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3화. 반란 (5)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기사들을 비꼰 칸이 옅게 호흡을 골랐다.
‘미친 깡통자식. 뒈지는 줄 알았네.’
대충 보이는 기세로 재봤을 때 깡통 3호쯤 되는 녀석이 기습을 해왔는데, 하마터면 반응이 늦어서 꼼짝없이 당할 뻔했다.
엘레나의 축복으로 민첩 스탯이 오르지 않았더라면, 꽤 큰 상처 하나를 내어줘야 했을 터였다.
그래도 처음의 계획대로 일이 풀리긴 했다.
‘깡통 4호랑 드잡이질하면 누가 덤벼올 거라고 생각은 했지.’
어차피 말로만 명예를 부르짖는 족속이 기사 아니던가.
얀을 시켜 준비해둔 마법진으로 빈틈을 만들고, 그 틈을 노려 확실히 숫자를 줄이는 데에 성공했다.
갑자기 덤빈 깡통 4호도 가슴을 제대로 얻어맞았으니, 한동안 호흡 자체가 힘들 게 분명했다.
오러로 강화된 신체이니만큼 금방 회복하기는 하겠다만.
‘자, 이제부터가 진짜다.’
손 안에서 도끼 자루를 굴린다. 그러면서도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이도록, 의식적으로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다음 안 덤비나? 어차피 이미 바닥에 떨어진 명예라도 수습해보고 싶은 건가…. 그냥 처음부터 다굴을 치지 그랬나.”
남은 깡통은 다섯.
깡통 2호로 추정되는 기사의 몸은 몹시 여리여리했다. 꽤 드물게도 여인의 몸으로 기사가 된 듯했다.
무장은 검신이 짧고 얇은 세검. 사형집행인처럼 찌르기를 주특기로 삼은 놈이리라.
3호는 이미 처리했다. 4호는 당분간 정신을 못 차릴 예정이고….
5호는 양 허리에 장검을 찬 걸 보니 쌍검을 쓰는 모양에, 가장 처지는 6호의 경우 그린스킨 투사들이나 쓸법한 곡도 형태의 무기를 썼다.
‘가장 중요한 깡통 대장은….’
잘 읽히지 않는다.
무장이야 일반적인 형태의 장검을 다루고, 다른 놈들과 달리 더 좋은 갑옷을 입은 듯했는데-.
‘실력을 가늠할 수 없다.’
최근 들어서 묘하게 직감이 날카로워진 칸이었다. 그런데도 깡통 대장의 실력을 대강으로라도 파악하는 게 힘들었다.
자기를 대공이라 칭하는 반란군 수괴 놈은 원래부터 고위 귀족이다.
그 아래에서도 가장 강한 놈이라면, 지금까지 상대한 기사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인 강자인 게 당연하다. 그래도 실력을 아예 가늠할 수 없는 정도라니?
‘최대한 버텨보는 수밖에. 어차피 내 목적은 다 쳐 죽이는 게 아니라…….’
생각을 정리한 칸이 긴장감을 속으로 삼켰다.
“어이. 나 혼자 떠드나? 그냥 들어오래도.”
“반푼이 종족 따위가 감히. 악마의 힘을 믿고 설치는구나.”
그때 여기사, 깡통 2호가 제 검을 뽑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 외에도 깡통 5호와 6호가 차례대로 뒤를 따랐다. 다행히 깡통 대장은 나서지 않을 모양이었다.
‘이만하면…….’
속으로 대강의 전투를 그릴 필요는 없었다. 그 전에 깡통 트리오가 쇄도한 까닭이다.
첫 일격은 역시나 깡통 2호였다. 깡통 3호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빠른 속도에 도끼를 눕혀서 방어하자, 오러의 묵직한 충격이 몸을 밀어냈다.
일반적으로 꿰뚫는 방식의 찌르기를 생각하면 된통 당할 게 분명한 힘. 기사들이 이래서 까다롭다. 오러는 사용자의 역량만 받쳐준다면 어떻게든 써먹을 수 있으니까.
이격으로는 쌍검이 옆구리를 노렸다.
면갑 사이로 뱀과 닮은 눈깔이 비열한 빛으로 일렁였다. 도끼로 한 자루를 쳐냈지만, 쌍검의 다른 쪽이 순간적으로 오러를 길게 내뿜었다.
머리를 한계까지 꺾으며 이를 회피했다. 펑- 검의 궤적을 따라 오러가 공기를 밀어내고, 그 충격으로 살짝 골이 울렸다.
멀미가 나는 것 같아서 짜증을 내듯 칸이 발을 뻗었다.
통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끼어든 깡통 6호가 검면으로 발을 받아낸 탓에 오히려 자세가 무너졌고, 무방비해진 상태를 노린 2호의 세검이 어깨를 찔렀다.
[도약]
6호의 검을 발판 삼아 뒤로 뛴다.
쿠당탕- 바닥을 몇 번 굴렀지만 제법 성공적인 회피 기동에 칸이 만족스레 웃으며 아에카리스의 주머니를열었다.
[늦었다.]
‘수다스러운 놈.’
드라우프니르가 머릿속에서 킬킬대는 소리를 들으며 양손에 마검과 여신의 축복이 깃든 도끼를 쥐었다.
깡통들이 허공에서 무기를 꺼낸 자신의 모습을 보고 악마의 힘이라며 떠드는 걸 보고 칸도 드라우프니르처럼 낄낄 웃었다.
‘악마의 힘이 맞기는 하지.’
누구의 신호랄 것도 없이 싸움이 재개되었다.
깡통 2호와 6호가 동시에 양 측면을 공략해오고, 그 뒤를 쌍검을 쓰는 5호가 뒤따랐다.
도끼와 마검을 교차하듯 휘둘러 첫 일격을 받아낸다. 아니, 역으로 밀어낸다.
오러로 강화된 육체로도 칸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한 깡통들의 자세가 미미하게 무너졌다. 그렇게 생겨난 잠깐의 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칸이 앞으로 뛰었다. 그대로, 공중에 몸이 뜬 상태에서 칸이 마검을 내리찍었다.
불안정한 자세로 마검을 받아낸 2호의 몸이 땅에 박히듯 주저앉았고, 곧장 도끼로 머리를 쪼개려던 칸이 하던 행동을 멈췄다.
“까불지 마라!”
쌍검의 연격이었다.
두 자루의 쌍검이 수많은 허상을 남기며 어지러이 쇄도하는 가운데. 칸의 눈동자가 바쁘게 굴러갔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건 의미가 없다. 모든 오러의 궤적이 실체를 가진 공격이었으니까.
마검과 도끼, 오러의 푸른빛이 짧은 사이 열 번도 넘게 부딪치고 깨졌다. 그 횟수가 스무 번이 넘어갈 즈음부터는 칸의 손발이 점차 뒤엉키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5호의 검격은 시간이 지날수록 복잡함을 더해간다.
‘염병.’
언제 눈을 감았는지도 모르겠다. 쌍검의 움직임을 쫓으며 대응하기에 급급했던 까닭이다.
단순 효율적으로 무기를 휘두르는 게 전부인 칸. 체계적인 검술을 토대로 기술을 펼치는 기사의 차이가 극명히 드러나는 지점이 온 것.
흐름을 끊어야 했다.
쾅─!!
연격에 대한 대응을 포기. 오히려 앞으로 달려드는 칸의 몸에 상처가 늘어난다.
하지만 칸은 고통을 모르는 것처럼 더욱더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점점 5호의 몸이 뒤로 밀려난다. 의식한 게 아니라 자연스레 그렇게 된 것이고, 칸이 유도한 바이기도 했다.
제아무리 오러로 강화된 신체라도 호흡을 무한정 참을 수는 없다. 연격이 무뎌지는 시점만을 기다리던 칸이 눈을 빛내며 다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거기까지 한 호흡.
“……!”
지나치게 좁혀든 간격에 기겁한 깡통 5호가 칸을 밀어내려 했다.
그게 바로 놈의 실수였다. 녀석은 받아치는 게 아니라 뒤로 뛰어 거리를 더 벌려야 했다.
검격의 위력이 온전하게 발휘될 수 없는 간격. 그 거리를 본능적으로 찾아낸 칸의 도끼가 불을 뿜었다. 크거걱-!
깡통 5호의 가슴이 크게 열리고, 칸의 어깨에선 피가 튀었다. 대신 깡통 2호의 세검이 칸의 어깨를 꿰뚫는 것을 넘어, 살점을 크게 파먹었다.
그러나 칸은 멈추지 않고 더욱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옆구리를 긁고 지나가는 장검을 가까스로 빗겨낸다. 마검의 자루로 깡통 5호의 머리통을 두들긴다.
다시 뒤에서 날아든 세검을 피해 바닥을 구른다. 장검이 위에서 머리를 노리고 내리찍힌다.
도끼로 방어했다. 그대로 마검을 던져 깡통 5호의 복부를 꿰뚫었다. 경악하는 놈들의 목소리에 기분이 조금 유쾌해졌다.
‘다시 하나.’
일 대 다수의 싸움에서 중요한 것은 뭘까.
다수의 움직임을 한눈에 포착할 수 있는 넓은 시야? 사방에서 끊임없이 몰아치는 공격을 놓치지 않고 대응할 수 있게 하는 집중력?
그도 아니면, 혼자서도 다수를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압도적인 무력?
전부 아니다.
‘싸움에서 중요한 건 기세다. 상대의 숫자가 많다면? 그래도 기세다! 굶주린 맹수처럼 물어뜯어야만 한다!’
전사의 시험을 담당하던 개자식의 말. 그때는 되먹지도 않은 정신론이라며 코웃음을 쳤지만, 지금은 그 말의 뜻을 절절히 이해했다.
“플로나 경! 저놈, 고통을 못 느끼는 것 같소이다!”
“악마의 힘이겠죠! 그것보단 어서 마무리를……!”
존나 아픈데. 고통은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질 않았다. 검에 베인 자리가 불에 타는 듯했다. 그러나 괜찮다. 참는 건 익숙하니까.
공격을 처맞는 와중에도 기어코 5호를 끝장낸 모습이 그렇게 인상적이었던 걸까.
깡통 2호와 6호의 눈에서 두려움이 느껴졌다. 자기들도 잡아먹힐 수 있다는 공포가, 놈들의 머릿속에 자리한 것이다.
칸이 의도한 바였다.
공포는 발을 묶고, 움직임에 쓸데없는 망설임을 더하니까.
“으오오오……!”
그때 주저앉은 채 회복에 집중하던 깡통 4호가 괴성을 내질렀다. 지가 처맞았단 사실에 격노한 듯했다.
칸이 씨익 웃으며 놈을 향해 마주 달렸다.
“잠깐, 알바로 경!”
“차라리 합공을…. 제길. 로드리고 경! 언제까지 구경만 하실 작정입니까!”
달리는 칸의 손에 마검이 저절로 날아와 감긴다. 아라크네의 침묵실을 미리 묶어둔 덕분이다.
깡통 4호는 무기 하나가 늘건 말건 관심이 없는 듯, 눈을 까뒤집고서 제 대검을 마구 내리쳤다. 아까의 정교한 검술이 아닌, 오로지 감정에 온몸을 내던진 검격.
“나야 좋지!”
쾅! 쾅! 쾅! 쾅!
깡통 4호가 휘두르는 오러의 대검이 아까보다 더 묵직했다. 하지만 이전보다 더 가볍게 느껴졌다.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이라도 알바로의 목을 잘라낼 수 있을 성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적들이 보기에, 지금 칸의 모습은 알바로의 매서운 검격에 연신 밀려나는 것처럼 보이리라.
‘들어와라…….’
그 간절한 바람이 통한 걸까. 눈치나 보던 깡통 2호와 6호가 천천히 거리를 좁히는 게 뒤통수 너머로 감지됐다.
깡통 1호는 아예 나설 생각이 없는지 처음 그 자리에 그대로였다.
놈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제 동료들의 죽음을 구경만 하는지- 칸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보인다.’
급격하게 팽창하는 깡통 4호의 오러를 받아내는 칸. 그의 뒤를 노린 깡통 6호가 바늘 형태의 오러를 수십 갈래 투사하고, 검격과 오러를 힘겹게 방어하는 칸의 심장을 깡통 2호가 꿰뚫는 광경이-.
저마다 숨겨둔 한 수를 꺼내든 기사들의 맹공.
그건 아직 확정되지 않은 미래인 동시에, 머지않아 도래할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선고였다.
한계에 치달은 육체와 혹사당한 정신력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큰 상처를 입고서 기사 하나를 줄이는 게 전부.
‘보인다.’
또 다른 광경이 펼쳐진다.
하늘에 닿을 것처럼 솟아나는 깡통 4호의 오러를 미리 예측한 것처럼 빗겨내고, 깡통 6호의 비수를 도약으로 회피. 컥-!
이번에도 깡통 2호의 세검이 칸의 복부에 커다란 구멍을 뚫고 말았다. 대체 무슨 원리인 걸까. 깡통 2호의 검이 알아서 칸을 쫓아 쇄도하는 것 같았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미래에서 벌어진 자신의 죽음을 몇 번이나 목도한 걸까. 모르겠다. 시간의 흐름이 괴상했다. 수만 시간이 흐른 것처럼도 느껴지고, 아직 찰나조차 흐르지 않은 것처럼도 느껴졌다.
마치 시간의 틈새에 갇힌 듯했다. 그리고-.
‘보인다!’
씨앗이 싹을 틔웠다.
─전투 예측(C) 스킬을 획득.
─태고의 혈통 효과로 전투 예측(C) 등급 상승. 전투 예지(B) 획득.
[전투 예지 (B) - 01%]
─오로지 전투 상황 속에서 발동한다.
“놈! 이것으로 끝이다─!”
폭발적으로 불어나는 깡통 4호의 오러가 머리 위에서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리고 깡통 6호의 오러가 수십 개의 비수가 되어 등을 노리고, 깡통 2호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진다.
모든 것이 예지에서 본 광경과 똑같았다. 칸은 그 순간 망설이지 않고 불확실한 미래의 가능성을 붙잡았다. 승리로 향하는 단 하나의 가능성을.
깡통 4호의 대검을 마검으로 막아낸다.
칸의 근력으로도 어깨가 시큰거릴 정도의 충격이 엄습했다. 그리고 칸의 손이 기이한 각도로 움직였다.
마검의 검끝이 땅을 향하도록 조정하자, 거대한 오러의 대검이 마검의 검신을 기기긱- 긁으며 아래로 흐른다.
꽈릉─!
뒤집힌 땅에서 역류한 토사물이 깡통 4호와 칸 사이의 시야를 가렸다. 그대로 칸이 공중으로 뛰었다. 깡통 6호가 쏘아낸 오러의 비수가 무방비한 깡통 4호를 두들기는 게 보였다.
‘이제 마지막.’
[탐색 (D)]
그때까지도 깡통 2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전투 예지로 본 미래가 끝난 걸까? 잔뜩 긴장한 어깨가 느슨해질 즈음.
소리가 들렸다.
쩡─!
여신의 축복으로 강화된 도끼가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하지만 막았다.
“뭣……!”
당황한 깡통 2호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희끄무레하게 일렁이는 녀석의 신형이 칸의 발아래에 있었다. 마치 뱀처럼 구불하게 자라난 녀석의 검도.
애초부터 길이가 늘어나도록 설계된 검. 낮은 등급의 탐색 스킬을 간단히 속이는 고등급의 주문이 내장된 마도구 혹은 아티팩트.
예지 속의 자신이 속수무책으로 당한 이유가 이거였나. 깡통 2호의 필살기는 기사가 아닌, 일류 암살자의 그것이라 해도 믿을 만큼 음습했다.
‘뭐, 들킨 순간 효용이 크게 떨어지겠지만.’
적어도 기습에 한해서는 필살의 일격이나 다름없었겠지. 그래서 저렇게 당황하는 것이겠고…….
“끄윽…….”
녀석이 죽은 이유이기도 했다.
깡통 3호와 사이좋게 도끼 손잡이로 전락한 깡통 2호에게서 시선을 거둔다.
‘다시, 둘. 그리고…….’
살아남은 깡통도 둘이었다.
*
*
*
“팔 하나는 날아갈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기어코 다 잡아내다니. 대단하군.”
“퉤.”
제 동료들을 모조리 죽인 걸 두고 칭찬하는 노친네에게 가래침을 뱉는 것으로 화답한 칸이 마검과 도끼를 굳세게 쥐었다.
그 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음은 당연했다.
지친 것이다. 긴 시간 이어진 추격전과 몇 번의 전투는 칸의 육체를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제아무리 튼튼한 야만전사의 몸뚱어리도 결국은 필멸자의 것. 지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마지막, 하나.”
그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웃었다.
참아내는 것. 견디는 것.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하는 것은 그의 몇 안 되는 특기였기에.
“그쪽이 뭘 생각하고 이 깡통들을 뒈지게 내버려 둔 건지는 모르겠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장담하지.”
칸은 오로지 하나만을 생각했다.
버틴다. 이 자리에 없는 론이 제 역할을 해낼 때까지.
“노친네. 당신은 절대 날 못 죽여.”
그 말에 깡통 1호….
아니, 대공이 신임하는 유일한 기사가 희번득한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