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화. 반란 (3)
환장하겠네. 무방비한 얀을 노리고 달려드는 기수에게 도약으로 접근한 뒤, 도끼로 단번에 쪼개버린 칸이 중얼거렸다.
“저 계집이랑 비실한 놈부터 노려!”
“저 괴물도 지쳤다! 계속 몰아붙이면 돼!”
‘이래서 용병들이 까다롭다니까….’
쫘악! 가슴팍이 열리면서 튄 피를 닦을 새조차 없었다. 엘레나를 노리고 달려드는 놈들을 향해 재차 도약을 써 달려든 칸이 도끼를 휘둘렀다.
“저는 괜찮아요!”
“아니, 괜히 부딪치지 마라.”
엘레나가 어지간한 용병은 찜쪄먹을 정도로 싸움에 능숙하다는 건 사실이지만, 체급의 차이는 절대적이다.
하물며 상대는 하나같이 말을 타고 있었기에, 더욱더.
론과 마이아가 제법 선전하고 있긴 하나, 결국 칸에게 부담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것도 아닌가.’
오히려 혼자라면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여기까지 도망치는 데에 일행의 역할이 컸으니. 그러니까-.
“슬슬 오는군.”
이럴 때야말로 자신이 힘을 쓸 때라고, 칸은 생각했다.
대단히 X같게 생긴 투구를 뒤집어쓴 놈과 더불어, 상어 이빨처럼 생긴 대검이나 전신에 보석박힌 장신구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등의 괴상한 놈들이 나서는 걸 보면서.
“대빵 출현인가?”
“크흐. 제법 잘 싸우더군.”
오크 면상처럼 생긴 투구를 쓴 놈이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무쇠이빨인가 하는 놈이었다.
“덕분에 손해가 크다, 빌어먹을 야만인 놈. 저것들 다 기르는 데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아나?”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칸이 나지막이 혀를 찼다. 이번에는 장신구를 과하게 착용한 놈이었다. 보석 애호가라 불리는 놈이다.
“사람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게 야만인 아니냐? 그럼 당연히 모르겠지. 돈귀신 녀석아.”
“사람 말은 멀쩡히 하는 것 같은데? 사람 말을 하는 오크처럼 보여.”
“쯧. 악마의 하수인이라잖냐. 사람 말 정도는 악마가 알려줬겠지.”
저들끼리 신나서 떠드는 놈들. 순서대로 톱니검 헤켈과 사형집행인, 붉은 이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용병 업계의 거물들이었다.
론이 말하기를 자기와는 비교도 안 되게 몸값이 비싼 놈들이란다.
‘확실히, 수준이 상당해.’
수하들조차 싸우는 법을 알았다. 저것들을 지휘하는 본인의 실력이야, 보지 않아도 대충 짐작 정도는 가능했다.
‘그래도, 할만하다.’
후웁.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체력을 꽤나 소진했지만, 전투력이 저하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에 감사하며 천천히 왼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흩어져!”
똑똑하네. 놈들의 기민한 반응에 칸이 혀를 찼다.
애매하게 뭉쳐있던 놈들이 사방으로 나뉘어지고, 톱니검 헤켈이라는 생선처럼 생긴 자식만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았다.
별명에 걸맞게 생긴 특이한 대검을 든 채로.
‘뭔 자신감이지?’
작은 의문이 떠오르는 가운데. 칸의 도끼가 헤켈의 톱니검과 맞부딪쳤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굉음이 터지고, 무릎이 땅에 박힌 헤켈의 목을 부러뜨리려던 칸이 고개를 꺾었다.
쉬익. 바람이 새는 듯한 소리와 함께 덥수룩한 머리 일부가 잘려나가는 감각. 그것이 얇은 레이피어가 일으킨 결과라는 걸 눈을 흘겨 알아낸 칸이 손을 뒤로 뻗으려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어딜 가려고.”
까드득- 마치 톱니가 맞물리는 것처럼, 헤켈의 톱니검이 칸의 도끼를 물고 늘어진다.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기사도, 성기사도 아닌 고작 용병 따위가. 칸의 일격을 받아내고도 멀쩡히 살아서 움직이는 것 자체가 말이다.
“끝내주는군! 이 검…!”
“방심하지 마!”
앞에는 광소를 터뜨리는 헤켈이, 뒤에서는 레이피어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사형집행인의 목소리가 칸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와 반대로 몸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톱니검에 붙잡힌 도끼를 쥔 팔을 털어내듯 털었다.
그에 헤켈의 몸이 통째로 딸려왔다.
다시 한번 뒤에서 찔러 들어오는 레이피어를 제자리에서 회전하는 것으로 회피했다.
쉬익, 뒤늦게 레이피어의 바람 소리가 따라왔다. 설마 보지도 않고 피할 거라곤 생각지 못한 사형집행인의 당혹스런 목소리도.
“이거, 마도구군.”
“제기랄……!”
톱니검에 휘둘리듯 공중에 몸이 붕 뜬 헤켈을 칸이 발로 걷어찼다. 감촉이 미미했다. 몸을 보호하는 마도구까지 끼고 있었나?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 걸 보면, 일회성이지만 방어력은 확실한 유형의 마도구인 듯했다. 그게 놈의 목숨을 살렸다.
그러나 미친 게 아니라면 알아서 물러날 터였다. 놈이 칸과 싸울 수 있게 만들어준 톱니검이 발치에 나뒹굴고 있었기에.
칸은 헤켈에게서 주의를 거두었다.
‘일단 하나.’
“다음.”
등을 돌리자 마찬가지로 등을 보이고 도망가는 근육질의 몸뚱어리가 보였다. 오크가 이쑤시개를 든 꼴이구만.
놈의 레이피어에서 느껴진 심상찮은 예기를 머릿속에 기억해둔 칸이 드라우프니르를 검집째로 휘둘렀다.
[뜨겁다니까!]
어쩌라고. 불덩어리를 옆으로 쳐낸 칸이 눈을 찡그렸다.
번쩍거리는 반지를 치켜든 보석 애호가의 손에서 밝은 빛이 터지고 있었다. 놈이 전신에 주렁주렁 달고 있는 것들이 전부 마도구였다.
“마법을 쳐내?!”
“악마의 하수인이 뭔들 못하겠나!”
오크 면상의 투구를 쓴 무쇠이빨 에릭슨이 덤벼들었다. 그 반대에서는 레이피어를 든 사형집행인이 조심히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전투 망치와 레이피어, 여신의 신성이 깃든 도끼가 어지럽게 얽힌다. 직접적인 충돌에선 기사조차 물러나게 만드는 칸이었는데, 이놈들은 잘도 덤벼들었다.
게다가 이따금 날아드는 견제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보석 애호가의 주문을 검집으로 쳐내기 위해 낭비되는 움직임 사이사이 레이피어가 날아들고, 그걸 피하기 위해 발을 놀리자니 전투 망치가 내리찍혔다.
‘데면데면한 놈들이라더니, 쿵짝은 존나 잘 맞네.’
무엇보다 거슬리는 건, 멀찍이 떨어져서 이쪽을 관망하는 녀석이었는데, 붉은 이리라는 별명답게 얼굴이 붉은 놈이었다. 무슨 관우도 아니고…….
문제는 놈이 얼굴값을 하는 놈이란 거다.
“흠.”
싸우는 사이에 정확한 빈틈이 보인다 치면, 놈이 노골적일 정도로 손발을 움찔거렸다.
금방이라도 손에 쥔 창을 던질 것처럼 말이다.
당연히 그 움직임을 신경 쓸 수밖에 없었고, 그게 바로 놈의 노림수일 터였다.
“생각보다 별거 없잖냐!”
“거, 템빨로 깝죽대기는.”
무쇠이빨의 전투 망치가 칸의 도끼를 밀어냈다. 정확히는 밀려나 준 것이었다.
쉬익. 칸이 있던 자리를 레이피어가 꿰뚫는다. 그 순간 칸의 눈이 맹수처럼 번뜩인다. 빈틈….
쒜엑──!!
사형집행인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레이피어를 쥔 팔이 하늘을 날았고, 무쇠이빨이 투구 안에서 눈을 크게 떴다.
‘둘.’
숫자를 세는 동시에 사형집행인의 팔을 날린 드라우프니르를 눕혔다. 그러기가 무섭게 회색의 섬광이 검면을 때렸다. 묵직한 충격에 절로 이를 악물었다.
‘관우가 납셨군.’
호리호리한 체격에 비해 투창의 위력이 상상을 초월했다. 어느새 놈이 손에 쥔 투창기가 보였는데, 그 생김새가 범상치 않았다. 저것도 마도구였다.
마도구 박물관이 따로 없네. 불평을 토하며 휘둘러진 전투 망치를 향해 도끼를 마주 휘둘렀다. 꽝-.
처음부터 지금까지. 전력을 다하지 않은 칸의 심리전이 빛을 발했다. 놀란 눈으로 엉덩방아를 찧는 무쇠이빨의 투구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쩡……!
놈이 회피를 시도한 탓에 주먹이 빗겨나갔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골을 울리는 충격으로 사실상 죽은 거나 다름없을 테니까. 그러나 방심하지 않았다.
칸의 주먹이 재차 오크 면상처럼 생긴 투구를 두들겼다. 놈이 자랑거리로 삼는 이빨이 우그적 박살 났다. 마도구가 부서지는 소리도 들렸다.
방어막이 물렁해서 일격에 깨진 듯했다.
“이젠 그냥 무쇠네.”
셋. 속으로 숫자를 읊은 칸이 남은 두 녀석을 향해 몸을 돌렸다.
“다음.”
다소 힘이 빠지려는 걸 억지로 의식해 목소리를 쥐어짜냈더니, 돌아오는 건 말을 탄 것들의 돌격이었다.
“너넬 부른 건 아니었는데.”
드라우프니르의 예기에 괴력을 싣고서 휘두르자 두 쌍의 인마가 통째로 잘려나간다. 갑옷조차 입지 않은 놈들이니, 별다른 검술이 없어도 손쉽게 싹둑 썰렸다.
‘잘 버티고 있군.’
잠깐 여유가 생겨 일행이 있는 쪽을 흘겨보자, 예상외로 선전하고 있었다.
“왼쪽으로! 다음에는 앞으로 돌파!”
론이 말하는 방향으로 위치를 수시로 옮기면서 돌격을 흘려내는데, 그 방향이 몹시 정확했다.
자각 없이 제 스킬을 활용하던 전과 다르게, 이제는 제법 능숙하게 다루는 듯했다.
게임에서도 그랬다. 시간이 흐르면서 NPC들도 플레이어와 함께 성장을 하고, 스킬을 각성하는데 론의 경우엔 처음부터 길잡이용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칸과 함께 수많은 전장을 전전했으니 성장세가 가파를 수밖에.
“주문으로 막을게요!”
거기에 상태를 회복한 얀이 가세하면서 더욱 여유가 생긴 듯했다. 적어도 당장 칸이 도와줄 필요는 없어 보였다.
서걱.
잠시 구경하는 사이에 덤벼든 기수를 벌레 쫓는 손짓으로 반쪽 낸 칸이 씨익 웃었다.
“나머지 둘. 안 덤비나?”
마치 사냥감을 앞둔 늑대의 그것처럼 느껴지는 섬뜩한 미소에, 자신이 사냥꾼이라 착각했던 양들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
*
*
“뭐, 이 정돈가.”
“괴, 괴물이….”
“죽기 전에 해야 할 말이 정해져 있는 거냐? 너희는.”
남은 둘, 보석 애호가와 붉은 이리의 숨통을 끊어놓은 칸이 도끼를 휘휘- 털었다.
‘수지는 나쁘지 않군.’
여유가 없어서 전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용병단의 대장들이 떨군 장비들만 루팅해도 수확이 상당할 게 분명했다.
특히 보석 애호가는 걸어 다니는 마도구 박물관이라 봐도 무방한 수준이어서, 적당한 판매처만 찾는다면 금화 몇십 장은 챙길 수 있을 터.
무엇보다 녀석들이 쓰는 장비들 중. 헤켈의 톱니검이나 무쇠이빨의 망치, 사형집행인의 레이피어는 평범한 마도구가 아니었다.
‘이것들 전부, 네 복제품 아닌가?’
[복제라니? 이런 어설픈 가짜는 나의 모조품조차 되지 못한다!]
드라우프니르가 난리 치는 것과는 반대로, 용병단의 대장들의 무기가 마검의 복제품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만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피 빨린 흔적이 없어.’
드라우프니르도 그렇고, 그 복제품도 그렇고 사용했을 때의 흔적은 비슷했다. 이성을 잃은 채 날뛰고, 마검에게 피를 빼앗겼었지.
그런데 이놈들은 그렇지 않았다.
정교한 합공을 가할 정도로 이성이 또렷했으며, 시체에는 피를 빼앗긴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진리의 추종자… 인형술사가 모종의 수확을 얻은 건가?’
그렇다면야 영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이전에 전투에서 인형술사는 죽지 않았으니까. 생각보다 시원찮게 오른 경험치가 그걸 증명했다.
“형씨. 대충 정리 끝났네. 말은 세 마리 정도 살려뒀는데….”
“말은 필요 없다. 여기서 맞받아칠 거니까. 아니… 한 마리 정도는 필요하겠어.”
“…진심인가? 그들이 전해온 게 사실이라면, 그냥 거리를 벌리는 게 나을 텐데.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목적지고.”
“꼬리를 달고 가면 저쪽도 나타나지 않을 거다. 차라리 나타날 수밖에 없도록 판을 짜야 해.”
론은 아리송한 얼굴이었지만, 일단은 칸의 말에 수긍한 듯했다. 지금까지 보여준 칸의 모습을 믿고 따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칸은 조용히 계획을 수정한다.
‘인형술사가 대공의 곁에 있다고 가정하면, 확실한 팻감을 보냈겠지. 최소한 내게 큰 부상을 강요할 정도로는…….’
용병단은 애초부터 자신의 발을 묶기 위해 보낸 사냥개들이고, 진짜는 따로 있다는 얘기였다.
그건 대공과 함께 전장을 누볐다는 정예병들일 수도 있겠고, 대공의 곁을 지키는 기사들일 수도 있다. 그도 아니면 둘 다-.
“얀. 쓸 수 있는 주문은 얼마나 되지?”
“큰 거로는 세 개…. 시간만 충분하면 그 이상도 가능해요. 마석을 좀 써야겠지만…….”
“마석은 이놈들이 떨군 게 있으니까 그걸 써. 그리고 엘레나. 쓸 수 있는 축복을 알려줘라. 마이아, 너는 이걸 가지고…….”
최근 들어서는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는 방식으로 일을 해결하는 경향이 있지만, 본래 칸이 선호하는 방식은 이쪽에 가깝다.
변수를 차단하고, 적의 알고리즘과 패턴을 낱낱이 파헤쳐가며 최적의 한 수를 골라내는….
‘오랜만이군.’
마치 컴퓨터로 ‘미들랜드 퀘스트’를 플레이하던 때로 돌아간 기분에, 칸은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대공의 깃발과 함께 여섯 명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낸 건, 칸 일행이 준비를 마쳤을 때쯤이었다.
“이거, 생각보다 빠듯하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