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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야만전사-75화 (75/132)

#075화. 반란 (7)

몸이 뜨겁다.

불구덩이에 몸을 집어넣고 뒹구는 것만 같은 작열감은, 비명조차 내지를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그에 몸부림치며 날뛰려던 칸이 퍼뜩 정신을 부여잡았다.

칸에게 벌어진 이변을 보고서 경계심을 느낀 노기사가 살의를 줄기줄기 풍기며 다가오고 있었기에.

‘끄으으윽…!’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온몸을 붉게 물들였던 핏줄기가 안개처럼 변해 전신을 감싸면서, 점차 통증이 줄어든 덕분에 생긴 여력으로 곧장 마검을 쥐고 흔들었다.

“헛수작으을──!”

그걸 본 노기사가 비웃음을 흘렸다.

여전히 어설픈 검이다. 검술이라 하기도 뭣한 흐느적거림에 당할 실력이 아니었다.

놈이 괴상한 수작을 벌이는 걸 보고서 다소 위기감을 느낀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봤자 기량의 차이는 절대적.

노기사의 입꼬리가 쭈욱 찢어졌다.

‘날 놀라게 한 죄로 좀 더 고통스럽게 죽여주마!’

꽈릉!

순간 눈앞에서 번개가 내리친 듯했다.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충격에 시야가 뒤흔들렸고, 하마터면 검을 손에서 놓칠 뻔했다.

‘뭐냐…! 대체 무슨 일이!’

놀람도 잠시. 몸속에 흐르는 기운이 늙은 육체에 힘을 불어넣었다.

조금씩 흐려지는 이성, 그를 일평생 단련을 통해 벼려진 정신력으로 견뎌낸 노기사가 처음으로 제대로 된 기수식을 취한다.

‘강해졌다! 아까보다 더……!’

안 그래도 검의 힘으로 강해진 자신을 능가하는 괴력이었거늘, 피안개를 몸에 두른 이후로 그 힘이 더 강해졌다.

만약 아까처럼 허술하게 받아쳤다간 험한 꼴을 당하리라.

그것을 직감한 노기사의 검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올곧은 검로를 그리며 짓쳐 드는 야만인의 검격을 흘려내기 위함이었다.

쿵! 쩌어어억.

“커헉.”

노기사의 입에서 고통스런 신음이 새어 나왔다. 검격을 제대로 흘려냈음에도 야만인의 힘이 내부를 진탕시킨 탓이었다.

그때 야민인이 입을 몇 번이고 달싹였다.

‘시발, 존나게 아프네…. 너는 이따가 뒤졌다.’ 알 수 없는 언어로 중얼거린 그 말을, 사악한 비의를 발동하는 것쯤으로 판단한 노기사가 울혈을 삼키며 앞으로 전진했다.

검의 힘으로 강화된 육체는 단단하고, 동시에 유연했다. 상상으로나마 그리던 움직임을 무리 없이 실현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흐아압…!”

노기사는 대대로 엘펠란 공국을 수호하던 기사 가문에서 태어났고,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가전 검술을 수련했다.

과거에는 제국의 상급 기사를 능가하는 기사를 몇이나 배출한 명가의 검술에는 몇 가지 비전이 존재했고, 노기사는 그중 하나를 재현할 생각이었다.

‘내려앉는 매.’

높이 뛰어오른 노기사가 팽그르르- 회전하며 팔을 바짝 당겼다. 마치 활의 시위를 당기듯.

이윽고 공중에서의 회전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노기사를 감싼 검붉은 기류가 작은 소용돌이를 형성하는 순간, 활강하는 매가 날개를 펼치듯 움직인다.

야만인의 머리 위로 검붉은 잔영이 발톱의 형상을 그렸다.

육체의 한계를 무시하는 듯한 공중에서의 초신속 연격, 그것이 활강하는 매라는 비전의 요체였다.

‘됐다!’

이건 반드시 통한다.

그간 머릿속에서만 그리던 비전의 검격은, 설령 상대가 제국의 상급 기사라도 통할 것이 분명했다.

매의 발톱이 야만인으로 떨어지는 순간, 놈은 세 갈래로 조각나리라. 이어질 광경을 고대하는 노기사의 얼굴에는 희열만이 가득했다.

“어?”

그런 노기사의 입에서 멍한 목소리가 흘러 나온 것은, 일생 최고의 일격이 너무나 허무하게 막힌 걸 보고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막혔다?’

막히기만 했다면 그가 이토록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아니, 내려앉는 매가 막힌 것만으로도 충분히 경악스러운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 야만인의 손에서 펼쳐진 수법만큼 놀랍지는 않으리라.

“너……!”

“대충 이런 느낌인가.”

여상한 투의 중얼거림을 들은 노기사가 분개했다. 자신이 펼친 최고의 일격을 막아놓고, 대수롭지 않다는 투의 감상을 흘린 것에 격분한 것이었다.

“얼굴이 볼만한데.”

“노옴──!”

노기사의 검이 분노에 호응하듯 격정적인 검로를 그린다. 이전에 야만인이 보여준 엉터리 검술로는 회피도, 방어도 여의찮을 현란한 검격.

그러나 통하지 않는다.

[옳지, 그렇게 하는 것이다. 제법 쓸만하군.]

‘어릴 때 하면 잘하는 아이라고 많이 들었었지.’

[또 오는군. 이번에도 제대로 재현할 수 있나 보겠다.]

얼마든지. 허벅지와 왼쪽 옆구리, 오른쪽 어깨를 동시에 노리는 검격에 칸이 손목만을 움직여 대응했다.

짧게 끊어치듯 검을 내치는데, 미세하게 손목을 비트는 것으로 검로를 꺾었다. 그것만으로도 세 방향으로 나뉜 검격이 가로막혔다.

지금까지의 칸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정교한 검술.

[중심이 흔들렸다. 말했을 텐데? 안타리우스 유파의 검은 흐르는 물과 같아야 한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꺾이더라도, 중심을 지켜야만 하느니라.]

진도를 못 따라가는 아이를 훈계하는 듯한 말투에 칸이 투덜거렸다. 혈주술 때문에 힘이 세져서 그래.

“그 사이한 검술은 무엇이냐─!”

[사이하다니. 저놈의 눈은 옹이구멍이더냐?]

짧은 찰나에 수십 번의 공방이 이어졌다.

현란함과 쾌속함으로 강하게 압박하는 노기사의 검과 한 번의 내지름으로 수많은 변화를 이끌어 내는 칸의 검.

둘은 그 성격이 완전 반대였고, 공방의 끝에 번번이 우세를 점하는 것은 칸이었다.

“생각보다 할 만하군. 검술이란 거.”

“건방 떨지 마─라─!”

노기사가 검을 내치려던 그때, 멀리서 들리는 파공음과 함께 흑색의 창이 노기사의 옆구리를 때렸다.

갑옷을 관통하지는 못했지만, 충격은 고스란히 받았는지 노기사가 비틀거린다.

빈틈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얀이 원격으로 조종하는 마법진이 빛을 발했다. 그 숫자가 셋이었고, 모두 회색 마법의 주문이 담겨져 있었다.

파바방!

잿빛의 창과 무형의 충격파가 노기사를 두들겼다.

[안타레우스의 검은 언뜻 보면 변화에 치중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지.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란, 공세에서도 무척이나 쓸만한 법이니까. 그 변화에 현혹되어 죽은 악마의 숫자가 헤아리기 힘들 정도니라.]

‘검색 기능 대신에 사전 기능을 탑재한 거였군. 앞으로 나무위키라고 불러주마.’

그게 무슨 뜻이냐?

드라우프니르의 물음에 슬쩍 웃은 칸이 비틀거리는 노기사를 향해 점을 찍듯 검을 내질렀다.

충격에 정신 못 차리는 와중에도 노기사는 칸의 검격을 흘려내려 들었다.

[말했잖나.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안타레우스의 검이라고.]

그러나 올곧게 나아간 검끝은 흔들리지 않았고, 주문이 각인된 갑옷에 좁쌀만 한 구멍이 뚫렸다. 노인의 검에 무력하게 이끌리던 이전과 판이한 결과였다.

“검술 하나로 더럽게 꺼드럭대더니, 이젠 그것도 끝인 것 같은데……. 오러, 꺼내지 그래? 깡통 1호.”

*

*

*

‘믿기 힘들군.’

미친 인간과 이상한 게 섞인 벌레의 싸움을 지켜보던 드라우프니르가 놀란 감정을 드러냈다.

‘질릴 정도로구나.’

드라우프니르가 칸에게 혈주술의 힘을 빌려준 것은 단순한 변덕의 발로였다.

‘혈화의 술’은 시전자의 피를 불꽃으로 만든다.

그 결과로 엄청난 힘을 손에 넣게 되지만,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작열통을 맨정신으로 느껴야만 했다.

제아무리 미친 인간이라도, 체내와 체외가 한꺼번에 불타는 고통마저 버티진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실제로 미친 인간 놈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혈화의 술을 받은 상태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고 싸우다니. 옛적의 미친 인간도 저러진 못했거늘.’

그게 원념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싸움을 거듭할 때마다 강해지는 기이한 신체, 그보다 더 이해하기 힘든 수준의 정신력, 그것만으로도 되다 만 도마뱀을 사냥하는 괴물일진대.

‘그 신체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이 더해지고, 더 많은 싸움을 거듭해 강해진다면……. 정말 용을 사냥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 위대한 인간처럼.’

안타레우스의 검을 알려준 것 또한 그러한 이유였다.

대대로 용이 사역하는 노예들은 인간을 압도하는 신체로 수많은 학살을 벌였다.

안타레우스는 그 노예들을 상대로 효과적인 검을 창안한 검의 달인이었고, 드라우프니르가 용살자가 될 거라 기대했던 뛰어난 전사이기도 했다.

‘마침, 눈앞의 벌레에게 알맞은 검이기도 하였으니.’

물론, 지금 당장 안타레우스의 검을 익히기는 힘들 것이었다.

단지, 조금이라도 재현할 수 있다면 벌레와의 전투에 도움이 될 거란 생각으로 검을 전수했다.

그러나 이 미친 인간은 이번에도 원념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비록 ‘겉핥기’에 불과한 흉내일지라도, 안타레우스의 검이 가진 요체를 제대로 파악해서 펼쳤다.

지금까지 검술이라곤 하나도 모르던 인간의 움직임이라곤 믿을 수 없는 움직임.

‘그 어떤 동작이라도 무리 없이 재현하는 초인적인 육체, 옛적의 인간들과 비교해도 타고났다고밖에 생각하기 힘든 감각과 반사신경…. 어느 하나만 갖추어도 일류의 전사가 될 재능을 한 몸에 타고나면 이런 건가.’

원념이 연신 감탄하는 사이. 미친 인간과 잡스러운 벌레의 싸움이 절정에 치달았다.

미친 인간은 혈화의 술로 더욱 강해진 힘과 안타레우스의 검을 이용해 벌레의 몸뚱어리에 네 개나 되는 구멍을 뚫었다.

미친 인간이 데리고 다니는 벌레들의 조력이 있었다곤 하나, 안타레우스의 검을 쓰기 시작하면서 미친 인간의 전투력이 급상승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대로면 무난하게 이기겠군.’

끝이 명확하게 보이는 싸움에 원념은 지루함을 느꼈다.

잡스러운 벌레의 검은 더 이상 미친 인간에게 통하지 않으니, 얻을 게 없는 싸움이라는 것도 지루함의 원인 중 하나였다.

[미친 인간아. 어서 그 벌레를 끝장내라. 혈주술은 오래 쓸수록 후폭풍이 오래…….]

“컥!”

[미친 인간?!]

원념이 당혹스런 목소리로 의지를 전했으나, 칸에게선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칸의 육체를 감쌌던 피안개가 점차 흩어진다.

거목처럼 굳게 땅을 딛고서 육체를 지탱하던 두 다리도 꺾였다.

‘씁. 여기까진가.’

원념이 놀란 것과 달리, 정작 쓰러진 장본인의 반응은 담담했다.

제 몸의 상태는 본인이 가장 잘 아는 법이니, 슬슬 약발이 떨어질 거라고 대충 예상은 했다.

생각보다 깡통 1호가 끈질겨서 죽이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마는, 연비 최악의 몸뚱어리로 이만큼 해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겼다.

“허억…. 허억…. 이 괴물 같은 놈이……!”

두 눈에 핏발이 가득 선 깡통 1호가 비틀대며 목덜미에 검을 겨누었다.

“그 어설픈 검술이 찰나 만에 이토록 변할 수는 없다. 그래. 불가능하지. 악마의 힘이라도 빌리지 않고서는…….”

미친 듯이 중얼거리는 깡통 1호의 모습은 그야말로 광인의 그것이었다.

악마가 아니라 귀신의 힘을 빌리긴 했지.

입을 뻥긋할 기력조차 없어 입 밖으로 내뱉진 못한 농담에 드라우프니르가 어서 일어나라며 짹짹거렸다.

‘시끄럽다. 어차피 이미 끝났어.’

[설마, 여기서 포기한 것이냐? 이럴 거라면 안타레우스의 검을 전수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약한 놈!]

‘뭔 개소리야. 포기라니.’

[포기가 아니면 무엇이냐. 먼 옛적의 전사들은 두 다리가 없어도 용의 비늘을 물어뜯으며 싸웠거늘……!]

‘아니, 싸움을 포기한 게 아니라.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다는 소리다.’

[그게 무슨…….]

“네놈이 또 어떤 사악한 수를 숨겨뒀을지 모르니, 대공의 앞에 데려갈 수는 없겠다.”

원념이 설명을 요구하려던 그때 노기사가 움직였다.

칸이 무력하게 쓰러진 틈을 타 숨통을 끊을 작정인 듯했고, 옴짝달싹 못 하고 떨어지는 칼날을 지켜보던 원념이 무어라 소리치려던 순간.

“이런 제기랄. 다시는 네놈 얼굴을 볼 일이 없기를 바랐는데.”

낯선 목소리의 난입에 노기사가 다급히 등을 돌렸다. 지친 몸이라고는 믿기 힘든 쾌속한 반응으로 등 뒤를 베었다.

“뭐냐, 이 어설픈 검은.”

난입한 목소리의 주인이 혀를 찼다.

명백히 제 검술을 깔보는 발언에 노기사가 격분하여 검을 휘두르려 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째서…?’

무슨 사악한 술수를…. 그 의문에 대한 답을, 노기사가 얻는 일은 없었다.

쯔어어어억……. 철퍽!

육체를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실금을 따라, 상반신이 미끄러지듯 바닥에 떨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일평생 대공의 곁을 지켜온 충직한 노기사가 명을 달리했다.

‘여전히 끝내주는 검이구만.’

그 시체에 남은 일직선의 검흔을 본 칸이 혀를 내둘렀다.

“어이, 칸. 내가 분명히 꼬리는 때놓고 오라고 말했을 텐데…. 이쯤 되면 날 화병으로 죽이려고 이러는 거라 생각해도 되는 거겠지? 응?”

시정잡배처럼 건들거리는 말투. 그에 반해 기다란 머리를 멀끔히 뒤로 넘겼는데, 째진 눈매 탓에 전체적으로 날카롭단 인상을 주는 얼굴.

하지만 짝다리를 짚은 불량한 모습 탓에, 어중이떠중이 용병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칸은 안다.

왕국 내에서 녀석의 검을 받아낼 실력자가 한 손에 꼽으며, 실제로 목숨을 걸고 싸울 경우에는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살인기계가 이 목소리의 주인이라는 것을.

칸이 쓴웃음을 지었다.

‘뭐,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나….’

한 왕국의 지부를 전체 총괄하는 총지부장이자, 제국에서 온 검의 달인이 바로 놈의 정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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