름없는, 현시점에선 진리의 추종자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호문쿨루스라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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