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화. 반란 (10)
“아쉬스. 용병조합의 그놈이 대체 무슨 방법으로 ‘공방’의 정확한 소재를 알고 있는 거지? 심지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알고 있지 않나─!”
쾅!
의자의 팔걸이를 내리친 대공의 분노는, 그의 고문 마법사이자 대공에게 진리의 추종자를 연결해준 아쉬스에게로 향했다.
“게다가 놈들은 ‘인형술사’의 정체까지 알고서 소문을 퍼뜨렸어. 이게 말이 되나? 자네가 분명 내게 그랬을 텐데! ‘그 집단’의 소속원에 대한 것은 제국의 정보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니, 꼬리가 밟힐 일은 없을 거라고!”
“…….”
“내가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보게! 지금 당장!”
대공의 격노를 한 몸에 받은 아쉬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조차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공방의 소재는 대공가에서도 극소수만이 알고 있다. 나와 대공, 그리고 인형술사만이. 문을 지키는 병사들조차 안쪽에 뭐가 있는지는 알지 못해. 그런데…….’
조합이 그 사실을 어찌 파악한 걸까.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아니, 그의 냉철한 이성은 하나의 정답을 도출해낸 지 오래였지만….
“대공, 이는 제가 따로 알아보는 것이 낫겠습니다. 아무래도 지금은 정보가 적어…….”
“인형술사. 그놈이 배신한 것은 아니고?”
“이 실험의 완성을 그 누구보다 바라는 녀석이 인형술사입니다. 그럴 리가-.”
“설마, 한통속이라는 이유로 감싸주는 것은 아니겠지.”
“대공……!”
의심의 화살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아쉬스가 발끈하여 외쳤다.
“진정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일평생 당신만을 모신 저를? 당신의 비원을 위해 그 미치광이 놈들에게 일생의 공부를 모조리 바친 이 아쉬스를!”
그 절절한 호소가 통했는지, 아니면 무시한 건지. 대공의 표정은 모호했다.
“…그럼, 말해보게. 놈들이 대체 어떤 방법으로 공방에 대해 알아낸 건지.”
“당장은 알 수 없지만…. 인형술사를 추궁하는 건 다음으로 미루는 게 좋을 겁니다. 영혼을 분리한 대가로 정신이 불안정한 상태이니, 괜한 자극을 주어서 좋을 게 없습니다. 우선, 문을 지킨 경험이 있는 병사들을 문초해 보시지요.”
“……그러지. 하지만 그 인형이 스스로 결백을 밝히기 전까지는, 공방에 대한 출입을 금하겠네. 어차피 제물들이 모이기 전까지 추가적인 실험은 없다고 하였으니. 상관없겠지?”
“예.”
“그리고 궁중백을 호출하게. 아무래도 병력의 집결 시기를 당겨야겠어. 괜한 방해가 들어오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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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놈이 요청한 대로, 이미 북부 전체에 소문이 퍼졌다. 용병들은 물론이고, 평범한 주민들까지도 전부 알 정도로. 공도에까지 소문이 닿는 건 시간문제야.”
“일처리가 빨라서 좋군.”
“그래서, 다음으로 생각해둔 게 있나?”
“있지. 이번엔 대공이 병력을 모으는 걸 방해할 생각이다. 아무래도 수상쩍은 냄새가 나거든.”
“어떻게? 또 대공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려는 거냐?”
“쯧……. 미개한 중세 놈 아니랄까 봐. 뉴스에서 똑같은 것만 틀어주면 아무리 자극적인 것도 결국엔 슴슴해지는 법이다.”
“그게 대체 무슨 개소리…….”
“새로운 자극을 줘야한다는 얘기지.”
“새로운 자극?”
“이웃집에 사는 놈이 뒷산에서 몇백 년 묵은 산삼을 주웠다는 소문이 나면, 너도나도 개떼처럼 몰려드는 법이거든.”
나중에 챙기려고 했던 거라 아깝긴 하지만….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 칸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쪽 일은 알아서 굴러가도록 내버려 두면 돼.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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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카를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술집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중이었다.
최근 북부의 정세가 너무 어지러워 지면서, 의뢰를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던 까닭.
다행히 그동안 모아둔 돈이 있어 생활에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니었으나, 용병 특유의 방탕한 소비 탓에 머지않아 돈이 바닥나게 생겼다.
‘그렇다고 의뢰를 나가기는 좀…….”
안전한 일을 찾아 북부로 떠나자니, 최근 북부 전체를 들쑤시는 군벌들 탓에 그것조차 쉽지 않다.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소일거리나 하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고….
그런 고민을 하던 카를에게, 종종 술자리를 가지던 용병이 완전무장을 하고서 돌아다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이! 지금 어디 가? 설마 의뢰라도 나가려는 거야?!”
“자네, 그 소식 못 들었나?”
“소식? 대공이 사실은 몇백 년 묵은 리치라는 거?”
“아니, 그게 언제적 퍼진 소문이야…! 그러니까 이렇게 미적대고 있는 거였구먼!”
“대체 뭔 소문이길래 그리 호들갑을 떨어?”
“쉬쉿. 잠깐 귀 대보게. 이건 자네만 알고 있어야 해…….”
대체 뭐길래 호들갑이야? 구시렁대던 카를은 이내 동료의 귓속말을 듣고서는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뭐……! 와이번 시체?!”
“쉿! 자네만 알고 있으라니까!”
“커흐흠. 아, 아무도 없구먼. 뭘!”
무안함을 느낀 카를이 헛기침을 내뱉고는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그래, 알-라스델이란 말이지…….”
모든 설명을 듣고난 뒤, 카를은 곧장 숙소로 돌아가 먼지가 묻은 장비를 모조리 껴입고서 도시를 벗어났다.
군벌로 둔갑한 마적들을 마주치면 어쩌나 굉장히 조심스러웠던 카를은, 군벌들도 자신과 같이 와이번 시체를 노리느라 정신이 없음을 깨닫고서 속도를 높였다.
종종 그와 같은 목적으로 알-라스델로 향하는 경쟁자들이 보였지만, 싸움은 우선 목적지에 도착한 뒤에 하자는 암묵적인 합의하에 묘한 동행이 시작되었다.
“알-란자스의 시장이 와이번의 뼈를 가공할 수 있는 장인을 수소문하고 있다더군. 그 소식을 들은 군벌들이 혈안이 돼서 알-라스델로 모여들고 있고.”
“이 얘기도 들었나? 몇몇 군벌이 시장의 뼈를 빼앗으려다가, 병신이 돼서 도시 바깥으로 내쫓겼다던데…. 되도록이면 알-라스델은 건들지 않는 게 좋겠어.”
“흠. 그쪽에 모인 놈들이 벌써 물경 수백일 텐데. 그놈들 상대로 와이번을 차지하려면, 우리끼리 손을 잡는 게 좋지 않을까…?”
“나쁘지 않은 얘긴데? 그럼 시체를 챙겼을 때는 어떻게…….”
그렇게.
알-라스델로 모여든 용병들이 일시적 동맹을 맺자는 얘기까지 나왔을 때쯤.
저 멀리서 보이는 알-라스델의 모습을 확인한 용병들이 감탄사 내지는 탄식을 흘렸다.
“오, 만신전이시여…….”
“정말 와이번이 날뛴 모양이야! 완전 개박살이 났잖아!”
알-라스델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하늘높이 솟아오른 중앙 첨탑이 박살이 나 있었다.
심지어 첨탑이 붕괴하며 무너뜨린 지반이 도시 외곽까지 영향을 미친 탓에 용병들은 어쩔 수 없이 말에서 내려야만 했다.
“아이고, 용병 나으리들. 여기 은화 2장만 내시면 말을 안전하게 맡아드리겠습니다!”
“말을 맡아준다고? 네놈이 가지고 튈 줄 어떻게 알고?”
“어휴. 끔찍한 소리를 하십니다. 여기 문양 안 보이십니까? 저희는 페란 자작가 소속의 상단이라굽쇼. 만약 그랬다가는 시장님께서 저희 목을 잘라버릴 겁니다요.”
“그렇다면야…….”
“흐흐.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그리고 와이번 발굴에 쓸만한 도구도 저쪽에 가면 팔고 있습니다요. 다소 비싸긴 하지만, 설마 맨손으로 시체를 발굴할 생각은 아니겠지요?”
그야말로 어- 어- 하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비굴한 태도의 상인이 매끄러운 혀를 놀릴 때마다, 카를의 주머니는 점점 가벼워졌고 마지막에 이르러선 가진 장비를 담보로 맡겨야만 했다.
‘꼬, 꼭 필요한 지출이었어…….’
카를과 함께 알-라스델에 도착한 다른 용병들도 상황은 비슷했기에, 도시의 성벽을 바라보는 용병들의 눈에서는 숫제 살기가 흘렀다.
기필코, 와이번의 시체를 얻고야 말겠다는…. 공통된 다짐을 하며 성벽에 접근하던 용병들을 맞이한 것은, 엉성하게 제작한 깃발을 든 군벌들이었다.
“이곳은 아무도 지나갈 수 없다. 죽기 싫으면 꺼져!”
군벌들은 자기들끼리 와이번 시체를 챙기기로 입을 모은 건지, 각자의 병력을 차출해 성벽을 통제하였으나-.
“시발. 꺼지라고? 너나 꺼져 이 새끼야!”
“내가 시체 발굴하려고 얼마를 쓴 줄 아냐? 길 막으면 다 뒈지는 줄 알어!”
졸지에 빈털털이. 아니, 빚쟁이가 되어버린 용병들은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밀어! 저놈들 다 죽여 버리라고─!”
“오늘 반드시 와이번을 가지고 돌아간다! 가자!”
“저, 저 미친놈들이!”
오오오오─! 함성을 내지르는 용병들이 성문을 향해 돌진했다.
어떻게든 방해하려 군벌들이 화살을 쏘고, 돌을 던졌지만, 용병들은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전신을 가려주는 방패를 앞세웠다.
다름 아닌, 직전에 마주친 상인에게서 산 물건이었다.
군벌들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알-란자스의 상인들이 그들에게는 물건을 팔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모르는 사실이 한 가지 더.
“이거, 그 야만인에게 고마워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군.”
알-란자스에 있는 본인의 집무실에서 여유롭게 술을 즐기던 페란 자작이 씨익- 웃었다.
각지에서 모여든 군벌들을 상대로 덤터기를 씌워 벌어들인 수익이 벌써 도시의 몇 년 치 세금을 훌쩍 넘었다. 용병들을 상대로 덤터기를 씌우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 정도야, 뭐. 벌어들인 돈을 생각하면 웃어넘길 수준이지.’
“쩝. 입이 귀에 걸리셨네.”
“좋을 수밖에…. 그래. 뭔가 더 바라는 게 있나? 대놓고 대공에게 적대하라는 것만 아니면, 무엇이든 들어줌세.”
론은 체통도 잊고 헤벌쭉 웃는 페란 자작을 질린 눈으로 보았다. 칸 형씨가 사람 여럿 망치는구먼….
“그런 부탁은 아니니까 걱정 마십쇼. 아니, 오히려 나으리 입장에선 쌍수 들고 환영할 만한 얘기려나.”
“흠. 대체 뭐길래?”
“조만간 대공 측에서 사람을 보낼 가능성이 높을 거랍니다. 나으리야 똑똑하니까 대충 예상하고 있겠지만.”
“그래서? 자네들이랑 협력하고 있다는 걸, 비밀로 해주면 되는 건가?”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는 투로 말하는 페란 자작에게 론은 고개를 저어 부정의 뜻을 밝혔다.
“그 반대요. 그쪽에서 오면 최대한 친절히 모시라고 합디다. 아예 그쪽으로 전향해도 괜찮다는 말도 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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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론 궁중백은 나날이 빠져가는 머리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최근 들어 신경 쓸 일이 너무 늘어난 여파이리라.
‘로열가드들의 죽음이 사실상 확정됐다. 고작 야만인 하나를 쫓는 데 그들이 다 죽었다고 믿기는 힘들지만, 이만큼 소식이 끊겼으면 의심의 여지가 없어.’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대공과 관련한 소문만으로도 극심한 복통에 시달릴 정도였건만, 대뜸 알-라스델에 와이번 시체가 파묻혔단 소식을 들은 군벌들이 통제에서 벗어나 버렸다.
본래 예정대로 라면 군벌들의 소집이 완료되었어야 정상인데, 적의 농간으로 그 시일이 무기한 연장되었다.
대공이 극심한 분노를 터뜨리며 어떻게든 해결하라 채근한 것이 바로 며칠 전의 일.
어쩔 수 없이, 리브론 궁중백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이 모두 사실이오? 페란 자작. 조합의 인물이 와서 그대를 협박해 지령을 내렸다는 게?”
“저, 정말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제가 미쳤다고 대공의 뜻을 거스르겠습니까? 물론, 일전의 소집에는 참가하지 못했으나. 궁중백도 봤을 것 아닙니까. 알-란자스는 다른 데로 사람을 뺄 여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소.”
‘영악한 놈이군.’
리브론 궁중백은 티 나지 않게 혀를 내둘렀다.
눈앞의 귀족, 페란 자작은 겉으로 보기엔 우둔하고 겁이 많은 족속으로 보이지만….
‘전부 연기일 거다. 멍청한 자라기엔 일처리가 너무 깔끔해. 정말 협박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사전에 조합과 손을 잡고서 벌인 일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본인에게 돌아올 이득을 알고서 한 행동일 거야.’
그 사실을 어림짐작한 리브론 궁중백이었으나, 그걸 티 내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대공께서 조합을 규탄하는 성명을 냈을 때 본인의 이름을 걸고 공증인으로 나설 수 있겠소?”
“물론이지요. 미리 언질만 주신다면, 곧장 성명을 내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가문의 직인을 찍은 서류를 마련해주시오.”
“하하. 당연히 그래야지요. 아! 그러고 보니 멀리서 오셨으니 피로가 상당하시겠지요. 혹, 머물다 가시렵니까?”
“그럴 생각이오. 알-라스델에 모인 군벌과 용병들을 해산시켜야 하니까.”
“그럼, 저희 측에서 따로 숙소를 마련해드리겠습니다. 알-란자스에 수녀원이 있다는 건 아시지요? 그곳을 비워두겠습니다. 도시 내에서도 동떨어진 위치에 있어 조용히 쉬시기엔 딱 좋을 테지요.”
“호의를 받아들이겠소.”
궁중백은 옅게 미소를 지었다.
알-란자스 수녀원은 엄밀히 말해 만신전 교회의 영역이나 다름없다는 걸 사전에 알고 왔기 때문.
페란 자작이 미치지 않고서야, 수녀원을 습격하는 방식으로 뒤통수를 치지는 않을 터.
‘수녀원장인 베르타는 대쪽같은 성정으로, 자작의 손을 몇 번이나 뿌리쳤다고 했지.’
게다가.
‘전직 성기사단의 부단장인 그녀다. 대공이 악마의 하수인으로 규정한 일에 흥미를 보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터. 어쩌면 그녀의 협력을 얻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한 리브론 궁중백은 대공이 호위로 붙여준 기사와 병사들을 대동한 채, 수녀원으로 향했다.
그러나.
리브론 궁중백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여신께서 선택한 대리자라지만, 늙은 몸을 험하게도 다루시는군요.”
스르릉──.
수십 년도 전에 현역에서 물러난 성기사가, 여신의 뜻을 받들어 다시금 검을 쥐었다는 것을.