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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야만전사-74화 (74/132)

#074화. 반란 (6)

과연 고위 귀족의 기사들은 강했다.

잘 단련된 육체를 오러로 강화하며 나오는 괴력, 오러 자체의 무게, 그걸 다루는 기사 본인의 기량이 지금껏 아르곤 왕국에서 상대한 그 어떤 기사도 저들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감당 못 할 수준은 아니야.’

실제로 칸은 대공의 기사 넷을 단신으로 처죽이는 데에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전투 예지라는 스킬의 덕을 보았다곤 하나, 만약 스킬을 획득하지 못했더라도 끝끝내 살아남아 다 처치했을 거란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흑익공의 대전사도 네놈과 같았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내게 싸움을 걸고, 자기가 이길 거라는 확신에 가득 찼었지. 미개한 반푼이 종족이….”

입이 양쪽으로 쭉 찢어지는 웃음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노기사만큼은, 쉽지 않겠다는 직감이 든다.

“그놈과 그때 가볍게라도 검을 나눌 걸 그랬군. 주군의 대업이 나아가는 과정에서 흑익공과 부딪칠 것은 필연. 흑익공이 언제나 선봉장으로 세우는 대전사와 네놈 사이의 간극을 비교해보고 싶은데 말이야.”

“말이 많군. 싸울 생각이 없는 건가?”

“흐흐- 너무 보채지 말거라. 제국의 하급 기사와 붙어도 해봄 직한 놈들을 넷이나 상대하고도 나와 싸워야 하는 거다. 적당한 쉴 시간 정도는 주어야지.”

미친놈인가. 그 말을 입안에서 굴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호의는 찝찝하지만, 휴식할 시간이 필요한 것은 사실.

‘체력이 너무 빠졌어.’

지금부터 상대할 노친네가 진짜인데, 체력은 이미 바닥을 기었다.

며칠을 연달아 쫓기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쌈박질을 해댔으니…. 그나마 ‘탐욕의 그릇’ 덕분에 체력이 올라서 버틴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차피 쉴 거라면 얘기나 묻지.”

“대답해줄지는 모르겠지만, 어디 해봐라.”

“네가 받은 명령. 이 자리에서 날 죽이는 게 전부였나?”

“설마 너 하나 잡자고 기사들 전부가 움직였을까? 스스로를 과신하지 마라. 뭐, 실제로는 전부 움직인 보람이 있어 뵌다마는. 너에 대한 것은 겸사겸사에 지나지 않았어.”

“그 임무에, 기존의 기사들을 전부 매장하라는 것도 포함이었나?”

노기사는 ‘어땠겠나?’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언제 반란군으로 토벌당할지 모르는 대공이, 기사라는 귀중한 비대칭 전력을 생매장한 이유를 칸은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래도 하나만 알려주자면, 네가 물어 죽인 사냥개들은 감히 북부에서 군벌을 형성하고 세금을 걷는 등의 주제넘은 짓을 일삼았었다.”

“그래서 팽한 건가?”

“팽이라니? 감히 대공국의 영역에서 군벌을 자처한 놈들이다. 그래놓고는 대공께서 일을 맡기니 꼬리를 흔들더군. 그래서 죽은 거다. 멍청해서…….”

‘대공의 의도는 뭐지?’

짧은 대화 속에서도 쉬이 의도를 드러내지 않는다. 노회한 충신은 다른 기사들과 달리, 정치적인 화법에도 몹시 능숙한 게 분명하다.

‘안 그래도 병력 하나가 절실한 처지에, 기사를 전부 팽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아.’

아니, 이치를 따진다면야 대공의 독립 선언 자체가 문제였다.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의 준비를 해도 모자란 대계를, 충동적이라 느껴질 만큼 갑작스레 시작한다? 이건 자신감이 아닌 미치광이의 소행이었다.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나한테까지 들리는군. 슬슬 싸움을 시작해도 되겠다는 신호로 알겠다.”

노기사의 검집에서 물 흐르듯 빠져나온 검. 그 익숙한 형태에 칸이 얼굴을 찡그린다.

“어디 한번, 내 검도 다른 녀석들의 것처럼 받아봐라.”

자신만만한 태도로 노인이 아주 느릿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말과는 다르게 먼저 덤비라고 말하는 듯한 움직임.

평소라면 마다하지 않을 기회였다. 하지만 칸은 섣불리 선공을 가할 수 없었는데, 노인의 검에서 피어오르는 검붉은 기운 탓이었다.

“어디 시장통에서 팔기라도 하는 건가….”

[미친 인간 놈! 그럴 리가 있겠느냐!]

드라우프니르가 노발대발하건 말건, 칸의 신경은 노기사가 든 복제품에 온통 집중되어 있었다.

칸이 가진 드라우프니르는 분신이지만, 본체의 원념이 깃든 까닭에 마검의 본래 성능을 일부 계승했다.

원념 잠식이나 상처 악화, 혈주술이 바로 그 예였다.

그에 반해 진리의 혈주술의 찌꺼기 정도나 활용할 뿐이었다.

‘용병대장이나, 저 노친네가 든 복제품은 결이 완전 다르다.’

혈주술의 효과로 신체가 단단해지는 건 같지만 피가 빨린 흔적이 없다. 범인조차 괴력을 가진 초인으로 만들어주는 힘을, 아무런 리스크 없이 사용한다는 거다.

심지어 눈앞의 노친네의 복제품은 검붉은 기운을 줄기줄기 흘리고 다녔다.

“오러는 어디 엿바꿔 드셨나? 노인장.”

칸이 이죽이자, 노인은 여유로운 태도로 맞받아쳤다.

“오러까지 쓸 필요가 있어 보이나?”

없어 뵈긴 하네. 속으로 중얼거린 칸이 여느 때처럼 마검과 도끼를 잡았다.

노기사와의 간격은 어느새 열 걸음. 기사와 야만전사, 둘 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선공을 가하는 것이 가능한 거리.

‘이 정도라면…!’

자신이 더 빠르다. 이전에 경계마을에서 그 효용성을 증명한 수법, 도약을 이용한 횡이동이 북부 최강의 기사를 상대로 모습을 드러낸다.

쾅─.

앞꿈치로 땅을 박살 내며 전진하는 칸의 기세는 중갑으로 무장한 기병의 그것을 연상케 했고, 속도에 있어서는 그를 완전히 능가했다.

어지간한 기사라면 아차- 하다가 흐름을 빼앗긴 채 당하고 말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제법 빠르군.”

노기사는 아무렇지 않게 칸의 일격을 받아냈다. 제아무리 혈주술로 강화된 육체라도 제법 힘겨운지 얼굴을 찡그렸지만, 뒤로 물러나지는 않았다.

근육이 꽉 들어찬 기사의 육체와 갑옷의 중량, 뛰어난 체술로 말미암아 거목처럼 버티고 섰다.

이어지는 매서운 반격.

후웅!

한 번의 소리에 세 번의 검격이 겹쳤다. 검끝이 흐릿하게 갈라질 정도로 빠른 찌르기에 칸이 뒤로 물러났다.

다만 완전히 피하지 못해 옅은 검상이 주욱- 피부 위로 생겨났다.

그 즉시 칸의 도끼가 노기사의 어깨를 노렸다. 내뻗은 검을 회수하지도 않고 손목만을 비틀어 도끼를 쳐낸 노기사가 발끝으로 칸의 복부를 밀어찼다.

쿵─!

기민한 반사신경으로 마검을 내리찍어 방어한 칸이 다급하게 도끼로 상반신을 가렸다. 따다당! 묵직한 충격이 도끼의 날을 두들겼다.

그 부드러운 연계에 경악할 틈조차 없었다.

검붉은 기운을 휘감은 검이 뱀처럼 휘어 하반신을 노리고 찔러 들어온 까닭.

‘미친!’

첫 일격부터 이 흐름을 유도한 것처럼 비집고 들어오는 찌르기. 방어도, 회피도 불가능하다.

그를 직감한 칸이 노기사의 우측으로 되레 파고들었다.

서걱!

살점이 뜯겨져 나가는 고통. 그러나 다리에 구멍이 나지는 않았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이를 악다문 칸이 노기사를 양단할 기세로 마검을 내리쳤다.

쩌엉──!

마검과 노기사의 건틀릿이 충돌하며 난 굉음이 귀를 울린다. 그린스킨조차 곤죽으로 만드는 괴력에 노기사의 몸이 비틀비틀 흔들렸다.

서로 일격을 주고받은 둘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물러났다.

왼쪽 다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칸과 반쯤 우그러진 건틀릿을 뜯어내는 노기사. 둘 중 누가 더 큰 피해를 입었는지는 명확하다.

‘사람 몸뚱어리가 아니라 무쇠라도 때린 것 같은데.’

게다가 상처를 입은 허벅지의 출혈이 멈추질 않았다.

반면, 노기사는 상상 이상으로 강한 칸의 힘에 놀란 듯 얼굴을 굳혔을 뿐. 박살이 난 건틀렛을 벗어던지며 아무렇지 않게 팔을 움직였다.

“이거야 원, 사람이 아니라 그린스킨 투사라도 상대하는…….”

[투척]

쫑알쫑알 떠드는 걸 지켜볼 생각은 없다, 라고 말하는 듯한 기습적인 투척.

마의 99%에 진입한 투척 스킬로 던져진 도끼가 나선 형태의 칼바람을 꼬리처럼 달고서 노기사를 덮쳤다.

마침 팔의 상태를 확인하던 노기사가 검붉은 기류를 흩뿌리며 여유롭게 도끼를 받아내려 했다.

그러나 도끼에 실린 힘이 그의 상상을 초월했다. 기이한 검로를 자랑하는 검술도 지금 만큼은 쓸모가 없었다.

쩌저저적……!

노기사의 몸이 저절로 뒤로 밀려나기 시작한다. 트롤의 변종으로 만든 언데드조차 한 줌 핏물로 만든 일격이다.

노기사의 두 눈에 핏발이 선다.

“흐읍!”

기합과 동시에 검붉은 기류가 몸집을 불렸다. 마치 타오르는 불꽃이 노기사를 잡아먹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불꽃은 노인을 잡아먹지 않았다.

그그그극. 쾅──!!

폭음과 함께 검붉은 아지랑이가 도끼가 몰고 온 용권풍에 조각조각 해체되듯 찢겨져 나갔다. 그러나 노기사는 무사했다.

핏발이 선 눈은 여전했으나, 조금의 부상도 입지 않았다.

“이 미개한 놈이…!”

다만 상태가 이상했다. 줄곧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던 노기사였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이 변한 것처럼 격정적으로 분노를 쏟아냈다.

“이리로 와─라─!”

갑옷을 입고도 발소리조차 내지 않던 것과 비교되는 난폭한 돌진이었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걸음마다 땅에 자국을 만들며 달리는 노기사의 모습은, 짐승형 마물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였다.

“후.”

쨍그랑!

마침, 치유의 힘이 깃든 포션의 반을 입에 털어 넣고 나머지를 몸에 뿌리던 칸이 숨을 토했다.

엘레나가 직접 축복한 포션으로도 허벅지의 출혈과 얕은 검상은 치료될 기미가 안 보였다. 그래도 체력은 조금이나마 회복했으니, 칸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마검과 마검의 복제품이 충돌한다.

붉고, 검붉은 기운이 서로를 잡아먹을 것처럼 어지럽게 얽히며 영역을 넓혀 나갔다.

“조잡한 검술!”

사선에서 내리긋는 검격이 순식간에 궤도를 달리하여 심장을 노린 찌르기가 되었다.

마치 관절이 없는 생물이 검을 쥔 것처럼 자유로운 전환에 칸은 번번이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압도적인 신체 능력으로 기술적 차이를 뒤집어왔던 칸이었다.

근력 스탯이 50을 넘어선 것을 기점으로 기사를 상대로도 같은 싸움법으로 승리를 취해온 칸이건만, 지금에 와서 그 싸움법의 폐해가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하체와 상체가 따로 노는구나! 흑익공의 대전사는 백병을 능히 다루는 최고의 전사라 들었거늘, 이 형편없는 꼬락서니는 무엇이냐─!”

상대는 고위 귀족이 자랑하는 최강의 기사였다. 검술의 기량으로는 검의 달인들 만큼은 아니어도, 대단히 뛰어난 경지에 올랐다.

그런 이가 초인적인 신체 능력까지 손에 넣었다.

“이번엔 왼쪽이 빈다─! 어설픈 놈!”

왼쪽 가슴을 얕게 베고 지나가는 검상. 자칫하면 심장에 구멍이 났어도 이상하지 않은 부상이었다.

아니, 치명상만 입지 않았다 뿐.

칸의 전신은 이미 얕은 검상에서 비롯된 출혈로 피범벅이었다. 진작 과다출혈로 쓰러지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우.”

칸은 차분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출혈로 머리가 핑- 돌고, 화상을 입은 듯이 몸이 뜨거웠지만, 언제나처럼 인내했다.

어른들이 그렇게 기술을 배우라고 말하는 이유가 있다니까. 애써 농담까지 지껄이며 정신을 부여잡은 칸이 마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흐-. 무어가 충분하단 말이냐! 네놈에게 줄 고통이 아직 한참 남았거늘!”

“이렇게 연비가 나빠서야, 짝퉁이 더 나은 거 아니냐…?”

광소하며 터뜨리며 대답한 노기사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대화가 엇갈리는 느낌인데? 야만인의 언어로 추정되는 단어가 섞인 문장 탓에 더 그런 기분이 들었다.

“다 죽어가는 놈이었나. 헛소리나 지껄이다니….”

노기사는 생각했다.

진작 한계에 달한 야만인이 지껄이는 헛소리라고.

“벌써 끝인가? 생각보다 싱겁군.”

조금 더 즐기고 싶었거늘.

“아쉬운 대로, 조금만 천천히 가지고 놀아볼까…….”

나른한 말투였지만, 노인의 얼굴은 희열로 가득 차 있었다. 도저히 기사라고 볼 수 없는 언행과 태도.

‘얇게 살을 저며서 죽이는 거야…. 이 몸뚱어리라면 예전의 배는 넘는 숫자도 가능하겠지. 흐흐흐.’

그렇게 마음먹은 노기사가 움직였다.

그때까지도 칸은 미동조차 않고 있었다. 하지만 정신은 온전하게 주변의 상황을 받아들였고, 그가 미적대는 원념에게 빨리 움직이라 일갈했다.

[재촉하지 마라.]

뱀처럼 사이한 원념의 음성이 쉬익- 쉬익- 귓가에 울려 퍼진다.

어쩐지 즐거워하는 듯한 목소리에 칸이 의문을 느낀 그때였다.

[조금 화끈할 거다. 아주 조금…….]

몸 안쪽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덩어리가 마구 날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에 칸의 눈이 더없이 커졌고-.

“끄아아악──!”

[키히힛.]

난생처음 겪는 종류의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는 칸의 머릿속에 원념이 속삭였다.

[짝퉁과 나. 어느 것이 나은지 직접 겪어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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