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야만전사-72화 (72/132)

#072화. 반란 (4)

“흠. 저놈인가? 대공께서 말한 야만인이.”

“그렇소. 북부에 저주를 퍼뜨린 장본인, 알-로렌느에선 참수자라 불리던 야만인 본인 아니냔 말도 있던데.”

“거창한 별명이네요. 예전에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아, 그러고 보니 알바로 경이 그쪽 출신 아니었나요? 좀 아는 게?”

“……없다.”

“딱딱하긴.”

“잡담은 거기까지 해라. 저쪽도 뭔가 대비를 한 모양이니.”

대공의 기사들 중에서 암암리에 우두머리 취급을 받는 로드리고 경이 기사들의 잡담을 멈췄다.

그는 비교적 작은 체구에 호리호리한 몸집을 하고 있었지만, 다른 기사들이 은연중에 그를 어렵게 여기는 것이 티가 날 정도였다.

‘쯧. 저 양반은 더 강해졌네.’

가벼운 말투로 알-로렌느 출신의 알바로에게 이죽이던 대공의 기사, 마틴이 짧게 혀를 찼다.

당장 몇 주 전까지만 해도 후작가의 기사였던 그들이 엘펠란 대공국의 로열가드로 불리게 되었지만, 거기서 더 강해지진 것은 아니었다.

물론, 더 나은 대우와 함께 질 좋은 장비를 받기는 했다마는-.

‘저 수준이면, 진짜 왕가의 로열가드도 물러서야 할지도 모르지.’

그러나 반백 년에 이르도록 대공을 모신 늙은 기사는 다른 사람이라 착각할 정도로 그 기세가 일변했다.

그 전에도 대공의 기사들 중에서 최강을 논하는 실력자긴 했지만, 지금은 아예 격이 다른 수준이라고 할까.

마틴은 노기사에 대한 의구심을 삼키며 당장의 상황에 의식을 돌렸다.

마침 그 로드리고 경이 그들의 표적에게 다가가고 있었기에.

“악마의 하수인 아니랄까 봐. 화려하게도 저질렀구나. 너 야만인아…. 지금이라도 얌전히 붙잡혀라. 대공께서는 네놈이 북부에 퍼뜨린 저주를 도로 되돌려놓기만 한다면, 얼마든 자비를 베푸시겠다 하셨으니.”

“대단한 자비군.”

명백한 비꼼에도 로드리고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마틴이 생각하기에 그건 조용한 분노에 가까웠다. 몹시 차갑고, 정제된….

저 충직한 노기사는 제 주군을 모욕하는 말을 듣고도 가만히 넘어갈 만큼 이해심 넘치는 위인이 아니었으니까.

“거절한 것으로 알겠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오지 않았나?”

예상외로 야만인의 입심이 대단했기에 마틴은 자기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내 로드리고의 엄한 눈총을 받고 고개를 꾸벅여야 했다마는.

“그래서…. 어쩌시렵니까? 저희가 다 나선 마당에 경이 먼저 검을 쥐는 것도 다소 격에 맞지 않는 일 아닌지.”

큼- 큼- 입을 다신 마틴이 로드리고의 자존심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그렇다고 아예 빈말도 아닌 것이, 으레 기사들은 제 체면과 주인의 명령을 첫 번째로 여기는 까닭에 다 같이 우르르 덤비는 걸 몹시 경멸했다.

특히 대공의 로열가드가 된 이후로는 자연스레 그러한 경향이 더 강해졌다.

‘흠, 누가 먼저 나서려나. 히메스는 비열한 놈이라 나중으로 미룰 테고, 그나마 자존심 강한 페드로나 플로나 쪽이…….’

“가능하다면, 내가 직접 나서고 싶소. 로드리고 경.”

“알바로, 자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기사, 알바로의 모습에 로드리고는 물론이고 마틴도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원인 모를 사건으로 주군을 잃고, 그 주군의 첫 부인을 줄곧 섬기다 그녀가 대공가에 편입되면서 저절로 로열가드가 된 알바로다.

그 이후로도 대공의 명령이 없을 땐 조용히 주군의 첫 부인의 일에만 관여하던 그 알바로가, 갑자기 나서겠단 의견을 낸 것이다.

“자네 실력이라면 괜찮겠지. 다만 방심하지 말게. 어떤 비열한 술수를 부릴지 모르니까.”

“…그럴 일 없소. 적어도 나는.”

그 호언장담에 더욱 의문이 커지는 한편, 뚱한 눈으로 이쪽의 사담을 지켜보던 야만인이 입을 열었다.

“그냥 한꺼번에 덤벼도 비겁하단 말은 안 할 건데.”

“건방진 것은 여전하구나. 추잡한 야만인 놈.”

“날 아나? 그쪽같이 생긴 깡통은 본 적이 없어서.”

“…그 잔망스러운 혓바닥도. 그때와 똑같군.”

뭐지, 둘이 진짜 아는 사인가? 마틴은 이내 알-로렌느의 참수자가 바로 저 야만인이고, 알바로와도 연이 있음을 눈치챘다.

그 연이 꽤나 심상치 않은 것이라는 것도….

“무기를 들어라, 야만인. 네놈을 죽이고, 그 목을 주군의 무덤에 바칠 테니.”

“거…. 누구 무덤에 바친다는지 전혀 모르겠지만, 불가능할 거란 말만 해두지.”

“들─어─!”

멀리서도 선명히 느껴질 만큼 저릿한 살기에 마틴이 흠칫 놀랐다.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리고 야만인이 손에 도끼를 들었고, 알바로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쾅. 오러로 육체를 강화한 알바로의 신형이 야만인의 코앞에 나타났다. 마틴은 알바로가 여태껏 전력을 숨겨왔음에 놀라고, 이어지는 광경에는 경악하고 말았다.

“악마의 힘인가…?!”

대공의 기사들 중 유일한 여성인 플로나의 새된 목소리에 마틴이 내심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놀랍게도, 야만인은 오러에 휘감긴 알바로의 검을 고작 도끼 한 자루로 막아냈다.

게다가 힘겨운 기색조차 없었다. 되레 도끼 자루를 비틀어 검을 흘려내는 여유까지 선보였다.

“흡!”

그러나 전력을 드러낸 알바로도 만만치 않았다.

끼기긱-!

알바로가 손목을 꺾어 야만인의 수작을 봉쇄하고, 오러를 덧씌운 건틀릿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뻐엉!

묵직한 파공성이 뒤늦게 울린 뒤로, 야만인의 몸이 긴 고랑을 남기며 밀려난다.

알바로는 그 자리에서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검이 닿기엔 한참이나 먼 거리지만, 오러를 지닌 기사에겐 충분한 거리였다.

낭창낭창 뻗어 나간 오러가 야만인을 향해 올곧게 쏘아진다. 그 크기가 예사롭지 않아 뒤에서 지켜보던 마틴이 눈을 크게 떴다.

‘대단한데.’

솔직한 감탄이다. 당장 마틴만 해도 짧은 새에 저만한 오러를 쏘아낼 수는 없었다. 악마의 힘을 빌린 야만인도 여기서 끝이리라….

“아, 기억났다.”

그때 야만인이 얼굴에 묘한 웃음을 띄웠다.

“진실이니 뭐니, 깝죽대다가 총지부장한테 줘 터진 그놈이군.”

“닥─쳐─라─!”

오러의 폭풍이었다. 격노한 알바로의 검에서 피어난 오러의 기류가 야만인의 신형을 완전히 집어삼킬 것처럼 불어났다.

마나라는 이적을 다루지 못하는 반푼이 종족에겐 사형선고와도 같은 일격.

그에 대한 야만인의 대응은 퍽 간단했다. 도끼를 전력으로 여러 번 휘둘러 오러를 쳐내는 것.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는 마틴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야만인에겐 별거 아닌 일인 듯했다.

“실력이 좀 늘었는데? 그때는 완전 좆밥이었잖아?”

노골적인 비아냥에 알바로가 재차 오러의 격류를 일으켰다.

다만 그 형태가 달랐다. 알바로의 검을 중심으로 오러가 와류를 형성하고, 점차 거대한 대검의 형상을 갖추었다.

그 크기가 알바로의 배는 되었다.

이번에는 야만인도 가만히 받아칠 수 없었는지, 뒤로 물러나는 선택지를 골랐다.

거대한 오러의 대검이 땅을 박살 내며 깊은 상흔을 남기고, 곧장 야만인을 향해 짓쳐들었다.

쩌저적. 콰가각──!!

사람의 손에서 휘둘러진 검이 내는 소리라 믿기 힘든 굉음이 연이어 터진다.

갑옷을 짓이기고 바위를 부수는 검격이 연속으로 펼쳐짐에 야만인이 속수무책으로 밀려난다. 완전히 수세에 몰린 것이다.

“생각보다 싱겁군요. 야만인이 악마의 하수인이 됐으니, 꽤 까다로울 거라 생각했는데. 알바로 경이 그만큼 강한 걸까요.”

“그렇겠지요. 이거, 알바로 경이 이렇게 강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요. 저 같은 건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

강직한 플로나와 비열한 히메스가 떠드는 소리에 마틴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야.’

분명 전력을 낸 알바로는 강하다. 하지만 야만인의 움직임 또한 상식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마틴이 진중한 눈으로 두 초인의 전투를 눈에 담았다.

쩌억! 쾅─!

덩치에 걸맞지 않은 기민함으로 알바로의 검격을 모두 피해내던 야만인이 비스듬히 세운 도끼로 오러의 충격을 완화하고, 밀어내는 힘에 몸을 맡긴 채 거리를 벌린다.

그러다 허리띠에서 꺼낸 단검을 투척하는데, 불안정한 자세로도 정확히 갑옷의 이음새를 노리고 던졌다.

알바로가 오러의 대검으로 몸통을 가려 막은 탓에 효과는 없었지만, 마틴은 야만인의 투척술에 주목했다.

‘으레 야만인들은 평범한 인간을 압도하는 신체능력이나, 본능에 따른 전투술이 전부라 하지. 그런데 저놈은…….’

검격의 궤도로 도끼를 비집어 넣어 충격을 최소화하는 임기응변과 정교한 기술. 그리고 무엇보다-.

“이만하면 그놈도 놀라겠군. 이기지는 못하겠지만.”

“으아아아─!”

저 간교한 혓바닥이 가장 놀라웠다.

야만인은 대부분이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족속이라 들었는데, 저 야만인은 능숙한 왕국어로 끊임없이 알바로를 도발했다.

그리고 어찌나 입심이 매운지, 평소 감정의 동요가 없는 거로 유명한 그 알바로가 맞나- 할 정도로 반응이 격렬했다.

‘어쩔까…….’

마틴은 허리에 걸린 검을 어루만지며 입맛을 다셨다.

‘생각보다 지지부진해. 야만인의 일행이란 것들도 나설 생각은 없어 보이고…. 뭔 꿍꿍이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이런 식으로 시간이 끌리는 것도 성미에 안 맞…….’

“커헉!”

애써 억누르려 했으나 속절없이 새어 나온 신음이 마틴의 이목을 끌었다. 다름 아닌 알바로의 입에서 터진 소리였기에.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는 알바로의 갑옷 가슴팍이 움푹 패였다.

감정에 몸을 맡긴 채 공격을 이어나가다 드러난 빈틈, 그 순간에 칸의 주먹이 정확하게 들어간 것.

“더럽게 단단하네.”

제 놈이 행한 짓이 얼마나 무지막지한 짓인지 이해를 못 하는 걸까. 마틴은 그럴 거라 생각했다.

기사들이 장비하는 갑옷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방호력을 지닌다.

평범한 창칼로는 아무리 두드려봐야 약간의 충격 이상의 효력을 내지 못할 만큼.

거기에 일정 수준에 이른 기사들은 오러를 갑옷에도 얇게 두르는 게 가능했다.

안 그래도 단단한 갑옷이 오러의 보호 아래에서 절대의 성벽이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모든 대공의 기사들은 방호 주문이 각인된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걸 맨주먹으로 두들겨서 우그러뜨렸다?

단순히 육체가 강인하다고 해서 가능한 짓거리가 아니었다.

설령 그 대단하다는 흑익공의 대전사라도 불가능할 테고, 괴력으로 유명한 그린스킨 투사들에게도 힘겨운 일이리라.

‘악마의 힘…!’

그래. 저건 명백히 악마의 힘을 빌렸다는 증거다!

마틴은 여기까지 오면서 반신반의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 저 야만인이 진정 악마의 하수인이라고 확신했다.

스릉-.

일대일의 결투니, 기사의 명예니, 그런 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다.

대공의 기사들 중에서 검술도, 신체의 단련도 어중간한 마틴이지만, 그가 유일하게 자신하는 부분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멀리서 상황을 관망하던 마틴이 저도 모르게 발을 내디뎠다.

발바닥 아래에서 오러를 터뜨리는 방식으로 순식간에 가속한 마틴의 신형이, 충격에 의해 연신 밀려나는 알바로의 뒤로 겹쳐지듯 나타났다.

말도 안 되는 가속이었다. 그야말로 쏜살같이 거리를 좁힌 마틴이 사전에 준비한 동작에 따라 그대로 검을 내쳤다.

결투에 난입한 존재를 깨닫고서 알바로가 무어라 입을 열려 했지만, 마틴의 검이 훨씬 빨랐다.

‘적어도 팔 하나쯤은 가져간다!’

악마의 하수인들은 으레 그렇듯, 위기에 몰리면 제 주인에게 빌어 힘을 내려받는 식으로 발악을 하기에. 처음의 기습으로 최대한의 이득을 볼 생각이었다.

마틴의 검이 폭발적인 속도로 찔러 들어간다. 야만인은 여전히 반응조차 못 한 듯, 알바로를 향해 도끼를 휘두르는 도중이었다.

성공이다. 마틴은 가속한 시간 속에서 쾌재를 불렀다.

“그럴 줄 알았지. 명예도 모르는 깡통들.”

뭐? 마틴이 무어라 반응할 새조차 없었다.

갑자기 발밑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그것의 정체가 마법진이라는 걸 깨닫기도 전에 무형의 힘이 마틴을 강하게 밀쳐냈다.

그 탓에 검의 궤도가 크게 틀어지고, 애꿎은 허공을 꿰뚫고 말았다.

파앙─. 파공음이 뒤늦게 따랐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낭패감을 느낄 새조차 없이 마틴이 허리를 비틀었다. 공중에서 장검을 내리찍어 야만인을 벨 생각이었다.

“거기, 조심.”

그때 야만인이 비열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마틴은 그 자세 그대로 검을 크게 반원으로 올려쳤다. 야만인이 아니라, 자신의 측면을 향해. 쩡……!

투창이다. 마도구의 힘을 빌린 건지 오러로 육체를 강화한 상태인데도 손이 저릿했다.

창이 날아온 방향을 본능적으로 응시하던 마틴이 뒤늦게 아차 싶어 야만인에게로 주의를 돌렸으나, 이미 늦은 뒤라는 걸 깨달았다.

“어디, 사악한 도끼 맛 좀 봐라.”

면갑 사이로 보이는 시야를 가득히 채운, 야만인의 도끼가 마틴의 코앞에 있었으니까.

비명조차 없었다. 나무를 쪼개는 것과 비슷한 소리가 나더니 야만인의 도끼가 마틴의 얼굴 깊숙이 박혀 들어가고, 대공의 로열가드였던 기사는 일개 도끼 거치대가 되었다.

“…….”

“…….”

그 광경을 황망한 눈으로 지켜보는 기사들.

그에 야만인은 열렬한 시선들에 의연한 태도로 비웃음을 흘렸다.

“악마의 도끼라 그런가. 성능이 끝내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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