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7화. 호문쿨루스 (3)
시야가 낮군. 정신을 차린 직후, 가장 먼저 떠올린 감상이었다.
‘묘하게 힘도 없는 느낌이고…. 마치 예전 몸으로 돌아간 것처럼.’
힘이 넘치다 못해, 터질듯이 끓어넘치는 야만인의 육체에 완벽히 적응한 칸으로선 몹시 낯선 감각이었다.
특히나 몸뚱어리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어서 더 그러했다.
‘대체 무슨 엿같은 상황이야, 이게…….’
[기억을 엿보고 있는 것이다.]
시발, 깜짝이야. 머릿속에서 울리는 중성적인 목소리에 칸이 움찔했다.
물론, 몸뚱어리가 움직인 건 아니고 그런 기분이었다는 얘기다. 그도 그럴 게 육체의 통제권이 없지 않나.
‘이게 누구 기억인데.’
칸의 물음에 드라우프니르가 웃음을 흘렸다.
어쩐지 비웃음처럼도 들리는 것인지라, 칸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새끼가 갑자기 왜 이리 뻗대지.
[…네놈이 처리한 가짜 버러지말이다. 그놈의 파편을 보고 있는 거다.]
‘왜?’
[그걸 나한테 묻나? 이 기억을 보고 있는 것은 너다. 내가 아니라.]
의뭉스러운 말이다. 기억을 보고 있는 게 칸 자신이라니. 그거야 당연하지 않나.
칸이 궁금해한 것은 그가 이 기억을 어떻게 보고 있냐는 것이었다.
[날 의심하는군.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건 내가 개입한 것이 아니다. 아까도 말했듯, 네가 보고 있는 것이지.]
잘 이해하기 힘든 말에 칸이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기억의 주체, 칸이 보고 있는 기억의 주인이 움직이기 시작한 까닭.
터벅- 터벅-
인형술사로 추정되는 기억은 화려한 복도를 거니는 것으로 시작했다.
칸은 뭐가 나오나 일단 보기나 하잔 심정으로 구경하기로 맘먹었다. 팝콘이 없는 게 조금 아쉽군.
[…….]
드라우프니르는 뭔가 할 말이 있는 기색이었는데, 칸이 입을 다물자 같이 침묵하기로 결정한 듯했다.
복도는 길었다. 보폭을 감안하더라도 몇 분을 꾸준히 걸었는데도 끝이 나질 않는 걸 보면, 엄청나게 큰 공간이라는 얘기였다.
‘그런 곳이 많지는 않을 텐데.’
건축 양식이나, 복도의 장식 따위를 보고 정확한 위치를 헤아릴 만한 식견이 없는 게 안타까울 따름.
적어도 남부 대수림이나 투사의 땅처럼 문명이 정착하지 않은 곳은 아닌 듯했다.
어디 왕국의 성안…. 칸은 그렇게 추측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칸은 이 장소가 어디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한참을 걸어 인형술사가 도착한 장소는 흑색의 철문 앞이었다. 이런저런 문양이 새겨진 걸 보면 보통 장인의 솜씨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철문 중앙의 문양이 눈에 띈다.
방패와 도끼를 쥐고, 말에 올라탄 전사.
‘데일론 후작가.’
아르곤 북부 최대의 세력. 데일론 후작을 뜻하는 문양이다. 기억 속의 인형술사는 지금 데일론 후작가의 내성을 거닐고 있는 것이었다.
“오셨……. 안에서…….”
철문의 옆쪽, 몸을 감추는 공간이 따로 있는지 병사 하나가 대뜸 튀어나와 인형술사를 맞이했다.
“아쉬…. 는?”
“각하와 함…….”
‘잘 안 들리는데.’
[네놈이 처리한 그 가짜의 영혼이 온전한 영혼이 아니라서 그렇다. 인간. 네놈의 ‘눈’이 정상적이지 않은 것도 원인 중 하나일 테고.]
거, 친절한 해설 고맙군. 드라우프니르의 친절한 설명에 칸이 감사를 표하고선 다시 상황에 집중했다.
어쨌건, 갑자기 나타난 병사는 인형술사를 퍽 공손한 태도로 대하고 있었다.
말소리가 툭- 툭- 끊겨서 들리긴 해도, 몸짓이나 표정만으로도 상하관계가 명백해 보였다.
철컹- 철컹-
‘들어가는군.’
둘의 대화는 길지 않았다.
짧은 목례 이후 병사가 철문의 손잡이를 이리저리 만지더니, 손을 쑤욱 집어넣었다. 그러자 철문이 크그긍- 묵직한 소음을 내며 밀려났다.
칸은 병사가 철문을 조작하는 걸 유심히 살피고 머릿속에 담아두었다.
“그럼….”
“시간이 꽤…. 알아서 자리를 비우…….”
철문에 감춰져 있던 공간은 또다시 복도였다.
길지는 않았다. 하지만 벽의 재질도 그렇고, 불 하나 켜놓지 않아 시야가 퍽 어두웠다.
‘방음을 꽤 신경 쓴 모양인데. 어지간히 날뛰어도 무너지지 않을 정도는 되겠고…. 벽면의 모양새도 뭔가 어설픈 느낌. 함정이라도 설치해 둔 건가?’
흑색 철문 너머의 공간은 데일론 후작에게도 굉장히 중요하고, 비밀스런 곳일 터.
당장 시야에 비치는 모든 것들이 일종의 공략 단서나 다름없었다.
북부의 혼란을 수습하려면 결국 데일론 후작을 막아설 필요가 있었다. 지금의 정보들은 그때에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과연 그럴까. 또 무식하게 때려 부수는 식으로 해결할 것이 뻔하거늘.]
누굴 진짜 야만인으로 보나.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근거 없는 비아냥 따위 가뿐히 무시했다.
다른 누가 뭐라건, 칸은 예민한 감성과 뛰어난 지성을 모두 겸비한 현대인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이 복도 너머에 펼쳐질 광경도 대충 예상은 갔다.
‘자기 집에 이런 음침한 공간을 두는 이유야 뻔하지.’
마음 놓고 은밀한 사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이거 아닌가.
게다가 데일론 후작은 귀족에 주문쟁이였다.
따로 놓고 봐도 음흉하기로는 첫째를 다투는 족속들인데, 데일론 후작은 무려 이관왕. 음흉의 끝판왕 같은 녀석이란 말이다.
‘취향 한번 끝내주는군.’
그러한 생각은 복도 벽면에 걸린 것들을 보고서 더욱 강해졌다.
사람들…. 아니, 살아있는 시체들이 복도 벽면에 장식처럼 걸렸다.
시체들은 마치 강시처럼 이마에 종이가 붙어 있었는데, 그 꼴이 정육점의 고기를 연상케 했다.
강시 부적처럼 붙은 종이는, 아마도 실험의 내용 따위를 적어둔 종이 같았다. 마법적 소양이 없는지라 정확한 의미를 알 수는 없겠지만.
‘너는 뭐 알겠냐?’
[…나는 검이다. 마법사가 아니라.]
‘쓸모가 없군.’
[애초에 기억을 보는 주체가 네놈 아닌가! 미친 인간. 나는 네가 보는 걸 옆에서 엿보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어련하시겠어.
마검의 원념과 쓸데없는 말다툼을 나누는 사이, 인형술사가 커다란 공동 같은 곳에 들어섰다.
성안에 이런 비밀공간이 있단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넓은 공간이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실험 기구들과 수북하게 쌓인 종이, 실험체 용도로 쓴 듯한 사람의 시체들.
첫인상부터 흑마법사의 공방이란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고대로부터 악마의 하수인과 마법사의 차이는, 마나와 흑마력. 어느 힘을 쓰느냐에 달려 있었다.]
묘하게 수다스러워진 마검의 말대로였다.
공동 안에서 ‘살아있는 시체’를 이리저리 뜯어보며, 종이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는 허여멀건 멀대의 모습은 흑마법사 그 자체라 해도 무리가 아니었으니.
“아쉬스. 실험은 어떤…….”
“순조롭다. 곧 있으면 결실을 보겠지. 다만 문제가…….”
“실험체의 수급이라면, 내 인형 중 하나가…….”
허여멀건 멀대, 아쉬스라 불린 녀석은 인형술사와 동등한 위치인 듯했다.
아마도 진리의 추종자…. 인형술사와 비교해서도 격이 낮지 않은 놈이리라.
‘…쉽지 않겠어.’
만승후라 불리며 전장을 섭렵한 데일론 후작이다.
그가 부리는 사병들은 왕가의 정예병들과 비교해서 크게 모자라지도 않는 수준이겠지.
거기에 고위계 주문을 쓰는 주문쟁이가 둘, 기사 전력도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을 터.
만약 공략 난이도를 구분하자면, 공략 불가에 한없이 가까운 수준이었다.
‘전면전에서의 토벌은 무리…. 그럼 목표 달성만을 우선해야 하나? 하지만. 북부의 혼란을 바로잡으려면 결국 데일론 후작을 멈추고, 진리의 추종자들을 격살하는 방법밖에…….’
눈앞이 까마득해질 정도로 난해한 공략 난이도에 칸이 바삐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쯤이었다.
“우선, 알파 개체의 상태부터 확인을…….”
‘알파 개체?’
놈들의 목적과 큰 연관이 있어 보이는 단어의 등장이었다.
그 직후. 아쉬스와 한창 복잡한 얘기로 토론을 벌이던 인형술사가 다시금 움직였다.
커다란 공동의 가장 안쪽으로.
안쪽으로 향할수록 공동에 가득한 실험 기구나 글이 빼곡하게 적힌 종이는 줄어들었다.
대신 의미를 알 수 없는 금색 선들이 점점 늘어난다. 아니, 늘어난 게 아니다.
‘애초부터 공동의 안쪽이 중심인 거다.’
제한된 시야로 파악하기는 한계가 있으나, 금색 선이 마법진의 일부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저 선들이 공동의 벽면을 타고 바깥에까지 이어지리란 것까지도.
마법적 안목이 없는 칸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든, 불가해한 직관의 산물이었다.
[…….]
칸의 그 추측을 들었을 게 분명한 드라우프니르는 할 말이 있어 보이는 기색이었으나, 침묵했다.
지금부터 인형술사의 기억 파편이 보여줄 장면이 중요하리란 것을 놈도 짐작한 모양이었다.
“거부 반응은 여전……. 알파 개체의 영적 질량이 꾸준히 하락하고 있……. 우선은 눈으로 보면 알 것이…….”
아쉬스의 말에 인형술사는 고개를 끄덕였고, 아쉬스가 마법진에 마나를 흘려 넣었다.
눈앞의 공간이 일렁인다.
그러자 시야를 차단하는 주문 뒤에 가려져 있던 진짜 공간이 드러난다.
‘이건…….’
인형술사의 시야를 빌려 공간 너머에 있는 걸 확인한 칸이 눈을 가늘게 떴다.
꿀렁- 꿀렁-
벽면에 빼곡하게 붙은, 수십 개가 넘는 투명관에서 수상쩍은 색깔의 액체가 주입되는 중이었다.
그리고 투명관은 마법진의 중심으로 쭈욱 이어져서 붉은 목재로 만들어진 거대한 상자로 삽입되어 있었다.
‘꼭, 시체 넣는 관처럼 생겼군.’
내용물을 생각하면 아예 틀린 표현도 아니리라. 수십 개가 넘는 투명관이 꽂힌 건 다름 아닌 사람이었으니까.
누굴까. 칸은 붉은 관에 들어간 중년의 남자를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알아차렸다.
저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보다 조금 더 끔찍한….
‘……!’
칸의 사고가 멈췄다. 붉은 관에 들어있는 존재가 돌연 눈을 부릅떠 칸과 시선을 마주해온 까닭.
착각이 아니었다.
‘저것’은 인형술사의 시선을 빌려 기억을 엿보는 칸의 존재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묘한 직감이 그 사실을 알렸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어느새 기억의 흐름 또한 멈춘 채였다.
인형술사와 아쉬스가 석고상처럼 굳어버린 게 그 증거. 드라우프니르의 목소리도 끊긴 걸 보면, 오직 칸과 ‘저것’만이 예외인 듯했다.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인형술사의 육체에 갇힌 상태였기에, 칸은 가만히 ‘저것’의 행동을 끝까지 지켜보는 수밖에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저것’은 칸을 뻔히 바라보기만 할 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꼭, 자아가 없는 인형처럼…….
‘대체 뭔….’
당황도 잠시.
금새 평정심을 되찾은 칸이 ‘저것’을 마주 노려보았다. 대체 뭘 하려나 구경이라도 하자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칸이 기대하는 일은 없었다.
스르르─.
처음 눈을 마주쳤을 때처럼, 놈의 눈이 갑작스럽게 닫힌다. 마치 주변의 소란에 잠깐 눈을 떴다가 다시 잠에 드는 아이처럼.
그리고 다음 순간.
지저분하게 자란 콧수염을 정리하지 않은 탓에 난잡한 인상이 강한 중년 남자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중세 놈들 특유의 악취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억!”
본능적으로 못생긴 얼굴을 밀어낸 칸이 몸을 일으켰다. 몸이 움직이는군. 주변 풍경도 바뀌었고.
“갑자기 왜 때리는 거요!”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에 칸이 고개를 돌리자,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론이 보였다. 그 주변에 자리한 일행들의 얼굴도.
‘돌아왔다.’
그 생각에 호응하듯, 드라우프니르의 중성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파편의 힘이 다한 모양이군. 아쉽게 됐어. 중요한 장면이 나올 듯했는데.]
‘못 본 거냐?’
[무얼 못 봤냐는 것이냐. 미친 인간.]
‘못 봤군.’
[그러니까. 뭘 못 봤냐는 것이냐!]
기억의 시간이 멈춘 사이 ‘그것’과 눈을 마주친 일은, 오롯이 칸 혼자서 겪은 일이란 것이다. 꿈처럼 말이다. 남의 기억을 엿보는 동안에 별개의 사건이 발생한 셈인데….
칸은 빨리 설명하라 목소리를 높이는 드라우프니르를 아공간에 처박아두고서, 입맛을 다셨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라고.
“아직 상태가 안 좋은 거요? 혼자서 표정이 확확 바뀌는 게 꼭… 머리라도 다친 건가? 아가씨. 형씨가 머리를 다쳤다고는 안 했잖나?”
“…헛소리는 나중에 하세요. 상황이 급하잖아요?”
“아, 그렇지!”
“급하다고?”
상념을 털어낸 칸의 되물음에 론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억울하게 얻어맞은 건 벌써 기억 속에서 지운 듯했다.
“그래! 상황이 영 심상찮아서, 안 그래도 형씨를 어떻게든 깨워보려고 이렇게 모인 참이라네. 다행히 형씨가 눈을 떠서 다행이지만…….”
칸이 미간을 좁혔다.
뭐 정신을 잃었으면 얼마나 잃었다고. 그가 인형술사의 기억을 본 시간은 체감상 한 시간도 안 되었다. 저렇게 호들갑스런 말투로 말할 정도는 절대 아닌-.
“잠깐. 인형술사랑 싸우고서 지금 며칠이나 지났지?”
말허리를 끊고 날아든 질문에 론이 입을 다물었다. 그 심상찮은 반응에 칸이 얼굴을 굳혔다. 뭐, 하루이틀이라도 지났나? 그 사이에 무슨 일이 터진 거고…?
“열흘이에요.”
뭐? 칸의 멍한 목소리가 장내에 흘렀다.
“그 마법사랑 싸우고, 칸이 정신을 잃고서 열흘이 흘렀어요.”
“…….”
“그리고….”
엘레나는 넋이 나간 것처럼 굳어버린 칸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가 정신을 잃은 사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듣고 나서 칸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이었으나- 꼭 전해야 할 정보이기도 했기에 그녀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북부에 잔존한 도시들의 과반수가 일제히. 왕가에 반기를 들고 독립을 선언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